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프롤로그 마도력 233년. 세계의 패권을 두고 오랫동안 대전을 치러왔던 스트라스 제국과 엘 파셔 제 국이 휴전협정을 맺기로 결정했다. 두 세력권의 사이에 끼여 운좋게 식민지 신세를 면하 였던 아베크 중립국이 협정 장소로 낙점되었다. 협정의 성사 여부에 따라 세계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스트라스 제국와 황태자와 엘 파셔 제국의 황태자가 대표로 한 자리에 모였다. 먼저 빳빳한 회백색 의장복을 입은 청년이 당당히 홀 안에 들어섰다. 단정하게 자른 황금색 머리카락 아래로 무척 잘생긴 얼굴이 보인다. 곧게 뻗은 팔다리에 단단한 체구를 가졌으나 생김새가 섬세하고 귀족적인 인상을 주었다. 눈동자는 여름들판처럼 아름다운 녹색이었다 . 그러나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대단히 위압적이다. 스트라스 제국의 황태자,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그는 소년시절부터 마치 전쟁광처럼 크고 작은 전쟁에 참가했다. 때문에 21살, 이제 겨우 소년의 티를 벗은 나이건만 벌써 열 손가락이 넘는 적장을 검으로 베어넘겼다. 하지만 그의 진짜 특기는 검이 아닌 마법이었다. 파브스 평원에서 보여준 4중 영창 주문은 메이지의 칭호를 받은 마법사들마저 경악케 했다. “흠... ‘엘 지스카르 파셔’는 누구지?” 레브노아드는 맞은 편을 유심히 살폈다. 스트라스 제국 측의 인물들이 입장하는 가운데, 엘 파셔 제국의 일행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찾는 것은 엘 파셔의 황태자였다. ‘스트라스 제국에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있다면 엘 파셔 제국에는 지스카르 황태자가 있다’ 는 말이 있다.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전장을 떠돌며 명성을 얻는 동안, 지스카르 황태자는 검에 놀라운 재 능을 보이며 또 다른 명성을 얻고 있었다. 풍문에는 벌써 마스터의 경지를 넘보고 있다 하던가. 팽팽히 대립하는 두 제국에, 비슷한 나이 또래의 황태자들이 각각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 고 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라이벌과 비슷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레브노 아드 당사자도 나름대로 지스카르 황태자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얼마 안가 그는 지스카르 황태자를 찾아냈다. 지스카르는 엘 파셔 황가 특유의 검은 머리카 락에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키도 훤칠하고 제법 괜찮은 미남이다. 그러나 잘생긴 얼굴은 극도로 무표정하고 아주 차가웠다. “허허. 어린 것이 표정 좀 보게. 엘 파셔의 황태자는 나보다 3살 아래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나보다 3살이 더 많아 보이는군.” “아니, 거기까진..... 하지만 레비 형님 말씀대로 굉장히 겉늙어 보이네요.” 레브노아드가 혼잣말을 하자, 곁에 서있던 적금발의 소년이 대답했다. 에드리히 반 스트라스. 제국의 11황자이지만 모든 권리를 버린 채 레브노아드의 신하가 되 었고, 그래서 수많은 형제들이 레브노아드에게 숙청을 당할 때 그만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수많은 형제들 중 그만이 레브노아드의 애칭을 부를 수 있었다. 덧붙여, 세상에서 오직 레브노아드만이 에드리히의 애칭을 불렀다. “에디. 아랫사람을 다루는 자는 얕잡아보여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겉늙은 엘 파셔의 황태자는 축복받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아......” 에드리히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레브 노아드는 피식 웃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호위 기사와 신하들은 뒤에 남았다. 엘 파셔 측에서도 오직 지스카르 황태자만이 가운데 제단을 향해 걸어왔다. 중재자는 없었다. 다만 대리석 재단 위에 미리 준비한 협정서가 올려져 있을 뿐이다. 레브 노아드는 제단 한 쪽에 놓인 황금펜을 집어들었다. 지스카르도 펜을 집었다. 거의 동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 간단히 인사치레가 오갈 차례가 되었지만 침묵이 감돌았다. 서명된 협정서는 어찌보면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두 제국이 실질적으로 휴전을 원하고 있어야만 협정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 국간의 대표가 직접 대화를 나누는 이 단계가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었다. 문득 레브노아드가 손을 내밀었다. 지스카르가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자 레브노아드는 입매 를 살짝 들어 웃었다. “악수를 하는 것도 안되는가?” 그에겐 보다 경험이 많은 자의 여유가 배여있었다. 실제로 지스카르는 3살이 어리기도 했 고, 전장을 떠돌던 레브노아드보다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지스카르는 여전히 무표정을 고 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브노아드의 손을 맞잡는 순간 눈에서 파랗게 냉기가 배어나왔다. 양국의 황태자가 악수를 나누고 있지만 참석자들은 살얼음판 같은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놓고 등을 돌렸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던 레브노아드가 갑자기 지 스카르를 향해 말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전쟁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왕이면 이 휴전, 가능한 길게 끌었으면 좋겠군.” “...휴전협정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처음으로 지스카르의 목소리를 들었다. 반듯하게 존대를 하며 3살위 형님 취급을 해주는 것 이 무척 의외라 그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그럼 기회가 되면 또 보지.” 그는 손을 흔들며 홀을 나섰다. 밖에는 그의 친위 기사단이 완벽히 줄을 맞추어 정렬하고 있었다. 레브노아드는 그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유쾌하게 외쳤다. “돌아가자! 우리들의 조국으로! 이젠 변방의 추녀들에게서 졸업해서 나긋나긋한 스트라스의 여자들을 안아봐야지!!” “우와아아--------!!” 금속제 동상 마냥 바람이 불어도 눈하나 깜짝 않던 기사들이 순간 미친 듯이 기뻐하며 함성 을 올렸다. 레브노아드는 기사단장 체르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귀환하는 동안 마차에서 눈을 붙여야겠다. 하늘이 무너지기 전에는 깨우지 말라.” “그 생활 패턴 제발 바꾸십시오. 며칠간 꼬박 날을 새다가 한꺼번에 몰아서 주무시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내 몸 관리 정도는 알아서 한다. 그리고 체르도, 일에는 시기라는 게 있다. 나는 잠을 자다 가 중요한 때를 놓치는 얼간이 짓은 하고 싶지 않아.” “하아. 무사히 평화협정 임무를 완료했지만, 귀환하는 길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 은 충분합니다.” “그 정도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막아! 내가 잠시 눈 붙이고 있을 동안 시간 끄는 것조차 못 하는 놈들이라면 필요없다.” 레브노아드는 그대로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체르도는 자신만만 하게 웃으며 곧장 그 명을 받들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수년간 레브노아드와 동고동락하며 불패의 명성을 쌓아온 황태자 직속 친위 기사단이다. 체르도는 목청을 돋워 단원들을 향 해 소리쳤다. “정렬!! 모든 것은 황태자 전하를 보필하여 스트라스에 도착한 이후의 일이다! 뉘 안전에 먹 칠을 하겠다고 벌써부터 헤이해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냐! 평생 변방의 추녀나 끼고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신 똑바로 차려!”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으며 레브노아드는 통신용 수정구를 꺼냈다. 그의 아버지인 스트라스 의 황제는 성정이 급한 사람이었다. 속히 보고를 올리는 것만이 화를 면할 방도이리라. 레브노아드는 수정구 위에 팔을 내밀었다. 그는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대단히 화려한 팔 보 호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팔꿈치 즈음에서 손등까지 이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온.” 순간 보석들이 일제히 빛을 뿜었다. 어느새 수정구는 스트라스 제국 황제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신호를 보내자마자 바로 연결이 되다니, 지금껏 수정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버님. 소자 레브노아드 근 보름만에 인사드리옵니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짐이 건강한지 어떤지는 네 눈으로 보면 알 것이고, 그보다 오는 초하루까지 귀환하거라! 휴전협정에 대한 것은 확인도 않고 난데없이 빠듯한 귀환명령부터 내려졌다. 레브노아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생기다마다! 이 애비가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노라! 오는 초하루날 사냥 계획을 잡아놨으니 그리 알라! “......아버님. 클루니오 백작께 연락을 넣어보시지요. 기꺼이 사냥 친구 정도는 되어줄 것입 니다.” -이 놈이 다 늙은 애비에게 효도할 생각은 않고! “그보다 휴전협정이 어찌됐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호! 간만에 실패의 쓴맛이라도 본 게냐? 내 이 휴전협정이 영 탐탁치 않던 차인데 그것 참 잘되었구나! “죄송하옵니다만, 성황리에 휴전협정을 마쳤습니다.” -에잉~! 황제는 빛바랜 금색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여전히 목소리엔 장난기가 남아있었다. 황제 는 예부터 자식들 중 레브노아드를 노골적으로 편애했다. 이유는 극명했다. 자식들 중 레 브노아드가 특출나게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레브노아드는 황태자가 되기까지 12명이나 되는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하였는데, 황제가 그에 한수 거들기도 했다. 덜컹-. 갑자기 마차의 문이 열렸다. 레브노아드는 고개를 돌렸다. 에드리히가 찻잔을 들고 들어오 고 있었다. “에디, 뭘하다 이제 오느냐.” “사흘을 꼬박 새지 않으셨습니까. 딱 곯아떨어지실 타이밍이라 생각해서 수면에 좋은 차를 가져왔습니다......만...........” 대답하던 에드리히는 말끝을 흐렸다. 레브노아드가 통신구를 통해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즉시 머리를 숙였다. “기체일후만강하오십니까. 황제폐하.” -그래. 에드리히로구나. 내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 앞으로도 빈틈없이 레비를 보필해야 할 것이다. 황제는 노골적으로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모든 황자가 죽었지만 에드리히는 살아 남았다. 에드리히도 황제의 아들이니 황권을 노릴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이것은 알아서 처신을 잘 하라는 뜻이었다. 레브노아드가 나서 싸늘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아버님. 에디는 제가 거두었으니 그에 대한 모든 권한과 의무, 책임은 모두 저에게 있습니 다.” -하! 이 놈이 다 컸다고 이젠 애비 말을 무시해? 뭐 좋아. 네가 다 알아서 하리라 믿어주겠 다. 그리고........... 초하루날이다!! “알겠습니다.” 레브노아드는 수정구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황제의 영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는 주지 않을 게냐?” “예? 아!” 레브노아드가 손을 내밀자 에드리히가 그제야 뒤늦게 들고 있던 차를 건넸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 동안 에드리히도 맞은 편에 자리잡았다. “에디. 그간 검이 많이 늘었다고 들었다. 진척은 어느 정도더냐?” “아.... 그저... 그런 정도입니다.” 에드리히는 약간 머뭇대다가 멋쩍게 대답했다. 레브노아드는 다시 한모금을 머금고 잔을 내 려놓았다. “에디.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거짓말을 하지마라.” “예?” 에드리히가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떴다. 레브노아드가 그 시선을 똑바로 맞받아주자, 그 는 몹시 주눅이 들어 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건......” “벌써 오라를 발현시켰다고 들었다. 네 나이 열일곱이니 스물다섯을 넘기 전에 마스터의 경 지를 넘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그 사실을 숨겼느냐?” “검을 두 번 다시는 들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미 몇 달 전부터 일체 검을 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이지 말아달라고?” 레브노아드는 물었다. 약간 쓰게 웃으면서. 그가 죽여버린 형제가 무려 12명이다. 그 외에 도 위협이 되는 후궁, 외척들을 싸그리 몰살시켰다. 신하와 백성들은 그를 신처럼 따랐지만, 혈육들은 그를 마귀처럼 증오하고 두려워했다. 에드리히는 고개를 들었다. 레브노아드의 시선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형님의 곁에만 있겠습니다.....” 레브노아드는 잔을 들어 나머지 차를 전부 들이켰다. 그는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권력은 일신의 강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제국의 모든 이가 나의 신하이고 너는 몰락한 황자에 지나지 않는데, 네가 마스터가 됐다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겨우 그 정도에 흔들릴만큼 내가 쌓아온 기반은 우스운 것이 아니야.” 조금 어지러웠다. 레브노아드는 머리를 흔들고 에드리히를 보았다. 13살 무렵 휘하로 받아 들인 동생은 여전히 작고 어리기만 하다. 아마 스스로 그리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검을 연마해라. 이왕이면 엘 파셔의 황태자보다 한 발 빨리 마스터 가 되라. 그 애늙은이를 눌러주는 것도 재미.....있겠군......” 피식 웃던 그는 미간을 쥐었다. 두통이 꽤 심해지고 있었다. 안색이 급속도로 나빠지는 것 을 보고 에드리히가 다가왔다. “형님?” “별 것 아니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아니, 간단한 두통약이라도 받아오겠느냐?” “신관을 뫼셔오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에드리히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마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레브노아드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 순간,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커헉!?”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어떻게든 공기를 들이키려 애썼다. 그러 나 무용지물이었다.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지고 코와 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믿어 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고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레브노아드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덜컥. 버둥거리는 그의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찻잔이었다. 에드리히가 건네주었던 찻잔. 마비되어 가는 감각속에서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차 안에 독이 들어있었다는 것을. “에, 에디.........네.....가........” 배신인가? 결국 그런 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보다 자신이 에드리히의 앞에서 이 정도로 방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어이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나는.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까맣게 잠식해오는 감각에서 저항했지만 끝내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말 순식간에, 모든 것이 암흑이 되었다.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 01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스트라스 제국과 엘 파셔 제국이 경쟁적으로 팽창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전 세계는 대전의 소용 돌이에 휘말려 든다.' '영주재판권의 축소는 황권 강화를 꾀하기 위한 정책 중의 하나다.' '에브라함 요새는 30년간 단 한번도 외부의 침공에 함락된 적이 없다.' 혹시 환생을 믿는가? 본래 나도 그런 건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더군. 나는 본래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라고 불리던 인간이었다. 스트라스 제국의 황태자였으며 누 군가에게 독살당해 한심한 최후를 맞은 놈이기도 하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환생을 때, 나는 전생의 모든 것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머리 속에 맴도는 레브노 아드의 경험과 지식들을 인식의 범위에 두지 못했다. 갓 태어나 주먹만한 아기였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아니, 우유가 굉장히 먹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주 우유를 먹여주지 않아서 괴로웠다. 이건 기억난다. 아마 6살 때였던가? 그때 처음 스트라스 제국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평원을 떠올렸다. 그곳에 힘껏 말을 내달리면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고 구체적으로 스트라스 제국까지 걸어갈 방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옆집 베티가 놀자고 그러기에 그냥 뒷산에 풀 뜯으러 갔던가?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때는 어린아이였으니까. 충동적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꼬맹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사람들에게서 ‘레이’라고 불리고 있었 다. 나이는 13살. 엘 파셔 제국, 겔락 백작 휘하, 빈첸시오 자작의 소유물인 노예. 그래 노예다. 하다못해 평민도 아니고, 나는 가축이나 다름없는 노예로 환생한 것이다. 그것도 적국의 노예구만. 대단히 어이없어하면서도 나는 아직 레이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가끔 생각한다. 누가 나를- 레브노아드를 독살한 것인지, 스트라스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 지저분한 곳을 벗어나 과거의 신분을 되찾고 싶다던지. 콰앙! “레이!!” 갑자기 베티가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왔다.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엘 파셔의 여자들은 왜 이렇게 사나운지 몰라. “베티, 항상 노크를 하라고 말했잖아.” “그런 것보다 레이! 밖에 난리야!” 또 무슨 일로? 설마 아버지들끼리 모여서 낮술을 마신 건 아니겠지? 바로 어제 성주님께 혼 쭐이 났으면서 아주 간이 부었군. 난 혀를 차고 베티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마당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하지만 술 에 취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어머니와 아버지가 근처에 계시기에 다가가서 물었다. “어머니.” “아이고 우리 레이 왔어?” 어머니가 나를 번쩍 안아서 품에 안았다. 겨드랑이가 땀에 쩔어 구린내가 났다. 그래도 어 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따뜻하고 포근해서 나는 얼굴을 부볐다. 그녀가 다시 땅에 내려주자 나는 그때서야 질문했다. “무슨 일이예요?” “물레방아의 축대가 부서졌단다. 이걸 어째~. 이걸 어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 낡아서 불안해 보이더니 결국 부숴졌나 보군요. 그런데 물레방아가 부서졌으면 영주관 에 알려야지 이런데서 뭘 하시는 거예요?” “어휴! 평소라면 그러겠는데, 어제 저 치들이 낮술을 처먹어서 주인어른께서 크게 화가 나 셨잖니. 그런데 오늘은 물레방아까지 부숴먹었다고 말씀드리면 주인어른께서 뭐라 그러시 겠어. 아이고, 이러다 치도곤을 당하지! 이 인간들아! 그러게 왜 술을 처먹어, 처먹기를!!” “이 여편네야. 맞아죽어도 내가 맞아죽어. 내가 저 물레방아가 지금 부숴질 줄 내가 알았 나!” 갑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쳐다보고 있으니 저절로 한숨이 나온 다. “어머니, 아버지. 빈첸시오 자작은 노예를 다룰 때도 사리분별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물레방 아는 부서질 때가 되어 부서진 것. 그가 죄도 없는 노예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라고는 생 각하기 어려운데요?” 어느새 부모님 외의 다른 사람들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말에 납득을 해 서 그런 건 아니다. 다들 그냥 하는 소리라도 좋으니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 이다. 노예는 어쩔 수 없는 노예라는 건가. 어찌 한 치 앞도 분간을 못할까. “아저씨들, 제 말이 사실이 아니면 또 어떻게 하실 거죠? 이대로 감추고 있다가 나중에 들 키면 성주님은 더욱 화내실 텐데요?” “여, 역시 그렇지?” “어쩔 수 있나 가봐야지. 영주님은 좋은 분이니까 이번에도 용서해주실 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번엔 잘못한 것이 아니니 용서받고 말고 할 것도 없다니까? 말해봤자 신통한 반응이 나올 듯 하지 않아서 그냥 말하기를 관두었다. 대신 방향을 돌려서 생산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자 결론 났으면 아버지는 어서 영주관에 찾아가서 물레방아가 부서졌다고 보고 올리세요. 그리고 다른 분들은 부서진 축을 꺼내 한군데로 모으고 주위를 정리해두십시오. 집사가 수리공을 데리고 왔을 때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말입니다.” “아, 그래야겠군.” “그러자고.” “잠깐! 왜 내가 영주관에 가야하는건데?” 그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시를 해놓고도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아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 누군가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살짝 짜 증이 솟았다. 나는 원래 일을 하는 중간에 방해받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우후후! 역시 우리 레이구나.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할까! 자, 이건 상이란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마냥 웃으며 마메 뿌리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 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 좋아요.” 나는 마메 뿌리를 받아들었다. 예전엔 이보다 훨씬 달콤한 과자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아마 이런 지저분한 나무 뿌리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으리라.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빈첸시오 성은 곡물이 풍족하게 나는 지역에 위치해있었다. 무엇보 다도 성주가 현명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 농노에서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평화 로웠다. 나를 낳아준 노예들.... 아니 내 부모님은 어리석지만 순박하고 따뜻했다. “마메 뿌리도 아주 나쁘지는 않을 지도.” 나는 뿌리를 씹으면서 베티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그건 지극히 평범한 나의 일상이었다. 밤이 저물어갈 무렵, 누군가가 찾아왔다. 여간해서는 노예숙소에 발을 들이지 않는 집사였 다. “여기에 있었군. 레이, 자작님께서 부르신다. 나오거라.” “성주님께서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첸시오 자작은, 사실 자그마한 성을 하나 가진 하급귀족에 불과했으나 지금 내게 있어서는 까마득히 하늘 위에 계신 분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를 소유한 주인님 아니신가? 그런데 무슨 용무로 나 같은 어린 노예에게 용무 가 있다는 걸까? 나는 집사를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바로 영주님께 나를 데려가지 않고 먼저 욕실로 데려갔다. “깨끗이 씻기고 준비시켜라. 서둘러!” 집사가 대단히 엄격하게 지시했다. 그 즉시 하녀들이 다가와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 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서 반항을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야 영주님 앞에 데려가는데 깨끗하게 씻기고 새옷을 입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하녀들은 대단히 신속했다. 어어-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말끔하게 씻겨져 새옷까지 갈아입 었다. 보드라운 실크셔츠에 까만 바지. 간단하지만 노예에겐 그저 황송할 물품들이었다. 마지막 순서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머리카락을 손질했다. 빗질을 하던 하녀가 탄성을 냈다. “와, 머릿결이 한번..... 이런 금발도 처음 봐. 부름을 받을만 하네.....” 그녀의 말이 대단히 신경 거슬렸다. 부름 받을만 하다니? “누나는 영주님이 왜 부르시는 건지 알아요?” “으음, 그게 말이야.... 사실 네 입장에선 약간 기분 나쁘고 무서울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가지렴. 좋게 생각해.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란다. 세상에 그분이 직접 이런 곳에 행차하실 줄이야! 나도 너처럼 그분을 모시고 싶지만 얼굴이 따라주질 않아서 그건 불 가능하고, 그냥 아침식사 갖다드리는 거라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무슨 뜻이예요?” 이야기를 듣고나니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하녀는 고개를 저었다. “묻지 않아도 금방 알게 돼. 그보다 너 누구 닮았니? 엄마?” “.........그럴껄요.” 사실은 아니다. 다들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지만, 나는 아주 옛날부터 이런 모습을 하고 있 었으니까. 금발에 녹색 눈동자. 내 얼굴은 과거 레브노아드라고 불릴 때와 똑같았다. 지금은 땅꼬마지만 아마 15살 즈음 되면 갑자기 키가 크고 검을 들 수 있을 만큼 체격도 좋아 0 지리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 혼자 뿐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여자 노예들이 5 명 더 준비를 끝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또래의 어린 소녀부터 20살이 넘은 여인까지 나이대는 다양했는데,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것이다. 대체 빈첸시오 성주는 무슨 생각으로 이들을 부르는......... 순간 나는 대단히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녀의 수다가 또 다른 토대가 되어, 나는 단 숨에 확신에 가까운 결론을 내렸다. 어떤 굉장한 사람이 성을 방문했고, 성주가 그의 잠 자리 시중을 들 여자를 골라낸 것이라는! 아니 그런데 나는 남자잖아? 내가 왜 여기에 끼어있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귀 족들이 예쁜 소년을 안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나도 황태자 시절 흥미삼아서 소년을 안아본 적이 있었다. 그다지 뒷맛이 안좋아서 다시는 찾지 않았지만....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정말인가? 진짜로 그것 때문에 불려가는 거야?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깨 달았다. 경비병들이 평소때와 달리 잔뜩 군기가 들어가 있었다. 귀빈이 성을 방문한 탓에 경계가 몇 배로 강화된 것이다. 도망칠 수 없다! 혹여 도망을 쳐서 잠시 이 순간을 모면한다 해도 그 뒤처리는 어찌 할 것 인가? 도망 노예는 가죽을 벗겨서 일주일동안 매달아놓는 것이 관례이다. 아직 무기를 쥘 만한 근력도 없고 추적자를 베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정석이 없으니 마법도 쓸 수 없다 . 애초에 13살 짜리 어린아이가 어디까지 홀로 움직일 수 있을까? 갑자기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범람했다. 그동안 집사가 재촉하기 시작했고 나는 내 키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야만 했다.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엄청난 고뇌가 밀려 왔다. 어쩌지? 그냥 앞뒤 생각말고 뛰어버려? “오늘밤 너희들 중 한 명이 대 제국 엘 파셔의 황제 폐하를 뫼시게 될 것이다. 평생 영광으 로 여길 기회가 주어지는 게다. 내 이리 강조하지 않아도 한치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어느새 나는 빈첸시오 백작의 앞에 있었다. 그가 뭐라고 이야기 했으나 나는 혼자만의 생각 에 잠겨있느라 말의 일부를 놓치고 말았다. 다만 갑자기 함께 온 여자들이 조금 들뜬듯한 느낌이 들어 의아하게 여겼다. 이윽고 귀빈실의 문을 열었다. 나는 자신을 다스렸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 하는 그런 일이 아닐 지도 모르니까 정신 차리자. 예의 귀빈은 창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검은 머리카락 에 무감각한 표정없는 얼굴.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생각은 모조리 마비되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엘 지스카르 파셔!!” 순간 빈첸시오 성주, 호위기사, 하녀 등등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내게 쏠렸다. 전부 경악해서 눈알이 다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야 엘 파셔의 황태자 이름을 마음대로 불러댔으니까. 그러나 나는 지스카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스카르도 짙은 푸른색 눈동자로 나 를 응시하고 있었다. 13년이 지났다. 당시 17살 애송이었던 그는 지금 30살이 되었을 것 이다. 그런 것치고 지스카르에겐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애초에 일찍 겉늙어버 린 탓인가? 13살이나 더 먹고도 얼굴이 거의 변하질 않았다. 휴전협정을 맺을 당시의 모 습 그대로, 지스카르는 내 눈 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놈의 밑에 깔려 다리를 벌려줘야 한다는 말이군.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애 늙은이에게. 뜨겁던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상상만으로도 어금니가 뻐근할 만큼 치욕적인 감각을 아는가? 나는 노려보다시피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일순 뒤돌아서 뛰었다. “어엇! 저 놈 잡아!!” 빈첸시오 성주가 외쳤고, 아마 지스카르의 휘하인 듯한 기사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커다란 손이 닥치자 나는 몸을 숙여 그것을 피했다. 내가 피할 수 있을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기사는 팔을 휘젓다가 그만 꼴사납게 꼬꾸라지고 말았다. 혼란한 틈을 타 또 다른 기사의 옆을 제쳤다. 그러나 기사는 하나 더 남아있었다. 아차하는 사이 나는 그자의 우악스러운 손에 어깨를 붙잡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노성을 터뜨렸다. “감히!!” 내 말에 기사는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내 사무적인 얼굴로 되돌아와 나를 방 안으 로 끌고갔다. 이 난동이 있었음에도 지스카르는 여전히 처음 그 자세로 서있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꿇어라.” 나를 붙잡은 기사가 짧게 명령했다. 나는 들끓는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웃기지마라. 차라리 죽여!” 다시 그 기사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빈첸시오 성주도 놀라서 말했다. “이, 이 놈이 뉘 앞이라고! 황제 폐하의 앞이다!” 황제? 하긴 13년이면 황위에 오르고도 남았을 세월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아이를 남겨두고 물러나라. 여자들까지 전부.” 그때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조차 13년 전의 그때와 아주 흡사했다. 순간 마치 껍 데기를 한겹 벗겨내듯이 모든 감각이 과거로 되돌아갔다. 놈의 앞에 붙들려 서있다는 사 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스트라스의 황태자였다. 엘 파셔 놈에게 붙들려 무릎을 꿇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될 일이다! 기사가 내 어깨를 놓고 물러났다. 여자들도, 빈첸시오 자작도 함께 썰물처럼 모든 이들이 떠나고 방 안에는 나와 지스카르만 남았다. 그는 여전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천천히 내게 걸음을 옮겼다. 숨을 낮게 쉬었다. 침착하게 주위를 살펴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았다. 그때 지스카 르가 손을 뻗었다. 간발의 차로 나는 팔을 뒤로 피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이미 예상했 다는 듯 어느새 내 팔을 붙들었다. 지스카르는 그대로 나를 끌고가 내동댕이쳤다. “윽!” 거긴 침대 위였다. 부드러운 깃털 베개가 가득했지만 내게는 거의 벌레 더미 같았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놈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아주 가볍게 고개를 젖혀, 지스카르는 주먹을 피했다. 하지만 거기까진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의 틈을 타 모든 힘을 실어 다리로 놈의 배를 찼다. 확실히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지, 지스카르는 미처 내 발을 못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약간 움찔하고 더 이상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살짝 찌푸린 푸른눈 뜨고 다시 내 얼굴을 응 시했다. 나는 그제야 내 키가 지스카르의 가슴 어림에 겨우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팔다리는 나무꼬 치처럼 가늘었다. 가능한 머리를 차갑게 식혀 가능성을 찾았고 나는 깨달았다. 아득할 만치, 체격의 차가 너무나 컸다. “얌전히 있는 것이 네 신상에도 좋을 것이다.” “꿈깨라. 내 목을 자르는 것이 더 쉬울 테니.” 지스카르가 손을 느리게 들었다. 그 손이 순간 내 뺨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빠악!! 찢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거의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 한 방에 나는 정 신을 잃을 뻔 했다. 지스카르는 내 몸을 뒤로 뒤집은 다음, 팔을 꺽어 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허리띠인 듯한 물 건으로 팔을 뒤로 강하게 죄여묶었다. “지스.....카르..!!” 나는 가까스로 말했다. 충격 때문에 감각이 아득한 몸을 뒤척여 억지로 일어나려 했다. 그 때 지스카르가 말했다. “누가 노예에게 짐의 이름을 가르쳤느냐?” “.........” 나는 잠깐 멈칫거렸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껄일 수도 없는 법이니까. “누가 노예에게 무술을 가르쳤지?”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 네놈은 누가 가르쳐야만 아느냐?” 지스카르는 그 상태로 또 빤히 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놈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오늘 처음 만난 노예가 밑도 끝도 없이 막말을 쏟아내니 어이가 없겠지. 그래, 지스카르의 입장에서 나는 일개 노예에 불과했다. 조금 기분 나쁘면 해충 없애듯 눌러죽여버릴 수도 있는. 그런 하찮은 존재에게 오히려 지스카르는 지나칠만큼 아량을 베풀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놈의 아량에 감사라고 하라고!? 나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름끼치게 끔직한 모욕감 때문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끔찍하게 느꼈다. 지스카르는 팔을 억압하던 손을 배 아래쪽으로 넣어 안는 것처럼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은 바지를 고정시키던 허리띠를 풀어내었다. 갑자기 허리 아래가 서늘해졌다. 바지가 벗겨진 것이다. 머리 끝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잠시 지스카르는 침대 맡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병이었는데 뚜껑을 열자 기분 나쁜 냄 새가 났다. 그는 내 엉덩이 위에 그것을 쏟아부었다. “헉........!! 그, 그만....!” 차갑고 끈적한 것. 알고 있었다. 어떤 용도인지, 왜 쓰이는 건지! “쓰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거다.” “머, 멈춰! 건드리지마!” 외침이 무색하게 꼬리뼈에 손가락이 닿았다. 그것은 느리게 미끌어져 내려와 이내 엉덩이 사이의 틈을 찾아냈다. “으........아! 엘 지스카르 파셔!!” “힘을 빼라.” “닥쳐! 네놈 이런 취향이었느냐? 나는 남자야! 변태...같은 자식이...... 악!!” 아프다기보다 깜짝 놀라버려서, 나는 크게 비명을 질러버렸다. 손가락 하나가 단숨에 깊숙 이 들어왔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이물감! 나는 이를 악 물었다. 몸을 움츠리며 그 이물감에 반항했다. 지스카르는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손가락은 전부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도 점점 더 파고들었다. 이럴 바에, 이럴 바에 독살당해 죽는 인생이 천 배 낫겠다. 머리를 쳐박고,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다. 생각이 미치자마자 나는 혀를 빼서 힘껏 물었다. 그것을 보고 지스카르가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빼서 턱 아래를 붙들었다. “윽, 커.........” 혀를 무는 힘보다 놈의 손힘이 몇 배는 더 강했다. 견딜 수 없게도, 점점 입이 벌어지기 시 작했다. 그동안 지스카르는 품에서 손수건을 길게 펼쳐 재갈을 물렸다. 지스카르는 침대 위에 널브러진 나를 다시 안아 들었다. 마치 아기 안는 것처럼 무릎 위에 얹고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이 엉덩이 주위를 훑어갔다. 향유를 묻히는 것이다. 미끈거리는 손가락이 항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연이어 또 하나가 더 들 어왔다. “넣으.....지마! 치....워.....!” 재갈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불확실한 발음을 어찌 알아듣고 지스카르가 말했다. “넓혀놓지 않으면 진짜로 할 때 상처가 심할 것이다. 처음이겠지?” “........!!” 죽여버리고 싶다. 죽여버릴 테다! 그보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하반신과 신경을 끊어버리 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손가락 두개가 마치 탐색하는 것처럼 안쪽이 샅샅이 훑어갔다. 깊게 넣었다가 천천히 빼내는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다시 안쪽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온 손가락이 속을 크게 저었다. 어느 순간 손끝이 어딘가를 건드렸고 내부에서 찌르르하고 엄청난 감각이 전혀졌다. “...욱.......우우윽.......!!”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헐떡거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지스카르가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표정 따위는 없었다. 아주 옛날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지스카르는 손톱을 약간 세워 다시 한번 안 쪽을 가볍게 긁었다. 마치 확인하는 것처럼 말 이다. 반응해주고 싶지 않은데, 차라리 다른 짓이라면 뭐든 하겠건만. “으..............! 후.....으.....” 가까스로 그 느낌을 참아 넘기고 뜨거운 숨을 토했다. 이를 악 물고 버텼지만 틀림없이 알 았을 것이다. 온 몸이 바짝 굳어버렸으니까. 지스카르는 나를 침대 위에 바로 눕혔다. 내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고 가슴 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나는 순간 이를 아득 갈며 놈의 턱을 걷어차버렸다. 발은 자유로웠으 니까. 제법 제대로 들어가서 놈의 얼굴이 위로 꺾였다. “......지나치게 겁이 없군.” 여전히 지스카르는 무표정이었으나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는 허벅지를 쥐어 위로 거칠게 들어올렸다. “네가 자초했으니 배려는 않겠다.” 뭐라고 말하는지 듣지 못했다. 다만 이 미치게 수치스러운 자세에 경련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스카르는 크게 벌려진 다시 사이에 향유를 모두 쏟아부었다. 미끈거리는 액이 배와 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지스카르는 바로 페니스를 가져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만질 때와는 달리 단숨에 찔러넣었 다. “우으으윽..........!!!!” 참았던 비명이 튀어나왔다. 거기서부터 몸이 반으로 쪼개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아직 전 부 들어가진 않았다. “하, 하지 마!” 가까스로 내뱉은 외침이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멈추지 않았다. 뒤로 조금 물러났다가 다 시 강하게 밀어넣었다. “흐으아악!!” “크!”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놈도 괴로운 듯. “너무.... 어리군. 향유를 이렇게 썼는데도.” 알면 하지마! 멈추란 말이다!! “우욱!” 하지만 그 말보다 비명이 먼저 튀어나갔다. 지스카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무 거친 움직임이라 생각이 더 이어지질 못했다. 깊게 들어왔다가 끝까지 딸려나가고 다시 침범해왔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주, 죽을 것 같다. 미칠 것 같아! “제..... 제발.....!!” 지스카르가 몸을 아래로 누르는 것 같았다. 위로 그림자가 졌다. 뜨거운 손이 양 뺨을 감쌌 고 타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지스카르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눈 바로 아래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썹 아래에 또 입을 맞췄다. 나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지스카르는 눈 위에 아주 오래 키스했다. 마치 입에 재갈이 물려 키스를 할 수가 없으니 그 대신으로 하겠다는 것 같았다. 지스카르가 떨어졌다.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 눈을 깜빡거리자 머리칼을 뒤로 모두 쓸어넘겼 다. 또다. 또 지스카르가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 보았다. “힘을 주지 마라. 아플 테니까.” 힘을 안 줘도 아파! 유치하고 또 비참해서 말하길 관뒀다. 이번에 지스카르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가능한 천천 히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웃기지만 애써 배려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뜨겁고 왠지 두통이 일었다. 이제와서 깨달았는데 아까 엊어맞은 뺨이 몹시 욱신거렸 다. 후유증인가... 지스카르가 허리에 손을 넣어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앉는 자세가 되었다. 머리 로 박치기라도 해주려 했지만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스카르의 손에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지스카르는 내가 옆으로 쓰러지지 않게 팔로 품 안에 꼭 붙들었다. 아, 이 자세..... 기분 더럽다. 그때 지스카스가 내 엉덩이 즈음에 손을 대고 좀 전과는 약간 다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으흑?” 좀 전에 그 감각! 나는 깜짝 놀라 늘어진 몸을 다시 바들바들 떨었다. 제기랄, 써먹으려고 두고두고 묵혀놨구 나. 그래 아주 죽여라. 아니 제발 그만해!! “흐, 아윽! 아!! 아아악!” 겨우 참을 만하면 다시 오고, 도망가면 다시 따라오고. 나는 목을 젖히고 고개를 저었다. 말 을 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라도 거부를 표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가차없었다. 너무 집요 해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거기가 너무 뜨거웠다. 일순 지스카르는 마치 으스러뜨릴 것처럼 내 몸을 강하게 안았다. 나도 허리를 몸을 몹시 웅크렸다. 내가 모든 것을 쏟아내자 동시에 몸 속으로 뜨거운 것이 밀려들어왔다. 너무나 힘이 들어 고개를 젖히자 갑자기 눈 앞이 까무룩 잠겨들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 눈에 익은 천장이 보였다. 나는 뜨거운 숨을 토했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오른 쪽 눈을 뜨기가 힘들고, 허리 아래가 굉장히 쓰라리고 아프다. 어째서? 의문을 떠올리는 동시에 숨을 멈추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손가락. 거칠게 밀고 들어오 는 이물감! “크으윽!!” 나는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치욕에 턱이 덜덜 떨렸다. 감히! 그 개자식 이! 빌어먹을 자식이!! “레이. 레이! 괜찮으니? 레이.” 그제야 부모님과 다른 노예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서둘러 달려와 팔로 나를 꼭 껴안았다. 익숙한 냄새를 맡자 왠지 떨림이 서서히 멎어갔다. “응....... 괜찮아요, 어머니.” “거짓말! 이렇게 다쳐서........ 이렇게.......” 그녀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내 뺨을 쓸었다. 나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어제 놈에게 얻어 맞은 뺨이 심하게 부어서 눈도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따뜻한 품으로 안심시켜주었듯이, 나도 그러고 싶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보이는 것만큼 심하진 않습니다. 괜찮으니까 잠시 혼자 쉴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레이.” “전 괜찮아요. 근데 피곤해서......” 어머니는 끝까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녀를 다독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쉬고 지난 일을 돌아보았다. 다시, 속이 들끓는다. 엘 지스카르 파셔.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반드시 갈아 마셔 버릴 테다! 천천히 생각해라. 먼저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라. 무슨 생각으로 비천한 노예의 신분에 안주하고 있었을까? 노예는 개나 돼지와 다름 아니다. 내 소유주인 빈첸시오 자작은 돼지에게도 아량을 베푸는 자였으나 그의 기분이 바뀌는 순간 언제고 내 얼굴이 시궁창에 처박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몰랐다는 거냐?! 내 나이 올해로 13살,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에 탈출을 시도하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적어 도 비상시를 대비하여 하나씩 대비책을 쌓아두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처음 위기를 감지했을 때 잠시 피신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레이.......” 누군가의 목소리에 생각의 끊어졌다. 들어오지 말라고 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였기에 화는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대단히 불안한 얼굴로 문가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레, 레이.... 너를 찾아오신 분이.....” 그때 어머니를 제치고 낯익은 기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지스카르의 호위기사! 어제 나를 붙잡으려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 놈이었다. “일어나라.” “......” 나는 움직이지 않고 인상을 찡그렸다. 기사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시 한번 폐하를 모시는 영광을 얻었으니 황공하게 여겨야 할 것이야.” “뭐?” 목소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또 부른다고? 다른 여자들도 많을 텐데 또 나를? 대체 왜! “일어나!”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 기사가 성큼 다가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거 칠게 그 팔을 뿌리쳤다. “놔! 내 발로 가겠다!” 기사는 입을 떡 벌렸다. 그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허, 내 살다살다 네 놈처럼 시건방진 노예는 처음 보는구나. 대체 네 놈이 뭘 믿고 그렇게 날뛰는지 정말로 궁금하군!” “너는 뒤를 봐주는 자가 없으면 바로 꼬리를 내려버리는 모양이지? 이쪽도 의문이다. 긍지 가 없는 자가 어떻게 근위기사로 발탁되었느냐?” “헉!” “레, 레이!” 내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어머니와 구경이라도 하려는지 뒤를 따라온 노예들이었다. 그들 은 곧 숨이 멎을 것처럼 입을 뻥끗대며 그러면 안 된다고 떨리는 손을 마구 휘저었다. “허! 지금 뭐, 뭐라고 했냐? 뭐.......” 기사는 약간 늦게, 더듬대며 말했다. 그러나 천천히 분노로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랐고 급기 야 한대 칠 것처럼 주먹까지 쥐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모르고 있었는데, 다른 기사가 더 있었다. “멈춰. 던필.” “하, 하지만 단장님. 저 놈........” “폐하를 기다리게 만들 셈이냐?” 던필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사나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따라와!” 나는 던필의 뒤를 따르며 단장이라는 기사를 곁눈질로 살폈다. 곧은 자세. 고른 숨소리. 좋 은 기사다. 하지만 일개 노예를 데려오는 일이라면 한 사람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어째서 저런 기사까지 보필해야 할 군주의 곁을 떠나서 이런 곳을 얼쩡대고 있는 걸까. 던필의 안내로 어제도 들어간 적이 있는 방문의 앞에 도착했다. 당당한 걸음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정작 여기까지 오자 갑자기 턱이 뻣뻣해졌다. 그러나 내 기분에 아랑곳없이 던필은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가.” 말대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던필이 인상을 찡그리며 등을 거칠게 밀었고, 나는 힘을 못 이겨 방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신은 물러나겠습니다.” 던필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즉시 문을 닫았다. 나도 모르게 동요하여 굳게 닫힌 문을 불안히 바라보다가 일순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부러 시선을 피하지 않고 놈을 노려보았다. 그 놈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파 근처에 선 채 무기질 같은 검푸른 눈동자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지스카르는 움직였다. 내 팔을 붙잡아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놈에게 이끌려 억지로...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놈이 가볍게 몸을 밀었고 나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긴장을 해서 온 몸이 나무 토막처럼 뻣뻣했다. 그것을 신경 쓰느라 잠깐 정신을 파는 사이 지스카르가 손으로 부어 오른 오른쪽 뺨을 쓸었다. 순간 소름이 와드득 돋았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치워!! 변태 자식아!!” 고함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간단히 그것을 낚아챘다. “다시 묶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굴어라.” 그제야 손목에 시뻘겋게 줄이 서있음을 깨달았다. 어제 허리벨트에 묶일 때 남은 자국이었 다. 그 일을 떠올리자마자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치밀었다. 끓어 넘치는 분노에 이성이 다 마비될 지경이었다. 지스카르가 다소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리한 요구였던 것 같군.” 지스카르가 갑자기 내 팔을 뒤로 꺾어 침대에 머리부터 처박았다. 너무 순식간이었던 지라, 그게 아니라도 힘의 차이가 너무 커서 나는 전혀 반항할 수 없었다. 익숙한 가죽이 팔목을 강하게 조였다. 팔을 뒤로 묶은 뒤 지스카르는 나를 안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내 허리끈을 풀어내 고 바지를 끌어내렸다. 홑겹인 바지는 금세 벗겨져 하반신만 완전히 알몸이 됐다. 지스카 르는 다시 나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젯밤의 상처는 괜찮은가?” 무슨 상처인지 깨닫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울분에 차 왈칵 소리 질렀다. “네 놈 같으면 괜찮을 것 같으냐?!!” 게다가 기절했다가 막 깨어난 참이란 말이다! 그때 등 뒤에서 엉덩이 계곡을 비집고 손이 들어왔다. 입구를 잠깐 더듬던 손가락이 틈을 비집고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안으로 들어 왔다. “윽! 으으읏!!” 툭 찢어지는 느낌. 어딘가 겨우 아물었던 부분이 다시 벌어진 것 같았다. 지스카르는 바로 손을 뺐다. “........무리겠군.” “헉... 헉........” 아직 시작도 않았지만 이 상태로도 나는 벌써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그 상태 로 자신의 품에 등을 기댈 수 있게 나를 앉혔다. 그리고 내 페니스를 손끝으로 가볍게 쥐 었다. 나는 경기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화들짝 몸을 떨었다. “핫! 거, 거긴 왜! 놔!” “조용히 맡기는 게 편할 것이다.” “차, 차라리 죽이라고 했다!” 악을 써가며 고함을 질렀지만 턱이 덜덜 떨렸다. 지스카르가 마치 진정시켜주고 싶은 것처 럼 손으로 부드럽게 턱과 뺨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다른 손은 여전히 내 페니스를 쥐고 있었다. 천천히 위로 아래로 움직이다가 기습적 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나는 허리를 크게 튕기며 숨을 들이켰다. 몹시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온 몸이 몇 배로 더 강하게 반응했다. 싫어, 이런 거. 빌어먹을 놈. 변태자식! 남자 걸 쥐고 주물럭거리는 게 뭐가 좋아!! 대체, 대 체 왜 이런 꼴을!! 그때 지스카르가 페니스를 손에 완전히 감싸고 손끝으로 귀두를 강하게 눌렀다. 반사적으로 신음이 튀어나갔다. “아아!! 으으윽! 머, 멈춰! 그만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여잔데, 그런데 왜.... 네 놈, 네 놈 남자가 취향이었나? 어린 소년이 취향인가? 그래?” “안됐지만 네가 처음이다.” “그런데 좋으냐?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셨어? 황손을 보기가 어렵게 생겼으니 엘 파셔의 미 래가 심히 걱정이군!” “이미 다섯 명의 딸과 아들이 있다. 무의미한 걱정이구나.” 지스카르는 짜증날 만큼 무심하게 말하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나는 더 말하려다가 신음 소 리가 섞여 나올 것만 같아서 대신 이를 악 물었다. 머리가 지글지글 끓는 것만 같다. 악 다문 입에서 거친 숨이 불규칙하게 새어나왔다. “굉장히 뜨겁군.” 지스카르는 보라는 듯이 페니스를 앞으로 당겼다. 나는 헐떡거리며 가까스로 말했다. “헉헉... 시........헉헉... 끄러.......” “참지 말고 내보내라. 편해질 테니.” “닥치란 말이다!!” 내가 고함치자 지스카르는 약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갑자기 페니스를 쥔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스카르가 터뜨려버릴 것처럼 내 것을 움켜쥐고 거칠게 위아래로 움 직였다. 나는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안으로 움츠렸다. 온 몸을 둥글게 웅크려 비틀어 어 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지스카르가 몸은 강하게 안고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웅크리려 할수록 더욱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턱을 쥐어 고개를 젖히게 한 뒤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덮쳤다. “우우욱!” 목구멍 깊숙이까지 혀가 침범해 들어와 나는 신음을 질렀다. 지스카르는 잠시 혀를 물려 치 열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안으로 들어와 혀를 휘감고 내부를 탐색하듯이 훑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호흡곤란으로! 난생 처음 겪은 일에 너무 긴장해서. 하 반신에 피가 전부 쏠리는 느낌 때문에. “하악! 싫..........!!” 겨우 그 깊은 키스에서 해방되었다. 순간 억지로 억눌렀던 백색액이 전부 쏟아져 나왔다. 지스카르가 아직 페니스를 쥐고 있는데 거기다가 전부 다! 그때의 심정만으로는 부끄러움에 그대로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정을 하면서 온 몸에 힘도 다 빠져나간 것처럼 나는 축 늘어져 버렸다. 따지자면 옛날에 이 비슷한 짓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거의 빈사상태 직전이었다. “하아하아........” 지스카르가 겨우 손을 풀어주었고, 나는 힘없이 침대 위에 늘어졌다. 그대로 숨을 헐떡이고 있노라니 문득 머리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지스카르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갑자기 없던 힘이 곰 같이 솟아올라, 나는 머리를 홱 비틀어 놈의 손에 서 벗어났다. 지스카르는 갈 곳을 잃은 손을 공중에 그대로 띄운 채 있었다. 그 상태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금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래. 웃었다. 황당하다는 듯이 말이다. 지스카르는 특유의 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한 너를 거칠게 다루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놈의 면상에 짱돌을 던져주고 싶었다. 팔을 묶고 재갈까지 물리고 두 번이나 강 간해놓고 뭐가 어째?! “그래, 이제 와서 말해도 믿기 힘들겠군.” 지스카르가 다시 웃었다. 입술을 아주 조금 움직여서.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걸 두 번이나 목격해버렸다. 이 눈알 뽑아버릴까!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그러니 저항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 하거라. 너에게 지식을 가르 치고, 몸을 단련시켜준 자가 누구냐?” 갑작스런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시 나를 불러들인 이유가 그거였던가! 분명 나 는 평범한 노예라고 보기엔 어려운 언행을 보여 왔다. 시건방진 건 둘째 치고, 빈틈을 노 려서 검의 달인의 ― 지스카르의 배를 걷어차는 것은 격투기 등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의심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했을 텐데?” 내가 잔뜩 경계하고 말하자 지스카르는 숨을 약간 길게 쉬었다. 그것이 한숨을 쉰 것이라는 것을 어쩐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너는 빈첸시오 자작이 소유한 남녀 노예에게서 태어났다. 네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노예 가 다섯이나 있더구나. 너는 태어나 노예숙소 근처에서 벗어난 경험조차 없었다. 그곳에는 책도 없고, 익힐 것도 없으며, 오직 글도 읽지 못하는 21명의 노예들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 내가 아무 말도 않자 지스카르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스스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네가 누군가에게서 가르침 받는 광경을 본 자도 없었다. 하지만 너는 틀림없이 많은 교육을 받았고, 또래보다 월등히 뛰어난 아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수상하군. 대체 누가, 어떠한 이유로 비밀리에 너를 가르치 고 단련시켰느냐?” “그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암살조직 따위에서 비밀리에 키워지던 중인 아이 같군.” 나는 입을 비틀었다. 하긴 이런 것이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이다. 누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 어서 배우지 않아도 유식해졌다고 믿을 것인가? 기사단장이라는 자가 근처에서 얼쩡거렸던 건 내 뒷조사를 위해서였군. “암살조직이라....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지스카르는 대답하면서 내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오만상을 다 쓰며 그 손을 피했 다. 그러자 지스카르가 갑자기 남의 것처럼 자기 손을 쳐다봤다. 자기도 모르게 움직인 건가? “대답은?” 손을 거두면서 지스카르는 물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또 긴 숨소리. 지스카르는 한숨 비슷한 것을 쉬고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자 팔다리에 소 름이 돋았다. 진저리를 치며 물러섰지만 이건 피할 수 없었다. 지스카르는 나를 안아 올 렸다. 그리고 시트를 집어 다리에 감은 다음 다시 내려놓았다. “음?” 내가 약간 당황하는 동안 지스카르는 침대 맡에 달린 줄을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근위기사단장인 듯한 기사였다. “가져왔느냐?” “예.” 난 번데기처럼 시트에 말려서 침대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기사가 무엇을 내미는 지 볼 수 없 었다. 절그럭-하는 금속음이 들렸다. 지스카르가 정체불명의 뭔가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이제야 볼 수 있었다. 철제 족쇄였다. 지스카르는 내 발목을 잡고 몸을 낮췄다. 손아귀 힘이 대단히 억세서 나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폐, 폐하. 제가 하겠습니다.” 놈이 내 앞에 허리를 굽힌 모양새라 기사단장이 급히 외쳤다. 지스카르는 아랑곳 않고 발목 에 족쇄를 채웠다. 절그럭. 금속음을 들으며 나는 참담한 기분에 빠졌다. 팔을 묶인 것으로 부족해서 다리까지. 일전엔 잠깐 구속당한 것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아무 생각도 않고 행동했을까. 이렇게 될 줄 몰랐나? 아니 나는 모두 알고 있었 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음에도 그 모든 것을 외면했다. 더러운 노예들 사이에서 완전히 안주했다. 그 시궁창 같은 곳이 무엇이 좋다고. 지스카르는 손짓으로 기사단장을 방에서 내보냈다. 바로 그 자를 시켜 감옥에 보내지 않는 것은 좀 의외였다. 다시 방 안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지스카르는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다. 너를 가르친 자가 누구냐?” 나는 고개를 들어 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내 허리를 누르고 시트를 벗겨냈다. 다시 싸늘해진 다리 사이로 손을 집 어넣어 페니스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터뜨릴 것처럼 굉장히 억세게. 순간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아으으윽!!” “대답해.” 왜 바로 감옥에 보내지 않나 싶었더니 이런 거였나. 내가 이런 일을 대단히 치욕적으로 여 기니까. 나는 이를 부드득 깨물었다. 분노에 불규칙해진 숨이 잇새를 통해 새어나왔다. 그래 네 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라. 하지만 가죽을 벗겨 소금물에 집어넣어도, 발정난 짐승들의 우리 안에 던져놔도 네 놈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는 절대 얻을 수 없을 테니! “크.......흑!!” 겨우 약한 신음만 내고 끝까지 아무 말도 않자 지스카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버티지 마라. 이 외에도 너를 심문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아. 결국 너 자신뿐만 아 니라, 네 어미나 아비, 그 외의 노예들까지 모두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 순간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겨우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놈이 원한다면, 막을 수 없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호흡이 곤란할 만큼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답하고 싶 어도 답할 수가 없어! 지스카르는 그런 나를 예의 표정 없는 얼굴로 응시했다. 문득 내 뺨을 감싸 품에 당겼다. 하지만 나는 거부할 생각조차 못한 채 사실상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 속을 교차해갔다. 어떻게 하지? 무엇을 하면 돼지? 나는 왜 이런 일에 이렇게 동요하지? 그 따위 노예들! 그래도, 나는........! 뜨거운 것이 입술을 덮었다. 몇 번이나 힘껏 빨아 당기고 혀를 강제로 비집어 넣고 휘 저었다. 한참 만에, 지스카르는 떨어졌다. 그는 나를 침대에 누였다. 다리 사이를 죄던 힘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온 몸이 아프다. 거 기가 너무 쓰라려! .......너무 힘이 들었다. 시파카 요새를 함락시킬 때보다도 훨씬 더. “쉬어라.” 모든 감각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낮은 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기절하는 것처럼 잠에 빠졌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있을 무렵 눈을 떴다. 나는 지스카르의 방 침대에 혼자 누워있었다. 옷이 깔끔한 새 것으로 입혀져 있었다. 찝찝한 느낌이 없는 걸 보니 씻기기도 한 것 같 았다. 이런 짓을 할 때까지 계속 골아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음? 팔이........” 뒤늦게 팔이 자유로워진 것을 깨달았다. 거미줄 같은 상처가 나있긴 하지만. 그러나 발목의 족쇄는 그대로 매어져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방 안을 조금 걸어보았다. 사 슬이 짧았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뛸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걸 단 상태로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 혀 깨물고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면 행동해야 했다.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조금씩. 무엇이든 닿는 대로 정보를 모아라. 티끌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틀림없이 형태를 갖춘다. 나는 먼저 방 안을 돌아다니며 주위를 탐색했다. 덜컹! 그때 방문이 열렸다. 티 내지 않고 돌아서 상대를 확인했다. 은발에 큰 체격. 근엄한 얼굴을 한 사내. 기사단장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또 뭐지?” 거만한 말투가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기사단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말했다. “따라오너라.” “어디로?” “황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겁을 상실한 노예의 질문에 기사단장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아마 귀환 시기가 된 것 같았 다. 나 같은 수상한 놈을 그냥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으니 끌고 가겠다는 것이고. 여기서... 떠나게 되나? 또 이런 하찮은 걸로 고민하는군. 절그럭절그럭. 족쇄가 무척 거슬렸다. 꾹 참고 밖으로 나오니 모든 이행은 이미 떠날 채비 가 끝난 듯 하였다. 과연 황제의 일행. 근위 기사들이 위풍당당하게 열을 맞춰대기 중이 었다. 그 중에서 던필이라는 눈에 익은 기사도 발견했다. 그는 남들 몰래 내게 얼굴을 찡 그리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지금 뭐하는 거냐? 애도 아니고. 대열 중간에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도 보였다. 그 화려함으로 보건데 지스카르가 사용 하는 물건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기사단장이 나를 데리고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발을 끌어 걸음을 늦추었다. “뭐.....하는 거냐? 노예는 짐마차에 싣는다는 상식도 모르느냐?” 기사단장은 다시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폐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죽을 목숨을 얼마 더 연명하게 되었으니 감사히 여겨 라.” “마음에.........! 닥치고 당장 짐마차에 집어넣어!” 뭘로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았다. 괜찮은 창녀 하나 발견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내 기분은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나는 강제로 지스카르의 마차 안에 집어넣어졌다. 지스카르는 이미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무슨 서류를 훑어보는 중이었는데, 내가 들어오자 짧게 말했다. “앉아라.” “........” 버티는 것도 꼴이 우스워 자리에 앉았다. 얼마 안 있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나 는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떠나는 것이다. 어머니, 눈물을 터뜨리시는 건 아닐까. 아버지는 걱정하실까. 원래부터 노예들은 자기 의지에 관계없이 여기저기로 팔려 다니는 법이지만. 지스카르가 잠시 서류에서 눈에 떼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얼굴에 닿는 시 선. 나는 인상을 쓰고 놈을 노려봤다. 신경 거슬려.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작정이냐? 지스카르는 다시 서류에 눈을 돌렸다. 사륵사륵 종이 넘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턱을 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멀어질 때까지 창 밖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마차가 멈추어 섰다. 빈첸시오 성을 떠난 지 일주일, 드디어 황성에 도착한 것이다. “폐하.” 예의 눈에 익은 기사단장이 문을 열어주었고 지스카르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나 는 마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보고 지스카르가 손을 뻗었다. “이리 와.” “.........” 나는 옷깃을 움켜쥐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근위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 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곁눈질로 훑으며 눈치를 보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는 아플 만큼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몰상식한 놈........” “다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은 얌전히 뒤를 따라라.” 시선은 전방에 둔 채, 지스카르가 말했다. 기사단장이 근처를 지나는 것을 의식하며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쓸데없이 옷을 더 여몄다. 잠시 후 나는 들끓는 목소리로 말 했다. “그러고 싶으냐? 마차 안에서까지 그러고 싶으냔 말이다.......! 근위 기사들이 바로 곁에서 호위 중이었데, 만약 들키면.......!” “네가 근위기사라면, 무엇 때문에 노예를 마차 안에 태웠다고 생각하겠느냐?”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확실히, 그런 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일부러 확인하지 않아도 뻔하다. 무료한 마차 여행기간 동안 즐기기 위해서 여자를 들이는 것 드문 일도 아니지. 그래, 아주 흔한 일이야!! .......관두자. 적어도 지금은. 나는 일단 주위를 탐색했다. 레브노아드일 때도 엘 파셔의 황성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주위를 압도하는 거대함이었다. 실제로 엘 파셔의 황성이 스트라스보다 다소 면적이 넓다고 들었다. 하지만 웅장함만 강조하고 있어 황성은 대체로 투박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스트라스의 황성은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기둥 하나도 그냥 두지 않고 우아한 조각을 새기고, 풀 한포기 심을 때도 조형미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식한 엘 파셔 놈들. 기둥 굵고 천장만 높으면 다 되는 줄 알지. 황제의 귀환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언뜻 보이는 다섯 명의 어린애들은 지스카르의 아이들일 테고. 가장 선두에 선 붉은 머리카락의 미녀. 내 짐작이 맞다면 그녀는 브뤼셀 황태자비일 것이다. 아니 황후겠군. 그녀는 나보다 1,2살 적어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매우 감격한 표정으로 지스카르에게 다 가갔다. “폐하, 오랜 여정에 힘드시진 않으셨습니까. 시라크, 너도 인사드려야지.” “오, 오셨습니까. 아버님.” 까만 머리카락이 푸른 눈동자. 어쩐지 못되먹은 눈매가 특히 지스카르를 닮았다. 엘 파셔의 1황자인가. 그런데 어깨가 뻣뻣한 것을 보니 황자는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듯 했다. 이유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싸늘하고 무표정한 인간이 찍어 누르는 것처럼 내려다보는데 어떤 아이가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을까. 설상가상, 지스카르는 아들의 안부도 묻지 않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검 수련은 쉬지 않고 있겠지?” “예에......” “호호, 시라크는 언제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폐하. 저녁식사 아직이시죠? 제 가 모시겠습니다. 함께 가세요.” 브뤼셀 황후가 끼어들어 살갑게 말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눈썹하나 까딱 않았다. 그는 부 하 다룰 때와 똑같이 명령조로 말했다. “오늘은 그냥 쉴 생각이니 시라크와 라비오네를 데리고 들어가시오. 크리스티안, 뒤는 그대 에게 맡기겠다.” 크리스티안, 은발의 근위기사단장이 정확히 70도로 허리를 굽혔다. 지스카르는 그대로 사람 들을 지나쳤다. 나는 일단 지스카르의 뒤를 쫓아갔다. 언뜻 브뤼셀 황후가 주먹을 그러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자식 정도는 소중히 다루는 게 어때.” 지스카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냥 좀 전처럼 없는 사람 마냥 조용히 놈의 뒤 를 따랐다. 황제궁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근처 지리를 머리 속에 철저히 입력시켰다. 기본적으로 용도 가 같기 때문인가. 스트라스의 황성과 구조가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언제까지 따라가야 해?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스카르는 끝까지 나를 따로 다른 자에게 맡기지 않았다. 결국 나는 놈과 함께 침실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식사는 여기서 하겠다. 두 사람 분으로 가져와라.” “예.” 시녀들이 하명을 받고 소리 없이 물러났다. 나는 방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까 본 시라크 라는 황자처럼 굳어 있었다. 무엇보다 침실이라는 장소가 나쁘다. 차라리 뼈를 발라내는 고문이라면 견디겠는데, ‘그것’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수차례 그 일을 겪었지만 나는 여전히, 조금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시간이 걸릴 테니 앉아라.” 지스카르는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 간단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비치한 책상에 앉았 다. 정체불명의 서류 따위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 나는 거기서 멀찍이 떨어진 티 테이블에 앉았다. 자꾸 손을 떨려서 심호흡을 했다. 안절부절하지 마라. 레브노아드! 네 의지는 그것 밖에 안 되느냐? 진실여부야 어찌됐던 나는 준 암살자급으로 의심받고 있다. 그런데 지스카르는 나를 바로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감옥에 처넣어줬으면 싶었지만, 어쨌든 나는 상당히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아니, 이건 굉장한 특별대우다. 우선 반말을 하고 욕까지 찍찍 퍼붓는 것을 용납해주고 있다. 내가 노예고 놈이 황제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면 이런 파격은 다시없었다. 더욱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도 제대로 된 심문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곧장 침실로 데려온 것을 보면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의사가 없다는 뜻. 그 모든 것을 보류해둘 만큼,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내 이 몸뚱아리가. 다시없는 굴욕! 그러나 틀림없는 행운이었다. 이로서 나는 다시 회생할 시간을 얻었으므로. ..............그리고 빈첸시오 성의 미천한 노예들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음식이 들어왔다. 시녀들은 티 테이블 앞에 식사를 차렸다. 황제의 식사치고 요리들이 꽤 소박했다. 지스카르는 서류를 내려놓고 내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놈이 잔을 드는 걸 보며, 나도 스푼을 들었다. 먼저 스프를 한 입 맛보았는데........ 뭐 이렇게 싱거워? 스프를 옆으로 내밀자 시녀가 뭘 하는지 약간 늦게 그릇을 받았다. 주방장뿐만 아니라 시녀 까지, 엘 파셔는 고용인을 아주 너그럽게 포용해주는군.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새우를 그릇 위로 가져왔다. 크기가 콩만 해서 껍질이 잘 벗겨지지도 않는다. 웬만하면 남부해협에서 해산물 좀 들여오는 게 어때.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이것저것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지스카르가 나이프를 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끼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식사 예법에 익숙하군.” 나는 그제야 자신이 노예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나이프를 한바퀴 돌리며 싱긋 웃었다.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암살은 무릇 높으신 분들만 당하는 일이지. 암살 대상에게 접 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 정도 교양은 필수일 지도 몰라.” “..........” 지스카르는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옆에 서있던 하녀들이 더 당황했다. 놈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에 들어 갔다. 나는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노예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사정을 이야기한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모든 진실은 영원히 암흑에 묻힌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직 자신을 온연히 제어할 수 없다. 나는 지극히 충동적이고 생각이 짧 다. 평범한 노예를 연기하고 싶어도, 계속 돌발행동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이상한 놈이 되어주겠다. 거침없이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선보여주지. 어떻게 이런 꼬마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고민해라. 생각할수록, 조사할수록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될 테니. 그것은 미래에 내게 위협이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어차피 일은 시작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시녀들이 그릇을 전부 내어갔다. 별 대화 없이 마주 보고 앉아 시간을 보냈 다. 창을 내다보니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지스카르는 내 몸을 번쩍 들어서 침대로 향했다. 순간 모든 평정이 단 숨에 무너졌다. “자, 잠깐..........!” 지스카르는 발버둥치는 나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목에 입술을 댔다. 당연히 피하려고 했지만 지스카르가 얼굴을 붙들었다. 강하게 빨아 당기는 느낌. “윽......! 하, 하지 마!” 손으로 어깨를 밀어냈으나 내 힘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 면서 쇄골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뜨거운 혀의 감촉을 느꼈다. 나는 기겁을 했다. 저절로 고함이 튀어나갔다. “네, 네 놈 머리 속에는 그것 밖에 안 들어 있느냐?” 지스카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추를 풀어 셔츠를 완전히 젖혀내고 어느새 가슴팍까지 내려 왔다. 주위를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유두 끝을 이로 가볍게 깨물었다. 흠칫 온 몸이 퉁겨 올랐고, 뒤이어 가늘게 경련이 찾아왔다. 아니, 그게 아니다. 놈의 머리에 그것 밖에 없는 게 아니라, 내 존재가치가 그것뿐인 것이 다! 나는 이를 빠드득 깨물고 소리를 삼켰다. 바들바들 떨며 억지로 감각을 외면했다. 지스카르는 집요하게 유두를 혀로 핥고 이로 괴롭혔다. 그러는 도중 다른 손이 등을 타고 엉덩이 계곡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가락 하나가 항문을 탐색하다가 안으로 밀고 들어 왔다. “으.........!!” 나는 긴장을 참느라 어깨가 뻐근할 만큼 몸을 바짝 웅크렸다. 지스카르가 고개를 들어 귓가 에다 말했다. “이제 상처는 거의 나은 것 같군.” 무슨 뜻인지 나는 금세 이해하고 말았다. 지스카르가 내 몸을 일으켜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한 손으로 허리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하면서 서랍 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약간 비린 듯한 향유 냄새가 난다. 그 것을 지스카르는 내 등 위에 쏟아 부었다. 차가움에 온 몸에 소름이 파르르 돋았다. 지스카르의 손이 등 전체를 어루만지면서 향유를 발라갔다. 나는 시트를 그러쥐고 나름대로 인내해보았다. 그러나 손이 꼬리뼈를 향하는 순간 결국 몸을 비틀어 일으키며 주먹을 휘둘렀다. “이거 치워!!” 물론 주먹은 허무하게 막혔다. 지스카르는 더 이상 내 앞에서 방심하지 않았다. 발목이 족 쇄로 묶여있었기 때문인지 지스카르는 팔을 묶으려하진 않았다. 그는 주먹을 놓아주고 다시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향유를 발라 미끈거리는 손이었다. 그것이 단번에 두 개나 항문 안으로 들어갔다. “헉!” 나는 지스카르의 팔을 붙들었다. 아무런 소용도 없었지만.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안쪽 깊은 곳으로 향해갔다. 괴롭고, 견디기 힘들만큼 부끄러웠다. 어 떻게, 어떻게 하면........! 나는 시트를 끌어 쥐었다. 고개를 어떻게 둬야 할지 몰라 뻣뻣하게 위로 쳐들고 있었다. “매번 그렇게 긴장하는군.” 지스카르는 나지막히 숨을 내쉬고 팔로 목을 안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꽉 죄일 것처럼 머리 를 껴안았다. 그동안에도 손가락은 깊이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길 반복했다. 끈적거리는 것을 끊임없이 안 쪽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훑어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참았다. 억지로 딴 생각을 떠 올려보며 모든 감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문득 지스카르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레이.” “하윽?!” 지스카르가 처음 내 이름을 불렀다는데 놀라고 있는 순간, 손가락이 안쪽의 예의 민감한 부 분을 깊이 긁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허를 찔려 나는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이거 노린 거지?! 나는 헐떡거리면서, 한편으로 대단히 분개했다. “헉헉..... 너, 네놈........!” “가만히....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상처 입히기 싫다는 놈이 거길 긁어? 그 순간 다시 손가락이 안을 휘저었다. 나는 다시 신음을 질렀다. 전엔 잠시 건드리고 빠지 더니 이번엔 작정을 한 듯 집요하게 그 부분만 괴롭히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온 몸이 그 감각에 지배당했다. “흐으윽! 으윽! 아, 아아아! 아으! 하,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제발.... 제발!!” 갑자기, 거짓말처럼 손가락은 쑥 빠져나왔다. 나는 순간 고개를 푹 떨궜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차르륵. 정신없이 헐떡이다 뭔가 풀어내는 소리를 들었다. 몽롱한 눈을 돌려니 지스카르가 옷을 벗 고 있었다. 순간 공포가 수배로 급증했다. 처음 놈의 것을 받아들일 때 얼마나 고통스러 웠는지,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생생하게 머리 속으로 지나갔다. 그때 허리를 붙잡는 손이 느껴졌다. 뜨거운 것이 입구에 닿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너무 크 다. 무서울 정도로. “.....으....윽...........” 난 시트를 꼭 쥐고 엎드렸다. 몸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등 뒤로 지스카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 “부, 부르지 마.......” 어색하고 기분 나빠서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때 지스카르의 페니스가 천천히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아픈가?” “아, 아..........” 아프다! 아파! 아프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이 몸뚱이는 아직 13살이란 말이다! 정말로, 놈의 것으로 완전히 꽉 차버리는 느낌. 일전과는 전혀 다른. 그래. 확실히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지만.......! 결합된 부분에 차갑고 끈적한 것이 흘러내렸다. 지스카르가 향유를 더 부은 것 같았다. 놈 은 급하게 오지 않고 아주, 아주 천천히 들어왔다. “흑... 하아, 흑............” “그대로.........” 굉장히 공을 들여서 지스카르는 끝까지 삽입하는데 성공했다. 정말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 아한다는 것을 나도 이제는 느낄 수 있었다. “견딜 수 있겠나?” “하아하아........” 나는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가까스로 숨만 몰아쉬었다.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 다. 지스카르가 고개를 숙여 내 목 위에 깊이 입을 맞췄다. 나는 이미 온 몸이 불덩어리 처럼 달아있었지만, 지스카르의 숨도 대단히 뜨거웠다. 하반신을 단단하게 채우고 있던 지스카르의 것이 움직였다. 역시 그 상태가 아슬아슬한 수 준이었다. 나는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소리 질렀다. “지스.... 카르! 지스카르!! 움직이지 마! 지스카르!” “힘을 주지 마라. 계속 버티면 상처가 날 테니.” “놔..... 놔....! 하아하아. 무리인.......나는.....” 힘을 주고 싶어서 준다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내 몸은 이미 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 었으니까. 지스카르도 다소 견디기 힘든 것처럼 약간 숨을 길게 쉬었다. 그러나 계속 허 리를 움직였다. 지스카르의 움직임에 따라 내 몸도 아래로 딸려갔다가 위로 끌어올려졌다. “지, 지스카르! 지스카르!” 아픈데! 아픈데, 확실히 처음 했을 때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힘들다. 견디기 힘든 건 똑같았다. 하반신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서, 피가 전부 쏠리는 느낌이 무서울 정도라서. “지스카르!! 그만!” 내 외침에 대답하는 것처럼 지스카르가 등 뒤에서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앞쪽 을 더듬어 내 페니스를 찾아냈다. 내 것은 이미 단단히 서있었다. 지스카르는 막바지로 인도하는 것처럼 중심을 쥐고 바짝 당겼다. “으으, 흐으으! 지스카르....!” “좀 더.......” 지스카르가 내 귓바퀴를 지끈 깨물었다. 낮은 톤의 음성과 조금 불규칙한 숨소리가 함께 들 려왔다. “좀 더 불러.......!” “아아아, 아아악!! 지스카르! 지스.....카르!”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의 절정! 뜨거운 지스카르의 것이 안 쪽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도 완전 히 막바지에 도달했으나 지스카르가 페니스의 입구를 아플 만큼 강하게 틀어쥐고 있어서 아직 사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미, 미치겠어! 이런 식이라니......!! 그때 놀란 것처럼 지스카르의 손이 확 떨어져나갔다. 나는 겨우 신음을 지르며 정액을 밖으 로 내보냈다. 잠시 후 지스카르는 꼭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 완전히 놈답지 않은 짓 이지만 왠지 느낌이 그랬다.) 내 페니스를 손으로 쓸어주며 나머지를 전부 사정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나도 안 고마웠다. 지스카르는 힘을 잃은 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그만 쉬어라.........” 언제나 고저 없는 무감각한 목소리. 하지만 숨결이 약하게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시트를 끌어당겨 내 몸에 덮어주고, 지스카르 자신도 그 옆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거 아주 짜증나는 포지션 아닌가. 내가 비실대면서도 옆으로 떨어지려고 하자 지스카르가 나를 붙들었다. 손을 허리 앞으로 뻗어 페니스를 쥐었다. “아직 힘이 남아 있느냐?” “윽..... 으............” 나는 도망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르르 페니스를 억압하던 손도 물러났다. 나는 마지막 저항으로 등을 돌린 채 누웠다. 하지만 여전히 등 쪽에서 따뜻한 살의 감촉이 전 해진다. 힘들다. 역시... 좀 쉬고 싶다........ 금방 눈앞이 가물거렸다. 어쩐지 요즘 너무 쉽게 잠이 드는 듯. 나는 어느새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실물을 그대로 옮겨 그리지 않은 걸 보면 꼬르디오 계열 그림은 아니고.... 그림자 처리방 식을 보니 역시 가스팔 계열인가? 황제의 침소에 붙은 그림이니 혹 거장 가스팔이 직접 그린 것?” 벽에 걸린 사과 그림을 노려보며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절그럭대는 족쇄소리가 신경 거슬려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멍한 기분. 엿새째, 아니 이레째인가? 지스카르의 침실에 눌러 붙어있게 된 지가. 음식이나 옷 모든 것 은 매우 풍족하게 주어졌지만 나는 이곳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업무를 마친 지스카르가 되돌아왔고, 어김없이 그 짓! 계속 이 패턴이 지속되니 뇌가 굳어가는 것 같았다. 혹여 그걸 노리고 일부러 한 짓은 아닌 지, 나는 현재 그 가능성을 대단히 심각하게 타진해보는 중이다. “으으음.....!” 한동안 더 끙끙거리던 나는 홧김에 침대 맡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마다 이것으로 호출하면 시녀들이 와서 시중을 들어주었다. 이번에도 재깍 시녀가 들어와 공손히 인사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입 안에 칼칼해서......... 브리튼 172년 산 앙꼴주. 보관중인 것이 있느냐?” 시녀는 잠깐 공손을 내팽개치고 홱 고개를 들었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랗게 떠져 있 었다. “그, 그게 얼마나 구하기 힘든 술인데!” “없다고? 엘 파셔는 황실창고가 아주 부실하군.” “.......! 제국에 독성이 약한 앙꼴주를 즐기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해두지 않았던 것 뿐입니다!” “브리튼 200년산은?” 물론 그것도 대단히 귀한 술이다. 물량이 너무 없어서 아무리 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종류 의-. 원래 엘 파셔는 앙꼴주를 즐겨 마시지도 않고 그냥 구색으로 갖춰놓은 것일 테니 황 제의 술 창고에도 기껏해야 한두 병뿐이리라. 시녀의 고뇌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녀는 굉장히 망설이면서 대답했다. “있....습니다.” “가져와.” 시녀는 죽 쑨 상을 하고 물러났다. 이내 브리튼 200년 산 앙꼴주가 내 앞에 놓였다. 시녀는 나갈 때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좀 유쾌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잔에 밑바닥만 약간 채울 만큼 술을 담아 마셨다. 알 콜은 거의 없고, 과실주처럼 달콤한 느낌. 과거에 나는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가끔씩 앙 꼴주만 입에 대곤 했다. 술에 취하는 것이 싫었다. 취한 동안 누가 뒤통수에 검을 꽂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다시 줄을 잡아당겼다. 시녀가 매우 불안한 얼굴로 들어왔고 나 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탁자 위에는 파티장을 방불케 할 만큼 엄청난 양의 음식이 올라왔다. 나는 대부분 끄트머리만 약간씩 맛보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렸다. “밍숭맹숭하군. 소금은 친 건가?” 트집이 아니라 정말로 싱거워서 그랬다. 이곳의 모든 음식들은 전부 내 입맛에 맞지 않았 다. 스트라스인은 향신료를 많아 써서 다양한 맛을 즐기는 반면, 엘 파셔인들은 음식을 싱겁게 대충 만들어 막 먹는 편이었다. 사실 난 전혀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노예로 태어 나 13년 동안 멀건 죽에 딱딱한 빵만 먹고도 불평 한번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심미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대량의 음식이 올라왔다. 그 중에서 겨우 입맛에 맞는 것을 두어 가지 찾았을 즈 음이었다. 시녀장까지 총출동해서 주위가 다소 분주했는데,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지스카르가 잠시 침실에 들른 것이다. 그는 이 난장판을 말없이 가만히 둘 러보았다. “폐, 폐하!” 시녀들은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외쳤다. 상황을 모두 파악한 지 스카르가 나를 향해 말했다. “심심한 모양이군.” “......정확히 맞췄다.” 지스카르는 사람들에게 물러나라고 명했다. 그가 이 난장판에 대해 별 언급을 않는 것에 시 녀들은 대단히 놀란 것 같았다. 지스카르는 맞은 편 소파에 와서 앉았다. “시종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 텐데?” “.........” 무고한 시종들을 괴롭히며 화풀이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괴었다. 레브노아드, 타락했구나. 아니면 레이, 어린애다운 치기라는 거냐? 내가 별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지스카르는 여분의 포크로 타르트를 집어먹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긴 왠일이지?” “한가하더군.” 그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서류를 폈다. 그래, 황제가 그렇게 만만한 자리는 아니지. 요행 히 업무를 일찍 끝냈어도 자잘한 것들이 넘쳐나고 있을 것이다. 아랫사람에게 맡겨버릴 수도 있지만 전부다 맡겨버리자니 또 찝찝한 업무 같은 거. 그런데 한가한데 왜 여길 와? 토끼 같은 새끼들이나 보러갈 것이지. “폐하.”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락이 떨어지자 근위기사가 머리를 깊이 숙이고 말했다. “피안델 대공께서 급한 용무가 있으시다고 합니다.” 원래 황제는 아~주 바쁜 사람이다. 지스카르는 보고를 듣고도 그 자세로 약 3초 정도 더 앉아 있었다. 일체에 허튼 동작이 없는 놈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행동의 기저에 깔린 귀찮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매우, 대단히 유쾌해서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다녀오십시오. 황제 폐하.” 지스카르는 자리에서 일어서 읽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녀오지.” “.........” 내 얼굴 만면에 가득하던 미소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찾아갈 것이 있으니 금방 돌아 오겠다는 뜻이었다. 지스카르가 나가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의미 없이 음식을 몇 개 더 주워 먹다가 방 안 을 돌아다녔다. 문득 지스카르가 놓고 간 서류가 눈에 띄었다. 간식 먹으면서 대충 훑어볼 서류라면 대단한 것일 리가 없다. 그래도 흥미삼아 한번 읽어보았다. “클레리몬 백작, 빙켄 자작 간의 조세 조정 건.” 계속 읽다가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 이런 걸로 쌈질을 할 만큼 세상이 평화롭 다는 뜻이고. “다음은 내부 세역 계산이 전부 엉터리라는 것이고. 황제 앞에 내미는 문서를 이따위로 만 들어? 네 놈들 모가지다.” 나는 펜을 뽑아들었다. 줄을 북 그어주려다가 문득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나는 펜으로 줄을 긋고 표기를 했다. 글자 같은 건 실로 오랜만에 써보는데,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손에 착 달라붙는 것처럼 예전 의 감각이 그대로 살아났다. 왠지, 굳어가던 뇌가 확 눈을 뜬 기분이다. 순식간에 조세 조정 건을 정리하고, 다음 서류를 펼쳤다. 이번 건은 엘 파셔의 체계가 다소 생소해서 약간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어느 사이 그 서류를 처리하는데 푹 빠져버렸던 것 같다. 덜컥. 문 열리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지스카르가 나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왔 다. 머리 위에서 내가 마음대로 끄적여 놓은 종이들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암살단체에서는 서류 정리하는 법도 가르치는 모양이군.” “..........” 나는 아무 말도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지스카르가 내 어깨를 눌렀다. 나를 의자에 다시 앉혀놓고 지스카르는 소파로 가 앉았다. “.....계속 해라.”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어느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보겠다는 뜻과 같았다. 내가 좋아서 마음대로 시작한 것이지만, 그런 의도에 협조해주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 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지스카르는 내가 주문한 앙꼴주를 잔에 부어 한 모금 머금었다. 그는 갑자기 잔을 들어 앙 꼴주를 바라보았다. 안면근육 마비가 걸린 그 얼굴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혹시 난생처음 마셔본 건가? 한참 침묵을 지키던 지스카르가 입을 뗐다. “......말을 따른다면 오늘 밤에는 안지 않겠다.” “........!!”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반응했다. 솔직히 좋다고 냉큼 서류정리를 하는 것도 꼴이 우스웠지 만........ 역시 거절하기 힘든 제안임은 사실이다. 서류 처리하는 것도 솔직히 즐거웠고. 결국 나는 펜을 들었다. 내가 서류를 처리하는 동안에도 지스카르는 계속 내 얼굴을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저 놈이 내 얼굴 관찰하는 버릇 비슷한 것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좀 신경이 쓰였다. 설마 이제 와서 제안 철회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지스카르는 시선을 거뒀고, 나는 완전히 일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루가 천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 황성에 도착한 이후 레이의 일상. 아직은 평화(????) 여러분은 엘 파셔에 대한 레이군의 다분히 편파적인 시각을 몇 군데 찾아보실 수 있을 것입 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시면 골룸합니다? 희미한 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아침이 되었음을 알고 나는 몸을 뒤척이며 생각 없 이 옆을 보았다. 지스카르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크게 흔들렸다. 지스카르도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는 나른하게 일어나면서 말 했다. “항상 일찍 일어나는군.” 침대시트가 흘러내리며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지스카르의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악! 내 눈!! 꼭두새벽부터 저런 걸 보고 계속 살아야 하나? 지스카르는 확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서류 정리를 시키는 대신 나를 안지 않기로 한 약속 말이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꼬박꼬박 자기 침실에서 잠을 잤고, 나는 매일 밤 놈과 같은 침대에서 극도로 불편한 숙면을 취해야 했다. 나는 치를 떨면서 말했다. “잠은 부인과 함께 자라. 황후와 잠자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17세 이상 용모 단정한 여 성을 첩으로 삼아!” 지스카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벽에 대고 소 리치기는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지스카르는 급한 일이 있을 때를 제하고는 항상 아침식사까지 이곳에서 해결하고 나갔다. 시녀들은 이제 아침이 되면 자연스럽게 2인분의 음식을 침실에 차려놓았다. 나는 마지막 으로 벽을 향해 한마디만 더 했다. “...아침식사 정도는 가족과 해라.” “앉아라.” 지스카르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내키지 않았지만 놈이 말하는 대로 가서 앉았다. 짬을 내서 훑어보던 서류를 손에 든 채로. 지스카르가 다시 말했다. “그건 내려놓고.” 똑똑 끊어지는 짧은 명령조에 갑자기 속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일일이 열 받지 마라, 레브노아드. 밤새 시달리지 않게 된 것이 어디냐. 깊이 심호흡을 하는 동안 나는 어 느새 여유를 되찾았다. 나는 지스카르의 얼굴 앞에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후우, 식탁 앞에서 서류 보기. 네가 자주하던 짓이라는 거 아느냐? 원래 애들은 어른이 하 는 걸 보고 배우는 법이지.” 지스카르는 눈앞에서 팔랑대는 서류를 빼앗아갔다. “아직 서류를 전부 해결하지 못했나 보지? 일처리가 생각만큼 능숙하진 못하군.” “심심해서 지역별로 총 세금 내역을 분류해봤는데 어때?” 지스카르는 뒷장에 정리된 표들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서류를 식탁까지 가져온 거냐?” “그게 네 추리력의 한계인가?” “그러면 이 서류는 왜 식탁 앞에까지 들고 왔느냐?” “눈에 띄는 이름이 있어서. 바룸 백작. 일처리가 아주 깔끔해. 감각도 좋고. 필시 세심한 성 격일 것이다. 이런 인간이 밑에 있으면 일거리가 반으로 줄어들지. 네 사람인가?” “.......” 갑자기 지스카르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군! 사람을 보는 눈이 그렇게 없나? 아니 네가 그 정도로 무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싶 진 않고, 무엇이 그렇게 바쁘지? 나라면 당장에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눈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싱긋 여유로 시선을 받아넘기고 청새치 살을 발라 입 안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지지리 맛도 없다. 스 트라스에서 주방장을 데려와 요리하는 법을 가르치든지 해야지 말이야. 그때 지스카르가 말했다. “......바룸 백작은 피안델 대공의 사람이다. 그를 내 수하로 들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문 제가 발생할 것이다.” “분란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라고 생각지 않나? 오, 샐러드는 맛이 제법 괜찮군.” “정국은 안정에 들어섰다. 인재가 절실하게 필요하지는 않아. 바룸 백작 하나를 얻기 위해 피안델 대공과 대립할 가치는 없다.” 나는 문득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갑자기 기분이 묘했다. “......휴전협정. 평화의 시대라는 거군.” 내가 죽기 직전에 성사시켰던 휴전협정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노예숙소에 콕 처박혀 세상 돌아가는 것에 완전히 무지했던 나도 그건 알고 있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든다. 만약 휴전협정이 깨져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면, 내가 지난 13년 동안 유유자적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을 리 없다. “평화로운 시기는 많은 인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웅호걸도 난세에나 존재하는 법.” 지스카르가 말했다. 나는 포크를 한 바퀴 돌리다가 샐러드 접시 가운데에 쿡 꽂았다. “그래도 나라면 바룸 백작을 손에 넣는다. 직접 만나봐야 알겠으나, 내 직감에 그 자는 알 짜배기야. 여유 있을 때 더욱 내 것으로 만들어 놔야지. 안정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인재를 지나치게 탐한 나머지, 기껏 유지되고 있던 안정을 스스로의 손으로 깨버릴 지도 모르지.” 지스카르와 나 사이에 따가운 시선이 교차했다. 지스카르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샐러드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짜다.” “아, 도대체 음식 맛을 모른다니까!”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지스카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황제의 결제 를 기다리는 안건이 벌써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잘 가고, 이왕이면 돌아오지 마라?” 나는 웃는 낯으로 놈을 전송했다. 지스카르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지그시 보다가 돌 아섰다. 방문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지스카르!” 지스카르가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라 난 약간 머쓱해졌다. 그러나 이왕 불러 세운 것, 나는 지스카르에게 요구했다. “밖에 나갈 수 있게 해줘.” “허락할 수 없다.” 대답은 마치 기다린 것처럼 즉각 떨어졌다. 게다가 묘하게 강경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예상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대답이었다. “......알았다.” 왜 갑자기 이런 멍청한 소리를 했을까. 아, 요즘엔 밤에 시달리는 일도 없고 그냥 자연스럽 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치 지스카르와 대등한 입장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을 한 모양이다. 레이, 요 생각 없는 꼬맹아. 이런다고 녀석이 부탁을 들어줄 리 없지 않느냐. 나는 남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탓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출을 허락한다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스카르가 뒤를 이어 말했다. “어떻게 그 지식을 얻었는지 대답하겠느냐?” “나는 대답할 것이 없다. 그리고 협상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 극히 사소한 자유를 허락하 는 대가로 상대가 가진 최대의 비밀을 얻으려고 해?” 나는 한심하게 놈을 쳐다봤다. 하지만 지스카르도 애초에 큰 기대를 걸고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제안을 하지. 오늘밤 스스로 다리를 벌려 내게 안겨라. 그리하면 감시인을 붙여 근방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허하겠다.” “뭐라고!?” 목소리 끝이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평정이 와르르 무너진 것도 그때 다. 나는 어린애처럼 (아니 어린애답게?) 방방 뛰었다. “발정난 개 같은 놈이! 엘 파셔를 통째로 갖다 바쳐봐라! 네 말에 따르는가!!” “그것으로 됐다.” 지스카르는 가볍게 웃고 (웃었다!) 문고리를 틀었다. 애초에 거절하게 만들려고 한 말이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이 열리기 직전 소리쳤다. “잠시만!” 지스카르는 다시 멈춰 섰다. 나는 약간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 봐라. 이건 기회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다. 나는 언제까지 방 안에 갇혀 있게 될까. 죽을 때까지? 아니, 지스카르가 이 놀이를 지겹다고 느낄 때쯤이겠지.........! “하....겠다.....” 그 정도 모욕쯤은 이제 인내할 줄 알아라. 한두 번 놈에게 당한 것도 아니잖은가. 이제 와 서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오히려 지스카르는 실언을 한 것이다. 기회를 이 용해! “밖에.... 나갈 수 있게 허락해준다면... 네가 말하는 대로 하겠다.” 나는 가까스로 모멸감을 삼키며 말했다.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지스카르는 대제국의 황제 고, 나는 잠자리 용도의 노예일 뿐이다. 새삼스럽게 발목에 매인 족쇄가 거치적거렸다. 지스카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말도 없고 표정까지 없었으나 어쩐지 거절할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전에 지스카르가 문을 열고 사람을 불러들였다. ---------------------------------------- 너무 길어서 2화로 자릅니다~ (이건 안 봐도 되요) : 재미없는 설정놀이 시간~★ <여러분은 엘 파셔에 대한 레이군의 다분히 편파적인 시각을 몇 군데 찾아보실 수 있을 것 입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시면 골룸합니다?> 지난 화에 제가 남긴 후기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는 분이 왜 이렇게 많은지, 흐... ㅠ_ㅠ 그럼 지금부터 설명에 들어갑니다. ‘엘 파셔에 대한, 레이군의 편파적인 시각’은 두 군데 존재합니다. 1. 무식한 엘 파셔의 놈들. 기둥 굵고 천장만 높으면 다 되는 줄 알지. (3화 초반) →스트라스는 여성적이고 미려한 건축문화를 가졌고, 엘 파셔는 남성적이고 웅장한 건축문 화를 가졌습니다. 레이군은 엘 파셔의 거대한 황성을 보고 기둥 굵고 천장만 높다고 악평 합니다. 그리고 스트라스 황성 면적이 좁은 건 은근슬쩍 넘어갑니다. 레이군은 저런 놈입니다 . 여러분은 이 녀석 말만 듣고 엘 파셔의 건축기술이 뒤떨어진다고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2. 스트라스인은 향신료를 많이 써서 다양한 맛을 즐기는 반면, 엘 파셔인들은 음식을 싱겁게 대충 만들어 막 먹는 편이었다. (3화 후반) →스트라스 사람들은 가능한 향신료를 전부 써서 맵고 짜게 먹습니다. 엘 파셔 사람들은 음 식을 싱겁게 먹는 편입니다. 레이군은 스트라스는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가졌다고 자랑하며, 엘 파셔는 다 싱겁고 아무렇게나 만든다고 악평합니다. 여러분, 엘 파셔의 음식문화가 한 참 미개하다고 생각하시면 골룸해요. 위는 별 쓸데없는 것일 수도 있고, 약간 의미 있는 언급일 수도 있고....... 그냥 재미삼아 후 기에 살짝 적었는데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듯. 그건 관계없지만 제 말의 의도를 다른 쪽으로 오해하는 분이 속출 ㅠ_ㅠ; 아래는 아무래도 관계없는 참고부록-☆ 3. 엘 파셔의 여자들은 왜 이렇게 사나운지 몰라. (1화 초반) →스트라스 여인들은 사회활동이 거의 없습니다. 사근사근하며 소극적이죠. 곱게 자란 편이 라 얼굴이 뽀얗고 피부가 곱습니다. 그래서인지 스트라스에는 미인이 많다는 속설이 있습 니다. 엘 파셔 여인들은 ‘비교적(비교적!)’ 사회활동이 활발합니다. 큰 목소리로 외치고 밖 을 뛰어다니기도 합니다. 엘 파셔에는 소수지만 여자 기사도 존재합니다. 4. 무식한 엘 파셔 놈들 (3화 초반) →스트라스 인과 엘 파셔 인은 상대를 칭할 때 주로 이하의 말을 사용합니다. “무식한 엘 파셔 놈들”, “말만 많은 스트라스 놈들” “엘 파셔의 야만인”, “스트라스의 겁쟁이” 만민공통어인 욕설은 언제나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 13살짜리 어린애를 감시를 위해 무려 다섯 명의 기사가 동원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중 에 낯익은 근위기사단장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이름이 크리스... 던가.” “크리스티안이다.” “그건 됐고, 삼가 심심한 동정을 표하마. 이런 짓이나 하자고 기사단장이 된 건 아닐 텐데 말이다.” 크리스는 더 이상 내 언행에 당황하거나 얼을 빼진 않았다. 대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저 정도면 좀 고지식하게 보여도 잘 생긴 얼굴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기사 중엔 낯익은 자가 한 사람 더 끼어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기사 던필, 그 자도 연신 날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는데, 크리스만큼 잘 생기지 않아서 그런지 별로 아쉽진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는 실로 오랜만에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기세 좋게 나온 지 불 과 5분 만에 인기절정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길가다 마주치는 시종, 시녀, 관리 기타 등등 모든 이들이 아닌척하면서 나를 한번씩 힐끔거렸다. 원인은 이 족쇄. 절그럭절그럭. 복도는 돌을 깎아 만든 바닥이기 때문에 족쇄가 끌릴 때마다 더욱 소리가 컸다. 이래서야 누가 쳐다봐도 할 말이 없지. 게다가 필시, 내 소문도 어느 정도 퍼졌을 것이고. 황제가 하루도 빠짐없이 찾는 상대니까 상상보다 훨씬 더 유명할 지도. 나는 애써 불쾌함을 털고 움직였다. 황제궁을 벗어나는데도 기사들은 나를 저지하지 않았 다. 생각보다 내게 허락된 행동반경은 넓었다. 설마 황성을 빠져나가는 것까지 허락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 걷고 있는데 갑자기 크리스가 내 앞 을 가로막았다. “이 이상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안된다고?” 내 행동반경은 중앙정원의 우측까지인가. 지스카르, 쩨쩨한 놈!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멀찍 이 떨어진 건물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유난히 높은 탑. 내 예상이 맞다면 저것이 마탑일 것이다. 구경을 핑계로 마탑에 들어가 운 좋게 마정석이라도 하나 슬쩍할 수 있다면 상황 은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 텐데! 마력이 담긴 보석을 ‘마정석’이라고 말한다. 마법사는 마정석에서 마력을 추출하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마정석은 매장량이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 게다가 마정석은 내재된 마력을 전부 사용하고 나면 평범한 보석으로 되돌아간다. 한마디로 소모품이라는 것이다. 이쯤 말하면 알겠지만 마정석은 어마어마한 초고가품이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돌아섰다. 대신 행동이 자유로운 지역을 거의 하루 반나절 동안 샅샅 이 조사하면서 다녔다. 그리고 늦은 오후 즈음에 우연히 연무장을 발견했다. 나는 스스로 마법사를 자처했지만 검에도 상당히 조예가 있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기사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감회가 새로워졌다. 나는 연무장을 가로질러 지나가며 기사들을 하 나씩 관찰했다. 과연 황실 기사단. 수준은 높은 편이군. 다들 자세가 안정되어 있고. 군기가 잘 잡혔다 할 순 없지만 전시도 아니고 이 정도면 합격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문득 연무장 끝에 매달린 깃발을 발견했다. 눈에 익은 문장 같 은....... “흑철(黑鐵) 기사단!!” 나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깃발의 의미를 기억해낸 순간 모든 평가는 뒤집어졌다. 나는 웃었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기가 배어나왔다. 이게 엘 파셔 최강이라 불리는 흑철 기사단이란 말이지!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는 거야?” 던필이 못마땅하게 물었다.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이 자는 꽤 사고뭉치인 듯, 상관인 크리 스가 쓸데없는 말 말라고 눈치를 주는데도 아랑곳 않았다. 나는 대답해주기로 했다. 대답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엘 파셔 최강의 흑철 기사단이 겨우 이것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스트라스의 황태자군 직속 기사로 병대를 구성한다면 단 서른 기만으로 능히 이들을 굴복시 킬 것이라 장담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정말 이런 것이 흑철 기사단? 이런 놈들이면 나도 검으로 상대할 수 있겠다! “.........좋아.” 마음을 결정한 나는 즉시 목소리를 돋워 외쳤다. “흑철 기사단이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말이다!” “하아? 이 애 새끼가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지껄여!!” 과연 흑철 기사 중 발끈하고 나서는 자가 있었다. 그는 위협이겠지만 검까지 서겅 뽑아들었 다. 수련하던 다른 자들도 하나둘씩 이쪽을 주목했다. 그때 크리스가 슥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보호하듯이 앞으로 흑철 기사단과 내 사이 를 가로막은 것이다. 조금이지만 의외였다. 지스카르가 이런 짓도 시킨 건가? 근위기사단장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크리스가 나서자 흑철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쑥 덕거렸다. 연무장 전체가 약간 술렁거렸다. 분명 이 시건방진 꼬맹이의 정체에 대하여 이 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금방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내 소문이 생각보다 널 리 퍼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제 흑철 기사들은 불만에 가득한 표정만 지을 뿐 함부로 검을 뽑아 들지 못했다. 내 뒤에 지스카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크리스 경. 별일 없을 테니 비켜주지 않겠나? 나도 죽고 싶지는 않아.” 크리스는 나를 저지하지는 않았으나 미간에 골을 잔뜩 세웠다. 저러다 젊은 나이에 주름 생 기겠네. 나는 앞으로 몇 걸음 나와 흑철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누군지 대충 알게 된 것 같은데. 이왕 검도 뽑은 것, 서로 상처 입히는 일 없이 간단 히 대련을 해보지 않겠나?” “뭐야?” 반응은 쉽게 나왔다. 여전히 함부로 움직이진 않았지만 다들 저 시건방진 놈의 버릇을 고쳐 주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사방에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나는 싱긋 웃었다. “진검 승부를 해서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쪽도 곤란할 것이다. 그러니 무난하게 검을 겨 루자는 말이다. 비록 나를 검으로 베어 처벌하진 못하더라도, 두 번 다시 건방진 말을 떠 들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실력차를 보여줄 수는 있을 게 아니냐?” “하하! 네 놈 말솜씨 하나는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해주마. 도발하는 재주가 제법인데, 그래 서 진심으로 우리랑 한판 떠보자고?” 처음 내 도발에 걸려들었던 바로 그 기사가 조롱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무장의 전반 적인 분위기가 비웃음으로 변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실은 대련을 통해 한 가지 확인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대련 신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겠다. 내게 진검은 무겁다. 누가 목검을 건네주겠나?” “오냐, 네 놈이 뭘 믿고 날뛰는지 한 번 지켜봐주겠다.” 그는 목검을 꺼내 와서 내게 던졌다. 나는 공중에서 검을 낚아챈 후 말했다. “먼저, 내가 든 건 목검이지만 진검과 같은 효과를 가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둘째, 그 쪽이 먼저 공격하고 나는 방어하는 형식을 취한다. 동의하느냐?” 실실 웃던 기사의 얼굴이 다시 슬그머니 구겨졌다. “한낱 노예새끼가...... 어디서 그런 시건방진 말투를 배웠어?” “동의 하는지, 않는지 그것부터 대답해.” “오냐. 전부 네 말대로 해주마. 그럼 시작이냐?” “와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는 성난 뿔소 마냥 돌진해왔다. 나는 웃었다. 좋아, 시험해보 자. 검이 마치 손아귀에 달라붙는 듯 했다. 다시 예전처럼 검을 사용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할 수 있다! 나는 확신했다. 노예로 태어나 책 한 권 읽은 적이 없음에도 서류를 처리하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장장 13년의 공백에도 아랑곳 않고 레브노아드가 가지고 있던 지적감각이 완벽하게 재 구현된 것이다. 검도 그와 마찬가지다. 족쇄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리를 크게 벌릴 수 없으니 자칫하면 균형을 잃는다. 나는 발을 옆으로 지그시 밀었다. 딱 이 만큼, 가능한 움직이지 않고 간다! 검이 날카롭게 어깨를 찔러 들어왔다. 나는 발을 뒤로 빼며 어깨를 옆으로 조금 비틀었다. 신체가 의도한 바에 완전히 따라주고 있지는 못했으나, 공격을 피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 었다. 공격은 종이 한 장 차로 허공만 크게 베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한심할 만큼 커다란 동작이잖아. 나는 검을 든 팔을 뒤로 빼었다가 그 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위로 찔렀다 . 특별히 빠르지도 않게, 모든 움직임은 물 흐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엇?” 기사는 한 박자 늦게 자기 턱 아래에 목검이 닿아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목검을 뒤로 물렸다. “내가 이겼다.” “이, 이, 이건 방심해서 그런 거야! 방심했다고! 워, 원래 이런 애송이 따위는.........!” “입 닥쳐! 일견 무력해 보이는 꼬마가 어째서 무모하게 도전하는지, 그것을 털끝만큼도 생 각하지 않은 네놈은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자격이 없다.” 나는 바로 근처에 서있던 붉은머리 기사를 가리켰다. “다음.” “......어떤 맛 간 놈이 노예 따위에게 검을 가르친 모양인데 말이야.” 붉은머리 기사는 침을 탁 뱉으며 다가왔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진 않 았지만, 그래도 한때 명성을 날리던 흑철 기사단이다. 이렇게 수준이 저급할 수도 있는 건가? 기사는 느긋하게 내 진척까지 걸어왔다. 입을 비틀고 나를 내려다보다가 검을 휘둘렀다. 나 는 다시 최소한도로 움직여 검을 피했다. 맞받아 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현격한 힘의 차이로 인해 검을 놓치게 될 테니까. “이깟 노예 새끼가!!” 검을 한번 헛질한 것이 그토록 분했던지, 어느새 기사의 얼굴이 머리카락 색만큼 시뻘개졌 다. 그는 연이어 검을 휘둘렀다. 전보다 빨라지긴 했지만. 정확히 한 걸음 반. 다리가 얼마나 벌릴 수 있는지 그 한도를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내게 중요했다. 발을 가능한 내딛고 몸을 앞으로 숙여서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며 다시 몸을 뒤로 당겼다. 상대의 하단은 텅 비어있었다. 목검은 정확히 왼쪽 허벅지를 타격했다. 빨강머리는 약간 움찔했으나 아랑곳 않고 검을 크게 그었다. “으윽!!” 이미 최대한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나는 대처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아니나 다를까 사슬의 길이가 짧아 덜컥 다리가 걸렸다. 나는 크게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제대로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하하! 꼴사납군!” 빨강머리는 좋다고 목소리까지 돋워 크게 웃었다. 나는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났 다. 저 놈을 보고 있자니 이젠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다. 진짜 저런 게 흑철 기사란 말이지! “이 목검을 진검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너는 허벅지 근육을 베고도 그 정도 검격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이냐?” 빨간머리 기사는 흠칫했다. 이제사 깨달은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큰소리를 쳤다. “하, 그걸 약속한 것은 그래엄이지, 내가 아니야!” “그래서 족쇄까지 찬 어린애를 이기니까 기쁘냐?” “이 새끼가!!” 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당장 나를 벨 태세를 취했다. 나는 물러섰다. 저런 거 뒤처리는 크리 스와 훌륭한 근위기사 여러분들께 전부 다 맡겨버리고 싶었다. “응? 이게 무슨 소란이냐?” 빨강머리의 발광을 멈춘 것은 어린 소년의 음성이었다.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 렸다. 추정 나이 11살에 어디서 너무 많이 본 듯한 얼굴면상.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지스 카르를 닮은 저 소년은 시라크 1황자였다. 그는 자기보다 평균 대여섯 살 정도 많은 친구들 을 이끌고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시라크는 나를 빤히 보았다. 황자의 친구들이 속삭였다. “전하, 쳐다보지도 마십시오. 미천한 노예입니다.” “노예? 그런 것 치고는..........” “얼굴이 멀끔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저 놈은 노예 중에서도 가장 저급한 성노입죠. 족쇄를 보십시오. 황제폐하께서 이번에 침실에 들여놓은 노예가 바로 저 놈입니다.” 나는 깊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듣기 좋은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지도 않고, 그만 돌아갈까....... “뭐라? 저 놈이 바로?!” 그때 적의에 불타는 시라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라크는 이제 이를 바드득 갈며 나를 노 려보고 있었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황성에 귀환한 뒤....... 인정하기 싫 지만 나 때문에 황제궁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라크도 지스카르를 만나지 못했 을 것이고. 아마 아빠를 빼앗긴 기분이겠지. 그런데 불연 듯 시라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런데 정말 저 놈이냐?” “예, 생김새나 족쇄가 있는 것 보면 확실합니다.” “근데 계집이 꼭 사내처럼 생겼구나. 나이도 뭔가 약…간 어려보이고…….” 순간 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황자의 친구들도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지요......” “크흠!” 시라크는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자기 아버지가 어린 사내아이를 좋아하는 변태적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빌어먹을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 뒈져버리고 싶어! 그 전에 죽여 버릴 테다 지스카르! 시라크는 좀 전보다 더욱 유심히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는 곧 내 손에 목검이 쥐어져 있 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네 놈은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노예 주제에 검은 왜 들고 있느냐?” 나는 퍼뜩 놀라 목검을 뒤로 숨겼다. “아, 아닙니다. 이건 그냥…….” 기사들과 대련했다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분명히 어린애의 호승심을 건드리리라. 그렇 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을 통해 금방 들통 나게 될 테니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네놈이 아버지를 믿고 지금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이걸 어쩐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황자 일행을 제한 모든 이들이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도 잠깐 생각해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았다. 우선 내가 시라크에게 깎듯이 존대를 하고 있었다. 불손한 말투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들 내가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는 애 앞에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건, 괜히 괴롭히는 것 같지 않은가. “흥! 건방진 놈. 감히 기사들의 성지에서 검을 들고 까불어? 좋아, 그렇게 검을 알고 싶다면 내가 상대해주마. 그거 들고 덤벼!!” 시라크는 허리에 달고 다니며 어린이용 예검을 뽑아들었다. 주위 인간들 얼굴이 가관이다. 작위를 받은 기사가 정식 철검을 들고도 내게 지는 판인데, 시라크가 상대도 안 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아, 이젠 어쩔 수 없다. “전하. 저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검을 익혔습니다. 송구하오나 전하께서는 제 상대가 될 수 없으십니다.” “너 따위가 검을? 하! 게다가 나보다도 강하다고 지금 지껄이는 거냐? 시건방진 놈이! 당장 덤벼!!”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여기서 정식으로 나가서 이겨버리면? 졌다고 방방 뛰고 난동을 부 릴 것이다. 대충 져주면? 나중에 자길 봐줬다고 생트집을 잡겠지.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가능한 저자세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닥치고 오라했다!!” “죄송합니다.” “이익!! 네 놈이!” 시라크 황자는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나서 내게 예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애들 검이라도 잘 못 맞으면 죽는 수가 있다. 크리스가 중간에 끼어들어 검을 빼앗았다. “큭! 크리스티안? 가, 감히!! 검을 내 놓지 못하겠소?” “전하! 이 노예는 황제폐하의 소유물입니다.” “닥쳐!! 아버지는 나보다 저 따위 꼬마가 더 중요하다던가?!” 마침 예상하던 발언 튀어나온다. 눈을 그냥 콱 감아버리고 싶다. 시라크 황자는 크리스에게 검을 돌려받는 것이 요원해지자 막무가내로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도 황자라고 영재 교육을 받은 것이 있어 주먹이 상당히 매서웠다. 일단 내 육체도 어린아이의 것이고. 하지만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패고 싶은 만큼 실컷 패면 그때는 돌아가겠거니 해서. 배에 두 방을 더 얻어맞고 뒤로 비틀대며 물러났다. 등에 뭔가 부딪혔다. 던필이 팔로 나를 감싸면서 말했다. “전하! 이러시면 황제께서.........!” “멍청아! 옆에서 말리면 더 열 받는 거 몰라?” 나는 가능한 목소리를 줄여 던필에게 외쳤다. 그는 내 말에 깜짝 놀란 듯 손을 뗐다. 동시 에 시라크 황자가 달려와서 정확히 턱에 주먹을 날렸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윽!” “이 더러운 자식이!!”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자 다시 발길질이 퍼부어졌다. 나는 완전히 바닥에 나동그라졌 다. 누가 애한테 이런 단단한 신발을 신겼어. 큭!! “전하!!” 결국 크리스가 시라크 황자를 붙잡고 뜯어말렸다. 시라크는 놓으라며 온 몸을 비틀었으나, 이미 숨이 턱까지 오를 만큼 나를 두들겨 팼기 때문인지 천천히 평상심을 되찾았다. 그는 숨을 약간 몰아쉬며 다시 제자리에 섰다. 상황이 진정된 것을 알고 나도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온 몸에 안 쑤시는 곳이 없다. 그 래도 바로 서서 시라크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전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하면서 힐끗 보니 시라크의 얼굴이 뾰루퉁한 것이 영락없이 토라진 애였다. 지켜보기가 아주 괴로웠다. 지스카르와 흡사한 얼굴로 뽀루퉁..... “.......가자!!” 시라크는 친구들과 함께 휑하니 연무장을 나가버렸다. 이찌됐든 겨우 한숨 돌렸다. 팔다리 에 어디 어긋난 곳은 없는지 확인한 다음 나도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그만 방에 돌아가야 할 같다. 이런 꼴로 돌아다니면 이상한 소문에 부채질을 할 수 있으니까. “무슨 속셈이야?” 그때 갑자기 던필이 입을 열었다.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소리지?” “왜 그대로 맞아주었지? 혹여 그 상처를 빌미로, 폐하께 시라크 전하에 대한 좋지 않은 이 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하는 거라면.........” “닥쳐라 빨갱이! 정 그 조악한 상상력을 풀어헤치고 싶다면 그림일기라도 써!” 오늘 빨간 머리 놈들과 상성이 안 좋은 듯.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자 턱이 엄청나 게 쑤셔왔다. 던필은 뭔가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을 크리스가 막았다. “던필! 아직 임무수행 중이다. 잡담은 그쯤해라.” “하지만 단장님, 궁금하잖습니까. 그럼 꼬마, 대체 검술은 누구에게 배운 거야? 아주 옛날부 터 배워왔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배운 거야?” 아차 했다. 시라크 황자와 대화할 때 내 입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어쨌든 그냥 얼버무려 버리자.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뭐든 다 알고 있었고, 뭐든 다 할 줄 알았 거든. 음음.” 반쯤 사실이기고 하고. “엘 파셔 최강의 기사단은 흑철(黑鐵)-블랙아이언 기사단이 아니다. 예로부터, 그리고 현재 에도 엘 파셔 최강의 칭호를 가진 것은 흑혈(黑血)-블랙블러드 기사단이다. 흑철 기사단이 명성을 날린 것은 스트라스 제국과 대전이 치열할 무렵 5년여의 기간뿐이었다. 당시 활 약했던 대기사들은 대부분 영지를 받아 지방으로 빠져나가거나 다른 기사단으로 이동했다.” 문득 나는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가 추궁하듯 시린 푸른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던필에게 잡담하지 말라고 호통을 친 주제에.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는 않았다. “뭐든 알고 있다면 엘 파셔 최강의 기사단이 흑혈 기사단이라는 것을 왜 몰랐나?” “아, 흑혈이었던가. 어쩐지 수준이 낮더라. 이름이 비슷해서 착각했던 모양이군.” 나는 싱긋 웃었다. 적어도 내 표정에서 진실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뭐, 안다한들 어쩌 겠는가. 진실 중에 진실은 결코 알아낼 수 없다. 결코. 침실 앞에 당도했을 쯤엔 이미 하늘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벌써 지스카 르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여튼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쐰 지라 나는 기분이 좋아서 손을 흔들었다. “여어.”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오는군. 무엇을 하다가........” 지스카르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침에 멀쩡하게 나간 인간이 옷에는 먼지와 핏방울이 묻히고, 턱과 얼굴까지 벌겋게 부어서 돌아왔으니까. 나는 지초지종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지스카르의 눈이 싸늘하게 차가워졌다. “누구 짓이지?” “응? 그..........” 의외로 반응이 살벌한 것 같다고 할까. 덕분에 목구멍까지 나왔던 시라크의 이름이 다시 안 으로 쑥 들어갔다. 난 대충 얼버무렸다. “......뭐 별로 대단한 상처도 아닌데.” “누구 짓이냐고 물었다.” “그게 중요하냐?” 나는 끝까지 말을 돌렸다. 어차피 지스카르는 원한다면 누가 이랬는지 정도는 금방 알아낼 수 있다. 이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지스카르는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뭐 좋다. 일단은 벗고 이리와.” 순간 나는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껏 새카맣게 잊고 말았다. 그 약속. 외출하는 대가로 무엇 을 하기로 했는지. 정말 굉장한 정신 상태 아닌가. 어떻게 그걸 잊지? 오히려 그게 축복 인가? 지스카르는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투였다. 나는 손을 조금 움찔거리다 겨우 단추 위로 가져갔다. 겉옷 제일 꼭대기의 단추를 푸는데도 몇 번이나 망설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망설이면 어쩌겠다고. 지스카르는 이미 내 모든 것을 전부 틀어쥐고 있었다. 원한다면 무슨 짓이든 가능하다. 하 지만 일부러 아량을 베풀어 약속 같은 것을 하고 지켜주었다. 내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스카르는 정말로 이행했다. 그런데 내가 이 약속을 깬다면? 지스카르도 다시는 약 속 따윌 하고 지켜줄 이유가 없다. 나는 단숨에 겉옷을 벗고 셔츠까지 벗었다. 그러나 허리춤에서 다시 손이 멈췄다. 숨이 조 금 거칠어져 있었다. 불규칙한 숨소리에 따라 몸도 흔들렸다. 손이 떨렸다. 짜증나는 망 설임. 움직여! 엄지를 바지 안에 집어넣는 순간 지스카르가 다가왔다. 성큼 한 걸음에 다가와 내 몸을 번 쩍 안아 올렸다. “엇? 왜........” 당황해서 버둥대는 나를 지스카르를 더욱 품에 끌어안았다. 그대로 침대 위에 나를 내려놓 고, 자신도 등을 돌린 채 앉았다. 지스카르는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아무 말도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손은 적당히 따뜻했다. 나는 그대로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등 뒤의 지스카르에 게 말했다. “네 놈도 벗어. 설마 날더러 벗겨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지스카르는 일어났다. 스륵스륵 옷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랑은 다르게 참 시원하게 도 벗는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머뭇거려야 하는 거냐? 갑자기 오기가 생겨, 나는 과감하게 바지를 벗어버렸다. 족쇄 때문에 완전히 벗진 못하고 발목에 대충 걸쳐졌다. 나 는 일단 다시 주저앉았다. 좀 기다리자 등 뒤에서 지스카르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하 필 신체 부위 중 가장 못 볼 걸 정면으로 보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아, 제발 정신 차 리자. 어쨌든 내 입으로 꺼낸 말은 책임을 져야만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그러니까 일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향유를 사용하고 손으로, 손으로........... “~~~~~!!”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등을 대고 지스카르의 다리 위에 올라앉았다. 내가 갑자기 움 직인 것에 지스카르도 좀 놀라는 눈치였다. 어찌됐든 나는 전부 상관치 않기로 했다. 아무 것도 생각 않기로 했다. 지스카르의 페니스는 이미 서있었다. 나는 허리를 들어 바로 내 항문 입구에 맞췄다. 그리 고 무작정 찍어 내렸다. “큭! 레, 레이?!” 지스카르가 무려! 말까지 더듬었다, 나는 못들은 걸로 했다. 숨을 턱까지 몰아쉬면서 그저 힘을 주었다. 하지만 내부가 굉장히 건조하고 너무나 빡빡해서 도저히 일정 이상 들어가질 않았다. 대체 지난번엔 어떻게 저 안쪽까지 들어간 건지 미스테리 할 정도다. 계속 밀 어붙이자 하반신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아니 아픈지도 잘 모르겠다. 알게 뭐냐! “크흐윽..........!!”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오는 지도 몰랐다. 오직 삽입하는 데만 모든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스카르도 내 허리를 붙들었다. “레이......! 멈춰! 상처가........” “시, 시끄러워! 헉헉 어쨌든..... 헉헉.... 어...쨌든 넣어서 끝내면 되는 거잖아!!” 손으로 만지고 넓히고 그 따위 짓 할까보냐. 어떻게 하든 약속은 지키는 거다! 죽을 것 같 이 아파도 오히려 이 편이 몇 백배 나았다. “흑! 으으으으으.......” “레이......!”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부르던 지스카르가 허리를 잡아 자기 몸을 뒤로 빼냈다. 그러자 새로 운 고통이 몸을 잠식했다. 항문이 잔뜩 긴장한 채 지스카르의 페니스를 너무 꽉 물고 있어 다시 빼내려고 하자 아주 직장까지 전부 뽑혀 나올 것 같았다. “아아아! 아아악! 그만해!” “으.... 그러니까, 윽... 이런 식으론......!” 지스카르도 여간 힘든 게 아닌 듯 말속에 신음이 섞여있었다. 어느 순간 쑥하고 지스카르의 것이 빠져나왔다. 나는 침대에 얼굴을 박고 엎어졌고, 지스카르도 팔로 몸을 지탱한 채 내 등에 머리를 대었다. 거친 숨소리가 전해졌다. “하아...하아... 다시는 스스로 하라고 말하면 안 되겠군........” 정말 말로 다 못할 만큼 아팠지만, 일순 나는 좋아죽을 뻔했다. 이런 소득을 올릴 줄이야! 나는 지스카르에게 안겨 다시 비스듬히 앉았다. 약간 흐린 눈으로 아래를 보니 상당한 양의 피가 시트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지스카르도 좀 다치지 않았으려나. 나는 얼 굴을 들어 위를 보았다. 숨을 고르고 있던 지스카르와 눈이 마주쳤다. 지스카르가 고개를 숙였다.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나는 얼굴을 피했다. 그러나 손이 턱을 붙들고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지스카르는 혀를 휘감고 굴리다 아주 깊이 빨아 당겼다. 마치 먹을 거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나. 격렬한 키스가 정말 오랫동안 이어졌다. 입 술에서 새어나간 타액을 턱을 타고 목줄기까지 흘러내렸다. “하아........” “헉헉헉.” 나는 입술을 닦았다. 목이 뻐근하고 입안이 다 얼얼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등 뒤에서 떨어 졌다. 손으로 내 페니스를 들고 그곳에 얼굴을 가져갔다. “윽!?” 깜짝 놀랐다. 지스카르가 내 것을 핥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붙잡았다. “뭐하는 거야! 그거...........!!” 지스카르는 단숨에 내 페니스가 입 속에 삼켰다. 내 것은 작아서 뿌리까지 전부 삼키고도 녀석의 입 속에 충분히 여유가 남았다. 그는 장난감처럼 혀로 내 페니스를 굴렸다. 그리고 빨아 당겼다! “흐으으으!” 엄청난 자극 허리를 크게 폈다. 전류가 통한 것처럼 등허리로 소름이 쫘악 돋았다. 나는 지 스카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거짓말! 벌써! “떠, 떨어져......” 나는 밀어닥치는 기운을 억지로 참느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스카르는 내 요구에 따 르는 것처럼 잠시 떨어졌지만 금방 다시 귀두를 입으로 물었다. 혀가 틈을 비집고 들어가 려는 것처럼 유독 끝을 괴롭혔다. 그만 나는 떨어지라고 손으로 머리를 밀었다. 다리를 어떻게든 움츠려 떨어지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전부 허사였다. 정말 숨이 다 넘어갈 것 같았다. “떨어......져....! 좀!! 크으윽!!” 쏟아버렸다! 어디다가 사정해버렸는지는 몰라도 절정에 이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을 바짝 굳히고 모든 걸 다 쏟아낸 후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지스카르는 내 다리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흰색 액을 훔쳤다. “금방 해버리는군.” “그, 그러게 떨어지라고 했어!” “빠르다고 말했을 뿐이다만.” “........” 나는 숨을 몰아쉬며 새삼 지스카르를 보았다. “잘도 그런 짓을 하는군. 굴욕적이지 않나?” “......나는 너를 안고 있을 뿐이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유독 딱딱했다. 지스카르는 내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자신의 품에 바짝 당기고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덮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다리 사이에 넣어 항문을 찾아냈다. 나는 당황했다. “또, 또 한다고?” “한 건 너 혼자 뿐일 텐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스스로 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아무 것도 안한 것도 사실이다. “으!” 살짝 손끝이 항문 사이로 들어갔다. 이미 상처투성이라 몹시 쓰라렸다. 손가락이 하나 더 동원되어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래 아팠다! 한번 다친 곳을 다시 벌리니 정말로 끔찍할 정도로 아프다! 그래도 신음을 참아 넘겼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지스카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쨌든 약속이니까. 이거라도 해야 약속을 지켰다고 할 거 아닌가. 손가락 두 개가 안쪽 같은 곳에서 움직였다. 나는 다리를 움츠리다가 펼치기는 반복했다. 허벅지 사이는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우.......... 큭.......” 거의 눈물이 날 만치 아픔에 떨고 있을 때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나는 헐떡이며 아래를 보 았다. 녀석의 손이 아주 피로 흠뻑 물들어있었다. 순간 절로 욕이 튀어나올 뻔 했다. 지스카르도 자기 손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약간 손을 움츠려 쥐었다. 지스카르는 시선을 옮 겨 내 옆구리 즈음으로 보았다. 근처가 온통 벌겋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지스카르는 다시 가슴께로 시선을 옮겼다. 붉게 부은 자국이 있었다. 지금에야 자각했는데 내 몸뚱이는 온 통 상처투성이였다. 전부 시라크에게 얻어맞은 흔적이다. 순간 지스카르가 시라크에게 무 슨 해꼬지라도 할 것 같은 기분에 나는 긴장했다. 그러나 금세 그게 아니라는 걸, 왠지 알게 되었다. 지스카르는 그냥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지스카르는 나를 엎드리게 하고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그는 내 페니스를 쥐었다. 부 드럽게 주무르는 감각에 나는 다시 자극을 받았다. “하아......” 뜨거운 숨을 토하고 있는데 엉덩이 계곡에 뜨거운 것을 느꼈다. 지스카르의 페니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정작 항문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그는 바짝 갖다대기만 한 채 내 페 니스를 주물렀다.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삽입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금방 머리가 녹아버릴 것처럼 달아오르고 말았다. 나는 잔뜩 달뜬 상태로 엉덩이를 놈의 하 반신에 바짝 밀어서 압박해 주었다. 아마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 이었을 것이다. “윽!” “앙으으........!!” 두 번째로 연속해서 사정하고 나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 지스카르도 평소와 다르게 침대에 바로 늘어졌다. “지스카르...... 상처.... 정말로 별로 안 아파......” 나는 아득하게 정신이 멀어지는 속에 말했다. 다시 입을 떼서 네 놈이 찢어놓은 건 빼고, 라고 말을 붙이려다가 나는 그만 잠들어 버렸 다. ----------------------------------- 지스카르는 츤데레. (뻥임돠) 한 10장이면 될 줄 알았는데 무려 21장이 나왔습니다. 재미도 없는 게...-_-;; 여러분, 만약 글이 20페이지 정도 된다 치면 10장씩 뚝 끊어 2화로 올리는 게 좋은가요, 20장 한꺼번에 다 올려버리는 게 좋은가요. 이번엔 아스트랄하게 5장, 16장으로 잘라서 올려보았습니다만...... 흐흐흐흐흐 ㅡ.ㅡ;;; “지난 주일엔 무엇을 했느냐?” 만인지상 스트라스의 황제. 아버님은 자식들을 모아놓고 자주 같은 질문을 했다. 1황자 제 노비스 형님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지난 주일에 마물 사냥을 나갔습니다. 제가 직접 오크를 세 마리나 잡았습니다! 폐하 께 보여 드리고저 이렇게 단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호오! 그것 멋지구나!” 2황자 루브라이안 형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금 더 정진하면 엘 파셔 어를 완전히 익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대단하구나.” 아버님은 나를 보고 물었다. “레브노아드! 요즘 검의 진척도는 어느 정도이냐?” 오랜만에 황실의 모든 구성원이 전부 모여 즐기는 저녁만찬 시간은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열두 명의 형제들, 여섯의 후궁이 나의 대답에 신경을 온통 곤두세우고 있 다는 사실을. 나는 가능한 말을 골라서 대답했다. “배울수록 나아지고 있습니다.” “겸손은! 체르도 경이 타고난 무골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구나! 그런데 한참 검 수련에 힘써야 할 시기에 갑자기 마법을 배운다던데........” “예. 비록 검에서 빠른 성과를 보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마법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하하하하! 고 녀석! 벌써 이야기 다 들었다! 또 마법에 재능이 남 다르다지? 체르도 경이 일전에 내게 하소연을 하더구나! 너는 검을 배워야 한다고! 헌데 궁중마법사가 달려와 너는 또 마법을 배우기 위해 태어난 아이라고 외치니 내 어찌 난감하지 않겠느냐! 허허허!” “......예.” “신학 대신 행정실무와 군사학에 치중한 교육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짐이 직접 템퍼러스 대 공에게 너의 교육에 힘 써 달라 부탁하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잠시도 지체 말고 이 애 비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야!” “예.” 나는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식당의 공기는 이미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싸늘해져 있었 다. 나는 일찍이 많은 분야에 아주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황제는 그런 나를 대단히 기꺼워하고 노골적으로 편애했다. 다른 자식들은 더 이상 본 척도 않았다. 형제들이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황제의 총애를 얻을수록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나 는 황후의 소생이지만 9황자이기 때문에 본래는 황위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유력한 차기 황제감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모든 형제들이 다 마찬가지였으나 특히 나이 가 많은 형님들은 나를 극도로 경계했다. 늦은 밤 나는 은밀히 아버님을 찾았다. “레비! 하하, 잘 왔다! 체스라도 한 판 둘 테냐? 하지만 늙은 애비를 생각해 두어 판 정도는 슬쩍 물려주는 미덕도 보이고 하렴!” “아버님. 저를 황태자위에 올리지 말아주십시오.” 내 요구에 아버님은 이해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어째서! 제노비스나 다른 녀석들은 황제감이 못돼! 스트라스를 번영시킬 수 있는 너 뿐이 다!” “그 자리는 제노비스 형님의 것입니다. 물론 제가 황위에 전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형님을 짓밟으면서까지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허허, 역시 레비구나! 형님 생각도 해줄 줄 알고.” 아버지는 웃었다. “하지만 네 목숨을 내놓아도 관계없을 만큼 형님들을 생각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현명한 레브노아드.........” 아버지는 턱을 괴며 진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크윽!!” 점심 때 먹은 식사에 독이 들어있었다. 나는 오른팔에 집중했다. 마정석이 빼곡히 박힌 팔 보호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음식을 입에 대기 전에 항상 해독주문을 준비해두곤 했다. 정신이 아득해져갔지만 짧은 시동어로 해독주문이 저절로 발동되었다. 까마득히 어릴 적부터 나는 독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를 때엔 신관이 옆에 없으면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황위 쟁탈전에서 한 발 물러나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후에도 독살과 암살 시도는 끊임없 이 이어졌다. 나는 너무나 뛰어나며, 지나치게 특별했다. 형제들은 언젠가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를 등 뒤에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형제들을 짓밟으면서까지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픈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만큼 너그럽지도 않았다. 나는 황제가 되기로 결정했다. 나는 형제들에게 굴복하고 내 아래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쉽게 머리를 조아리는 자는 없었다. 대신 엄청난 암살시도와 견제가 뒤따랐다. 그러 나 대부분은 나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전하를 모함하기 위해 제노비스 1황자가 위조한 문서들입니다.” “아아......” 나는 문서를 받아들었다. 두어 장을 넘겨보다가 화가 치밀어서 집어던졌다. 어째서 그렇게 아둔한가! 내가 이 따위 것이 당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만 자신이 하잘 것 없 다는 것을 인정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굴복하란 말이다! 그 자존심을 전부 버린다면, 내 신하가 되어 함께 나라를 일구어 갈 수도 있지 않은가......... “레브노아드 전하. 어찌할까요.” 나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제노비스 형님은 굴복하지 않는다. 그가 절대로 황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판부에 제출해라.” “예!” 제노비스 1황자는 반역을 공모한 혐의로 처형당했다. 황제가 내 편이었고 모든 과정은 수월 하게 이루어졌다. 그러자 1후궁과 외가인 호노스 후작가문이 엄청나게 반발했다. 시류를 타고 3, 8황자도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가시 돋친 공방전과 모함, 암살이 행해졌다. 대치는 끝을 보았다. 나는 1후 궁을 처형, 3, 8황자를 사고로 위장해 완전히 제거했다. 황위 쟁탈전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일찍이 전쟁터에 나가 가신과 백성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한편으로 주위의 모든 피붙이들을 천천히 제거해갔다. 불씨를 남기지 말아야 한 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후궁과 관계된 가문, 가신까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을 죽여야 했다. 물론 내가 죽인 형제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이 조금 가엾다고는 생각한다. 제노비스 형님은 1황자로 태어났다. 황위를 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권한 을 빼앗고, 아버님의 총애를 빼앗아간 내가 당연히 증오스러웠을 것이다. 다른 모든 형제 들이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도 잘못한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해서 그들의 권한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아마 특별히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뿐이다. 어느 날인가, 나는 파랗게 잎사귀가 늘어진 나무를 감상하며 정원을 걷고 있었다. 문득 인 기척을 느꼈다. 노련한 호위 기사들이 지체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살기등등한 금속음 때 문에 상대는 몹시 움츠러든 듯 했다. 수풀을 걷자 조그맣게 움츠린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체르도 경이 말했다. “11황자입니다.” “아아, 혼자 살아남았다더니 이런 곳에.......” 11황자의 어머니인 5후궁은 지난달 가까운 호수에 외유를 나갔다가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실상은 2황자와 5황자가 손을 잡고 가장 힘없는 5후궁 일파를 숙청한 것이다. 11황자는 그날 열이 나서 외유를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운 좋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어머니가 죽고, 외가가 망하다시피 하고, 아버님이 찾아줄 리도 만무하고.... 올해 12살이 된 11황자는 황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더 이상 시녀들조차 몰락한 황자를 보살펴주지 않았다. 그 증거로 며칠을 못 갈아입었는지 옷에 때가 꼬질꼬질하다. 나는 문득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련?” 웅크리고 있던 11황자가 고개를 들었다. 감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 었으나, 조금씩 움직이더니 결국은 손을 잡았다. 그리곤 얼른 일어나서 내 다리에 바싹 매달렸다. “감히!! 물러나시오!” 각양각색의 암살자들이 비재했으므로 기사들이 서둘러 11황자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11황자를 품에 안았다. 내 충실한 기사들은 함부로 내 의사에 반하지 않 았다. 대신 11황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바짝 뒤를 따랐다. 바람이 불었다. 가볍게 머리카락에 스치는 바람. 나는 11황자의 적금발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만약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너를 곁에 두고 소중히 여기겠다.” 11황자가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에... 예에......” “그래. 착하구나. 에드리히...........” 눈을 떴다. 머리가 멍~했다. 갑자기 웬 옛날 꿈이람. 나는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만 신음을 낼 뻔했다. 하룻밤이 지나자 시라크 황자에게 얻어맞은 자리가 제법 묵직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지스카르에게 당한 하반 신은 끔찍할 정도다. 부자가 합심해 사람을 죽이려 드는군. 나는 침대 맡에 팔을 걸치고 축 늘어졌다. 옷을 전부 챙겨 입은 지스카르가 나를 내려다보 았다. “얌전하군. 오늘은 외출하고 싶지 않나?” 나는 울컥했다. 또 밤일 치르고 싶다 그거지? 그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능한 밖을 많 이 돌아다니는 것이 내게는 유리했다. 하지만 도저히 오늘밤에 또 견딜 자신이 없었다.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나도 알고 보면 아직 힘없고 연약한 어린아이다. 저 변 태 자식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오늘은 쉬고 내일 쯤.......” 속마음과는 달리,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아.... 온 몸이 쑤신다. 그때 지스카르가 성큼 다가와 나를 붙들었다. 반쯤 풀어헤친 셔츠를 단숨에 벗겨버리고, 바 지까지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대단히 당황했다. “기, 기다려! 아침부터?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왜.......!!” 언제 향유를 가져왔는지 지스카르는 끈적이는 액을 자기 손에 묻혀 다리 사이로 넣었다. “너....... 너.......!!” 놈이 마음대로 하겠다고 결정해버리면 나는 고스란히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소리 지 르길 그만두고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때 지스카르가 내 입술에 손을 댔다. 하지 말라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문득 엉덩이에 닿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스카르가 손에 묻힌 것은 향유가 아 닌 다른 것이었다. 촉감도 다르고, 무엇보다 냄새가 달랐다. 이건....... “약인가?” “깨달았다면 입술은 그만 물어뜯고......” 입구 근처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안쪽으로 슥 들어갔다. 나는 흠칫 녀석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야 다친 건 안쪽이니까. 지스카르는 손을 빼냈다. 연고를 손에 더 발라 다시 항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천천히 내벽 을 밀고 안으로 들어와 안 쪽을 둥글게 훑었다. 나는 좀 더 세게 옷깃을 움켜쥐었다. 기, 기분 나빠. 이런 건....... 그 순간 엉덩이부터 등을 타고 찌르르 소름이 돋았다. “헉! 치워!!” 결국 나는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무엇보다도, 저 놈이 순수하게 치료만을 목적으로 이러고 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돼? 지스카르는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히 그러하다면 다른 사람을 부르마.” “아?” “짐이 아니라 대신 치료해줄 다른 사람을 부르겠다. 아니, 이 기회에 신관을 부르는 것이 낫겠군.” 퍼뜩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에 생각이 미쳤다. 치료받으려면 상처 입은 부위를 보여줘야 한 다. 그야 신관 앞에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지스카르의 흔적이 잔뜩 남아있는데다가 심하게 부어오른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지스카르는 줄을 잡아당기려하고 있었다. 나는 급히 외쳤다. “자, 잠깐만!” 지스카르는 이미 줄을 당긴 뒤였다. 나는 순간 뭐라 말도 못하고 얼이 빠졌다. 지스카르가 다가왔다. 갑자기 시트를 크게 걷어내더니 내 몸에다가 둘렀다. 대충 몸을 가렸을 무렵 시녀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갈아입힐 옷을 가져와라. 시중을 들 필요는 없다.” 시녀는 즉시 내가 입을 깨끗한 새 옷을 내왔다. 그녀가 물러간 후,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 다. “일부러 그랬지!” “약부터 바르자. 상처가 심한 편이니......” “........” 저항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스카르는 시트를 끌어내렸다. 나는 약간 움찔했지 만 앉은 채 그대로 있었다. 지스카르는 연고를 손에 덜어 먼저 얼굴에 발라주었다. 뺨을 감싸듯이 부드럽게 매만지다가 목덜미로 내려왔다. 어깨의 상처는 꽤 심했다. 그는 연고를 다시 덜어 어깨에 발랐다. 온 몸에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연고를 확 들이부어 문지르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지만 지스카르는 일일이 손을 움직였다. 방이 유난히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목부터 약을 바르며 올라온 손이 허벅지까지 올 라왔다. 얼굴 마주보고 앉아있기가 굉장히 뭣하다. 시선을 애매한 곳에 두고 뻣뻣하게 있 자니 지스카르가 갑자기 날 자기 품으로 끌어갔다. 이럴 때만 기가 막히게 남의 속을 읽 는 놈. 연고를 바른 손이 허벅지를 전체적으로 문질렀다. 고환과 페니스를 훑고 가장 상처가 심한 항문으로 되돌아왔다. 약을 듬뿍 묻힌 손이 다시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손가락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안을 저으면서 끝까지 완전히 들어왔고, 나는 파르르 떨었다. “기, 기분 나빠.........” “타인이 만지는 건 더 싫을 테지.” “그건.........” ‘그렇다’ 고 생각한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냐? 확실히....... 지스카르의 손에 익숙하다. 예전만큼 몸이 긴장하고 있지 않다. 그건 지스카르 가 배려해주기 때문이다. 다치지 않게 애써 신경 쓰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안심해 버린 것이다. 이건 길들여지고 있는 거라 해야겠지. “으응.......” 항문을 만지는 손길에 나는 다리를 조금 움츠렸다. 전에는 닿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을 지경 이었는데. 그렇군. 이대로 익숙해지는 거도 괜찮다.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평생 이대로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언제까지나 이런 일에 안절부절 겁먹고 있을 수는 없다. 냉정하게 모든 기회를 살린다면 언젠가 때가 찾아올 것이다. 나는 황태자가 아니다. 성노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러니 치욕이라고 생각할 것도 없다. 수 치라고 여기지 말고 받아들여라. 지스카르의 성욕을 채워주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하,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는데...... 나는 지스카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모멸감에 온 몸이 떨렸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이렇게.......!! 아니 틀렸어! 나는 레브노아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만은 절대로 용납 할 수 없다! 지스카르가 갑자기 내 뺨을 감싸 쥐고 입술에 키스했다. 내가 피하자 다시 당겨 입을 맞췄 다. 혀를 빨아 당기는 감각에 나는 극렬히 저항했다. 지스카르는 집요하게 혀를 다시 집 어넣었다. 그러나 이내, 떨어졌다. “다시 이렇게 되는군.” 모멸감에 경련하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그가 말했다. “너는 지극히 미천한 노예다.” 그는 내 어깨에 입을 대었다. “짐에게 안기는 것은 오히려 네게 영광스러운 일이 될 텐데.” 어깨에서 떨어져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분노하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헌데........ 어째서 짐이, 너를 모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너는 어떻게 그리도 지독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지?” 순간 나는 몸을 틀어 지스카르의 눈에 손을 내찔렀다. 바로 코앞에서 지스카르는 내 손을 붙들었다. 그대로 나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지스카르는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 나는 입을 비틀어 웃었다. “나는 레이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이미 나에 대한 조사가 상당히 진척되었을 것이다. 네 눈으로 나를 봐라. 스스로 판단해라. 나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바로 지금 네 앞에 있다.” 지스카르는 내 말을 이행하는 것처럼 나를 빤히 응시했다. 한참 뒤에야 그는 물러났다. 지스카르는 새 옷을 가져다주었다. 바지를 갈아입으려면 족쇄를 풀어야 했다. 잠깐 해방되 어 바지까지 전부 갈아입을 수 있었다. 지스카르는 몸을 낮추어 내 발목에 족쇄를 다시 채웠다. 할일 없이 남의 발목만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갑자기 말했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나?” “뭐? 네 놈이 제대로 발정이 났구나!”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외출을 대가로 거래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근처 정원을 둘러보려 한다. 따라 나오겠느 냐?” “무슨 바람인지 모르겠군. 대가없이 밖에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니.” “아침나절은 한가할 것 같다. 어울려 주겠나?”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말투 때문에 좀 웃었다. “어울려 달라고? 노예에겐 명령이 어울릴 텐데.” “그렇군.” 지스카르는 외출준비를 명했다. 크리스, 던필 등 익숙한 근위기사들을 이끌고 황제궁에 딸린 정원으로 나왔다. 큰 거 좋아 하는 엘 파셔 답지 않게 생각보다 규모가 소박했다. 정원 한편에 쉴 수 있도록 그늘과 탁 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 자리 잡고 앉자 시녀들이 차를 내왔다. “이건 뭐지?” 탁자 위에는 본 적이 없는 것이 놓여 있었다. 납작한 판과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인형. “체스판이다.” “괴상한 모양이군.” 스트라스에도 체스가 있다. 그러나 말의 모양도 틀리고 아마 규칙도 완전히 다를 것이다. “해보겠나? 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좋아.” 딱히 할 일도 없었으므로 나는 승낙했다. 규칙은 은근히 복잡했다. 하지만 제각각 말의 생 김새가 자기 성질과 쓰임을 가르쳐주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헤매지는 않았다. 나는 어느새 엘 파셔 식의 체스에 푹 빠져들었다. “........” “체크 메이트.” 나는 중앙에 킹을 내려놓고 씨익 웃었다. 연습게임을 제하고 제대로 체스를 시작한 지 정확 히 다섯 판 째였다. 근위기사들과 시녀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나는 개의치 않고 찻잔을 들어올렸다. “당황할 것 없다. 내가 본래 전략 게임에 강한 편이니까. 아, 차가 다 식었군. 시간이 꽤 지 났는데?” 그때 지스카르가 말을 옆으로 물리며 말했다. “다시 한 판.” 나는 문득 지스카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항상 보던 차갑고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다리를 모로 꼬아 앉았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엘 지스카르 파셔, 은근히 지는 걸 싫어하는군.” “........” 지스카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좋아. 다시 한 판!” 다시 한번 게임을 시작했다. 이번엔 초반부터 대단히 치열했다. 그리고 시녀가 새로 가져온 차가 전부 다 식어버렸을 때야 비로소 게임은 끝났다. “체크 메이트.” 지스카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킹을 중앙에 올렸다. 나는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한 판 더!” “너도 은근히 지기 싫어하는군.” 지스카르가 툭 말했다. 한참 열을 내다가 우뚝 멈춰서 지스카르를 쳐다보았다. 세상사에 무 심한 듯 차가운 얼굴. 그것을 보는 순간 또 웃음보가 터졌다. 이번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킥킥 웃으면서 나는 말했다. “큭큭. 네 녀석, 그 말을 하려고 지금까지 벼르고 있었군!” “.........” 나는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바로 들었다. 지스카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아, 물론이다. 이 몸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지. 무엇 하나 져줄까 보냐!!” 팔로 체스판 위의 말을 한꺼번에 쓸어 바닥에 밀어냈다. 나는 새로운 체스말을 들어 판에 올려놓았다. “다시 한 판!” “너는........” 지스카르는 입을 조금 떼었다. 그때였다. 사람 인기척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시라크 1황자가 서있었다. “누가 황자를 내원에 들여놓았느냐!” 지스카르의 지엄한 호통이 떨어졌다. 원래 황제궁의 내원은 황제의 지극히 개인적인 장소였 다. 당연히 침실 등을 방문할 때처럼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시라크는 허락을 받은 적이 없는 듯 했다.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시라크 황자를 붙들었다.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이거 놓아라!” 시라크는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거친 걸음으로 걸어왔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왠지 시라크 황자에게는 강하게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지스카르가 내게 모든 신경을 쏟는 바람에, 어린 시라크 황자는 아버지의 품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아버지를 빼앗긴 셈이니, 내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내가 원해서 지스카르를 독점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이건 레브노아드가 황제의 편애를 부담스러워할 때랑 비슷하군! 형님들이 소외받는 것을 보기가 약간 난감했지. 그래서 내가 시라크에게 약한 건가? 이래저래 대단히 곤란한 심정으로 앉아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라크 황자가 나를 목표로 달려왔다. “네 이 놈 더러운 노예 자식!!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아직도 아버님 근처에서 맴돌 아!?” 시라크는 빽 고함을 지르며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좀 놀랐다. 아무리 황자라지만 황제 앞에서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건가? 물론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나는 시라크의 주먹을 피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턱에 살짝 비껴 맞았다. 그러나 연이어 날아 오는 주먹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윽!” 몸을 웅크리며 작게 신음을 삼켰다. 마침 심하게 멍이든 부위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때 지 스카르가 시라크의 팔목을 휘어잡았다. 그대로 뒤로 끌어내어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굉장히 커다란 소리가 내원을 울렸다. 나는 크게 놀라서 황급히 소리쳤다. “기다려! 그냥 애가 한 짓이잖아!!” “으, 윽....... 아, 아버님.......” 시라크는 벌벌 떨며 뒤로 물러났다.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시 라크를 내려다보는 지스카르의 얼굴은 싸늘했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싸늘한 냉기에 내가 더 놀랐다.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어오는 것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나는 당황했다. 친아들이고, 게다가 1황자가 아닌가. 주위에 보는 눈이 이만큼 많다. 위신이 라는 것이 있는데 황자에게 이런 망신을 주는 건 정말 바보짓이다. 난감하게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근위기사와 시녀는 시라크가 뺨을 맞을 때 굉장히 놀란 얼굴을 했지만, 어느새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 었다. 확실했다. 그들은 시라크 황자가 냉대 받는 것에 익숙했다. “아, 아버님...... 저.... 만나주시지 않으셔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짐은 바쁘니 허락을 받고 다시 찾아와라.” “그, 그런........” “어서 황자를 데려가라!” 지스카르는 명했다. 목소리는 전보다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기사들이 다가오자 시라크는 앞뒤 보지 않고 지스카르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그리고 마구 팔을 흔들며 칭얼거렸다. “아버님!! 저런 놈과 보낼 시간은 있고, 저와 어머님을 만나러 올 시간은 없으신 겁니까? 왜 절 찾아오시지 않는 거예요!!” 그래도 일국의 황자건만, 저렇게 떼를 쓰다니 쳐다보기가 민망할 지경이군. 나는 한숨을 쉬 었다. 시라크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황제에게 총애 받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말과 행동을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시라크는 전혀 그런 걸 몰랐다. 어린애처럼. 어린 아이니까? 아니다. 11살이면 완전히 앞뒤 분간 못할 나이도 아니다. 나는 11살 때...... 나를 편애를 하 는 황제와 그 사실에 불만을 품은 형님 사이를 조율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거 기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경계할 줄은 알아야 한다. 황실은 그런 곳이다. 시라크는 결국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고 말았다. 지스카르도 그만 움직였다. 이래저래 시간 이 많이 흘렀으니 그만 업무를 보러 들어가야 했다. 나는 시라크 황자가 사라진 곳을 바 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1황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더라도, 황제가 냉대하면 그 입지는 급속도로 작아진다. 시라크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근위기사들이 움찔거렸다. 내 무례한 발언을 제지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두 번 무례했어야지. 내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도 결국 방해는 없었다. “왜지? 능력이 일천해 성에 차지 않는가? 대기만성하는 경우도 있는데 벌써 내치기는 이르 지 않나? 그게 아니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따로 있나?”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대단히 따가웠다. 어차피 재미도 없는 이야기. 나는 묻는 걸 그 만두고 지스카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대답했다. “그래, 시라크의 재능과 성품이 모두 탐탁치 않다. 무엇보다도 브뤼셀 황후와 외가인 마크 시 공작가의 권세가 너무 강해서, 시라크가 황제가 되면 외척이 득세하게 될 것이다.” 황가의 민감한 사안. 설마 대답해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시녀들이 침을 꿀꺽 삼켰 다. “어떻게 생각하지?” 그리고 무려 의견을 구하기까지. 근위기사들은 약간 뻣뻣하게 움직였다. 나는 쓰게 웃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사상이 비슷하군. 황제의 총애는 권력을 낳는다. 어중간한 자식은 전 부 쳐내고, 훌륭한 재목만 골라 두말 할 여지도 없도록 확실하게 입지를 만들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을 취하는 것이, 장차 제국을 위해서 가장 효율적이지.” 스트라스의 황제가, 아버님이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는 제국을 위하여 행동 하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감정에 치우치면 훨씬 더 큰 분란이 존재했을 것이고, 온 나라가 내전의 불길에 휩싸였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지스카르가 걷기 시작했고, 나도 뒤를 따라 걸었다. 주위는 나뭇가 지 흔들리는 소리 말고는 극히 고요했다. 나는 즉흥적으로 말했다. “노예가 주는 사랑은 하잘 것 없다. 사랑받은 노예는 커서 그냥 노예가 된다. 그래서 노예 들은 첫째 아이를 낳아도 둘째 아이를 낳아도 언제나 똑같이 사랑을 베풀지. 그들의 애정은 아무리 퍼내도 단 하루도 마르지 않아.” 빈첸시오 성의 노예들. 아둔하고 계산할 줄 모르는 자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곁을 떠날 줄 을 몰랐다. 스트라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아마... 굉장히 행복했다. 하늘이 짙푸르렀다. ---------------------------------------------------- 레이군은 난공불락! 달달해지려면 멀었다! 재미삼아 레이군 vs 지스카르씨 인기투표 설문을 쌔워봤습니다만, 투표인 16명 중 13명 득표로 레이군의 승리!! 압도적이라는 것은 아~주 조금 의외였어요 ^^; 당신의 선택은?!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7화 황성에 끌려온 지도 한 달 가까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침실에 갇혀 있었고,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서류나 처리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외출의 기회도 주어졌다. 이번에도 익숙한 다섯 명의 근위기사가 감시 역할로 불려왔다. 준비를 전부 마치고 일 어나자 지스카르가 말했다.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들어 오거라.” 황당함에 지스카르를 쳐다봤다. 난 근위기사들을 불러 물었다. “들었나? 자네 군주 되시는 분께서 아들 학교 보내는 아버지처럼 말씀하는군. 내가 어떻게 대답해 드리면 되지?” “........” 아무도 대답이 없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할 말이 없을 게다. “서류는? 조의(朝儀)에 필요한 문건이 있으니 두고 가라.” 지스카르의 요구에 잠깐 멈춰 섰다. 이미 말했지만 나는 매일 서류를 처리하면서 무료한 낮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지스카르가 던져주는 서류의 분량이 점점 늘 어갔다. 그리고 이제 지스카르는 당연한 듯이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 고 있었다. 저 놈을 갈아 마실까? 나는 서류뭉치를 들고 와서 지스카르에게 하나씩 던져주었다. “궁내부 예산안 하자 없음. 지난해 대비 공무역 물품 내역 조정 완료. 외궁 보수를 위한 세 부자재 구성, 그런 건 건축업자에게 시켜. 새 주화 제조 시 철과 구리의 조합비율 건의안, 제련 기술자를 고용하는 것을 추천하마. 내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걸 끼워 넣은 모 양인데, 동전 만드는 법을 적어내라는 건 좀 심하다 생각되지 않더냐?” “......예의 암살 조직에서 건축과 제련 기술은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지?” “내가 암살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절대로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암살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궁내부 예산안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도 가르치지 않을 것 이다.” “우리 조직과 견해 차이가 있어 유감이군!” 지스카르가 지그시 날 쳐다봤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어쩌자고? 먼저 말장난 시작한 건 그쪽이야. “나가 봐도 좋다.” “사양하지 않고.” 나는 방을 나섰다. 두어 번의 외출로 근처의 대략적인 지리는 머리 속에 완전히 기억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파고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경비병이 전부 몇 명이나 되는지. 교 대는 하루에 몇 번, 몇 시에 하는지. 황실 기사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탈출만이 목적이 아니라, 엘 파셔의 황성을 파악해두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이건 스트라 스에 상당히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더 이상 스트라스의 황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면서, 스트라스인조차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는군. 갑자기 속이 허전하다고 느꼈다. 점심을 거른 것이다. 그동안 내 뒤를 따라다니던 기사들도 물론 점심을 걸렀다. 나는 잠시 돌아섰다. “고생이 많군. 2교대로 식사라도 하고 오지 그러느냐?” “허허, 고 놈! 들을수록 쏠쏠한 맛이 있네. 황제폐하와 맞먹는 건 머리가 너무너무 좋아서 그렇다 치고, 어린놈이 말투는 어쩌다 그 모양이 됐어?” 이럴 때 끼어드는 놈은 정해져 있다. 말리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 크리스가 인상을 쓰고 엄 히 외쳤다. “던필!!” “크리스 단장, 나는 이제 저 노예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느 낄 정도입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파업하고 싶어!” 존대에 반말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이제 보니 두 사람 사적으로는 친한 사이 같았다. 그 러나 공적으로는 상하관계가 엄격한 사이. 던필이 막 나가기 시작하자 크리스는 목에 핏 대까지 올리고 소리쳤다. “던필!! 공무 중이다! 더 이상 경거망동은 용납지 않겠다!! 언제까지 그 무분별한 태도가 용 납될 것이라 생각하나?” “저 꼬맹이 때문에 나보단 자네가 더 많이 고민하고 있잖나. 그러잖아도 고혈압인 네가 화 병으로 넘어가기 전에 내가 나서서 그 궁금증을 풀어주지!” “네 녀석!!” 잠시 소란이 일어 멈추어 섰을 때였다. 웬 중년 부인이 접근해왔다. 그녀는 앞길을 가로막 고 대뜸 한 마디 날렸다. “네가 바로 레이렷다? 따라오너라.” “에?” “황후전하께서 너를 보자 하신다.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야!” 브뤼셀 황후! 시라크 황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여인! 그녀가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으리라는 건 생각할 것도 없다. 따라가 봤자 좋은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무조건 무시해버리는 것만이 상책. 하지만 그 방법은 황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것이다. “뭣 하느냐? 황후 전하의 분부라는데 따라오지 않고!” “아.....? 예.” 부인이 다시 브뤼셀 황후는 들먹였다. 나는 어느새 내키지 않는 발을 질질 끌고 그녀의 뒤 를 따르고 있었다. “뭐야? 또 갑자기 고분고분해져서.......” 던필이 내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근위기사들이 노골적으로 눈총을 주며 같은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크리스만이 딱딱한 표정을 유지했을 뿐이다. 엘 파셔의 근 위기사들, 문제가 많군. 황후궁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중년 부인의 안내를 받아 야외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에 도착했다. 그때 약간 소란이 일었다. 크리스와 근위기사들이 내 뒤를 따라 테라스까지 들어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황후궁의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눈에 익은 꼬마 가 불쑥 나섰다. “크리스티안 경! 어머님께서 계시는 자리에 어찌 이 같은 무례를 저지르는가!” 시라크 황자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시라크의 뺨에 시선을 주었다. 벌써 2주일이나 흘렀고, 지스카르에게 맞은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어쩐지 시선이 갔다. “죄송합니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노예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황제폐하의 엄명이 계 셨습니다. 시라크 전하의 명을 다를 수 없는 점 이해해주십시오.” 크리스는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무시당한 시라크는 얼굴을 빨갛게 만들고 분개했다. 그는 이를 갈다가 갑자기 분노의 화살을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난 한숨을 얕게 쉬고 시선을 피했다. “시라크, 이리로 오렴. 폐하의 명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20대 후반,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성이 시라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브뤼셀 황후가 직 접 나온 것이다. 시라크는 쪼로로 달려가 브뤼셀 황후의 옆자리에 섰다.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이름이 레이라 하느냐?” “예.” “그래, 레이. 듣던 대로 예쁘장하게 생겼구나. 폐하께서 널 마음에 들어 하실 만도 해. 여기 앉으렴.” 예쁘장..........!!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내게 작은 충격을 안겨주고 작은 티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황후 이외에도 아름다운 귀부인이 셋 더 있었다. 나는 단숨에 그들의 신분을 알아냈다. 지스카르의 세 후궁이다! “이 분은 1후궁인 케미안 부인, 이쪽 분은 2후궁인 크로커스 부인, 여기 계신 분이 3후궁이 신 이로파 부인이란다. 여자들끼리 티타임을 가지려던 중에, 너를 빼놓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불렀단다.” 내가 왜 이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되는 거지!! 할 말은 넘치도록 많았으되 차마 그 모든 걸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머리가 지끈대기 시 작한다. 나는 억지로 황후가 준비해준 자리에 앉았다. 약간의 다과와 차가 나왔다. 어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일단 아무 과자나 집어 들었 다. 그랬더니 황후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다른 후궁들과 함께 쿡쿡 웃기 시작했다. 이로파 3후궁이 말했다. “레이. 티타임이잖니. 다과에 먼저 손을 대는 건 아주 배워먹지 못한, 천박한 짓이란다.” “...식전이기 때문에 공복에 차를 마시기가 곤란해서 그랬습니다. 제 행동을 불쾌하게 느끼 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호호……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웃음소리가 미묘하게 어색하다. 이번엔 크로커스 2후궁이 찻잔을 내밀었다. “그래도 티타임인데 차도 마시고 그래야지?” “예.” 나는 순순히 찻잔을 들어 등 뒤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우유는 약간만.” 시녀는 약간 머뭇거리다 우유를 넣어주었다. 나는 적당히 섞여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차를 입에 댔다. 크로커스 부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져 있었다. 시라크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노예 주제에 어디서 차 마시는 법은 어떻게 아는 거야!?” “........황성에 도착한 후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노예 주제에 차라니! 건방진 놈!” 그렇게 생각한다면 괜한 노예 불러다 차를 대접하지 말아다오. “시라크, 앉으려무나. 한갓 노예의 일이다. 장차 황제가 될 네가 이런 일에 직접 나서서야 체통이 서지 않아요.” 브뤼셀 황후의 분위기가 전과 약간 달라졌다. 가식이나마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가 사라졌 다. 시라크는 분을 참으며 자리에 앉았고, 대신 황후가 일어났다. 그녀는 찻잔을 든 채 내 등 뒤에 섰다.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그녀가 손으로 내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앉아 있으렴. 폐하께서 차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셨나 보지? 아,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폐하께서 아주 많이 사랑해주시는 모양이구나.” 브뤼셀 황후는 빙그레 웃으며 내 머리 위에 남은 차를 전부 쏟아 부었다. 차는 아주 뜨겁진 않고 미적지근했다. 그러나 머리부터 얼굴, 상의 겉옷까지 흠뻑 젖고 말았다. 나는 머리카 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망연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나, 이런 실수를........” 브뤼셀 황후는 실수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사와 표정이 전혀 일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우아한 동작으로 잔을 내려다 놓고 턱을 들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약간 눈을 내려 시선을 피했다.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비 웃음이 담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케미안 1후궁이 일어나 황후의 곁에 다가갔다. “황후 전하. 괜찮으십니까. 찻물에 화상을 입지는 않으셨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예, 하긴 그보다는 레이가..... 레이, 황후 전하께서 실수를 좀 하셨구나. 이해할 수 있지?” 그나마 케미안 후궁이 이 중에서 가장 독기가 없었다. 그녀는 다소 어색하게 내 상태를 살 펴보았다. 그러나 나를 멸시하고 있는 것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예. 별로 뜨겁지도 않았고, 닦으면 되는 일입니다. 손수건을 빌려주시겠습니까?” 나는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크로커스 2후궁이 호들갑스럽게 말 했다. “어쩜! 어떻게 손수건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거지? 하긴 본디 태생이 천하니.........” “예, 손수건을 챙겨 다녀본 지가 오래되어서 미처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머리를 닦 을 수 있게 손수건을 빌려주시겠습니까?” “하! 그러마.” 크로커스 2후궁은 손수건을 엄지와 검지로 쥐어 내 앞에 떨어뜨렸다. 나는 묵묵히 수건을 집어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언뜻 시라크가 통쾌한 표정으로 히죽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여봐라. 어머니의 잔이 비어있지 않느냐. 새로 차를 가져와라!” 시라크 황자의 독축에 시녀들이 서둘러 찻잎과 물병을 들고 왔다. 갑자기 시라크가 일어나 물병을 빼앗았다. “이리 다오. 내가 부어드릴 테니.”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시라크 황자가 브뤼셀 황후의 잔에 무사히 물을 부을 수 있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겠으나, 현재 그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보였다. 과연 어머니께 차를 부어드린다던 시라크 황자가 곧장 나를 향해 왔다. 브뤼셀 황후와 후궁들 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한편 약간 재미있어 하며 시라크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왓?” 그때 누군가 시라크 황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놀랍게도 그 상대는 크리스였다. 그는 일순 시라크의 팔을 비틀어 물병을 빼앗아갔다. “아악!” “크, 크리스티안 경!! 그대가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브뤼셀 황후는 황급히 시라크 황자를 품에 안으며 노성을 터뜨렸다. 크리스는 고개를 숙였 다. “죄송합니다, 황후 전하. 시라크 전하께서 넘어지실 것처럼 보이기에, 화상을 입으실까 우려 되어 그만 끼어들고 말았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크리스는 지스카르처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주 인상을 쓰고 화를 내는 등 표정관 리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평소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감싸기 위해 움직였는지, 혹은 정말 시라크 황자를 위해 움직인 것인지 헷갈릴 정 도였다. 브뤼셀 황후는 더 크리스를 탓하지 않았다. 진실이야 어찌됐든 일이 커지는 것은 그녀의 바 람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시라크의 팔을 살펴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크리스는 물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티타임은 굉장히 불편한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숙 인 채 지키고 있었다. “후,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또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해요.” 황후가 마지막으로 나를 전송했다. 나는 가능한 정중하게 인사하고 황후궁을 나섰다. 피곤하다. 5일 밤낮을 샜을 때만큼 피곤하다. 바라건대 다시는 저 모자와 마주칠 일이 없기 를. 하지만 황성에 있는 한은 무리일 것이다. 나는 혀를 차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던필이 불쑥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크리스가 막을 새도 없었다. “대체 뭐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뛸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싸움에 진 강아지 마냥 고개 를 푹 숙이고 그래?” “던필!!” “기다려봐 단장! 꼬맹아. 황후께 따로 노리는 거라도 있느냐? 아니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 고! 제발 안 어울리는 내숭 떨지 말고 차라리 그냥 평소처럼 확 뒤집어엎어! 너 황제 앞 에서도 그거 잘 하잖아! 두 눈에 힘 빡 주고 기선제압 하라니까?” 던필은 내 어깨를 딸딸 흔들면서 소리쳤다. 나는 일순 황당함을 넘어 당황하고 말았다. 아 니,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 놈을 떼어내는 것이다. “크리스티안!” 내가 외치자 크리스는 두 말 없이 던필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던필이 더욱 소리쳤다. “보라고! 황제 직속 근위기사단의 단장을 제 종 부리듯 하는 저 건방진 자태!” “대체 저 놈을 근위기사로 만든 놈이 누군가? 크리스 경! 그토록 근위기사로 뽑을 인재가 없던가?” 크리스가 다분히 쌓인 것이 많았던지 내 잡담에 대답을 해주었다. “단원을 추천할 권한은 있으나, 단원을 최종 발탁할 권한은 황제 폐하께 있다.” “어이 크리스 단장! 내가 어떻게 근위기사가 되었나는 것보다 저 꼬마가 왜 갑자기 안 어울 리는 짓을 하는지 그게 더 궁금하지 않나?” “던필!! 네 놈 정말.......!” 크리스가 벌써 몇 번째 핏대를 올리며 던필의 이름을 외쳤던가. 이제 보니 젊은 나이에 미 간에 주름이 완전히 자리를 잡혔다. 그러나 크리스는 갑자기 던필을 나무라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는 내게 답을 구하듯 기다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근위기사들의 시선이 내 게 집중되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라크 황자와 브뤼셀 황후, 후궁들이 받아야 할 관심을 내가 전부 가져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의도하여 생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없었을 때부터 시라크와 황후는 지스카 르의 눈 밖에 나있었다. 내가 그들의 원망을 감수해야만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럼에도 내가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나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그래서다. 나는 그냥 동정하고 있을 뿐이야.” 던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동정이라고? 네가 황후 전하를?” “우습다고 생각하느냐? 이 웃기는 동정조차 오래 가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게 마음이 너그 러운 인간이 아니므로...... 오랜 과거에도 그러하였듯이.”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듯 크게 팔을 젖혀 돌아섰다. 엘 파셔의 황성이 넓게 펼쳐져 있 었다. 나는 성큼 길을 가로지르며 눅눅한 겉옷을 벗어버렸다. 옷을 옆으로 내밀자 마침 곁에 있던 크리스가 공손히 옷을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방 어색함을 느꼈다. 돌아보자 크리스가 뒤쪽에 멈추어 서있었다. 내가 건넨 옷을 내려다보면서. 근위기사들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던필 조차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웃으며 농담처럼 물었다. “지스카르의 명령대로 움직인 것뿐이겠지만, 매번 나를 도와줘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던 참이다. 그런데 이젠 지스카르가 나를 아주 받들어 모시라 하던가?” 크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페하께서는 너를 감시하라고만 하셨다.” “.......그래? 의외로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성격이군. 원한다면 이 일은 비밀로 해주지.” 나는 손을 흔들어주며 앞서 걸어갔다. 그때 크리스가 말했다. “너를 아주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다.” 다리가 멈추었다. 팔이 멈추었다. 나는 돌아섰다. 크리스를 똑바로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디서?”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하지만 이상하군. 나는 태어나 노예숙소 근방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언제 빈첸시오 성에 들른 적이 있는가?” “빈첸시오 성은 그때 첫 방문이었다.” “그렇다면 착각이군.” 나는 가차 없이 단언했다. 그랬기 때문에 크리스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착각이 아니다! 틀림없이 너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기억도 나지 않는다면서 어째서 그건 확신할 수 있단 말이냐?” “........” 크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돌아섰다. 한참 바깥 구경을 하며 다니다 보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일단 황제궁까지 돌아왔으나 침 실로 직행하지 않고 내원에 위치한 테이블에 주저앉았다. 오랜만의 바깥에 나온 탓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이번엔 공짜 외출이 아니었다. 너 같으면 돌아가고 싶겠느냔 말이지. 생각 없이 배를 어루만졌다. 갑자기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황 후궁에 불려가서 다과를 조금 먹었을 뿐. 그런데 기사들은 그것조차도 못 먹었다. “....이봐. 이건 농담으로 건네는 말이 아니라, 교대로 두세 명 정도 식사라도 하고 오너라. 다섯 명이 필사적으로 나를 막아야할 일이 생길 리는 없잖은가?” “........” 기사들은 표현은 안했지만 꽤 동요하는 얼굴이었다. 배가 고프긴 고팠나 보다. “프리츠, 커멘더스, 펠드란. 다녀와라.” 크리스가 말했다. 세 명의 기사들은 약간 주저하다가 곧 움직였다. 사람이 전부 사라지자마 자 던필이 의자를 하나 빼내어 척하니 앉았다. “아, 피곤하다! 아가야, 뭐 나올 게 있다고 하루 종일 빨빨대고 쏘다녀, 쏘다니길.” “던필.........!” 또 핏대 올리는 크리스를 내가 막았다. “크리스 경. 저 놈의 태도가 나도 탐탁치 않지만,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그쪽도 좀 앉 지? 어디서든 융통성은 필요한 법이다.” 크리스는 미간을 좁히고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저 놈도 지스카르처럼 남의 얼굴 쳐다보는 것이 취미가 되려나. 크리스는 결국 의자를 꺼내 앉았다. 던필이 턱을 괴더니 몹시 못마땅하게 말했다. “꼬맹이. 그런데 어찌 크리스와 날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다르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네 자신을 봐라. 같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아가야, 내가 첫 만남에서는 방심을 해서 추태를 좀 부렸는데, 이래봬도 근위기사단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강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황제폐하의 측근이 될 수 있었지. 덧 붙여 대 그랜트 공작가문의 장자이기도 하다!!” “네가 뭘 믿고 막 나가는지 그 이유를 지금 알았다. 크리스 경. 그대는 어느 가문 출신인 가?” 크리스는 묘한 표정을 짓고 날 쳐다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울펜가모트.” 엘 파셔에는 세 개의 종신 공작가가 존재하는데 그 중의 하나다. 그 중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이 울펜가모트 공작가문이다. 같은 공작가문에, 같은 기사, 나이까지 비슷해서 친해졌군. “그래서 결론은 실력, 가문, 외모까지 더해 모든 분야에서 크리스 경에게 뒤쳐지고 있다는 뜻........” “아! 배고프다!! 뭐 마실 거라도 없을까? 여기 보거라! 누구 없느냐!” 갑자기 던필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가 크게 소리쳐서 정말로 시종이 왔다. “무엇을 준비할까요? “술과 간단한 안주!” “던필!!!” 이번엔 실로 크리스가 핏대를 세울 만 했다. 그러나 던필은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데는 확실히 소질이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나는 앙꼴주. 연도는 따지지 않을 테니 평범한 것으로......” “앙꼴주가 뭐냐! 과실주나 다름없는 걸 술이라고 마셔? 어린나이에 타락하기로 마음먹었으 면 제대로 타락해야지. 앙꼴인지 앵꼴인지는 치우고 드래곤의 꼬리로 가져 오거라!” 던필이 끼어들어 마음대로 주문을 바꾸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치워. 나는 앙꼴주 외엔 마시지 않아. 취하는 건 질색이니까.” “왜 취하는 것을 꺼리지?” 질문한 것은 크리스였다. 새삼스러운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취하는 것을 꺼렸던 것은 암살에 대처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암살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누가 노예 꼬맹이 따윌 암살하려 들겠는가. “.......그러고 보니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던필이 시킨 도수 높은 술이 안주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잔을 세 개 늘어놓고 거기다 드래곤의 꼬리를 퍼부었다. “하하, 꼬맹아. 혹여라도 내가 곯아떨어진 뒤 탈출할 기회를 노릴 생각은 마라. 이 몸은 술 을 드럼으로 퍼다 마셔도 절대 취하지 않는 몸이시니까.” “던필.........” 크리스는 이마를 짚었다. 화낼 기력도 떨어진 것 같았다. 저런 상식 밖의 놈에게 그간 친구 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시달림을 당하였을 크리스 경에게 심히 동정의 표시를. 그러나 나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술을 보니 갑자기 목이 말랐다. “꼬마야.” 던필이 도발하듯 잔을 잠깐 들어서 보여주더니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걸 보고 나도 내친 김에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쿨럭! 쿨럭쿨럭!! 하악!!” “하하하하하!! 그게 얼마나 독한 술인데 초보자가 단숨에 마셔!!” 던필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거칠게 입술을 훔치고 다시 잔을 쥐었다. 그리고 남은 잔을 모조리 비워버렸다. “푸하!” “......아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랬지.” “기억하고 있군! 잔이 비었는데 채우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예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던필이 계속 잔을 채워주었고 나는 쉼 없이 술을 들이마셨다. 크리스가 약간 걱정스런 눈으 로 쳐다보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 잔걱정이 많은 녀석이구나, 너는.......” 눈앞의 풍경이 고정되어있질 못하고 마구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이다. 나는 어느새 아득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후우! 무리하는 것 같더라니.” 머리부터 거꾸로 바닥에 처박힐 뻔한 것을 크리스가 간발의 차로 붙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꼬마..... 레이. 정신 차려라.” 레이는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나, 완전히 취해서 반쯤 꿈 속에 있었다. 어머니처럼 따뜻하 고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레이는 갑자기 그 촉감과 냄새에 사로잡혀 크리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우응......” “어라? 조 녀석 봐라?” 던필은 무척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반면 크리스는 대단히 당황하여 레이를 떨어뜨리려고 애 썼다. “던필! 아이를 좀 떼어내!” “이봐 크리스, 여자가 달라붙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색하는 건가? 뭐 어때. 귀여운 주 정이잖아.” “멍청한 소리를!!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아이다!!” “그건 그렇군. 폐하 취향도 진짜 독특하지 않나? 처음엔 약간의 호기심과 탐색을 위해서 시 작했을 테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완전히 총애 받는 첩실 그 자체라니까? 꼬맹인 우리 아들 또래잖나. 그야 하는 짓을 보고 있노라면 도통 애처럼 안 느껴지지만.” “입 조심해라......! 아무리 너라도 선이라는 것이 있어!” “네네, 알겠습니다. 꼬마야~, 이러다 들키면 크리스가 기사단장직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단 다. 억하심정이 있는 게 아니면 좀 비켜주련?” 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되려 크리스의 옷깃을 꼭 쥐었다. 대답할 정신이 있었다면 첩실 운운 하던 순간 폭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이쿠, 요 놈 방긋방긋 웃는다. 이것 좀 봐.” 던필은 다시 킥킥 웃으며 레이의 뺨을 잡아당겼다. 레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크리스의 품 안 에 얼굴을 밀어 넣고 비볐다. 크리스는 더욱 당황하여 진심으로 소리쳤다. “던필!! 장난은 거기까지 해라!!” “하하! 그냥 내버려두면 잠들 테니 그때 데려가자.” “그때까지 이대로 있으란 말이냐!”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하잖나. 어차피 누군가가 안고 있어야 한..........” 갑자기 던필은 하던 말을 뚝 끊었다. 이미 어둠이 깔린 정원 한 쪽에 인영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테이블까지 걸어 나왔다. “폐, 폐하.” “폐하, 어찌 여기까지.......” 공기 중에 곤란함과 긴장이 섞여있었다. 하지만 레이에겐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는 좀 더 크리스의 품에 파고들어 냄새를 킁킁 맡았다. 땀 냄새. 사람 냄새. 좋은 냄새. 크리스는 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당황했다. “아....... 이, 이건.......” “이리 다오.” 지스카르가 손을 뻗었다.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그러나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였다. 크리스 는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레이는 지스카르에게 건네졌다. 레이는 약간 반항하며 싫은 기색을 보였다. 얼음 같은 목소 리가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품은 따뜻했다. 어딘지 익숙한 냄새도 났다. 몸이 흔 들리지 않도록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 배려도 어딘지 익숙하다. 레이는 어느 새 조금 안심했다. 레이를 안은 채, 지스카르는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크리스티안. 자네답지 않은 일처리 방식이군.” “.....죄송합니다.” “두 번 같은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 분위기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짓누르는 듯한 침묵이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지스 카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는 오늘은 하루 종일 무얼 하던가?” “허락된 범위 안에서 황성을 탐색했습니다. 물론 감시의 눈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정오 즈음에는 황후궁에 불러갔습니다...........” 크리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이의 외출이 끝나면 크리스는 언제나 당일 있었던 일을 자 세히 보고했다. 레이의 정체를 밝히는데 사소한 단서라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크리스는 가능한 신중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계산된 행동인지, 아니면 정말 동정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 습니다. 그러나 황후와 황자 전하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자주 황후전하와 마주치게 만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황후 전하께서 오 는 신년파티에 아이를 참석시키길 요청하셨는데, 그것을 고려해보시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노예를 파티장에? 그거 재밌겠다, 가 아니라 황후와 자주 부대끼면 꼬마가 고생할 텐데?” 갑자기 경박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크리스가 이를 꽉 깨물고 낮게 외쳤다. “던필! 네 놈!” 지스카르도 눈을 가늘게 떴다. “던필. 그대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삼가라.” “허어, 나도 같은 어릴 적 친구인데 직급 좀 낮다고 사람을 이렇게 핍박할 수가 있나. 근위 기사 단장님. 황제 폐하. 셋뿐일 땐 좀 자유로운 분위기를 허락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 …안 되나?” 던필은 머리를 푹 숙였다. 전생에 무슨 악업을 그리 쌓아 저런 인간들과 붕알 친구가 되었 나. 속으로 이래저래 투덜대며, 그는 결국 할 말을 끝까지 다 했다. “저는 어쩐지 꼬마가 굽실대고 다니는 걸 보기가 싫습니다. 저도 왜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파티장에 보내 건 반대입니다.” “.........” “.........” “오, 다들 동감하시나 보다.” 지스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갓 노예일 뿐이다.” 레이의 머리가 스르르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손을 들어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해주었다. 던필이 턱을 괴고 웃었다. 다소 무례한 태도였으나 지스카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던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아이를 거칠 게 다루고 싶지 않았다. 하지 만 틀림없이 그 아이는 노예였다. 노예는 노예로 대우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폐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크리스는 한참 생각한 듯 심각하게 말문을 열었다. “확신이 서지 않아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신(臣)은 어디선가 그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건 처음 이 아이를 발견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예?” 크리스는 일순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지스카르는 레이의 금발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불연 듯 머리 속에 떠올랐다. 단 한번 스치며 본 적 밖에 없는 그 사내. “........너는 누구지?” 지스카르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 주인공 인기투표 결과 레이군의 초 압승!!! 지스카르의 심리는 너무 앞서나가실 것도 없고, 딱 가지고 계신 정보만으로 추측하시면 될 듯 합니다. (아닌가?^^;) 당신이 지스카르라면 레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식으로도........... 그리고......... 리플, 감상 만세!!! /-ㅇ-/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당신은 한마디 날리고 가게 될 것이다!!!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8화 “그 노예는?” “여전히 폐하의 침소에 있다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어제도 침소에 머무셨습니다.” “이게 며칠 째야!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럴 수는 없어!” 시녀장의 대답을 들은 브뤼셀 황후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일국의 국모답지 못한 경 망한 행동이었으나 아무도 탓하는 이가 없었다. 황제는 브뤼셀 황후와 3명의 후궁을 두었고, 그 외에 첩은 한 명도 두지 않았다. 금욕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특별히 한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해서 곁에 둔 적이 없었던 것 이다. 그런데 이번에 마물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황제는 처음으로 첩을 만들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 게다가 13살짜리 아이였다. 덤으로 노예출신. 다소 의외이긴 했으나, 귀족가에서 미동(美童)을 첩으로 두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황제는 노예 소년을 아예 황제궁 침소에다가 데려다 놓고 잠시도 놓아주질 않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 어떤 무례한 언동도 모두 용납한다고 한다. 황제가 노예 소년에게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방에 쫘악 퍼졌다. 벌써 한달 째 독수공방하는 황후에게 측은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듣자하니 그 노예, 수상쩍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면서! 족쇄를 차고 있는 것도 그 탓이고! 헌데 폐하께서는 어찌 그런 아이를 곁에 두신단 말인가!! 어찌!!” “얘야, 그만 진정하거라.” 마크시 공작이 보다 못해 딸을 다독였다. 브뤼셀 황후는 겨우 몸가짐을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아니다, 네 마음은 내 이해하고도 남아. 그보다, 일전에 그 노예를 한번 만나보았다고 들었 는데 대체 어떤 놈이던?” “후, 제 앞에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더군요. 황제께서는 어찌 그런 미천한 것을 좋다고 곁에 끼고 계시는지!” “그건 의외군. 들어보니 굉장히 당돌하고 맹랑한 놈이라 하던데.” “저도 들었습니다만, 제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더군요. 그 놈도 누구 앞에서 기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게지요! 흥! 그때 제대로 혼쭐을 내줬어야 했는데!” 브뤼셀 황후는 코웃음을 쳤다. 마크시 공작이 그녀를 말렸다. “아서라. 황제의 총애가 그만큼 지극한데 함부로 손을 댔다간 뒷일을 감당하기가 너무 골치 아플 것이다. 전에 시라크가 그 노예에게 상처를 입혔다던데,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잘 다독거려주고.” “아버님! 시라크가 오죽하면 그러겠어요. 이걸 아시나요? 그 노예에게 손을 댄다고 폐하께 서 시라크에게 손찌검까지 했답니다! 세상에 그 어린 것이 얼굴이 발갛게 부어서..........” 브뤼셀 황후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기 시작했다. 노예 따위에게 홀랑 넘어간 건 그래 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뤼셀을 생각한다면 가끔씩 황후궁을 찾아 그녀의 체면을 차리게 해주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다른 건 다 제쳐놓고서라도 시라크 황자를 홀대하 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다. 13년 전, 지스카르가 아직 황태자에 불과하던 때였다. 그는 팽창정책을 중단하고 스트라스 와의 휴전을 주장했다. 하지만 황제를 포함해 대다수의 귀족들이 휴전을 탐탁치 않게 여 겼다. 그랜트와 울펜가모트 공작가문의 자제들이 황태자와 절친한 사이였으나, 당시의 가주 는 아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모든 이가 적이 되었고, 지스카르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그때 한 인물이 지스카르 황태자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바로 마크시 공작이었다. 그 는 외동딸을 지스카르에게 주고 아예 한 배에 올라 탄 다음,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 았다. 그 결과 지스카르는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고 무사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황제가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기 때문에 지스카르는 마크시 공작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마크시 공작가의 권세는 날로 커져갔다. 엘 파셔의 세 공작가문 중 가장 강성한 가문이 울펜가모트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됐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시간 이 흐르자 마크시 공작은 과도하게 권력을 탐했고, 황권의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 황제의 의도는 명백했다. 마크시 공작을 누르고 황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 노예를 더욱 싸고돌면서 브뤼셀 황후를 외면하고 있었다. 급기야는 시라크를 황위에 올리지 않겠다는 뜻까지 내비치는 중이었다. “아버님! 저희들이 황제폐하를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던가요. 그런데 이제 와서 토사구팽을 하겠다는 뜻이라면, 저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얘야! 누가 들을까 겁나는구나! 설마 황제께서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시겠느냐. 내가 그분을 위해 어찌했는데! 그저 황제께서는 자신의 권한을 좀 더 과시하고 싶으셨던 것뿐일 게다. 그리고 쓸데없는 잡음이 자꾸 생기는 건 전부 그 노예가 폐하의 침소에 들어앉아있기 때문이야. 내가 폐하를 알현해 그 노예를 쫓아내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다.” “후우, 그럼 저는 그 노예를 신년파티에 불러 톡톡히 창피를 주겠습니다. 물론 제 손을 대 지 않고요. 훗, 폐하께 이미 청을 올리고 준비 중이랍니다. 기대해주십시오.” “그래...... 브뤼셀. 그렇게 하면 된다.” 그들은 그제야 다소 불안을 덜었다. 시녀장에게 식사를 준비시키고 그들은 느긋이 부녀간의 시간을 나누었다. “뭐라? 날더러 파티장에 나가라고?” 수십 벌에 이르는 화려한 예복이 끝없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시중을 들기 위 해 십수 명의 하녀들이 바로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저 놈이 농담을 하는가,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지스카르는 농담이 너무나 안 어울리는 얼굴로 말했다. “규모가 그리 큰 파티는 아니다. 신년 파티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신년 파티는 거기서 왜 나오는 거야? 그보다 진심이냐?” 지스카르는 대답하지 않고 침대 기둥에 기대어 섰다. 어쨌든 진심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잠시 나를 이해시켜줄 순 없겠나? 노예를 파티장에 데려갈 생각을 하다니, 나는 지금 너의 용기에 훈장을 내리고 싶을 정도다.” “.....노예가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확실히 전대미문이나, 평민이 참석한 경우는 더러 있었 다. 첩실의 자격으로.” “하아?” 첩이니 뭐니 아주 기분 더럽게 만드는 단어가 거슬리긴 했지만, 일단 그보다 다른 쪽에 주 목했다. 그러니까 첩이라서 노예라도 파티장에 데려갈 수 있다는 뜻이다. 기가 막힌다. 스트라스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족이라면 다들 첩을 하 나씩 데리고 있기 마련이지만, 그걸 밖으로 드러내놓고 이야기 하진 않는다. 뭐 자랑이라고 첩을 다들 보는 앞에 데려간단 말인가? “이래서 엘 파셔 놈들은!! 헛소리 작작해라. 내가 미쳤다고 그런 자리에 가? 그것도 네 놈의 첩실 자격으로?!” “........네 의견은 고려할 생각이 없다.” “뭣! 좋아, 다른 건 넘겨놓고 나는 족쇄를 차고 있다! 이런 걸 달고 파티장에 나가라니 농담 이 아냐. 혹시 풀어주려고?” “고려해보았으나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미쳐도 곱게 미쳐!! 대관절 날 파티에 참석시켜서 뭐 하려고......!!” 말하는 중간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스카르가 눈을 좁혔다. “뭐지?” “멀쩡한 황후를 내버려두고 노예 따윌 옆에 끼고 가다니 웃겨서 그런다. 나도 웃기는데 주 위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나. 이로서 브뤼셀 황후는 더욱 뒷전으로 밀려나겠군.” 나는 웃었다. 마음껏 자조했다. 지스카르가 왜 나를 파티장에 데려가는지 알고 있다. 지스카 르가 섹스에 미친 짐승도 아닌데 어째서 나를 자기 침실에다가 가둬놓는 것인지, 그 이유는 깨달은 지도 제법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새삼스럽게 분통을 터뜨렸다. “족쇄를 채워 침실에 가둬놓고 아주 유용하게 이용하는구나! 내 정체를 탐색할 수도 있고, 허전할 때마다 가끔 성욕을 채울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황후를 견제할 수 있다. 내가 침 실에 갇혀 있은 지 한달이 훌쩍 넘었으니 너의 총애가 황후에게서 완전히 떠나갔음을 이제 모든 이들이 다 알 것이다. 이보다 더 유용할 수 있나! 멋지군!” 순간 지스카르가 뒤에서 턱을 잡고 와락 끌어갔다. 고개가 크게 젖혀졌고, 지스카르가 입술 을 덮쳤다. 혀가 입 안 깊숙이 들어와 내 혀를 휘감았다. 잠시 뜨거운 숨을 토한 후, 입을 다시 맞추고 격렬히 빨아들였다. 정말로, 너무나 당황했다. 주위에는 시종시녀들이 잔뜩 시립하고 있었다. “우, 으웁!!” 나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다가 팔꿈치로 힘껏 놈의 옆구리를 찍었다. 지스카르가 움찔하면 서 물러났고, 주위의 시종도 같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어쨌든 가까스로 놈의 손에서 벗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지스카르는 옆구리를 손으로 쥐고 일어났다. 그는 다시 내게 다 가왔다. “아, 알았으니까 하지 마!!” “무엇을 알지?” “나를 이용만 하려고 들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 지!”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모른 척 할 것 있나? 얼간이가 아닌 다음에야 다 안다. 지스카르는 미간을 좁혔다. 기가 찬 듯 황당한 듯 대충 그런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지스 카르는 기둥에 기대섰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브뤼셀 황후가 그렇게 신경 쓰인다면, 그녀를 위해서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느냐? 브뤼셀 황 후가, 시라크가 원한다면 네 비밀을 알려줄 마음도 있느냐?” “......비밀이랄 것도 없으나, 너답지 않은 질문이군. 내가 감정에 휘말려 중요한 사항을 쉽게 발설할 인간으로 보이던가?” “글쎄. 크리스티안이 그 방법을 추천하더군.” “그는 훌륭한 기사다. 훌륭한 계책까지 마련해주기를 바라지는 마.” 지스카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들은 훌륭하다.” “하아?” “시라크와 브뤼셀 황후는 무시해라. 어차피 그들은 잘라낼 싹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낮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파티에 나갈 준비를 해야만 했다. 회색 예복으로 전부 갈아 입고, 약간 덥수룩하게 자라있던 머리도 말끔하게 잘라서 손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으나 발목에는 여전히 족쇄가 매달려 있었다. 이런 부조화는 또 없을 것이다. “뭘 하느냐? 더 늑장을 부리면 늦을 텐데?” 나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제야 지스카르가 몸을 일으켰고, 시종들이 그의 어깨 에 묵직한 붉은색 망토를 둘러주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파티장은 일전에 봐두었던 중앙궁 1층 홀에서 열리고 있었다. 회장 앞에 도착하자 시종이 목소리를 높여 지스카르의 도착을 알렸다. 셀 수 없이 많은 등불을 밝혀 대낮보다 더욱 밝은 홀이 넓게 펼쳐졌다. 쟁쟁한 명성을 자랑 하는 고위귀족, 오만한 긍지를 가진 유서 깊은 명문귀족,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허리를 굽 히고 좌우로 물러서서 길을 내었다. 그들이 맞이하고자 하는 것은 지스카르였다. 그러나 지스카르의 곁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완 전히 압도당할 법 했다. 이런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익숙한 분위기. 익숙한 위압감. 마치 바로 어제도 십만의 가신을 호령한 듯. 신기할 정도로. 나는 회장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절그럭하고 족쇄소리가 크게 울렸다. 순간 엄청난 시선이 느껴졌다. 갑자기 홀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한 것도 내 자의식 과잉이 아니다. 호기심 가 득한 대중을 향하여 나는 차라리 웃어주었다. 지스카르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는 곧장 상석으로 향했다. “폐, 폐하. 오셨습니까.” 먼저 회장에 출석해있던 황후가 시라크가 데리고 지스카르를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을 창백 했다. 후궁이라면 모를까, 황후가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지 못하고 홀로 입장한 것이다. 얼 마나 꼴이 우스운가. 그건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였다. “황후의 청대로 아이를 파티에 참석시켰소. 신년 파티는 아니지만 관계없겠지.” “무, 물론입니다.” 지스카르는 시라크에게는 말도 걸지 않았다. 그대로 두 사람을 지나쳐 가장 상석에 자리한 다음, 옆자리를 가리켰다. 내게 앉으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다정한 언행을 보이진 않았으나, 노골적으로 무시당한 황후와 대비효과가 나타났다. 황후는 주먹을 움켜쥐고 시 라크를 다독여 지스카르의 왼쪽 자리에 앉았다. 그때 턱에 짧게 수염을 기른 풍채 당당한 노인이 다가왔다. 약간 황후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황제폐하! 실로 오랜만에 뵙는 듯 합니다. 이 늙은이의 알현 요청까지 뿌리치시다니 그리 도 업무가 바쁘시었습니까?” “그리되었소, 마크시 공작.” 황후의 외조부인 마크시 공작. 그는 황제의 앞에서도 기세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짐작케 했다. 마크시 공작은 나를 보고 대단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시간이 여의치 않으시다니 이런 곳에서라도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폐하! 이 늙 은이가 정말 충심에서 드리는 말이오니 새겨들어주십시오! 그 노예를 하루라도 빨리 내치 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제국에 가장 지엄한 분이셔야 할진데, 어찌 노예 따위를 곁에 두시려 하십니까. 게다가 계집도 아니고 사내아이라니요. 제발 그 총애를 거두십시오. 세상 의 이목이 폐하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상황을 주시했다. 나는 논란의 중심이었으나,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제삼자이기도 했다. 자아, 지스카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공작. 나는 그대의 학식과 지혜를 존중하오. 허나 그대에게 바란 것은 제국의 대소사를 관 장하는 것이지, 짐의 개인적인 문제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오.” 지스카르는 특별히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낮은 톤의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오히려 마크 시 공작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제가 아니면 또 누가 감히 폐하께 이런 쓴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이런 일이야 말로 제가 도맡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작이 그리 생각한다면 더 이상 정사를 꾸리는데 그대의 지혜를 구할 필요가 없겠군.” “폐,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공작의 눈이 커다랗게 경악했다. 지금 지스카르가 그 엇비슷한 선언을 했다. 공작을 억누르 는 것도 아니고 아예 배제시켜버리겠다고. 공작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지스카르는 잔을 들었다. 마크시 공작이 대답을 기다리는데도 그에 전혀 아랑곳 않고 천천 히 술을 마셨다. 기다리다 못한 마크시 공작이 다시 외쳤다. “폐하!!” 잔에서 입을 떼고, 지스카르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턱 끝으로 마크시 공 작을 내려다보았다. 근처에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문득 하나둘씩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유조차 몰라 고개를 두리번대는 자도 있었다. 갑자기 침묵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비정상적인 적막은 회장 전체를 장악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마크시 공작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이 비난을 하는 것도, 달리 무엇도 아닌 데 마크시 공작은 대단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스카르가 잔을 내렸다. 자그맣게 탁-하고 내려놓는 소리를 회장 내의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었다. “물러나시오!” 정중하게 들리나 거역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명령. 마크시 공작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비로소 그는 간신히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이를 악 깨물고 무시당한 분노를 다시 곱씹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트러블이 생길 것 같다. 애써 등장한 응원군이 허무하게 사라지자 브뤼셀 황후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자꾸 신 경 쓰이는 것이 싫어서 나는 지스카르에게 물었다. “돌아다니다 와도 괜찮을까?” “.......좋을 대로.” 나는 일어서서 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곧장 음식이 있는 곳으로 향 했다. 그 행동은 몇몇 사람들의 비웃음을 유발했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나는 조각 케이크를 몇 개 접시에 덜어 맛을 보았다. 보기에도 맛없게 생긴 게 진짜로 맛이 없다. 설탕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단맛을 제대로 낼 순 없나? “큭큭, 하긴 네가 언제 이런 진수성찬을 먹어봤겠어. 먹는 꼴이 정말 게걸스럽구만!” 크림만 살짝 입술에 대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렇게 비웃었다. 너무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래 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황후를 피해왔더니 이번엔 시라크 황자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온 건가. “죄송합니다, 전하.” 나는 앞뒤 없이 대충 사죄를 청하고 얼른 그 자리에서 피신했다. 그러나 시라크 황자는 이 를 무시당한 것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지? 아버님이 곁에 안 계시면 너 같은 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걸 모르나?” 바로 옆에 붙어있지 않아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외조부인 마크시 공 작이 무안을 당하고 쫓겨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조금만 더 생각을 하고 행동할 순 없는 걸까? 하다못해 자신의 모자람을 인식할 수는 없는가? 나는 덕지덕지 달라붙는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간에 사과만 하고, 나는 서둘러 돌아섰다. 순간 무언가에 발이 걸렸다. 아니, 시라크 가 족쇄의 사슬을 밟은 것이다.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와장창!! 짧은 사슬 때문에 넘어지는 순간 제대로 땅을 짚을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정말 꼴사납게도 파티장 가운데에서 요란하게 넘어지고 말 았다. 그러잖아도 여기저기서 눈총을 받던 중인데, 이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고개 를 돌려 나를 주목했다. “.......” 나는 심호흡을 깊게 했다. 그리고 묵묵히 땅을 짚고 다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는 데 다시 족쇄가 걸렸다. 시라크가 여전히 사슬을 밟은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비웃음과 통쾌함이 가득했다. “발을 치워주시겠습니까?” “너 따위가 뭔데 감히 내게 발을 치울 마라 하느냐?” “.......전하의 발밑에 사슬이 깔려 있습니다. 비켜주시지 않으시면 일어날 수가 없기에.” “족쇄. 그래, 이게 족쇄로군! 족쇄를 차고 당당하게 파티장에 출입하다니, 너는 창피라는 것 을 모르느냐?” 내가 음식을 집어든 순간부터 은근히 깔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라크 황자의 말 에 다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누군가 허리에 손을 넣어 나를 들어올렸다. “엇......” 도움을 받을 거라곤 생각 못했기에 나는 약간 얼떨떨해져 상대를 확인했다. 크리스가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준 다음, 갑자기 하늘을 향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크리스, 꼬마가 어떻게 나오는지 그냥 지켜보기로 한 거 아니었나? 내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정작 매번 나서는 건 너라는 거 알아?” 던필이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기사복장이 아니라 말끔한 의장복을 차려입고 있어 제법 공작 가의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빙긋 웃으며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꼬마야, 이번엔 제대로 쪽팔렸지?” “......하나도 안 창피했다면 거짓말일 터. 인정하겠습니다.” “오, 네게 존대를 들을 날이 올 줄이야! 너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구나.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런데서 반말 던지는 건 좀 심하지.” 그는 이제 머리카락을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하늘만 쳐다보던 크리스도 한숨을 쉬며 말했 다. “무릎을 부딪친 것 같던데 상처는 없나?” “대단치 않습니다.” “.........” “크리스가 마음속으로 외치길, 네게 존대를 듣는 것이 너무 어색하다고 한다.” “던필!!” 주위가 약간 술렁였다. 조롱만 가득하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크리스와 던필이 내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위 기사 요직을 꿰어 찰 만큼 뛰어난 실 력자들이었고, 얼마 안 있어 공작이 될 신분이기도 했다. “크리스티안! 던필! 네 놈들이.......!!” 잠시 동안 완전히 외면당한 시라크가 얼굴을 빨갛게 만들고 분개했다. 크리스와 던필에게 노성을 질렀으나 정작 분노에 찬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던필이 나를 등 뒤로 밀어 넣고 시라크에게 말했다. “전하, 장난은 장난으로 끝나는 편이 좋습니다. 이 이상 계속하시면 틀림없이 폐하의 진노 가 있을 터인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는 말씀입니까?” 지스카르를 들먹이자 그 효과는 확실했다. 시라크는 파랗게 질려 당황하다가, 이내 던필을 향해 이를 갈고 휙 돌아섰다. “어린애 퇴치 완료. 꼬맹아, 이제 숨통이 좀 트이냐?” 던필은 싱글거리며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시라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불연 듯 움직 여 시라크의 뒤를 쫓았다. 던필과 크리스가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무시했다. 시라크는 테라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크리스와 던필에게 제대로 무안을 당했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라크는 뒤늦게 내가 뒤따라온 것을 알고 벌컥 소리 질렀다. “네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닥쳐! 시건방진 노예 새끼가!” 시라크는 숨을 거칠게 쉬었다.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가 분노 때문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는 다시 발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라크는 1황자였다. 황제의 신뢰와 애정, 엘 파 셔의 모든 영광과 권위는 본래 시라크의 것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시라크는 그 모든 것을 빼앗겼다. 다름 아니고 노예 같은 것에게 치여 시궁창에 처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진정 모른단 말인가!! 동정은 받을 수 있어도 구원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네 놈 때문에, 네 놈 따위가!!” 분을 참지 못한 시라크가 주먹을 휘둘렀다. 던필에게 충고를 듣고 도망친 지 얼마나 지났다 고! 나는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거칠게 비틀어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으왁!?” 시라크는 크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귓불까지 벌겋게 만들고 입을 벙긋거렸다, “네, 네 놈이!! 네 놈이!!” “어리광도 작작해! 너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느냐?!” 나는 성큼 다가갔다. 시라크는 웃기게도, 자신도 모르는 새 뒷걸음 치고 있었다. 그것이 더 욱 화가 치밀었다. 나는 시라크의 팔을 다시 잡고 소리쳤다. “황제가 되고 싶다면 어머니를 버려! 그녀를 짓밟아 쫓아내고, 네 아버지에게 자신이 얼마 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 각인시켜라!! 친 어머니를 버릴 수 없다면 그녀와 외조부를 설득 시켜라! 손 안에 주어진 것만 누리고 더 이상 권세를 탐하지 말라고 설득해!! 그것도 할 수 없다면 황위를 포기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쥐구멍 아래로 숨어버려!!” “뭐, 뭐, 이, 이 놈이 지금 미쳤나!!” 시라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팔을 비틀어 빼냈다. 나는 더 이상 시라크를 붙들지 않았 다. 말없이 시라크를 주시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시라크는 조금 주춤했다. 그러나 이내 등을 돌려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여전히 굉장한 말을 줄줄 늘어놓는군.” 던필이 혀를 내둘렀다. 이야기 중간에 두 사람이 테라스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크리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서있었다. 그는 꽤 어렵게 입을 떼었다. “시라크 전하가 어찌 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심장까지 차가워질 수 있는 인간이라면 첫 번째 방법을 택할 것이다. 권력의 맛을 안 인간 을 감화시킬 수 있을 만큼 위대한 성인이라면 두 번째 방법을 택할 것이다. 목숨을 중히 여기고 현실을 인정할 줄 아는 자라면 세 번째 방법을 택할 것이다. 어리석고 경솔한 인 간이라면 아무 것도 택하지 않는다.......” 바람이 꽤 쌀쌀했다. 나는 다시 파티장 안으로 향했다. 크리스와 던필도 뒤를 따랐다. 목이 말라서 음료를 들고 다니는 시종을 찾았다. 시종은 내 키에 맞춰주기 위해 허리를 낮 추고 쟁반을 내밀었다. 나는 쟁반 위에서 음료를 골랐다. 그런데 모조리 다 술 뿐이었다. 잘 하다가 결정적인 실수를 한 시종이 뒤늦게 말했다. “아! 과실음료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됐다.” 난 술잔 가운데 대충 아무거나 골라서 집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던필이 키득키득 웃었 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웃지?” “혹시 술에 취한 뒤에 네가 뭘 했는지 알고 있냐?” 나는 갸웃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침대였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냥 정신을 잃 었다고 여겼는데 달리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갑자기 크리스가 내 잔을 뺏어갔다. “그만 둬.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음료를 마시는 편이 좋지 않나?” 던필은 더욱 키득거렸다. 그리고 크리스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다. 네가 그 날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크리스의 품에 막 엉겨 붙었 단다. 아주 볼만했지!” “내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크리스를 보았다. 크리스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 다. 그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 그러고 보니 어렴풋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꿈을 꾼 기억이 나는데....... 취하면 레브노아드의 정체성은 완전히 망각한 채 어린애로 돌아가 버리는 걸까? “그 뿐인 줄 알아? 갑자기 옷을 전부 벗어던지더니 크리스에게 키스를 하려고 덤벼들더군! 장난 아니었는데......” “헛소리로 살을 덧붙이지 마라.” 나는 잘라 말했다. 한참 신나게 나불대던 던필이 미간을 좁혔다. “뭘 믿고 그렇게 단정하냐?” “내가 그랬을 리 없다.” “허어? 이 놈 보시게.” 나는 크리스에게서 술잔을 뺏었다. 그리고 주위 눈을 의식해서 말투를 다시 바꿨다. 더 이 상 트러블이 생기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 “만취할 만큼 마시지 않으면 됩니다. 알아서 조절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잔을 입에 대었다. 그때 누군가 또 잔을 뺏어갔다. 나는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지스카르였다. 쟁쟁한 두 기사에 이어 황제까지 한 자리에 모이자 주위에 엄청난 눈총이 쏟아졌다. “마시지 마라.” “....폐하. 한 모금 마신다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갈증이 나서 그러니 돌려주십시 오.” “술은 금지다.” 지스카르는 무척 강경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명령도 질색이다. 나는 즉시 시종이 들고 있던 술잔 중 하나를 집어서 말릴 새도 없이 잔을 싹 비워냈다. 목 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확 솟아올랐다. 나는 약간 기침을 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 섰다. 마침 크리스가 그곳에 있었다. 그의 몸에 부딪히자 크리스가 어깨를 잡아 나를 붙 들어주었다. 그걸 보고 던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 벌써 취한 것?” “마시는 순간 즉시 취하는 사람도 있나?” “뭐, 확실히 취한 것처럼은 안 보이지만..........” 던필은 묘한 부분에서 말끝을 흐렸다. “폐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고분고분해질 명령에 따를 수는 없나?” 크리스는 나를 바로 세워놓고 두 걸음 정도인가 약간 멀찍이 물러났다. 지스카르는 아무 말도 않고 좀 전에 내게서 가져간 술잔에 가만히 입을 대었다. 특별한 사건 없이 무사히 파티를 끝낼 수 있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답답한 예복을 풀어헤쳤다. 시종들이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이제 겉옷만 벗은 참이건만 지스카 르가 손짓을 해서 시종들은 전부 물렸다. 갑자기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왜.......?” 미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지스카르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 상태로 침대로 직행했다. “뭐! 오, 오자마자!! 게다가 오늘 파티에 참석한 건 외출이라 할 수 없잖느냐!!” “하지만 오늘은 서류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서류를 받지도 못했어!” “그래. 짐은 오늘 아무런 약속도 한 바 없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지스카르는 침대에 앉아 등을 보이는 형태로 나를 자 기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미 반쯤 풀린 앞섶을 완전히 젖혀 손을 집어넣고 날 자기 품에 바짝 당겨 안았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어금니를 꾹 물었다. 피할 수 없다. 허리에 있던 손이 겨드랑이까지 훑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유두를 찾아냈다. 손끝으로 꽉 쥐는 느낌. 꼬리뼈부터 소름이 쫙 끼쳤다. “읏.....으.....!” “심장고동이 굉장하군.” 지스카르가 귓가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 입김 때문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머리를 가능한 옆으로 비틀어 떨어지려고 했지만 이내 지스카르는 다시 따라와서 귀 언저리에 입술을 댔다. “비, 비켜! 너.........!” “‘너’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라.” “뭐?” 또 다른 손이 뒤쪽에서 바지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대로 다리를 쓸어내리며 바지를 함께 벗겨냈다. 허리 아래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질겁을 하고 몸을 움츠리는데 지스카르가 나를 놓아주고 그대로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족쇄 때문에 위로 보는 자세로는 행위를 계속 하기가 어려웠다. 손이 엉덩이를 약간 벌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각오를 하고 시트를 가볍게 쥐었다. 그런데 뒤이은 것은 손가락도 페니스도 아니었다. 지스카르가 내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가져갔다. “헉?! 지, 지금.....!” 물기가 축축한 것이, 혀가! 항문 입구를 핥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 어깨를 경직시키며 바르 르 떨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너무 당황해서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뭐, 뭐, 뭐, 뭐하는 거야!” “보다시피.” 지스카르는 손으로 내 허리를 들어올렸다. 엉덩이가 위로 들려올라가자 그 사이로 얼굴을 다시 묻었다. 입술과 혀로 그곳을 핥았다. “으.... 하, 헉!!” 간지럽고, 뜨겁고,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느낌. 화끈-하고 얼굴부터 온 몸에 열이 채여 올 랐다. 나는 시트를 쥐고 그 감각에서 도망가려고 애썼다. 다리를 비틀고 움츠리며 가까스로 견뎠다. 그건 그야말로 무의미한 반항! 뭉클한 혀의 감각에 나는 빽 고함을 질렀다. “더럽잖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엉덩이를 양 옆으로 더 벌린 다음 집요하게 괴롭혀왔다. 손이 앞으로 돌아와서 내 페니스를 쥐었다. 미칠 지경인 것은 지금 내 물건이 서있다는 것이다. “하, 아아......! 하아.... 으으!” 부끄러워서, 기분이 이상한 것이 더욱 창피해서, 진짜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 나는 몸을 일으켜 진짜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지스카르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오히려 엉덩이가 더욱 들려서 지스카르를 더욱 편하게 해주었다. “좀..... 펴, 평범하게.... 윽! 으으.... 지....스카르, 지스카르!!!!” 마지막으로 고함을 크게 지르자 지스카르가 떨어졌다. 나는 헐떡거리면서 깊게 안도했다. 지스카르는 나를 바로 뉘였다. 그런데 이번엔 페니스를 입으로 물었다. “아! 왜 자꾸......!” 비키라고 손으로 아무리 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혀로 내 것을 핥으며 엄지손가락으로 항문 입구를 문질렀다. 그 상태로 잠시 동향을 살피다 이내 천천히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점점 움직임이 격해졌다. 지스카르는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바짝 고정하고 엄지만 이용해 넣 었다 뺐다하며 지독스럽게 괴롭혀 왔다. 입으로는 페니스는 뿌리까지 완전히 물고 빨아 당겼다. 나는 다리를 잔뜩 움츠렸다. 고개를 젖히고 헐떡이다가 다시 웅크려 몸을 떨었다. “그.....만..........” 나는 몸을 웅크리며 지스카르의 어깨를 붙들었다.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그만!! 비, 비켜!! 나.......!” 정말로 요지부동이다. 나는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외쳤다. “지스카르!!!” 지스카르가 약간 놓고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전부 다 사정해냈다. 아랫배가 뻐근할 만큼 굉장한 절정이었다. 미처 여운도 다 느끼지 못한 나를 지스카르가 안아서 자기 몸에 비스 듬히 기대게 앉혔다. “입으로 해주는데 약하군.” “.........!!” 축 늘어져 헐떡이던 나는 순간 눈을 번뜩이고 놈을 노려봤다. 지스카르는 내 뺨을 감싸 당 겼다. 잠깐! 이 놈이 키스하려는 거지!! “치, 치워! 최소한 씻고 오던지!” “........네 것일 텐데?” “내 거라고 안 더러우란 법 있나!!” 지스카르는 얼굴을 거칠게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빼려고 하자 손 으로 뒤통수를 꽉 붙들었다. 잡아먹을 것처럼 몇 번이나 입 안을 빨았다. 멀찍이 도망가는 혀를 따라잡아 기어이 엉켜들었다. 정말 지독한 키스였다. 좀 떨어질만 하면 다시 겹쳐오 고 또 빨아 당기고. 타액이 절제되지 못하고 온통 입가로 흘러내렸다. “하아!” 지스카르도 꽤 힘들었는지 크게 숨을 뱉고 떨어졌다. 나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숨넘어가 기 직전이었다. “허억허억! 하악!” 헐떡거리는 나를 지스카르는 강하게 품에 끌어안았다. 그가 말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마라.” 순간 나는 머리를 확 쳐들었다. 목소리 끝이 저절로 갈라졌다. “뭐야?! 지금 그 말 안 들었다고 이 짓이야?!” “이리 하면 안 될 이유는?” 지스카르는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숨이 죽은 내 페니스를 손으로 약간 거칠게 주물렀 다. “으.......” “노예에게 명령을 따르게끔 가르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지?” 나는 약간 어깨를 굳혔다. 그러나 금방 몸에 힘을 뺐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어느 모로 봐도 잘못된 점이 없군.” 지스카르는 나를 앞으로 밀어 침대에 쓰러뜨렸다. 아마 향유로 생각되는 것을 침대 맡에서 가져와 엉덩이에 쏟아 부었다. 손으로 한 번 쓸어낸 후 바로 페니스를 입구에 갖다댔다. “으..........!” 지스카르의 것이 항문을 벌리고 들어왔다. 나는 얼굴을 침대에 바짝 대었다. 오늘따라 내부 가 빡빡한 듯, 받아들이기 벅차다는 느낌이었다. 위로 밀려올수록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 어졌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면서 발로 시트를 끌었다. “으, 흐윽!” 묵직한 고통에, 이를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문득 등 뒤로 그림자가 졌다. 지스카르가 내 어깨에 얼굴을 대었다. “실언을 했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저음......... 조금 눈을 떴다. 흐린 시야로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어른거렸다. 따뜻하다. 어깨에 닿 아있는 온기, 오직 그것만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지스카르를 보았다. 그리고 크게 코웃음을 쳤다. “하, 뭐가 실언이냐. 네겐 노예를 필요한 용도에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 윤리적으로 도, 법적으로도 무엇 하나 잘못된 것이 없을 텐데?” 지스카르는 등 뒤에서 갑자기 낮게 숨을 쉬었다. 그것은 어쩐지.... 이를 테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다. 지스카르는 갑자기 내 페니스를 붙잡더니 허리를 꽉 밀어붙였다. “아으윽!!!” “그러면 마음대로 해도 되겠군.” “그.........!” 말은 그렇게 해놓고 지스카르는 페니스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팔로 품에 바짝 붙이고 숨소리를 맞추면서 삽입을 시도했다. 천천히 안쪽까지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놀라울 만큼 고통은 줄어있었다. “으응........” “레이.” 지스카르는 나를 부숴버릴 것처럼 꽉 안았다. 그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지스카 르의 팔에 바짝 기대어 웅크렸다. 고통이라고 해야 할지, 달리 뭐라고 해야 할지 그 감각을 견디기 위해서. “레이.” “부, 부르지 마.” 왜 저 놈이 내 이름을 부르면 이렇게 닭살이 돋을까. 나는 뜨거워진 숨을 토하며 거절을 표 했다. 그러자 내 페니스를 쥔 손이 약간 강하게 움직였다. 저릿한 느낌에 허리를 가늘게 떨었으나 뒤쪽이 지스카르의 페니스로 고정되어 있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뒤쪽에 정신을 빼앗길 듯 하면 앞쪽이 강하게 눌러왔다. 나는 다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우.... 으.... 아아........!” “참지 마라. 좀 더 말해......” 지스카르가 귓가에 바짝 입을 대고 속삭였다. 말소리는 웅웅거려서 잘 들을 수 없었다. 나 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스...카르......!” 지스카르는 내 몸을 뒤로 당겨 허리를 펴게 했다. 그리고 더욱 격렬하게 페니스를 움직였 다. 참을 수가 없었다. 아픔과, 그것보다 더 앞서는 감각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 아! 지, 지스카르!!!” 나는 다시 한번 뜨겁게 사정했다. 두 번째인데도 이렇게 격렬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 름이다. 모든 것이 전부 끝난 후에도 지스카르는 나를 아주 오랫동안 안고 있었다. ------------------------------------------- 크아! 힘들다!! ‘오늘’ 내로 다 썼다! ‘13살 레이와 30살 지스카르의 썸씽은 심한 게 아니냐.’, ‘로리킹님의 닉네임을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이런 감상을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흑흑~ 제가 로리킹 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두 사람의 나이는 정말로 피치 못할 선택이었습니다. 어흐흑~ 현재 지스카르의 나이(30살★) = 어린 지스카르의 나이(17살) + 환생한 현재 레이의 나이 (13살★) 지스카르와 레이의 나이 간엔 저런 공식이 성립합니다. 레이가 환생해서 크는 동안 지스카 르도 나이를 먹으니까요. 먼저, 저는 지스카르를 20대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30살을 넘기는 건 좀 심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의 선을 넘는 것입니다! 아저씨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스카르 나이를 최고한계선 29살로 설정하면, 레이의 나이는 12살이 됩니다. 13살 이 아닌 12살!! 중딩도 아니고 초딩입니다. 12살로 설정하고 가만히 보니 이마에 땀이 삐 질삐질 흐르더군요. 얼른 13살로 바꿨습니다. 결국 지스카르 30대 등극. 그렇다면 생각을 달리해서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어린 지스카르의 나이를 더 줄이면 어떨까? 그러면 지스카르도 20대로 회춘하고, 레이도 좀 더 성장할 수 있다! 현재 지스카르의 나이(30살) = 어린 지스카르의 나이(17살★) + 환생한 현재 레이의 나이 (13살) 위의 공식을 다시 한번 가만히 바라봅시다. 저는 좌절했습니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레브노아드와 지스카르는 라이벌입니다. 서로를 강하게 인식할만한 계 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7살도 안되는 지스카르가 검을 너무 잘 써서 전 세계 적으로 유명해진다는 게 인간적으로 말이 안돼. 게다가 휴전협정 시 꼬맹이가 사인하러 나온다면 진짜 웃기겠지요. 원래는 17세도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옛날엔 17살만 되면 성인 취급했다는 말도 있고, 16살은 정말 어린애란 생각이 드시지 않으시는지요? 고딩도 아니고 중딩입니..... 죄송합니다. 지스카르 어쩔 수 없이 17세 확정. 보시다시피 지스카르와 레이의 나이는 절충하고 절충해서 가까스로 결정된 나이입니다. 환 생한 레이의 나이는 최대한 높이고, 지스카르의 나이를 최대한 낮추는 작업을 하느라 고뇌 많이 했답니다. 하하하. .......솔직히, 겉은 어린애지만 속은 어른이라는 설정을 엄청 사랑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조 건이 되어도 레이군 절대 15세를 넘기지 못했을 듯. 잇힝♡ 때릴 거야?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9화 “체크 메이트.” 내가 가진 왕이 중앙에 올랐다. 나는 다시금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어이, 더 이상 내 상대가 안 되는데?” 지스카르는 무표정했다. 그 상태로 체스판을 한참 내려보았다.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말고 이제는 인정하시지? ‘밀고 당기는 머리싸움’은 내가 한 수 위라 는 것을 말이다.” 지스카르가 갑자기 하늘을 보더니 말했다. “들어가야겠군. 너도 그만 들어가거라.” 어느새 훌쩍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까워져 있었다. 꼬박 두 달 가까이, 나는 거의 방 안에 서만 생활했다. 이번에도 2주 만에 바깥 공기를 마신 참이었다. 그것이 단 두 시간 만에 마지막을 고했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체스에서 졌다고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건, 아마도 아 닐 거라고 생각한다. 최근 지스카르는 새벽녘에 나가 아주 늦은 시간에나 겨우 돌아왔다. 내색은 안하지만 평소 보다는 확실히 피곤해 보였다. 황후, 마크시 공작과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이다. 내가 외출을 금지당한 것은 그와 관련이 깊다.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에 수상한 놈을 함부로 풀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황후 일파의 음모에 휘말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내가 추측한 것은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나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바깥 일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던데,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조금만 알려줄 수는 없느냐?” 지스카르는 못 들은 것처럼 대답을 않았다. 나는 이미 몇 차례나 비슷한 질문을 했다가 묵 살당한 바가 있었다. “스파이일 지도 모르는 수상한 녀석에게 거기까지 이야기해줄 수는 없다 이거지. 그래, 마 음대로 해라. 너라면 알아서 잘 하고 있을 테고.” 실제로 관심은 가지만 걱정은 별로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무익한 질문은 않기로 했다. 금방 황제궁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자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도 않을 거대한 건물 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자아~ 이제 들어가면 또 언제쯤 나오려나? 불연 듯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달리 내가 할만한 일이 없을까? 내가 요즘 방 안에서만 지내느라 지나치게 한가해서 말이 야.” “서류의 양을 늘려주면 되겠나?” “그게 아니라!” 나는 멈추어 섰다.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햇빛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없어도 돼. 야외에서 할 수 있 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 나를 말려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말을 하다말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대로 욕구불만이었나 보다. 또 돌발행동이 튀어나 오는 걸 보면. “아니다. 못 들은 걸로 해.” “무슨 일을 원하지?” 이어지는 지스카르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녀석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주 사소한 문제도 큰 타격이 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이고, 지스카르는 일부러 위험 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지스카르는, 가끔 내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었다. “.......글쎄. 마음대로. 물 깃는 일이라도 시키던지.” 지스카르는 멀리 정원에 시선을 던졌다. 한동안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낮 시간동안 검이라도 배워 보겠느냐? 물론 감시 하에, 연무장 내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한 다.” “응?”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그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을 못했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진짜 허드렛일을 시켜도 나로선 할 말이 없을 텐데.” “........” “그런데 포로에 가까운 녀석에게 뭔가를 배울 기회를 주겠다는 건 심하지 않나? 그것도 검 을?” “내키지 않는다면 그만둬도 상관없다.” “아니, 받아들이겠어!” 서둘러 소리를 친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잠깐 떠오른 것이지만 실로 획기적 인 발상이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잠깐 지스카르. 검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배우면 안 될까?” “무엇을?” “마법.”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단박에 거절이 튀어나왔다. 지스카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 를 내려다보았다. “야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원하지 않았나? 마법이라니?” “아.... 갑자기 뭘 배워보라고 하니 생각이 나더군. 나는 검보다는 마법이 더 어울린다는 생 각 들지 않느냐?” 만약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마법을 배우게 되면 당연히 마정석도 주어질 것이다. 13살 어린아이의 육체이기 때문에 검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마법은 다르다. 마정 석이 손 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과거의 온전한 힘을 고스란히 되찾는다. 이 끔찍할 만 큼 무력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허락할 수 없다. 마정석의 보유량이 한 나라의 국력을 좌우한다. 노예에게 건네줄 만큼 흔 한 물건이 아니야. 검을 배우던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라.” 지스카르는 잘라 말했다. 동시에 기대도 무참히 잘려나갔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씁쓸 하지만, 지스카르는 나름대로 큰 배려를 해주었다. “알았다..... 검을 배우겠어.” 지스카르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크리스에게 말했다. “크리스티안. 네가 감시를 겸해 레이를 맡아라. 원치 않는다면 이야기해도 좋다.” “아닙니다. 실은 전부터 그 아이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스가 허락함으로서 나의 검술훈련 일정은 결정되었다. 부웅!! 나는 힘껏 검을 휘두르고 몸을 숙였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 이틀 정도 지났던가? 그동안 나는 크리스의 지시에 따라 단순 동작 만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불만은 전혀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기술보다는 체 력단련이니까. 머리가 가장 효율적인 검로를 기억하고 있고, 몸이 검을 휘두르던 감각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으며, 동체시력과 반사 신경도 건재하지만, 신체 조건만큼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13살의 근력과 악력은 정말 형편없다. 체력은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되어 금세 바닥 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한심하군.” “한심하다고? 내가 13살 때 어떻게 검을 휘둘렀는지 회상하고 나니 죽고 싶은 심정인데?” 연무장 주위를 확인하고 돌아온 던필이 참견했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후우, 잔소리는 사양하겠다. 내 스승은 크리스니까.” “그래? 그럼 크리스 단장님의 의견을 들어볼까?” 크리스가 마침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미간엔 트레이드마크 같은 주름이 딱 자리 잡고 있었 다. “네가 가진 기술과 감각은 대단히 노련하다. 타고난 몸놀림에 기댄 어설픈 것이 아니야. 그 러나 체구는 작고, 팔다리는 단련한 기미도 없고, 기본 체력조차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크리스티안. 내가 너를 가르쳐야 하느냐, 아니면 네가 나를 가르쳐야 하느냐?” 나는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되물었다. “.......좋다. 너는 이미 수준급의 검술을 체득하고 있다. 하지만 최고라고 칭할 수준은 아니 다. 미숙한 점을 찾으라면 끝이 없을 지경이지. 시범을 보이겠다. 내 검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마라.” 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하고 대단히 투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미숙한 자들과는 검 을 빼는 소리부터 다르다. 쿠-웅! 천지가 울리는 것처럼 무거운 발 구름. 크리스는 검을 횡으로 크게 베었다. 순간, 살갗에 소 름이 돋았다. 완벽하다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일검! 스으-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크리스는 검을 갈무리했다. 그의 지시대로 나는 마지막 동작 하나 까지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크리스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가볍게 팔을 휘둘러 긴장을 풀고, 검 끝을 바로 직선거 리에 보이는 깃발에 맞추었다. 나는 발을 내밀며 강하게 굴렀다. 철컥!! “윽!” 사슬이 짧다. 마음만 앞서서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족쇄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크게 비틀거렸다. 나동그라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랄까. 나는 불만스럽게 족쇄를 노려보았 으나 이내 다시 목검을 들었다. 앞으로 내밀고, 숨소리를 맞춘다. 그리고 중심을 밀어내듯 굴러라! 쿵! 부우웅! 깊은 파공성. 내 귀에도 그것은 대단히 만족스러울 수준이었다. “좋아.......!!”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크리스를 향해 물었다.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크리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는 겨우 대답했다. “....기대를 상회할 정도로.” “역시 인간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던필이 끼어들었다. 그는 실로 심각한 얼굴로 날 노려보았다. “이거 진심인데, 네 녀석 몇 년 안에 소드 마스터로 거듭나는 거 아냐? 지금 우린 그 역사 적인 순간 앞에 있는 거냐?”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라. 난 검에 별로 뛰어나지 않아. 기초 이해력이 좋을 뿐, 금방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또 이해 못할 소리를 하는군. 그건 무엇으로 확신해?” “내가 검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로 검에 소홀히 하겠다 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레브노아드가 처음 마법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유는 해독주 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마법이라는 학문 자체에 푹 빠져들었다. 만약 마법을 되찾을 수 있다면....... 검을 배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어디냐. 나는 미련을 덜기 위해 애썼다. 크리스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네게 황제폐하의 검을 보여주고 싶군. 검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다니.” “지스카르의 검?” 레브노아드가 살아있을 당시, 지스카르는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될 재목이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아직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는 뜻이다. 뛰어난 재능을 보이다가도 깨달음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들은 아주 많다. 하지만 나는 이미 4중 영창 주문을 성공시 켜 보인 바 있었다. ‘스트라스엔 레브노아드, 엘 파셔엔 지스카르’라고 해서 사람들의 입 에 함께 오르내렸으나, 사실 당시 지스카르가 지닌바 능력은 한 단계 격이 낮았다. 그때 두 제국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경쟁하고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내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자 엘 파셔도 그에 대항할 존재가 필요했으리라. 그 필요에 의하여 지스카르의 명 성은 다소 부풀려진 감이 있었다. 자아, 그렇다면 한번 확인해 볼까? 과연 지스카르가 마지막까지 허울만 좋은 호랑이였는지. “지스카르는 혹시 소드 마스터인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또 그런 상식적인 것은 모르는군.” “말하는 기색이 소드 마스터가 맞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지스카르가 몇 살에 마스터가 되었 느냐?” 크리스는 잠시 뜸을 들였고, 대답했다. “스물이었다.” “.......훌륭하군.” 나는 피식 웃었다.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때 던필이 얼굴을 디밀고 황당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뿐이냐? 크리스도 여태껏 다다르지 못한 경지를 10년 전에 벌써 정복했다는데.” “나는 충분히 감탄하고 있다. 얼굴 좀 치워주지 않겠나?” 던필의 얼굴을 밀어내다가 나는 문득 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엘 파셔의 황제가 스무 살에, 그럼 스트라스의 황제는 몇 살에 마스터가 되었느냐?” 황위 계승권을 가진 이들 중 검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자는 내가 아는 한, 단 한명뿐이다. 에드리히, 그 녀석이 반드시 황제가 되었으리란 법은 없다. 방계인 대공이나 공작이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나는 모든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과감하게 물었다. 던필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두개 폈다. “스물두 살! 스트라스의 황제도 괴물 같은 인간이었지만 역시 우리 황제님에 비하자면 한 수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 유치한 소리였지만 나도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아아, 이 정도는 통쾌하게 여겨도 되 겠지, 에드리히. “이런 걸로 경쟁심리를 불태우는 게 웃기는 일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기분 좋은 건 기분 좋은 거 아니겠냐? 스트라스의 황제는 물론이고 레브노아드 황태자도....... 아, 꼬마야.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라고 혹시 알고 있나?”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온 이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으나 사실 내심은 굉 장히 놀란 상태였다. 나는 가능한 별 관심이 없는 듯 대답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사람이 아니던가? 그는 왜?” “무슨 말이고 하니, 그 스트라스의 황태자가 인간에겐 불가능할 거라던 4중 영창을 약관 스 무 살에 성공시켜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거든. 그런데 황제께서도 스무 살에 소드 마스 터가 되는 진기록을 세움으로서 체면치레를 했다는 이야기지. 게다가 레브노아드는 중간에 독살당해 죽어버렸으니 이쪽의 판정승이라 할 수 있지 않겠냐?”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닭싸움 붙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묘한 기분이 었다. 이런 식으로 내 이름이 오르내릴 줄이야. “크리스. 너는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본 적이 있지? 당시 황태자였던 폐하를 모시고 휴전협 정 식장에 참석했으니까.” “본 적이 있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끄러미 크리스를 살폈다. 그는 더 이상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때 던필이 크게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끄응~ 그래서 결론은 스트라스 놈들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엘 파셔의 상대는 될 수 없다 는 것이다!! 이야, 갑자기 아주 상쾌한 기분인데?” “.........” 나는 검을 의미 없이 휘둘렀다. 그리고 슥 고개를 들었다. “강자들의 능력을 저울질하는 건 분명히 재미있는 일이다. 그런데 저울질은 제대로 해야 의 미가 있지 않겠느냐? 4개의 마법을 동시에 구현하는 4중 영창은 역사를 찾아봐도 전례가 없던 기술이었다. 그에 반해 20대에 근접한 소드 마스터는 역사에 드물게 등장하곤 했지 . 그렇게 생각한다면 엘 파셔의 판정승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몰라.” “뭐냐. 왜 갑자기 스트라스 편을 들어.” “흥. 여전히 천박한 놈이군!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편 가르기란 말이냐? 나는 단지 객관적 인 시선으로 다시 한번 평가해봤을 뿐이다.” “허허? 노예에게 천박한 놈이란 소리를 듣다니.” “아마 그런 소리를 들은 놈은 네가 전무후무할 것이다! 평생 수치로 안고 사는 게 좋겠군!” “너 어딘가 가시가 돋쳐있지 않냐?” 그때 크리스가 일어섰다. “잡담은 충분히 했는가? 레이, 다시 횡 베기 자세로 서라. 자세를 교정해주겠다.” “......좋아.” 나는 목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걸어 나갔다. 크리스를 스쳐지나가며 나는 문득 말했다. “크리스티안. 생각 이상으로 둔하군.” “뭐라고?” “아니다. 그게 정상이지.” 나는 현재 13살 어린아이, 그러나 당시 레브노아드는 21살의 완전히 장성한 청년이었다. 알 아보라는 것이 무리다. 게다가 크리스는 단 한번 스쳐봤을 뿐.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일정은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를 가르치면서 크리스는 고지식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 휘했다.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아주 빡빡하고 엄격한 일정이 이어졌다. 덕분에 더 이상 심심해 할 여가는 없었다. 매일 체력이 향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검술훈련은 아 주 만족스러웠다. 지스카르는 여전히 바쁜 것처럼 보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솔직히 말해 아주 굉장히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나는 오직 검에만 전념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 하루 일정을 마치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황제궁으로 되 돌아가던 중이었다. 문득 시야에 마탑이 들어오기에 멈춰 서서 올려다보았다. “마탑에 뭐라도 있냐?” 던필이 말했다. 순간 귀가 솔깃했다. 역시 저게 마탑이군. “별로. 그냥 한번 가보고 싶을 뿐이다. 하아, 검이 아니라 마법을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탑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리고 네 활동범위는 딱 우측까지다. 어서 움직여라.” “크리스 경, 구경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을 텐데?” 쓸데없이 옥신각신 대는 도중 마침 맞은편에서 오던 다른 일행과 마주쳤다. 상대는 보는 순 간, 나는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시라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더러운 노예 자식! 그 주제에, 검을 배우고 있다지? 아버님도 정말 어떻게 되신 게 아닌 가?” “시라크 전하. 황제폐하에 대해 그 같은 불경한 말을 입에 담으시고도 무사하실 거라 생각 하십니까?” 나는 똑바로 시라크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저자세를 취해줄 생각이 없었다. 웃기게도 시라 크는 내 시선에 약간 움찔거렸다. “네, 네놈이야 말로! 내게 이런 무도한 태도를 취하고 무사할 성 싶으냐?” “먼저 지나가십시오.” 충고를 했지만 시라크의 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바로 주먹을 쥐고 달려들지 않 는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발전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뒤로 물러서자 시라크는 약간 씩씩거렸다. 시비를 걸고 싶은데 상대를 안 해주니까 답 답한 것이 아닐까? 시라크는 계속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갑자기 발칵 외쳤다. “너, 너는?!” “예?” “그, 그러니까 넌 왜 안가고 있느냐? 이런 곳에서 뭐하려고?” “마탑을 보고 있었습니다.” “흥! 그렇겠군. 노예 신분에 마탑에 출입해본 경험이 있을 턱이 없지! 그곳은 대단히 신비로 운 곳이다. 혼자 움직이는 인형도 있고, 날아다니는 빗자루도 있지!” “하아? 그 무슨 허무맹랑한.” “뭐라고?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냐? 내가 만들어내라고 하자 마법사들이 바로 내 눈 앞에서 그것을 만들어냈느니라!” 순간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괴로운 심정이 되었다. 날아다니는 빗자루, 만들려면 못 만들 것도 없다. 빗자루에 그냥 부유마법을 쓰면 된다. 다만 그 귀중한 마정석으로 빗 자루 따윌 하늘에 왜 띄우는가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아마 시라크가 억지를 부리자 힘없고 불쌍한 마법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날아다니는 빗자루를 만들었으리라. “하아... 예. 그러셨군요.”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시라크가 인상을 썼다. “네 놈 지금 안 믿고 있지?” “하하.... 아닙니다, 믿습니다.” “안 믿고 있잖아!! 좋아, 따라와! 내가 증거를 보여주지!” “예?” 순간 그 얼떨떨한 심정이라니. 지금 시라크가 마탑까지 날 데려가겠다고 한 게 맞나? 크리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시라크 전하. 이 노예는 그쪽 방향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닥쳐라!! 내가 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아!! 크리스티안, 네 놈이 끊임없이 나를 우롱 하려 드는데, 내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황제폐하의 명이십니다.” “시끄러워! 그냥 빗자루만 보여주고 돌려보낼 텐데 무슨 문제야!!” 지스카르를 들먹이는데도 시라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심리가 훤히 눈에 보였다. 날아다 니는 빗자루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내게 보여주고 처음으로 진짜 승리감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와! 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시라크는 성큼 앞서갔다. 크리스에겐 마지막까지 황자를 제지할 권한은 없었다. 그가 고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슬쩍 웃었다. “여전히 잔걱정이 많군. 너희들이 감시를 제대로 하면 될 게 아니냐? 뭐 솔직히 마탑을 구 경하고 싶은 건 사실이다만.” 나는 적당히 진실을 섞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그러나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절호의 기회!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는 결국 못 이겨서 허락했다. 나는 시라크의 뒤를 따랐다. “시, 시라크 전하. 어쩐 일로 또 여기까지............” 마탑에 도착하자 늙은 마법사가 황급히 뛰어나와 그를 맞이했다. 그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라크의 방문을 대단히 반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시라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일전에 내게 보여주었던 물건, 그걸 다시 보여 다오!” “예? 그, 그건 치워버렸는데.” 부유마법에는 한계가 있다. 시라크가 사라진 다음 나는 빗자루는 다시 평범한 빗자루로 변 했으리라. 그 대답을 들은 시라크 황자는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뭐, 뭐라고? 당장 그걸 가져와! 아니면 같은 걸 만들어와! 못한다면 네놈들의 목을 전부 따 버릴 것이야!!” 마법사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였다.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에, 들어와서 기다리십시오. 얼른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마법사는 견습에게 안내를 맡기고 들어갔다. 우연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빌어먹을, 또 아까운 마정석 날리게 생겼군. 곧 마크시 공작이 축출당하면 더 이상 저런 덜떨어진 놈에게 시달릴 일도 없겠지.” 나는 노마법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포함 되어 있었다. 결국 지스카르가 황후 일파를 몰아내면서 일은 마무리 될 모양이었다. 제 어머니와 외조부가 몰락할 위기에 처했는데 시라크 황자는 그저 날아다니는 빗자루 따위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지켜보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순진무구하다. 어리석다! 우리들은 작은 방에 안내되었다. 자신만만하게 상석에 앉은 시라크는 히죽 웃었다. “훗! 기대해라. 네 평생 못할 구경을 지금하게 될 테니까!” “예.....” 나는 신경 쓰지 말자고 스스로 타이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응접실로 눈에 띄는 물 건은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에게 마정석은 목숨과도 같다. 이런데다 놓고 다닐 리 없지. 나는 찬찬히 기다리기로 했다. 곧 마법사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각각 짧은 봉을 들고 있었는데 그 끝에 달린 보석이 단숨에 내 눈길을 끌었다. 마정석이다!!! “자! 이 빗자루렸다? 좋아! 어서 보여 다오!!” “아.... 예.” 시라크가 빗자루를 들고 좋아하자 마법사의 얼굴에 경멸이 어렸다. 이미 시라크는 주위 사 람들에게 업신여김 당하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마정석이다! 마법사 하나가 빗자루를 들었고, 다른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온.” 주문이 떨어지자 웅-하고 마정석이 떨렸다. 기묘한 울림은 마치 서정적인 노래 소리 처럼 들렸다. “온.” 또 한번 주문이 떨어지자 마정석이 다른 음을 내며 떨렸다. 2중 영창. 마법사라고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 그 정도는 눈감고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영창의 음역을 보건대 부유 마법과 조명 마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였다. 빗자루가 천천히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빗자루 주변에 화사하고 신비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저것 때문에 조명마법이 한 번 더 사용된 거로군. 내겐 실로 희극이 따로 없 었지만 시라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보거라! 아주 대단하지? 네 평생 볼 수 없는 걸 보여주는 거다. 이 몸에게 감사해!!” “예, 굉장한데요.” 나는 싱긋 웃었다. 갑자기 애들처럼 호들갑을 떨어서야 이상할 것이다. 시라크는 내 반응이 그리 열렬하지 않자 약간 불퉁해졌다. 나는 상관하지 않고 마법사가 든 마정석을 가리켰다. “그런데 혹시 저게 마정석입니까?” “그래. 마법을 사용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품이지.” “예, 듣던 대로 굉장히 신기하군요. 굉장히 아름다운 울림이 이렇게...........” 양식이 있는 자라면 날아다니는 빗자루보다 저 마정석에 더 관심을 보이리라. 그래서 나는 마정석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정석에 대한 흥미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시라크 조차 그 사실을 깨달을 만큼. 불통해있던 시라크는 이내 눈을 반짝 빛냈다. “훗, 가지고 싶은가 보지?” “......예. 혹시, 한번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헛소리 마라! 마정석이 얼마나 귀중한 물건인데 너 따위 노예에게 손을 대게 한단 말이냐?”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망하는 기색은 일부러 보이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시라크는 몸이 달았다. 저 어린아이는 나를 안달나게 만들고 싶을 것이다. 그 게 아니 된다면 큰 은혜라도 베풀어 내가 넙죽 엎드려 감사하는 꼴을 보고 싶을 것이다. “이봐, 마정석을 가져와라.” “예? 전하. 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도 이것은.” “가져오라니까!!!” 1황자의 강압에 마법사는 눈물을 머금고 자기 마정석을 바쳤다. 시라크는 봉을 한바퀴 휘두 르다가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왜? 한번 만지게 해줄까?” “..........” “자, 이리 오너라. 그러면 조금 건드릴 수 있게 해주지.” 나는 일부러 크리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 어린애를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하는 눈빛으 로. 고지식한 기사단장님은 타인의 앞에서는 함부로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저지할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씩 서두르지 않고 시라크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녹색으로 빛나는 마정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쾅!! 그때 부서질 것처럼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지스카르! 내가 마정석을 쥐기 직전, 그는 단숨에 내 멱살을 낚아채 옆으로 매다 꽂았다. 나는 종이조각처럼 날아가 장식장에 심하게 처박 혔다. 부러지는 듯한 고통과 뭔가 온통 깨지는 요란한 소리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땅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무.... 무슨..........!!” 지스카르는 다시 다가왔다. 내 입장에선 거의 흉기나 다름없는 손으로 얼굴을 세게 후려갈 겼다. 나는 전보다 더 거칠게 장식장에 처박혔다. 일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나는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고개를 들었다. 지스카르를 노려보고 거의 악에 받혀 소리 질렀다. “뭐!! 대체 뭐야!!” 지스카르는 전에 없이 무자비한 손길로 머리채를 쥐어 벽에 처박았다. 그리고 팔을 뒤로 당 겨서 거칠게 꺾었다. 아니 꺾는 게 아니라 부러뜨리는 느낌이라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묶을 것을 가져와라!!” “예, 예!!” 누군가가 후다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스카르는 다시 노성을 터뜨렸다. “크리스티안!! 짐이 허락한 장소 이외엔 절대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하라고 명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폐하.” 지스카르가 이만큼 언성을 높이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 조차 목소리에 놀람이 배어 있었다. 마법사가 금방 밧줄을 가져왔다. 크리스가 대신 내 팔을 단단히 묶었다. 나는 두 번 벽에 처박히고 정신이 없어서 거의 반항하지 못했다. “끌고 가라!!” 지스카르는 다시 명령했다. 바짝 긴장한 기사들이 나를 짐짝처럼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아, 아버님........” 그때 시라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스카르는 성큼 돌아서서 다가갔다. 짜악!! “우왁!” 뺨을 맞는 소리가 크게 울렸고 시라크는 바닥에 쓰러졌다. 지스카르는 아무 말도 않았다. 지극히 분노 어린 눈으로 아들을 노려보고는 차갑게 돌아섰다. 끌려가는 와중에 시라크가 잔뜩 웅크린 채 벌벌 떠는 것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크윽!!” 침실 바닥에 나동그라지자마자 머리 위에서 커다랗게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억지로 몸을 비틀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왜 이래!! 뭐야 갑자기!” 지스카르는 눈을 좁혔다. 갑자기 성큼 다가와 내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나는 장난감처럼 위로 번쩍 들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무엇이냐. 대체 네 정체가 뭐지?!” “그 따위 질문 지겹지도 않느냐? 이미 조사할 만큼 조사해봤을 텐데? 나는 레이다! 빈첸시 오 성에서 태어난 노예! 그것에 한 치의 착오가 있더냐?” 지스카르가 갑자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버둥댔다. “뭐? 그, 그만........!!” 팔다리가 묶여있는 상태에선 제대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새 완전히 알몸이 되 어버렸다. 지스카르는 나를 바닥에 다시 내던졌다. 머리가 호되게 부딪히는 바람에 나는 잠시 몸을 움츠렸다. 그 상태로 기다리는데 주위가 잠잠했다. 나는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스카르는 아 무 것도 하지 않았다. 벌거벗겨져서, 알몸으로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나를 높이 서서 내려 다보았다. 그 시선을 깨닫는 순간, 이제 와서 나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약간 움직여 일어나려 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발로 배를 짓밟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뱃속이 뜨거웠다. 견딜 수 없는 모욕감에 속이 들끓었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 깨부터 뻣뻣하게 굳어왔지만 몸을 가리기 위해 웅크리진 않았다. 모멸감에 턱이 바르르 떨려왔으나 그 자세로 있었다. 정말 이걸 원한다면, 그래. 마음대로 해라. 네가 원한다면 벌거벗겨 대중 앞에 내던진다 해도 내가 어찌 저항하랴! 방 안은 적막하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팔을 뻗 어 나를 끌어서 품에 안았다. 가늘게 경련하는 몸뚱이를 일부러 강하게 안았다. 나는 몸을 비틀었다. “........놔.......!!” 손이 허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소름 끼친다. 맨살에 닿은 손이 역겨울 만큼, 진저리 칠 만큼 끔찍했다. “이거 놔! 개자식아!” “입 다물어라........!” 지스카르는 나지막히, 그러나 분노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낱 노예 따위, 팔다리를 부러뜨려 고문할 수도 있고,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줄 수도 있 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짐은 그냥 너를 안았을 뿐이다. 짐이 그토록 아량을 베풀었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손가락이 거칠게 아래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두개가 단숨에 안쪽까지 밀고 들어왔다. “으으윽!!” 나는 헐떡거렸다. 고통에, 굴욕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놔!! 놓으라고!!” 내가 온 몸으로 저항하자 지스카르는 손가락을 빼고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리 를 붙잡아 위로 들어올렸다. 족쇄 때문에 다리는 어중간한 정도만 벌어졌다. 정말 우스운 꼴로 엉덩이와 치부가 훤히 드러났다. “지스카르!!!!!!!” “닥쳐!” 지스카르는 우악스럽게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자신의 페니스를 내 항문에 대 었다. 뜨거운 것이 닿자 나는 심하게 진저리를 쳤다. 거의 경련에 가깝게 저항했다. 그러나 전혀 소용없었다. 단숨에, 지스카르의 것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우으으윽!!!”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 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까 지 강타했다. 조금도 배려는 없었다. 지스카르는 빡빡한 내부를 오직 힘만으로 밀어붙여 끝까지 박아버렸다. “커헉!” 결국 숨이 모자라 나는 숨통을 터뜨렸다.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거칠게 들어왔다 빠 져나갈 때마다 괴로워서, 미칠 것처럼 치욕적이라서! 찢겨나는 것은 몸뚱이가 아니라 내 자존심이다! 입을 가로막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나는 소리 질렀다. “비키란 말이다!! 개자식아!! 죽여 버리겠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스카르는 매우 거칠게 양 다리를 손으로 밀어붙여 허리와 엉덩이를 완전히 위로 들어올렸다. 지스카르는 마치 찍어 박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윽!! 그.... 으윽! 아아아악!! 아................!!” 이번엔 반대로 등이 크게 밖으로 휘어졌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더 비명도 지르지 못했 다.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찍어 누르는 힘에 온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언제부턴가 나는 힘 을 잃고 머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지스카르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움 직이다가 어느새 멈추었다. 다리를 놓고 페니스를 빼고 물러났다. 나는 심하게 헐떡이며 멍한 시선을 아무데나 풀어놓았다. 지스카르는 손을 뻗어 내 얼굴에 가져갔다. 뺨에 살짝 닿은 순간 손은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다음번엔 격정적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귓가에 들리는 숨이 많이 거칠었다. 나는 약간 쉬어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말라고 했다....... 항상 몇 분 가지도 못하면서.......” “짐이… 내가 어째서 이래야 하느냐? 노예 따위가 굴욕을 느끼는 것이 무엇이 대수라고! 노 예 따윌 원하는 식으로 안는 것이 뭐가 문제라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키지가 않는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어이가 없었다.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알고 있을 거라고? 그럼 이번에는 내가 물으마! 어째서 노예 따위가 네 심정을 이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왜 노예 따위가 마정석을 손에 쥐는데 그렇게 정색하는 거야!!”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미약한 통증에 조금 떨었다. 귓가에 낮은 톤의 목소 리가 울렸다. “말해. 너는 대체 뭐지?” “내가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내가 뭔지, 네 눈으로 확인해라. 나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아...........” 지스카르는 귓가에서 뺨을 스치고 내려와 입술에 키스했다. 격렬하진 않았지만 깊은 키스였 다. 지스카르는 꽤 오래 입술을 머금은 뒤에 떨어졌다. 그때 다리 사이를 더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하........ 하지 말라고.......”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나마 남은 힘으로 약간 저항해 보았다. 한번도 이런 저항이 통한 적은 없지만. 지스카르는 손으로 다리 사이를 완전히 감싸 전체적으로 주물렀다. 손이 깊이 주무를 때마 다 허리가 약간씩 들렸다. 나는 허벅지를 바짝 움츠리고, 이를 악 물고 말했다. “크....으으...... 하지 마...... 좀.......” 지스카르는 몸을 숙여 앙 다문 입에 다시 키스했다. 아래 입술부터 부드럽게 물고 혀로 이 사이를 훑다가 틈으로 밀어 넣었다. 축축한 타액이 섞여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싫어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지스카르가 따라붙어 다시 깊게 들어왔다. 내 입술을 완전히 머금고 혀로 엉켜들었다. 입 안이 온통 놈의 타액과 내 것으로 질척해졌다. 키스하는 동안 손은 더 강하게 다리 사이를 압박했다. 지스카르의 손아귀에 내 허리와 엉덩 이는 완전히 들려진 상태였다. 나는 다리를 가늘게 떨며 힘들게 그 자세를 버텼다. 정말 힘들었다. 너무 아팠다! “하악! 좀 그만해! 구멍 있는데 아프단 말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살인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설마 또 넣을 작정은 아니겠지, 이 죽일 놈아!” 지스카르는 깊은 숨을 내쉬며 떨어졌다. 다리 사이를 만지던 손도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뭘 하려는지 다리 하나를 내 다리 사이로 넣었다. 그는 내 허리를 붙잡고 바짝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리가 얽히면서 지스카르의 페니스가 내 페니스와 맞닿았다. 민감한 곳에 놈의 촉감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왔다. “허헉! 무슨! 아.......!!” 지스카르는 손으로 자기 것과 내 것을 동시에 쥐었다. 서로 교차하여 쥐고 아래위로 움직였 다. 나는 기겁해서 진심으로 저항했다. 뒤로 묶인 팔을 억지로 비틀며 악을 썼다. 지스카 르가 내 팔을 붙들었다. “살이 찢어진다. 그만해.” “그, 그럼 너도 하지 마! 아!” 협상은 바로 결렬되었다. 지스카르는 자기 페니스에 내 페니스를 문지르듯 주물렀다. 나는 얼굴을 벌겋게 만들고 도망가려고 다리를 움찔거렸다. 아니 오히려 도망가려 했던 것이 역효과였다. 다리 사이에서 일순 뭔가 찌르르하고 올라왔다. “읏...아......! 아아...아아!!” 내가 고개를 젖힌 채 떨자 지스카르는 허리를 좀 더 갖다 붙여서 움직였다. 까슬한 음모가 거슬린다. 고환까지 완전히 밀착되어 감각이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시, 싫어!! 기분 나, 나빠. 나빠!!” “레이.” 지스카르가 내 머리에 입술을 대었다. 뜨거운 거친 숨소리와 낮은 목소리 울림이 전해졌다. 그는 다시 말했다. “하아, 레이.” “흐... 아....” 얽어든 사타구니가 아주 뜨거웠다. 그리고 땀으로 아주 습했다. 페니스를 쥔 지스카르의 손 도 미끈거리는 느낌이다. 손이 빠르게 당겼다 내리며 격렬하게 움직였다. 나는 어느새 과 도할 만큼 느끼고 있었다. 나는 발로 시트를 마구 밀어냈다. 그것만으로는 견딜 수가 없어 다리를 꼬아 지스카르의 다리에 바짝 붙었다. “아으....아아.... 지.......!” “조금 더........!” 지스카르는 내 머리를 쥐고 자기 품에 으스러뜨릴 듯 안았다. 독촉하듯이 손의 움직임을 더 욱 강하게 했다. 나는 괴로움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머리를 너무 꽉 안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공기를 삼키며 끝내 소리 지르고 말았다. “지스... 카르!! 지스카르!!!” “크읏!!” 낮게 신음을 토하며 지스카르가 절정에 올랐다. 나도 참지 못하고 전부 쏟아내고 말았다. 지스카르는 마지막 한 방울이 나올 때까지 페니스를 쥔 손을 움직였다. 아주 한참 후, 겨우 그 움직임은 멈췄다. 다리가 엉킨 상태로 한동안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차가운 냉기에 어깨를 살짝 떨자 지스카 르는 겨우 일어나 나를 안아 올렸다. 사타구니와 몸에 지스카르와 내가 쏟아낸 사정액이 묻어 온통 미끈거렸다. 아, 정말로 기분 더러워. “읏........” 지스카르가 침대에 눕혀주는 순간 나는 약간 몸을 움츠렸다. 어떤 때려죽여 시원찮을 놈이 강제로 쑤셔 넣어 후벼 파는 바람에 항문이 심하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지스카르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나를 눕혀주었다. 시트까지 당겨 몸을 가려준 뒤에 그는 말했다. “신관을 불러오마.” “피, 필요.......없어.......” 나는 힘들게 대답했다. 뒤가 굉장히 쓰라리고 괴로웠지만 이런 꼴을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 고 생각하니 차라리 아프고 말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신관을 불러오겠다.” 싫다고 말하고 싶은데 눈앞이 가물거렸다. 지스카르는 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 겼다. 숨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주위는 아주 고요했다. 지스카르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는 입술을 벌렸다. 입 모양이 익숙한 단어를 내뱉을 것 같 았다. “.............” 꽤 오랫동안 말을 기다렸다. 결국 지스카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중간에 정신을 잃었던 것일 지도 모 른다. 그만큼 기력이 없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 내가 남긴 말은 기억이 난다. “죽일 놈........” --------------------------------------- 5일 연재 체제 돌입? ㅡ.ㅡ; 어제 올리겠다고 거짓말 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사죄의 뜻으로 두 사람 프로필~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금발/ 녹색 눈동자 180cm 수준급의 검사이며, 4중 영창이 가능한 마법사. 위자드급의 대마법사와는 또 다른 강력함을 보이며 명성을 떨쳤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여유가 넘친다. 위기가 닥쳐도 싱긋 웃을 줄 아는 배짱이 있다. 과감하다. 판단하기 힘든 갈림길에 섰을 때, 직감에 따라 일단 밀어붙인다. 거만한 지배자 타입이지만, 기본적으로 유쾌하고 시원한 성격이다. 아랫사람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여기서 소개되는 레브노아드와 현재의 레이군은 미세하게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환생의 영 향이죠.) 엘 지스카르 파셔 흑발/ 어두운 푸른색 눈동자 181cm 스무 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당대 최강의 검사. 싸늘한 얼굴에는 표정이 전혀 없다.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일이 아주 드물다. 대단히 신중한 성격이다. 행동하기 전에 몇 번이고 더 생각한다. 강력한 카리스마, 특유의 위압감은 숨이 막힐 정도. 아랫사람들은 극도로 경외하며 절대 복 종한다. ★ 장성한 두 사람은 체격 차가 거의 없습니다.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0화 지스카르는 금장이 입혀진 상소를 펼쳐보았다. 마크시 공작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폐하, 그 노예를 내치셔야 합니다. 이 많은 상소를 보십시오. 노엘 대신관도 황실의 기강이 흐트러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찌 노엘신전에서 폐하의 잠자리에 대한 일까지 참견을 하려든단 말인가!!” 울펜가모트 공작이 크게 언성을 높였다. “모욕적인 일이군! 노엘 신전이 이 기회에 영향력을 높여보겠는 속셈인 모양인데!” “그런 무도한!! 어찌 노엘 신전이 설령 꿈에서라도 그런 망발을 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랜트 공작이 뒤를 이어 동조했고 꽤 많은 이들이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어전은 침실 노예 처분 문제로 연일 언쟁이 붙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으로 보이는 것이 전 부는 아니다. 이 논쟁의 물밑에는 황권 강화를 원하는 황제와 기존의 권세를 그대로 유지 하길 원하는 황후 일파의 대립이 존재했다. 만약 이번에 황후 일파가 황제에게 압박을 가하 여 침실 노예를 쫓아내는데 성공한다면, 앞으로도 사사건건 황제의 일에 간섭하고 좌지 우지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황권 강화가 실패하는 것이다. 마크시 공작은 가능한 동조자를 모아 황제를 압박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축출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오늘 마크시 공작은 꽤 기세당당했다. 그는 대신들을 향해 물었다.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소! 그 노예는 어째서 족쇄를 차고 있는 것이오? 애초부터 수 상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오?” 마크시 공작은 다시 돌아서서 지스카르에게 말했다. “폐하! 아니나 다를까 그 노예가 마탑에 숨어들어 수상한 짓을 벌이려고 했다지요? 폐하께 서 직접 그 노예의 무엄한 행동을 저지하셨으나, 아마 심려가 아주 크셨을 것입니다. 보 십시오. 그런 놈을 곁에 두시면 언젠가 진짜로 큰 화를 입을 날이 올 것입니다! 신이 드리 고 싶은 것이 그 말입니다! 명망 높은 노엘 대신관도 감히 폐하께 참견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사태를 미리 예지하고 충언을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전의 대신들이 약간 술렁거렸다. 마탑에서 생긴 소란은 제법 널리 퍼져 있었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끄럽던 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는 묵직한 음성 으로 말했다. “짐이 오늘 몸이 불편하여 일찍 폐장하겠소.” 지스카르는 몸을 돌려 회장을 빠져나갔다. 절대 몸이 불편한 사람의 걸음이 아니었다. “폐하!!” 마크시 공작이 목소리를 높였고, 지스카르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울펜가모트 공작과 그랜트 공작이 뒤를 쫓아왔다. 지스카르는 멈추어 섰다. “당분간 두 분 공작께 뒷일을 맡기겠소.” “일이 좀 틀어졌군요.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마크시 공작은 숨을 고를 기회를 가지 게 될 것입니다.” “허나 큰 문제랄 것도 없소. 돌아온 뒤 즉시 결착을 볼 터이니.” 울펜가모트 공작은 여전히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랜트 공작이 어깨를 들썩였다. “어쩔 수 없잖나. 벌써 10년이나 정기적으로 행해진 마물 사냥이네. 황제께서 마스터가 되 신 이래 직접 무위를 보이는 것으로 국력을 과시해왔지. 그런데 마크시 공작이 마음에 걸 린다고 갑자기 이번 일정을 취소해보게. 마크시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는 뜻이나 다름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폐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부를 것이네.” “알고 있네. 다만 답답해서 말을 꺼낸 것일 뿐. 이번에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사냥을 떠나시기 전에 마크시 공작을 쳐낼 수 있었을 텐데.” 울펜가모트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면 저도 마탑에서 일이 터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 노예는 너무 미심쩍습니다. 마크시 공작을 축출하고 이번 일을 일단락내 시거든 빠른 시일 내에 그 노예를 내치십시오.” 순간 지스카르의 얼굴에 칼날 같은 냉기가 어렸다. “공도 마크시 공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짐을 압박하기로 결정하시었소?” “트, 틀리옵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울펜가모트 공작은 대경하여 극구 부인했다. 지스카르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이내, 그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가 완전히 떠나고야 울펜가모트 공작은 겨우 숨을 토했다. “그러게 말을 가려해야지.” 그랜트 공작의 핀잔을 듣고 울펜가모트 공작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나는 폐하를 걱정하고 있는 것뿐이네!!” “마크시 공작도 그렇게 말하던데.... 아아, 알겠네.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 울펜가모트 공작은 한숨을 쉬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나는 진심으로 걱정일세. 황후를 견제할 생각이었다 해도, 왜 하필 그런 수상한 노예를 선 택하셨단 말인가. 폐하께서 단순히 그 노예를 이용하고 계신 것뿐이라면 좋겠지만 보다시피 그것은 아닌 것처럼 보이네. 마크시 공작의 말은 솔직히 구구절절 옳아. 언제가 그 노예 때문에 정말로 큰 화를 입을 지도 모르네!” “하긴, 걱정이 될만도 하지. 이번에는 제대로 줄을 선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13년 전 휴 전협정에 반대하고 황제폐하께 반하는 길을 선택하는 바람에 그랜트와 울펜가모트 공작가는 크게 위축되었지. 이번에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면 명망 높은 두 공작가는 이번에야 말로 쫄딱 망하는 거야.” “천박한 말투를! 자네가 그런 식이니 자네 아들도 그 모양 그 꼴이지 않은가!” 그랜트 공작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그래보여도 내 아들은 처신을 잘하는 편이라네. 진짜 문제가 되는 일을 저지른 적도 없고, 좋은 부인을 얻었고 아이도 낳았지. 그런데 크리스는? 떠올려 보면 결정적일 때 정작 큰 사고를 치는 건 자네 아들이었던 것 같은데?” 울펜가모트 공작도 눈을 가늘게 떴다. 두 공작 사이에 신경전 비슷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금방 그랜트 공작이 손을 흔들었다. “아아, 자네랑 싸우고 싶지는 않아. 실은 나도 그 노예에 신경이 쓰이네. 하지만 황제께서 다름 아닌 던필과 크리스에게 그 노예의 감시를 맡긴 모양이니 괜찮겠지.” “..........” 울펜가모트 공작을 창 밖을 내다보았다. 따앙!! 나무기둥을 힘껏 후려치고 나는 다시 물러서다. 타격감이 영 좋지 않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터엉!! 나무기둥이 부르르 떨렸다. 상당히 흡족할 만큼 타격이 들어간 것이다. 나는 매우 만족스럽 게 그것을 보다가 몸을 스르르 구부렸다. 이내 팔을 부여잡고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무리 하게 팔을 휘둘러서 근육이 찌릿찌릿했다. 크리스가 아직도 떨리고 있는 나무 기둥을 손으로 잡았다 “금방 바닥을 보일 거라 말한 것치고, 무서울 만큼 빠르게 발전하는군.” “끙.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다 집어치고 15살이 될 때까진 체력단련만 해야겠어.” 나는 투덜대며 팔을 털었다. 문득 소란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시녀들 셋이 수건 하 나를 가지고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크리스도 고개를 돌렸다. 시녀들이 그 시선을 눈치 채고 화들짝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우연히 수건을 손에 쥐고 있던 시녀가 다소곳하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말씀하신 수건, 가져왔습니다.” “더 소란 피우지 말고 물러나라.” “에, 예.” 시녀는 수건만 바친 후에 후다닥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피식 웃었다. “크리스 경, 인기 있는데? 하긴 일전에 파티장에서도 감히 다가오지 못할 뿐 많은 레이디들 이 자네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었지. 남편이 이렇게 인기가 많으니 자네 부인도 고생이 심하겠어.” “에구구~ 여전히 애늙은이 같은 꼬맹일세. 원래 13살 애가 부인 걱정도 하고 그러나?” 감시를 빙자하여 저쪽 그늘 아래서 빈둥대던 던필이 기지개를 펴며 다가왔다. “크리스는 아직 결혼을 안했다. 얼굴 잘났지, 출신도 좋지, 능력도 있지, 거기에 미혼? 인기 가 넘칠 수밖에 없는 조건 아니냐! 내 생각에는 이거 아주 고의적인 것 같단 말이야. 여 자에게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내심은...........” “결혼을 안했다고?” 던필의 헛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리스는 30대에 가까웠다. 기사들이 결혼을 늦게 하는 감은 있지만, 아직까지 혼자라는 것은 신체에 ‘어떤 이상’이 있지 않고야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던필이 손을 잘래잘래 저었다. “내가 사창가에 끌고 가봐서 아는데 크리스를 성불구자가 아니야. 아니 왜 어린애한테 이런 노골적인 설명을 해줘야 하지? 그런데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단 말 이야.” “흐음!” 크리스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헛기침을 했다. 미간에 골이 잔뜩 패인데다가 대단히 불 유쾌한 표정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럼 왜 아직도 결혼을 안했느냐? 말하기 곤란한 이유인가?” “여자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 지금까지는 시간도 없었고.” “관심이 없다니 그 얼굴을 가지고 안타깝군. 덧붙여 기사일로 바빴다고 변명은 통하지 않는 다. 시간은 던필도 똑같이 없었을 텐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쪽은 이미 결혼을 한 모양이 잖은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던필이 품에서 호들갑스럽게 뭔가를 꺼냈다. “암! 결혼했다마다! 금쪽같은 딸내미도 하나 얻었지! 한번 보겠나?” “하아? 딸 그림을 매일 들고 다닌단 말이냐?” 나는 던필의 방정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림이 아니라 마법으로 투영한 영상을 종이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마정석이 원료로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마법은 아주 비싸다. 그런데도 일부러 이런 걸 만들고 다닌다는 것을 통해 던필의 열렬한 딸 사랑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딸은 던필은 하나도 닮지 않았다. 은발에 파란 눈동자가 아주 사랑스러 운 예쁘장한 꼬마였다. 던필이 딸 자랑을 할만도 하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어때? 제 엄마를 아주 쏙 빼닮았다니까? 이름은 ‘크리스티나’라고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크리스티안을 올려다보았다. 요즘 들어 항상 인상만 쓰고 다니던 크리스가 더더욱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을 보고 던필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딸이 태어나면 꼭 한번 이런 이름으로 지어보고 싶었는데 정말로 딸이 태어나지 뭐냐. 게다가 은발이 크리스를 좀 닮지 않았어? 어떠냐, 우리 크리스 정말로 예쁘지? 얼 마나 귀여워, 우리 크리스!” “........딸 이름으로 장난을 치다니. 그에 동의한 네 아내도 보통 인물은 아닌 모양이구나.” “내 아내가 되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나는 혀를 찼다. 거금을 투자해 저 그림을 만들고, 일부러 품에다가 넣어 다니는 것은 딸 사랑보다 크리스를 놀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이라면 충분히 가 능성 있다. 수련하느라 이마에 맺힌 땀이 뚝하고 손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크리 스가 양 손으로 수건을 받쳐 건네주었다. 별 생각 없이 얼굴과 목을 훔쳐내다가 문득 고 개를 돌렸다. 크리스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원수처럼 자기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수건을 들었다. “돌려줄까?” 던필이 다가와서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크리스, 네 심리 조금은 이해하는데... 흐음. 그래도 보는 남들 눈도 있으니 다음에는 좀 주의하는 게 좋겠다.” “알고 있으니 일부러 충고해줄 필요 없다. 것보다 이거 치워! 던필! 제대로 경계를 서지 못 하겠나?!” 내가 계속 웃어야 할지 달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좀 전에 도망쳤던 시녀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한 사람을 안내하여 오는 중이었다. “지스카르?” 순간 크리스와 던필이 바로 기립했고, 좀 떨어져서 주위를 경계하던 근위기사들도 서둘러 뛰어와 황제를 영접했다. 나도 일단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황제 대우해주는 것은 거 기까지다. “이 시간에 한가하게 어쩐 일이지? 벌써 황후 건을 마무리 짓지는 못했을 텐데?” 지스카르가 시선을 주었다. “무엇으로 확신하느냐?” “걱정 마. 누가 정보를 흘려준 것은 아니니까. 마탑에서 그렇게 소란을 벌였잖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유리한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것 같더군. 그러기에 어린애도 아니고 생각 좀 하고 움직이지 그러느냐? 황제폐하께서 체통 없이 직접 뛰어와 주먹부터 날리니 소문이 퍼지고도 남지.” 나는 감정을 실어서 말했다. 저 놈에게 맞은 얼굴과 상처 입은 하반신이 아직도 덜 나아서 비 오는 날마다 욱신거린다. 신관에게 치료받아서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아직 완치는 안 되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아마 상황이 안 좋았을 텐데, 날 방에 다시 가두지 않고 계속 검을 배우게 해주었다 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정도 맞은 건 하루 만에 치료할 수도 있지만, 한번 잃은 권력은 되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황후 및 외척을 중심으로 권력 체계가 재편성되면 엘 파셔 전체 가 큰 혼란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의외로 조언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말해줄 수는 없느냐?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네가 알 바 아니다. 노예의 조언이 필요할 만큼 궁지에 몰려 있지도 않다.” “.........” 나는 싱긋 웃었다. 오냐 그러시냐. 그렇다면 신경 끄시겠다. 지스카르는 연무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검은 얼마나 발전했느냐?” “네가 알 바 아니지.” “..........” 지스카르는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안.” “예, 폐하. 검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습니다. 신체상의 제약으로 힘과 속도가 느리지 만 기술만은 이미 일류에 가깝습니다.” 처음으로 크리스티안에게 악감정을 느꼈다. 의미 없이 검을 휭휭 휘두르며 나는 말했다. “그래봤자 내 검 실력은 평범한 일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다. 검에는 흥미가 없으니까.” “배부른 소리를 하는군.” “뭐?” “단지 흥미가 없을 뿐이지 않느냐. 네 선택지는 검 하나뿐이다. 없는 흥미도 만들어내지 않 으면 아니 될 터. 신체기도, 동체시력, 반사 신경, 판단력 모든 조건이 훌륭하다. 체계적으로 지도를 받으며 검에 모든 것을 투자한다면 짧게 잡아 5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겠지.” 갑자기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근위기사들이 황제의 앞인 것도 잊고 경악하고 있었다. 실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가 직접 하는 말이다. 막연히 떠받들어주는 말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5년 후면 18살이다. 너보다도 빠르군. 너무 되는대로 말하는 게 아닌가?” “이미 기초가 잡혀 있으니까.” “.......” 나는 검을 휘둘렀다. 후웅-하고 깊은 소리가 들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런 곳에서 5년이나 검을 휘두르고 있을 생각은 없다.” 지스카르는 내 목검을 응시했다. 황제가 침묵하는데 함부로 입을 열만큼 용기 있는 자는 없 었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문득 지스카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달 정도 마물 사냥을 나가야 할 것이다. 따로 준비할 것은 없겠지만 알아 두거라.” “마물 사냥? 이런 시기에?” “빠질 수 없는 행사다. 마크시 공작 건은 돌아오는 즉시 처리할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대충 납득했다. 나는 다른 부분에 관심을 돌렸다. “그런데 나도 데려가겠다고? 성 밖으로?” “.......버려두고 가면 마크시 공작이 기뻐하며 잡아먹으려 들 테니.” 지스카르는 돌아서서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등을 돌렸다. 아 직 훈련이 남아있었다. 아직 바람이 찼다.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1화 마물 사냥은 봄과 가을에 각각 두 번씩, 총 네 번에 걸쳐 행해지는 행사였다. 장소는 행사 때마다 적당한 마물 서식지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되었다. 형식적인 행사가 아님을 온 나 라의 백성들에게, 특히 경쟁국인 스트라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10년 쯤 지나면 짜고 치는 행사가 되기 마련인데.........”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소수정예의 기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였고, 후방에서는 마법사까지 대 기 중이었다. 여가로 즐기는 토끼 사냥과는 차원이 틀리다. 이건 나무랄 데 없는 마물 퇴 치라 할 수 있었다. “꾸웨엑!! 꾸웨엑!” 오크를 한 쪽으로 몰아붙이는 동안, 몇 마리가 도끼를 휘두르며 좌측 포위망을 뚫고 튀어나 왔다. 숫자는 스무 마리 정도. 몇 마리라고 말하기엔 수가 너무 많군. 게다가 무기를 사용할 만큼 나이를 먹고 기술이 늘어난 오크는 타고난 신체능력에 힘입어 여느 기사에 버금갈 수준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스릉-. 근위기사는 뒤에 남고 지스카르만 홀로 검을 뽑아들었다. 엘 파셔 황가에 전해지는 보검이 매끈한 은색 나신을 드러냈다. 나는 팔짱을 꼈다. 지스카르가 직접 나섰다. 이건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바닥에 강하게 구르는가 싶더니 지스카르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보통 사람이 봤다면 틀림없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말 그대로 눈 한번 깜빡 할 사이 5미터를 넘어 검을 크게 휘둘렀다. 투콱! 번쩍하는 흰 빛과 그 둔중한 소리는 동시였다. 순간 가장 선두에 있던 오크의 머리가 허공 에 높이 튕겨 올랐다. 푸화악!! 시뻘건 핏물이 사방에 뿜어져 나왔다. 그보다도 한 발 먼저, 지스카르는 오크의 무리 속으 로 돌진해 검을 내찔렀다. 푹하고 오크의 뱃가죽 한가운데에 검이 박혔다. 그 즉시 팔을 비틀어 검을 위로 잡아 빼며, 지스카르는 다시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우지직! 쩌걱!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미 몇 번이나 봤지만, 볼 때마다 감탄한다. 검이 뽑혀나갈 때 뱃가죽부터 어깨까지 박살이 난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커다랗게 포효했 고, 거의 동시에 또 한 마리의 오크는 허리가 반 토막 나서 시뻘건 내장을 쏟아냈다. 지 스카르는 아직 오라(aura)도 사용하지 않았다.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힘! 하지만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절정에 다다른 기술이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 게다가 어찌나 빠른 지, 오크는 항상 검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쩌렁쩌렁 비명을 질렀다. 우적! 오크를 짓밟고 튕겨나가며 지스카르는 베고, 다시 돌아서며 베었다. 항상 일 검에 하나 씩. 얕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목이 날아가고 뱃가죽이 완전히 찢겨나갔다. 한 번 검이 지나간 뒤 오크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끄웨엑! 꾸웨엑!!” 압도적이라는 수식어조차도 부족했다. 순식간에 오크 중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마구잡이로 돌진하던 오크들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허둥지둥 멈춰 섰다. 놈들은 바닥까지 긁으며 방향을 선회해 죽어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방금 필사적으로 도망 나온 곳을 향해서. 지스카르는 뒤를 쫓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충분히 오크들이 도망간 것으로 보이자 그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일제 사격!!”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팔을 뻗었다. 바우우우웅!! 와우우우웅!! 수십 개의 나팔이 동시에 합주를 시작한 것처럼 웅장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십 개의 휘황한 빛 무리가 한 곳에 내리꽂혔다. 콰과과과광!! 쿠웅!! 콰아앙!! 나무가 통째로 부러지고 조각조각 으스러졌다. 땅이 뒤집어졌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으깨 져 나갔다. 하물며 오크 따위, 사지가 갈가리 찢어지고 겨우 남은 살덩어리조차 다시 한번 난도질당했다. 이것으로 이 일대의 마물 퇴치는 사실상 완료되었다. “훌륭하군. 특별히 나무랄 곳도 없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나와 함께 안전한 곳에서 대기 중이던 시라크가 눈을 흘기고 있었다. 시라크는 황후와 마크시 공작의 반대에도 불구, 고집을 피워 마물 사냥에 합류한 상태였다. 황후 일파는 시라크를 지키기 위해 힘들게 자 기 수하의 기사들을 일행에 집어넣었다. 마물 사냥에 합류해서 시라크가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어린애의 변덕과 고집만 있을 뿐. 한심하다. “레이. 이리로 오너라.” 그때 의외의 사람이 나를 불렀다. 마법사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럼포드 자작이 조금 능글맞 게 웃더니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런 눈치 없는 녀석 같으니! 폐하께 이걸 갖다 드리려무나. 네가 갖다드리면 아주 기뻐하 실 게야. 직접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드리는 것도 좋고. 알았지?” “.........” 한쪽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상대가 악의가 있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험한 말이 튀어나오지 않은 것뿐이다. “쓸데없는 참견이오, 럼포드 자작!” 그때 크리스가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럼포드 자작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덧붙여 나도 약간 당황했다. 던필이면 몰라도 크리스가 이런 식으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럼포드 자작. 그 아이는 그런 일을 시키기 위해서 데려온 것이 아니다.” 어느새 돌아온 지스카르가 딱딱하게 말했다. 럼포드 자작은 양쪽에 끼여 식은땀을 뻘뻘 흘 렸다. 지스카르의 뒤를 쫓아온 장교들은 묘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잠깐 이상해졌지만 어쨌든 마무리를 위한 최종 보고가 쏟아졌다. “폐하, 총 다섯 개의 부락을 발견했고 전부 불에 태워 완전히 소각시켰습니다.” “오크 부족이 약탈품과 보물을 숨겨둔 땅굴을 발견했습니다. 현재 발굴 확인 작업 중입니 다.” “황혼이 지기 전까지 살아남은 놈이 없는지 샅샅이 수색하라. 특히 수컷은 한 마리도 남겨 놓아서는 안된다. 수색이 끝나면 오늘은 이 곳에서 밤을 새고, 내일 다시 이동한다.” “예!”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크의 시체가 끝 도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역시 수가 조금 많다. 이 정도 부락이 다섯 개나 된다는 사실도 걸린다. “외람되나.........” 그다지 크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좌중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닌 척 내게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방금 퇴치한 오크 부족은 제법 번성한 축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면 아시겠지만 이 주변 은 먹을 것이 풍부한 지역이 아닙니다.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어 인적이 끊어진지 오래되 었으니, 인간을 약탈해서 생활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고려해봄직한 문제라고 생 각합니다만.” 장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쾌함이 아니라 놀라움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섞인 표정 이다. 장교 중 한 명이 물었다. “이 정도 오크 부족은 평이한 규모라 할 수 있다. 번성한 축에 든다니 무슨 근거로 그런 소 리를 하느냐?” “물론 부족의 규모가 아주 큰 것은 아니나, 전사 계급의 수도 많고 활동이 다소 왕성한 편 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호오? 그런 미세한 기준까지 네가 어찌 알고 있지?” 탐색하고자 하는 의도가 눈에 보였다. 나는 그 자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저는 이 지역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황제폐하께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뭐라고?! 지금 내가 사전조사를 엉터리로 했다 이 말이냐?” 갑자기 체구가 큰 장교 한 명이 벌컥 소리 질렀다. 그는 거의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보았 다. 그때 지스카르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덩치는 움찔해서 움츠러들었다. 지스카르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미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흑혈기사를 전방에 내세워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 네 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무시했다는 거로군. “폐, 폐하?” 그러나 사전조사를 했다던 장교는 시퍼렇게 질려서 외쳤다. 사전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는 것은, 황제를 시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스 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사전조사가 아무리 철저해도 그건 두 달 전의 일이다. 얼마든지 마물의 분포나 상황이 바 뀔 수 있는 시간이다. 더욱이 상황이 변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대의 충의를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니 물러나라.” 겨우 상황은 진정되었다. 그러나 장교들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명령을 이행하기 우 해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 그 시선들은 아주 집요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따가운 시선이 하나 있었다. 시라크가 이를 악 물고 나를 노려보다가 휙 돌아섰다. 더 이상 한심하다는 감정 외엔 크게 피부에 닿지 않았다. 고뇌도 없고 반성도 없고 변화도 없다. 그 어리석음이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나는 시라크의 존재를 뇌리에 서 지웠다. 다음날도 행군은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 해가 뜨자마자 출발하여 오후가 되었을 때 또 다른 마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오우거와 만티코어, 상위로 분류되는 굉장히 강한 마물이었다. 하지만 개체수가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퇴치하러 온 입장에서는 떼로 몰려다니는 오크가 훨씬 더 피곤한 존재였다. 먼저 행동지침을 정한 후 기사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가쁜 숨을 돌리며 이마 의 땀을 훔쳐냈다. 지스카르가 돌아보았다. “피곤한가?”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매우 피곤합니다!” 나는 한 쪽 다리를 들었다. 사슬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끌려왔다. 저 몰상식한 놈, 몬스터가 득실대는 산에 데려가면서도 족쇄를 안 풀어주다니. 그동안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 한 게 몇 번이던가. 원래 체력도 좋은 편은 아닌데다가 추락사 당하지 않겠다고 발밑에 온 신경을 다 쏟다보니 힘이 배로 들어간다. “두고 가려니 신경이 쓰였는데 마침 잘 되었군. 거기서 얌전히 쉬고 있거라.” 그래, 힘 빠져서 어디 도망도 못 가겠구나. 나는 아예 근처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지스카르 에게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시라크가 씩씩대고 있는 것이 언뜻 보였으나 더 이상 관심이 일지 않았다. 나는 다리를 굽혔다 펴며 피곤을 풀었다. “우워워어!!” 쿠웅!! 콰지직!! 4미터는 너끈히 되는 오우거가 산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괴성을 질렀다. 사람 몸뚱이만한 몽 둥이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나무기둥이 수수깡처럼 우둑우둑 부러졌다. 그 엄청난 위압감 이라니! 하지만 기사가 견제하고 마법사가 공격주문을 사용하는 것으로 오우거의 수는 착실 히 줄어들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오우거들은 눈이 시뻘개져서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놈들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잠깐만 방심해도 큰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을 터. 솔직히 말해 나는 약간 흥미진진하게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상처라면 대기 중인 신관이 해결해 줄 것이고. 엘 파셔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도 하고 싶고.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도 들고. “저, 전하! 그렇게 앞으로 나가시면 위험합니다!!” “상관없잖아. 조금 가까이서 보는 것 정도는!” 그때 시라크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호위의 애가 타는 만류도 듣지 않고. 내가 눈을 동그랗 게 뜨고 쳐다보았고 시라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시라크는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드러냈다. 그때 오우거를 상대하던 기사 중 한 명이 주의를 흩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우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몽둥이로 기사를 후려갈겨 말 그대로 날려버린 다음, 포위망을 뚫고 뛰쳐나왔다. 어그적-하고 뒤늦게 기사의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즉사했음이 틀림없었다. “아!”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여유는 어느새 전부 날아가고 존재하지 않았다. 오우거는 곧장 시라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놈은 거대한 손으로 시라크를 낚아챘다. 그 모든 것은 실로 찰나의 일이었다. “시라크!!”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족쇄에 발이 걸려 크게 휘청거렸다. 꼴사납게 넘어지 기 직전, 누군가가 어깨를 붙들었다. “....크리스!” “위험하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물론 지금의 나는 오우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족쇄에 발이 걸리지 않았더라도, 나는 스 스로의 의지로 멈추어 섰을 것이다. 나는 시라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질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 “시라크 전하께서!! 저지해라!! 붙잡아야 해!” “쿠워어어어!!” “으와악! 마법사!!” 기사들이 오우거를 저지하기 위하여 고함을 질러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오우거는 마구 몽둥이를 휘두르며 무작정 앞만 보고 돌진했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 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오우거는 시라크를 손에 거머쥔 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지스카르는 뒤늦게 도착했다. 지스카르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폭주하는 오우거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과연 막았을까? 분위기는 미묘했다. 어린애가 몬스터에게 붙잡혀갔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살아있을 가 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시라크를 구해야 한다고 인정에 호소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황후파에 속하는 귀족들이 그들이다. 시라크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황후일파는 자연스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들의 권세는 시라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해가 지기 전까지 오우거를 전부 소탕해야 한다. 인력을 나눌 여유는 없다.” 지스카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결정이었다. “이럴 수가! 그래도 친아들이거늘!! 어찌 그 핏덩이 같은 아이가 바로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 을 뻔히 구경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어찌!!” “어디서 감히 그 같은 망발을 지껄이시오! 시라크 황자는 이미 죽었소!” “죽다니!! 새끼를 잃은 오우거는 대신 다른 종족의 아이를 잡아가는 습성이 있소! 이번에도 그 경우임이 틀림없소! 지금 당장 가면 그 분을 구할 수 있단 말이오!” “흥! 꿈보다 해몽이 좋구려! 이게 전부 호위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겁도 없이 오우거 앞 에 달려든 결과지! 그 생각 없는 행동에 휘말려 아까운 기사만 목숨을 잃었으니!!”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황후파 귀족들과 황제파 귀족들이 핏대를 올리며 말싸움을 시작했다. 진흙탕 속에서 시라크 의 최후는 확정되고 있었다. 쿵! 지스카르가 검을 들어 바닥을 찍었다. 지스카르의 모든 행동은 일부러 과장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기묘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함을 지르고 말싸움을 하던 자들이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이외에 주변의 모든 웅성거림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지스카르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비를 마치고, 다시 오우거를 사냥한다. 하나씩 오우거의 둥지를 없애다보면 시라크를 발 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 하지만 그런 방법은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지금 당장 그 분을 찾으러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렇게 흔적도 확실하고......!!” 지스카르가 시선을 주었다. 반발하던 황후파 기사는 움츠러들었다. “무작정 흔적을 쫓아 깊은 곳까지 들어가다가 예상치 못한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계획대로 하나씩 둥지를 칠 것이니 재정비를 하라!” 더 이상의 이견은 없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 되었다. 사람들은 명에 따라 움직 이기 시작했다. 지시를 전부 내린 후, 지스카르는 내게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느냐?” “전혀.”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지스카르는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그 헤아릴 수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는 어쩐지 이야기해주고 싶어졌다. “정이 많은 자는 좋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현명한 군주는 아니다. 입맛이 쓰겠지만 너는 적 절한 선택을 했다.” “물론이다.” 지스카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잠깐 뒤에 배치된 의자에 앉아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스카르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에서 황후파 귀족이 아예 통곡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황제파 귀족들은 예상치도 못한 행 운이었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시라크는 아직 어린아이기 때문에 황제의 결 정을 너무 잔혹하다고 수군거리는 자도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바로 나 자신 조차도! 불연 듯 뒤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커다랗게 울렸다. 지스카르는 여전히 검을 닦아내고 있었 다. 나는 지스카르에게 다가갔다. 성큼 내딛어 그의 바로 앞에 섰다. “만약 시라크를 구하고 싶은 것이라면.........!” 지스카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네 이야기가 아니냐?” “내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네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약 시라크를 구하고 싶은 것이라 면!” 나는 손을 뻗어 지스카르의 얼굴을 꽉 붙들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라.” 지스카르는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어울리지 않게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짐은 황후와 시라크를 잘라내겠노라 말하였 다. 벌써 잊었느냐?” “시라크는 언제든지 잘라낼 수 있는 존재다. 굳이 지금 마물의 소굴에 던져놓고 비참한 최 후를 맞게 할 필요가 있느냐?” “그렇다면 더욱 가당치 않다. 시라크는 어차피 제거될 것이다. 만약 짐이 시라크를 구하길 원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렇다고 한들,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지만 구하고 싶을 것이다! 값싼 연민이든, 다른 무엇이든, 그 모든 하찮은 감정으로 인하 여!” 내 안목이 생각보다 얕다는 것을 겨우 깨닫는다. 지스카르는 가장 이성적이고 자신에게 엄 격한 군주였다. 동시에 지스카르는 언제나 시라크의 아버지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 랫동안 시라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너는 인간인 까 닭에 때때로 그 가슴 뜨거운 욕망을 채우지 않으면 안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엄격해져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때에,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틀림없이 행하 는 것이다!” 지스카르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거칠게 끌어당겨 입술을 덮쳤 다. 전부 삼켜버릴 것처럼 강하게 빨아 당겼다. 그는 잠시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입술을 머 금어 힘껏 빨았다. 나는 당황해서, 얼굴까지 시뻘겋게 되어 놈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것이 통하지 않자 주먹으로 턱 아래를 힘껏 찔렀다. “큭!” “허헉!!”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곁눈질로 슬쩍 주위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시선이 이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닌 척하면서 쉴 새 없이 이쪽을 힐끗거렸다. 나는 그냥 접시 물에 콱 코를 처박고 죽고 싶어 졌다. “그보다 죽여 버릴 테다....... 개자식........!” 지스카르는 턱을 문지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아주 짙은 푸른빛이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차가운 손등으로 쓸어 올리고 일어났다. 지스카르는 앞으로 걸어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무시무시한 꼬맹이. 뭐먹고 자라면 13살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 던필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나는 얼굴을 훔쳐낸 후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그때 누가 또 입을 열었다. 던필이 아니라 크리스가 말하고 있었다. “경이로울 정도다.” “내가 노예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테지.”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멀리 앞을 내다보았다. 시라크를 찾기 위한 구출대가 조직되고 있었 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족쇄까지 차서 거치적대는 주제에 나는 구출대에 끼고 싶다고 요구 했다. 지스카르는 째려보다시피 했지만 결국 승낙했다. 오우거가 남긴 흔적을 따라 가능한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큰마음 먹고 구출하기로 결정했 는데 정작 가보니 죽어있더라는 시나리오라면 정말 허무할 것이다. 수색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오우거의 습격이 없었던 것이 가장 유효 했고, 시라크를 잡아간 오우거의 둥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물길이 지나는 계 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자 막다른 곳에 얕은 토굴이 나타났다. 눈에 익은 오우거가 그 근처 를 배회하고 있었다. “시라크는........ 저기다!” 토굴 안에 짚이 잔뜩 깔려있었는데 시라크는 그곳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특별한 외 상을 보이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검을 꺼내들고 나를 응시했다. “조심해라.” “족쇄만 풀어줘도 내 안전이 상당수준 보장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내심 원한을 담아 받아쳤다. 내가 무리해서 따라오겠다고 한 것이지만, 족쇄를 차고 험한 산을 탔더니 이젠 발목이 욱신거릴 지경이다. 그때 누가 목에 팔을 휘감았다. “엇, 던필? 이거 놓지 못해!” “어허 그렇게는 안 되지. 폐하, 저희가 목숨을 걸고 어디 도망 못 가게 단단히 지키고 있겠 습니다.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목숨을 걸고 지켜 보이겠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크리스까지 한마디 덧붙였다. 본질적으로 가벼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가, 던필이 하는 말 엔 솔직히 크게 관심을 안주던 지스카르가 일부러 크리스에게 눈길까지 주었다. 지스카르는 돌아섰다. 그의 손안에 들린 보검에서 하얗게 빛 무리 같은 것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던필을 뿌리치고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소드 오라였다. 지스카르의 것은 처음 보는 것이다. “하!” 지스카르는 흔치 않게 기합을 토하며 뛰어들었다. 수컷 오우거가 몽둥이를 휘두르려고 했으 나 그것보다 한발 먼저 지스카르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수십 번 칼로 두드려야 겨우 흠집이 나는 오우거의 뱃가죽이 썩뚝- 잘려나갔다. 틈을 주지 않고, 지스카르는 검을 상처에 다시 쑤셔 박아 힘껏 그었다. 뿌드득!!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집채만한 오우거의 몸통이 칼로 반 토막 나는 광경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크아아!!” 수컷의 죽음에 암컷 오우거가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 스러지는 오우거의 공격이다. 그것을 지스카르는 고개만 젖혀서 슬쩍 피했다. 그러더니 단칼에 오우거의 팔뚝을 잘라버렸다. 둘레만 50센티는 될 것 같은 팔뚝을! “......절대 저 검과 정면으로 부딪혀선 안 되겠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지스카르는 팔을 잃고 광분하는 오우거에게서 멀찍이 물러섰다. 그 는 크게 명령했다. “쏴라!”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했고, 화염 덩어리가 오우거의 머리에 명중했다. 머리통이 통째로 폭 발하여 산산조각이 났다. 몸뚱이만 남은 오우거는 천천히 무너졌다. 콰앙! 아니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다. 몸통만 남은 오우거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팔을 휘둘러 바닥이며 벽을 미친 듯이 후려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전부 짜낸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콰앙!! 쿠구쿵! 쿠르르르-! 오우거의 힘도 상상을 초월하게 강했고 근처의 지반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규 모가 작은 산사태가 나면서 흙더미 따위가 우르르 쏟아졌다. “우와악!” “물러서!! 다들 물러서라!” “폐하께서는!?”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재수 없게 위치가 나쁜 곳에 서있던 기사 하나가 완전히 모래 더미 에 깔려버리기도 했다. 나는 몸을 낮춰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지스카르와 시라크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특히 시라크는 토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했다. “레이!” 그때 지스카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소리가 들린 방향을 주시했다. 지스카르 는 어느새 토굴에서 시라크를 꺼내 와서 품에 안고 있었다. 절로 안도의 한숨을 튀어나 왔다. 뒤이어 웃음이 나왔다. 멍청아 남의 이름은 그만 부르고 네 걱정이나 해라. 저러다 깔 려 죽겠네. “위험해. 뒤로 물러나라.” 그때 크리스가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뒤로 끌어 당겼다. 나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모래나 자갈 따위가 계속 굴러 내려오는 중이었는데 족쇄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크리스의 인도로 나는 대충 안전한 지대까지 물러날 수 있었다. 쿠르르! 쿠웅! 산사태는 금방 멈추었다. 계곡 아래로 바위 등이 떨어지는 소리만 아련하게 들려왔다. 주위 를 두리번거리다가 지스카르를 발견했다. 무사한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돌린 후 크리스의 팔을 툭 쳤다. “도와줘서 고맙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고지식한 대답이었다. 나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그때 무언가가 다리를 와락 끌어당겼다. 순간의 일이었다. 나는 크리스의 품에서 아래로 쑥- 끌려나왔다. “――아!” 크리스가 나를 붙잡기 위해 내뻗은 손이 바로 코앞까지 닿았다가 어느새 저만치나 멀어졌 다. “어어엇?” 나는 비명보다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 었다. 족쇄 사슬에 나무뿌리라도 걸려있었던 모양이다. 부러진 나무가 계곡 아래로 떨어 지면서 나도 부록처럼 딸려간 것이다. 이대로 떨어지면 계곡 물이 아니라 바위더미 위에 떨어진다. 뭐야, 이런 식으로 죽는 거야?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따위야! “온!!!” 그때 누군가 절박한 외침에 들려왔다. 순간 내 몸뚱이의 무게가 사라진 것처럼 가벼워졌고, 추락하던 몸이 바람을 탄 나뭇잎처럼 거꾸로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다시 밑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으와앗?” 추락하다가 공중에서 한바퀴 회전까지 했다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럼에도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마법사가 기치를 발휘해 무게를 줄이는 마법을 쓴 것이라는 걸. 덕분에 방향이 바뀌어서 나는 물가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중간에서 한 번 튕겨 올랐 기 때문에 추락하는 가속도도 현저히 줄었다. “레이!!!”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지스카르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쳐주려고 했다. 이 썩을 놈아, 네 놈이 족쇄를 채우지만 않았어도! 첨벙!! 순간 빨려드는 것처럼 나는 물 속에 빠졌다. 수면에 부딪히는 순간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고, 그것보다도 위아래를 분간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리가 거치적거렸다. 맙소사, 족쇄를 차고 수영을 하는 게 가능한 거야? 계곡이니 물살도 거칠 텐데! 나는 되는대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럴수록 숨이 차올랐다. 숨이 부족했다! 공기가.....!! 지금 뭘 하는 거냐!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자 갑자기 이성이 돌아왔다. 우선 발버둥치는 것을 멈추었다. 힘을 빼고 먼저 수면이 어느 쪽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때였다. 몸이 물살에 밀려 휘몰아 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어딘가로 휙 끌려갔다. “푸하!!!” 공기!! 끌려간 곳은 수면 위였다. 나는 있는 대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물살이 다 시 나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냉정해지자. 족쇄는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만큼 길이가 있다. 침착하면 충분히 수영할 수 있어! 원래 말은 다 쉬운 법이다. 처음부터 발군의 수영 실력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고, 나는 상당 히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그 상태로 죽지 않을 만큼 어설프게 수영하면서 물살을 탔다. 한참을 떠내려가다가 우연히 바위를 잡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린 다음 물가를 향해 움 직였다. 바로 한 발자국 전만해도 헤아릴 수 없이 깊던 계곡물이 갑자기 허리높이만큼 얕 아졌다. 겨우 나는 지상에 발을 디디는데 성공했다. “하아! 하아! 하아!!” 나는 땅을 짚고 숨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나는 무릎을 털 고 일어나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고요했다. 다시 한번 주위를 넓게 살폈다. 상당한 거리를 떠내려 온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근처에 인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건 뜬금없이 탈출의 기회?” 어떤 마물이 어디쯤에 분포되어 있는지는 대충 기억해놓은 것이 있다. 여기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면 적당히 피해갈 자신이 있었다. 나는 먼저 물기를 짜서 옷을 정돈했다. 그리고 적당히 무기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나뭇가지를 구해 집어 들었다. “좋아, 그럼 가보실까.”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2화 지스카르는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가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여전 히 자잘한 모래 따위가 떨어지고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문득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품 안에 시라 크가 안겨있었다. 죽었을 아이는 살고 레이는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손 안의 핏덩 이를 똑같이 계곡 아래로 집어던지고픈 실로 잔인한 충동이 일었다. 지스카르는 팔 힘을 느슨히 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사람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지스카르가 움직일 때마다 전신이 짓눌리는 압박감을 느꼈다. 지스카르는 먼저 시라크를 병사에게 맡겼다. 다음에 고개를 돌려 크리스에게 시 선을 고정했다. “폐하. 레이가 계곡 아래로 떨어진 것은 족쇄 때문입니다.” 그때 던필이 입을 열었다. 지스카르는 눈동자만 움직여 던필을 내려보았다. 좌중은 동시에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느낌을 맛보았다. 심지어 던필을 무작정 끌어내고픈 충동까지 느 꼈다. “짐이 원인을 따지고자 했던가?” 지스카르가 엄히 물었다. 던필은 흠칫한 후 즉시 자세를 바로하고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죽여주십시오, 폐하! 신이 무도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주위를 샅샅이 수색하라.” 지스카르는 돌아서며 명령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면죄부라도 받은 것처럼 숨통을 틔웠다. 그들은 황급히 흩어져서 수색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혹시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은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반드시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크리스는 딱딱한 음성으로 다짐했다. 지스카르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를 믿고 있겠다.” 크리스는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름 아닌 자신을 향해 ‘믿고 있겠다’고 말했다. 그 는 움직였다. 그때 던필이 어깨를 붙잡았다. “크리스, 도와주겠다.” “필요 없다. 나는 혼자 움직일 것이다. 너는 근위기사들을 모아 생존자를 구해내라. 흙에 파 묻힌 자 중에 살아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크리스!” 크리스는 거칠게 던필의 팔을 뿌리쳤다. 던필은 다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 어디서 화풀이 하는 거야? 진정해!” “생존자를 구하라고 하명했다! 대답은?” 던필은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손을 떼고 바로 시립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크리스는 계곡 아래로 통하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하아.” 크리스는 이마에 땀을 훔쳤다. 물길을 따라 내려온 지 3시간 째. 피곤을 느낄 만큼 숲을 그 리 오랫동안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몹시 지쳐있는 것은 자꾸 상념이 떠올라 움직임에 절제를 잃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변명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찾아내서, 반드시 다시 데려갈 것이 다! 그것만이 폐하의 믿음에 보답하는 길이다. 절그럭-. 그때 가까이에서 금속음이 들려왔다. 절그럭. 또다. 크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크게 떴다. 수풀을 걷어내며 눈에 익은 얼굴이 불쑥 나 타났다. “여어, 크리스. 드디어 찾았군!” 금색 머리카락, 여름들판 같은 녹색 눈동자. 틀림없이 레이였다. 그런데 도망가기는커녕 오 히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크리스는 무척 당황했다. 헛것을 보는가 싶을 정도였다. “뭘 하고 있느냐.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정답이라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주었으 면 하는데.” 레이는 앞으로 턱짓을 했다.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지?” 레이는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생각해봐라. 이곳은 마물이 우글대는 깊은 산중이다. 도망치기 위해 경솔하게 혼자 돌아다 니다가 변을 당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요행히 산을 빠져나가더라도 추적의 손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발목에는 족쇄가, 외모는 눈에 띄지, 13살의 나이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 모든 것이 문제다. 혼자 몸만 달랑 빠져나가봤자 수일 만에 도로 잡혀올 것이 뻔해.” “그러나 너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나는 신이 아니다. 크리스티안.” 크리스는 수긍하지 않고 레이를 주시했다. 그 와중에도 이 아이를 너무 과도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삐죽하게 서있던 레이는 손을 내저었다. “아아, 좋아. 사실 진지하게 도주하는 것을 고려는 해보았는데.” “그런데?” 크리스는 독촉하듯 물었다. 레이는 피식 웃으며 눈을 내려 깔았다.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더군. 내가 사라지면 지스카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를 찾을 수 없다면 빈첸시오 성의 노예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파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레이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크리스는 레이가 계곡물에 빠졌다는 것을 기 억해냈다. 아직 봄 날씨에 서늘한 산중의 바람. 틀림없이 꽤 추웠을 것이다. 그는 망토를 떼어내어 건네었다. 레이는 사양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시중을 받아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레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들었다. 햇빛이 드리워 눈가의 그늘은 거의 사라졌다. 새 파란 녹색 눈동자가 먼 곳을 널리 굽어보았다. 소년은 아주 거만하며 대단히 우아하였다. 크리스는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되는대로 말을 꺼냈다. “부모님이 신경 쓰인다는 건가. 그렇다면 절대 도망칠 수 없겠군.” “그럴까? 내가 가차 없이 부모님을 버리는 날이 틀림없이 올 것이다. 홀로 설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만큼 충분한 힘을 손에 넣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 곳을 떠나겠지. 나는 언제나 그런 식이니까.” 레이는 망토를 걷으며 돌아섰다. “그만 가자. 피곤하구나.” 크리스는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정중히 소년을 수행했다. 그것은 무의식이 아닌 자의에 의 한 행동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오늘이 보름날이라 천만다행이었다. 크리스와 함께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스카르는 예의 표정 없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크리스티안, 수고했다.” 먼저 크리스를 치하하는 말이 있었다. 크리스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다음 차례에 지스카 르는 내게 안부를 물었다. “상처는 없느냐?” “특별히 없습니다. 크리스티안 경 덕분이고, 무엇보다도 계곡에 떨어지기 직전 마법사님의 도움이 아주 컸습니다. 어떤 분인지 알려주신다면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스카르는 한쪽에 눈길을 주었다. “럼포드 자작.” “에, 예!” 일전에 손수건을 건네며 괜히 농을 건네던 자였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무척 쑥스러워했 다. 나는 원래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노예 계급이다. 노예 따위를 위해 일부러 마법까지 사 용한 이유는 지스카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상대는 순수하게 나를 살리고자 했던 것 같았다. 그것은 심히 유감이지만. 나는 감사를 표하며 한편으로 럼포드 자작의 모든 것을 눈여겨보았다. “짐이 경황이 없어 그대의 공을 생각지 못했다. 돌아가는 길로 즉시 치하하겠다.” “황공하옵니다!” 지스카르는 다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또 같은 질문이었다. 이미 그거 물어봤잖아, 라고 말하면 아랫사람 앞에서 지스카르의 체면 이 완전히 구겨지겠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발목이 아주 쓰라리지만! 달리 다친 곳은 없습니다.” 나는 발목이라는 단어에 특히 강세를 두어 대답했다. 지스카르는 시선이 발목에 닿았다. 내 심 족쇄를 풀어주겠다는 말이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끝까지 그 소리는 나오질 않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지스카르는 휭 등을 돌려 먼저 불가로 되돌아갔다. 실로 냉랭한 태도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오히려 웃었다. 주위는 무척 분주했다. 마물 퇴치가 갑자기 중단된 덕분에 제대로 야영지를 만들 만한 상황 이 못 되었다. 간이로 저녁을 때우고 오늘밤은 노숙을 할 모양이었다. 나도 병사에게서 모포를 하나 얻었다. “크리스 경, 피곤할 텐데 그대도 그만 가서 쉬는 게 어떤가?” “피곤하지 않다.” 가라면 대충 갈 것이지 계속 붙어있어서 어쩌겠다고? 내가 귀찮은 기색까지 보이자 비로소 크리스는 물러났다. 나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특별히 이유가 있어 한 행동은 아니 었는데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시라크.......!” 시라크는 황후파 귀족들의 철통같은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어김없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 다. 상처 하나 없이 건강해 보였다. 지스카르가 화풀이를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군.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그때 시라크가 가신들과 옥신각신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다툼에서 승리한 시라크가 혼자서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기세 좋게 접근한 것 치고 금방 말을 못하고 입을 우물댔다. 그는 갑자기 왈칵 외쳤다. “그대로 죽어버리지 그랬어!” 다행이랄까 주위엔 듣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시라크의 의도를 이 해하지 못했다. 구제불능의 얼간이라고 머리 한 구석에 완전히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라크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시라크.” “어.... 뭐? 지금 뭐라고!!” 존칭도 없이 이름만 부른 것은 처음이다. 시라크는 입을 뻐끔거리며 이 모욕적인 대우에 몹 시 분개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게 할 말이 있느냐?” “누, 누가 네 놈 따위에게 할 말이 있다고......! 아, 아니, 그런데 지금 이 놈이 말하는 꼬라 지가! 감히 노예 따위가 뉘 안전인 줄 알고! 내가 누군 줄 알고!!” “할 말이 있느냐?” 내가 재차 묻자 시라크는 우뚝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지만 이를 악 물고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 모든 행동을 나는 긍정으로 해석했다. “내가 했던 충고를 몇 번이고 심사숙고하여 생각해보았다는 뜻이로군. 그렇다면 이것은 마 지막 기회다. 너는 그 조언을 통해 어떤 판단을 내렸느냐?”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지?!!” 시라크는 왈칵 외쳤다. “나도 너처럼 똑똑해지면, 너처럼 칼을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어른들이 깜짝 놀랄 만큼 굉 장한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그러면 아버지도 틀림없이 마음을 바꾸실 거다! 나를 봐주실 거야! 그렇지?” 지스카르는 이미 너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을 테지. 나는 시라크가 말을 전부 끝내길 기다리고 있다가 짧게 대답했다. “나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라크는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즉흥적이었으나 자존심까지 모두 던지고 노예 앞에서 비굴 하게 부탁을 한 것이다. 그것이 철저히 짓밟혔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시라크, 너는 정신연령도 낮고 아주 무능하다.” “뭐, 뭐, 뭐라고?!” “너는 네 자신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돼.” 시라크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도 끝까지 충고해주기 로 결정했다. “황위를 포기해라, 시라크.” 뿌드득- 시라크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세 개의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네 힘으로 황후 일파를 잘라내고, 전에 보여주지 못한 비상한 능력을 선보여서 네 아비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둘째는 황후 일파가 황제 일파와 공존할 수 있도록 네가 모든 이들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너는 무능하기 때문에 첫 번째도 두 번째로 이룰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황위를 포기하 고 스스로 외진 곳에 은둔하겠다고 말해라. 그리고 네 어미와 외조부의 목숨을 살려달라 고 황제께 애원해라.” 시라크는 끝까지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턱을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내가, 내가.... 그렇게 쓸모없나? 구제불능,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고집쟁이 어린애였지만 지금은 입에 쓴 충고도 들을 수 있는 사 람이 되었다. 시간이 더 흘러서, 훨씬 더 먼 미래에 너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라크,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11살 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라크는 몇 번이고 거듭하여 생각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는 시라크를 뒤로하고 지스카르가 쉬고 있는 불가로 향했다. 지스카르는 여전히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하는 중이었다. 그 어떤 행동도 않고 있다가 내가 다가오자 비로소 고개를 조금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리곤, 더 이상 내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뭘 그렇게 쳐다봐?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라고 똑바로 말하면 끝날 일을, 시라크보다 못한 놈. 지스카르의 옆자리에 모포를 쫙 펼쳤다. 노곤함을 느끼고 모포에 벌렁 드러눕자 지스카르가 또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묘했다. 인상을 찡그리고 왜 그러냐고 한 마디 날리 려던 순간이었다. “.............!!!!!!!!!!” 나는 발작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당연한 것처럼 지스카르의 옆자리에 떡 자리 펴고 누웠다. 잠시 혼 이 나갔던 것이 틀림없다! 그게 아니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지!! 나는 주위를 마구 두리번대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크리스와 던필을 발견했다. 잰 걸음으로 걸어서 두 사람의 사이로 기어들었다. “에엑! 꼬, 꼬맹이 지금 뭐하는 거야.” “레이?” “실례. 나 오늘 여기서 자도 되겠지?” 당황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나는 몸을 웅크렸다.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으로 아무데나 얼굴을 갖다 박았다. 그때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스카르가 나를 안아 들어올렸다. “..........!!” 반항할 수 없었다. 주위에 보는 눈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저항하는 만큼 꼴이 더욱 웃길 것이다. 나는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고 가능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 내려놔... 죽여 버리기 전에........” “네게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 먼저 씻어라.” 다른 이유로 다시 화끈했다. 계곡에서 벗어난 뒤 숲을 돌아다니는 동안 이상한 늪을 밟는 등 짚이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근처에 예의 계곡과 한 줄기를 이루는 물가가 있었다. 지스카르는 나를 땅에 내려놓고 근처 를 대기 중인 병사에게 명령했다.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라.” “...에, 예!” 병사는 황급히 대답하고 도망치듯 멀찍이 물러났다. 지스카르는 갑자기 웃옷을 확 벗었다. 동시에 나도 화들짝 놀랐다. “너, 너는 왜 옷을 벗는데?!” “낮 동안 땀을 많이 흘린 기억이 나서 나도 씻을까 한다만.” “날더러 그걸 믿으라고!!” “..........” 지스카르는 지그시 나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했으나 어쩐지 진심으로 했던 말인 것 같았다. 왠지 나만 머쓱해졌다. 무안함도 탈피할 겸 나는 과감히 웃통을 벗었다. 바지는…… 족쇄 문제도 있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당히 차가웠다. 지스카르도 곧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는 내 얼 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물을 떠서 눈가를 씻겨주었다. “뭐야, 갑자기 애 취급이라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둬.” “네 꼴이 어떤지 아느냐?” 나는 약간 움찔했다. 거울도 없었고 미처 외견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지스카르는 물을 떠 서 뺨을 씻겼다. 다시 물을 떠서 이번에는 코에 끼얹고 콧날을 살짝 잡아당겼다. 순간 나는 힘껏 코를 풀었다. 패앵!! “...........” 안면근육에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받아도 할 말 없는 녀석이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겨 괴상망 측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지스카르는 콧물이 잔뜩 묻은 손을 애매하게 들어올렸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왜? 시중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나?” “이러고 싶었느냐?” 지스카르가 보라는 듯 뭐 묻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약간 후회가 됐 지만, 여기서 밀리면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것이다! 나는 뻔뻔하게 받아쳤다. “깔끔 떨고 싶으면 가서 인형이나 씻기시지.” 나는 시원하게 세수를 했다. 지스카르는 묵묵히 손을 씻었다 특히 신경을 써서 하류 쪽으 로. 그 꼴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큭큭. 후하하하! 뭐, 이런 곳에서 목욕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나는 유쾌하게 물을 헤치고 좀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보름달이 구름 밖으로 완전히 얼 굴을 드러냈다. 수면에 빛이 반사되어 황홀할 만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나는 양 팔을 벌리고 고개를 크게 젖혀 월광욕을 즐겼다. “레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지스카르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와라.”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더 이상 가지 말고 이리로 오너라.” “..........” 바람소리가 가라앉았다. 문득 차가운 물살을 느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싫다.” 휙 등을 돌렸다. 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스카르가 어느새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짜증이 치밀어서 팔을 비틀어 빼내었다. 지스카르는 다시 팔을 붙잡았다. 나는 역시 비틀어 저항했다. “이거 놔!!” 지스카르는 팔을 잡는 대신 얼굴을 붙들었다. 다른 손으로 허리가 꺾을 만큼 강하게 끌어당 기고 키스를 퍼부었다. 타액을 잔뜩 머금은 혀가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내 혀를 찾아낸 후 강하게 빨아들였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얼굴을 비틀었다. 기회가 되면 혀를 깨물어 버리려고 턱에 힘을 주었다. 지스카르는 결국 떨어졌다. “발버둥치지 마라!” “이거 치워!! 내게 명령하지 마라! 나를 모욕하지 마!!” “짐이 너를 모욕하기를 위해서 이러는 것처럼 보이느냐?!” 지스카르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이럴 때가 아니지만 놈이 언성을 높이는 것을 이로서 두 번째라는 생각이 스쳤다. 지스카르는 벼락같이 내 머리를 안고 품에 끌어안았다. 다른 손으로 으스러뜨릴 것 같이 허 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뒤로 휘청대며 물러나는데 길게 늘어진 나무뿌리에 등허리가 툭 부딪혔다. 순간 허리에 있던 손이 바지 안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 와 엉덩이를 꽉 쥐었다. “헉! 이, 이런 곳에서.......!!” 다음에 이어질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놀랐다. 너무 당황해서 허 둥거렸다. 그러나 손은 이미 엉덩이 사이로 들어와 항문 입구를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다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지스카르는 혀를 집어넣어 자기 입인 것처 럼 천장과 혀의 뿌리를 헤집었다. 자꾸 침이 고였다. 지스카르의 타액까지 더해져 입 안이 온통 질척댔다. 움컥거리며 곤란해 하고 있을 때 지스카르가 힘껏 입 안을 빨아당겼다. 순간 묘한 자극에 나는 움찔하고 엉덩이를 움츠렸다.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애무만 하 던 손가락 하나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디 하나만큼 삽입한 후에 옆으로 당겨서 벌렸다. “우으윽!” 나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지스카르는 나를 뒤로 돌려서 등을 보이게 했다. 바지가 풀려서 흘러내리고 대신 엉덩이 사 이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정말로 할 셈이다!! 나는 기겁을 해서 저항했다. “이, 이런데서! 너..... 아!” 지스카르가 성급하게 삽입을 시작했다. 항문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흉기 같은 살덩이가 뻐근 하게 밀려들어왔다. 나는 더 반항하길 멈추고 양 손으로 나무를 꽉 붙들었다. 고통이 심 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잘못 되도 꼴사나운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삽입이 진행될수록 내 입도 점점 벌어졌다. 나는 턱을 몹시 떨었다. 어느덧 내부가 아주 미 세한 여유조차 없을 만큼 지스카르의 것으로 완전히 꽉 들어찼다. “하아... 아아.........!!” 나는 허리까지 바들바들 떨면서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당장 비틀어서 뛰쳐나가고 싶은 데, 말뚝이 박힌 것처럼 뒤가 정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수 치스러워 몸 전체가 다 떨렸다. 지스카르는 심하게 경련하는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머리에 얼굴을 대고 진정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는 떨면서 입을 열었다. “다..... 피, 필요 없으니... 그것부터 빼......” “.........그것만은 거절하마.” 지스카르의 깊은 저음이 등 뒤에서 울렸다. 손이 내 페니스를 지그시 거머쥐었다. 나는 허 리를 움찔했다. 항문 깊숙이 삽입된 놈의 페니스도 그 떨림을 느꼈을 것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허둥대며 말했다. “놔.... 놔......!!” “이대로........” 지스카르는 손끝으로 페니스의 귀두를 쥐고 지그시 누르며 문질렀다. 손가락 중에 검지만 세워서 입구를 가볍게 연속해서 긁었다. 나는 숨을 껄떡거리며 들이마셨다. 금세 폭발할 것처럼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허리를 비틀고 자극받을 때마다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 그때마다 내부에 들어찬 지스카르의 것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으읏! 아아, 이런 식은.......!” “레이......!” 지스카르가 항문에 삽입해 두었던 페니스를 드디어 움직였다. 직장이 딸려 나오는 듯 하다 가 다시 밀려들어갔다. 처음에는 그 정도로 빡빡했고 오직 고통만 있었다. 그러나 지스카 르가 내 중심을 잘근잘근 주무르며 허리의 움직임을 최대한 천천히 하자 나는 금세 그 행 위에서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하아... 아아. 그만 멈춰.... 싫다고............” 다음번엔 좀 더 빠르게 빠져나왔고 다시 뿌리까지 들어갔다. 허리가 움직임에 위아래로 크 게 들썩거렸다. “읏으으....... 하아...아아아, 아아....!” 신음을 삼키기도 힘들만큼 굉장한 자극이 항문 깊숙한 곳부터 등줄기를 관통했다. 그대로 머릿속이 하얗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지스카르는 내 몸의 어디가 약한지, 어떻게 손을 대야 뜨겁게 느끼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놈은 항상 자신의 쾌감은 뒷전으로 했다. 숨소리까지 세심하게 배려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각고의 노력을 들여서, 내가 절정의 막 바지까지 이르게 하는 일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내가 원하여 시 작된 것이 아니다! “싫다고, 싫다고 말하고 있잖아!!!!” 내 고함소리에 주위가 쩌렁하고 울렸다. 지스카르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뜨겁고 불규칙한 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메아리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을 때 지스카르는 손을 전부 떼고 물러났다. 나는 거친 숨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힘들게 나무뿌리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막 뒤돌아서 는 순간이었다. “.........!” 손이 닥쳐와 목줄기를 움켜쥐어 밀어붙였다. 지스카르의 손에서, 온 몸에서 살기가 일었다. 수면과 공기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네가 무엇이건, 지금 짐이 소유하고 있는 노예라는 사실에는 한 치의 틀림이 없다. 네 머 리카락 한 올, 땀 한 방울마저도 모두 짐의 소유물이다. 짐은 결코 이 손을 놓지 않을 것 이고, 너는 영원히 그 어느 곳에도 갈 수 없다.” “나는.........” 나는 지스카르의 팔을 움켜쥐었다. 빠득 소리 나게 깨문 잇새로 말했다. “나는 오롯이 나 자신의 것이다. 내가 짓밟아, 내가 소유할지언정, 그 어떤 것도! 나를 정복 할 수는 없다.” “그 꼴로?” 지스카르는 입꼬리를 올렸다. 철옹성 같던 무표정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완전히 비틀어서 나 를 조롱했다. “마치 싸움에 진 개의 발악과 다름 아니군!” 목구멍 저 언저리가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겨져서 놈의 손아귀에 짓눌려서, 나는 꽥꽥거리며 소리나 지르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다!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천천히 체온이 식어갔다. 아니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 내 발로 다 시 여기로 돌아왔다. 개나 다음 아닌 굴욕을 감내하며, 마지막일지 모르는 절호의 기회를 거머쥐기 위해서. 지스카르는 손을 때어냈다. 나는 느리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꼴사납게 흘러내린 바지를 주 섬주섬 다시 입었다. 지스카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으며 밖을 가 리키며 명령했다. “물 밖으로 나가라.” 나는 명령에 복종했다. 그러나 두 걸음을 걸었을 때 자갈에 족쇄가 걸렸다. 그대로 물에 빠 지기 직전 지스카르가 퍼뜩 팔을 뻗어서 부축했다. 지스카르의 팔에 기대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놈이 잡아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내일도 행군이 있을 것이다. 꾸물대지 마라.” 지스카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팔을 거두었다. 나는 다시 제 발로 서서 물 밖으로 향 했다.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3화 “뛰지 마! 또 벌레가 튀어나온다!” “크아악!!” 어김없이 마물 사냥은 계속되었다. 오우거를 남김없이 사냥한 다음, 며칠 더 깊은 곳까지 행군하자 트윈헤드 오크 족의 부락이 나타났다. 사냥은 지금까지 그랬듯 수월하게 진행되 었다. 하지만 마무리 단계에서 난데없이 사람 몸뚱이만한 벌레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 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예의 벌레는 사전조사를 할 땐 확인된 바가 없는 블러드웜이라는 이름의 몬스터였다. 조사 가 미비했을 가능성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급습당한 것치고 피해가 크지는 않 았다. 그러나 피해가 전무할 수는 없다. 사방에 부상자가 하나둘씩 속출하고 있었다. “블러드웜의 사체는 오크들의 식량이 된다.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은 이 지역에 오크 부족 이 번성했던 것은 그 탓이지.” 나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평했다. 팔짱을 끼고 이 혼전을 지켜보았다. 족쇄를 찼으 니 도망도 못가고, 무기가 없으니 공격할 수도 없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 만히 있는 것이다. 문제 될 것이 있는가? 옆을 올려다보았다. 지스카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계속 보고만 있을 참인가? 이런 곳에 가만히 있으면 피해가 커질 것이다.” 평생 거기서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지스카르가 그제야 움직였다. 목을 틀어서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때 갑자기 지스카르의 등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다섯 마리의 블 러드웜이 길고 징그러운 몸뚱이로 하늘까지 전부 가렸다. 블러드웜은 불시에 발밑에서 튀 어나와 공격하는 점 때문에 아주 위험한 몬스터로 분류되고 있었다. “폐하!!!” 뒤따르던 몇몇 근위기사들이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그들은 황급히 앞으로 뛰어나왔다. 지 스카르는 검을 뽑아 들었다. 조금 느린 동작이었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칼날 위를 오라가 옅게 한 겹 덮고 있었다. “크오오오오오―――!” 거대한 포효! 블러드웜이 제 영역을 침범한 놈들을 찢어발기기 위해 칼날 같은 이빨이 빼곡 하게 돋은 아가리를 앞 다퉈 들이밀었다. 지스카르는 양 손으로 검을 비틀어 쥐고 숨을 들이쉬었다. 일순 옅게 검날을 덮고 있던 오 라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는 몸을 비틀어 돌아서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아앗!! 그것은 이미 검격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성난 듯 휘황한 오라가 십여 미터를 뻗어나가 다섯 마리의 블러드웜을 가로로 쪼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썩둑 갈랐다. 번쩍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근위기사들이 두어 걸음을 떼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섰 다. 모든 것이 멀끔하게 반으로 잘려나간 기괴한 풍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쿠웅!! 블러드웜이 그제야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소음을 내며 내 발 바로 앞에 뭉떵 잘려나간 블러드웜의 대가리가 처박혔다.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 하나 깜짝 않고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머리 위에 그림자가 졌다. 지스카르가 블러드웜을 밟고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놈을 마주 응시했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손을 뻗었다. 내 턱을 잡아 위로 크게 젖혔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입술을 덮쳤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 사람들 의 시선을 의식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빼기 위해 뒷걸음질치려고 했다. 그러나 멈추었다. 도망가는 대신 놈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키스는 처음부터 사나웠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아픔에 벌어진 입 속으로 마음대로 혀 를 집어넣고 헤집었다. 입 안에 침이 고여 들자 턱 끝을 당겨 강하게 빨아 당겼다. 입으로 잠깐 호흡한 뒤 지스카르는 다시 격렬히 입 맞추었다. 한참 후에야 지스카르는 입술을 떼어냈다. 그는 몸을 일으켜 근위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다 소 화가 난 목소리로. “크리스티안! 감시와 호위 임무를 확실히 수행하라! 일전과 같은 실수는 용납 않을 것이다!” “예!” 크리스가 대표로 대답했다. 지스카르는 이어서 호명했다. “럼포드 자작!” “예!! 맡겨주십시오!!” 일전의 사고는 마법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데 충분했다. 계곡에 떨어질 때 도움 받은 것을 인연으로 럼포드 자작이 그 역할을 맡았다. 지스카르는 묵직한 망토를 거칠게 젖히고 돌아섰다. 근위기사 중 반이 나를 호위하기 위해 남고 남은 반의 지스카르의 뒤를 따랐다. 지스카르가 저만치 멀어지자 럼포드 백작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허허! 정말 폐하의 총애가 대단하구나. 원래는 사람들 앞에서 낯 뜨거운 행동을 하는 분이 아니신데 말이야! 얘야, 내게만 살짝 귀띔해주지 않으련? 어젯밤에 어떻게 애교를 부려 폐하께서 저렇게 살살 녹였는지..........” “어젯밤에 혹시 폐하랑 싸웠냐?” 그때 던필이 럼포드 자작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입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혹시 마 정석에 손을 댈까봐 럼포드 자작이 내게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던필 경,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요. 싸우다니.” “럼포드 자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제넘게 싸움이라니.” 럼포드 자작 때문에 존대를 썼다. 지금은 괜히 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동의하자 던필은 손 을 딱 퉁겼다. “역시 싸웠군!! 죽을 뻔 하고 간신히 살아서 돌아오자마자!! 둘 다 지기 싫어하는데다 고집 은 또 얼마나 센지.” 나는 던필을 무시하고 다시 상황을 확인했다. 과연 지스카르.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그의 영향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은 어느새 전열을 갖추고 블러드웜을 일방적으로 도륙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좋아..........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딜 가지?” 한걸음 내딛자 크리스가 물었다. “블러드웜은 동족의 피가 스며든 땅을 꺼립니다. 좀 역겹더라도 사체가 많은 곳에서 대기하 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움직였다. 제지는 없었다. 내가 하는 말에 틀린 점은 없었으니 까. 살갗이 비교적 흰 놈들만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근처의 블러드웜은 전부 암컷이었다. 땅은 무르고 피로 충분히 젖었다. 미끼는 넘칠 정도로 충분히 모였다. 나는 럼포드 자작을 응시했다. 마침 그와 눈이 마주쳤다. 럼포드 자작은 나를 묘하게 보다 가 마정석이 박힌 스태프를 어깨에 걸쳤다. “마정석에 정말로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 “부정은 않겠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일 테고 말이다. 내 대답을 듣고 럼포드 자작은 더욱 얼굴이 묘해졌 다. “대체 마정석 가지고 뭐하려고? 아니, 정말로 궁금한 것은 황제폐하의 의도구나. 어째서 네 가 마정석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시는 거지?” 나는 눈을 내려 깔았다. “어째서라고 생각하십니까? 크리스 경.” 갑자기 호명받자 크리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뜸을 들였다. 하지만 의외로 굉장히 솔직 하게 생각하던 바를 털어놓았다. “마탑 사건이 있었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너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 지금까지 네가 보여준 능력을 감안한다면 마법을 쓸 줄 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 황제폐하께서 마 정석의 소지를 금한 것은 그 탓이 아닌가?” “마법을 쓸 줄 아는 것이 큰 문제입니까?” 나는 반문했다. 크리스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검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께서는 제가 검을 쥐는 것을 크게 경계하지 않 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검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주위에 많은 감 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검을 한 자루 쥐었다고 해서 이 삼엄한 감시를 뚫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정석은? 제가 마법을 사용해봤자, 마정석을 손에 쥐어봤자 얼마나 더 강해진다고 그렇게 경계를 한단 말입니까?” “.........” 나는 잠시 크리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는 끝까지 해답의 실마리를 떠올리지 못했다. 뭐, 아무래도 관계없는 일이다. 발밑에서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나는 다시 한번 럼포드 자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근위기사 들의 감시가 삼엄한 이 때에 그의 마정석을 빼앗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거기에 모든 것을 걸겠다! 드드드드, “뭐, 뭐지?” “블러드웜?” 기사들은 검을 뽑고 경계태세를 갖췄다. 그때 던필이 기겁을 하여 외쳤다. “틀려! 훨씬 크다!!” 나는 하얗게 웃었다. 왔다! 그 놈이 블러드웜의 피 냄새를 맡고, 순간 바닥이 움푹 꺼졌다가 다시 치솟았다. 거무죽죽한 구렁이 같은 것이 블러드웜의 사체 를 한 입에 삼키고 허공 위로 튀어나왔다. “스토어웜!!! 어째서 이 놈이!!”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스토어웜은 드래곤의 일종이지만 날개도 없고 팔다리 도 없으며 지능은 오크 이하다. 당연히 마법 같은 건 사용할 줄 모른다. 하지만 10여 미 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체를 가지고 있으며 브레스를 뿜을 줄 알았다. 때문에 스토어웜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대단히 강력한 몬스터였다. 어째서 놈이 이런 곳에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스토어웜은 블러드웜의 암컷을 먹이로 삼지 만, 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서 서식하는 마물이 아니다. 나는 단지 계곡물에서 빠져나와 숲을 헤매다가 우연히 목격했을 뿐이다. 스토어웜이 블러드웜을 집어삼키고 땅 속으로 사 라지는 모습을. “레이! 상처는?!” “그런 것보다 뒤를 봐라!!” 크리스가 내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나는 그의 등 뒤를 가리켰다. 스토어웜이 몸을 뒤틀 었다. 딱히 우리를 목표로 하진 않았지만 스토어웜이 워낙 거대하다보니 가만히 있으면 깔려죽을 판이었다. 크리스는 나를 옆으로 던지다시피 했고 검으로 스토어웜의 몸뚱이를 가로막았다. 백색 빛이 터져 나왔다. 지스카르의 그것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지만 틀림없이 오라 소드였다. 스토어웜의 몸뚱이에 크리스의 검이 반 이상 박혔다. 크리스는 그 상태로 1미터 가량이나 뒤로 밀려났으나 끝내 진로를 막는데 성공했다. 스토어웜에 비하면 크리스는 코끼리 앞에 어린아이 수준. 실로 굉장한 집념이었다. “크롸아아아아!!”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스토어웜이 고통에 괴성을 지르며 꼬리를 반대로 휘둘렀다. 크리스의 몸이 꼬리에 휩쓸려갔다. “그거 내려 놔!!” 던필이 소리치면서 기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검을 냅다 집어던졌다. 검은 스토어웜의 턱 아래에 박혔다. 스토어웜는 꼬리를 휘두르길 멈추고 머리를 뒤틀었다. 덕분에 크리스는 중간에 튕겨 나왔다. 그는 바닥을 몇 번 구르다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났다. 무사한 것 같았다 . 이 정도에 죽을 정도로 약골이라면 머리 속에 기억해둘 가치도 없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그때 두어 번 몸을 뒤틀던 스토어웜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드래곤 브레스! 그 한방으로 이 일대의 모든 생명체는 잿더미가 될 것이다. “마법은 아직이오?” 이미 럼포드 자작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법은 늦지 않고 적 당한 순간에 완성되었다. 2중 영창. 하나는 폭염구 마법이고, 또 하나는 위력을 배가시키는 증폭 마법이었다. 공기가 나선으로 회전하는가 싶더니 가운데에 잔뜩 압축된 붉은 기운 이 모여들었다. 럼포드 자작은 마정석이 박힌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붉은 기운이 단 숨에 세배 이상 부풀어 올랐다. “지금!!” 콰콰콰광!! 불덩이는 정확히 스토어웜의 오른쪽 눈에 직격했다. 스토어웜은 턱을 크게 젖히며 괴성을 질렀고, 브레스를 만들기 위해 들이키던 숨이 흐트러졌다. 근위기사도, 럼포드 자작도 모두 대단히 유능했다. 그들은 사선을 넘나들고 싸우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확실히 여유가 있었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스토어웜........!”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순간 스토어웜은 하나 남은 눈을 희번뜩이며 다시 고개를 바로 들었 다. “크와아아아아악!!” 놈은 럼포드 자작을 향해 꼬리를 힘껏 휘둘렀다. 기사들이 놀라 앞으로 뛰어나왔다. 유일한 마법사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스처럼 완벽하게 움직임을 봉 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을 휘둘러 가까스로 궤도를 뒤틀었으나, 한 사람이 휩쓸리면서 저만치 튕겨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죽었나? 아니, 신경쓰지 마라! “브레스가 흩어지지 않았어!!” 기사가 외쳤다. 스토어웜이 좀 전에 들이키다가 말았던 숨을 다시 머금었고 있었다. 순식간 에 브레스 준비가 끝났다. “아, 안돼!!” “럼포드 자작!!” 비명 같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 자리에 선 모든 자들이 공포의 끝자락을 보았다. 막지 못하면 정말로 죽는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몰살이다! 그 순간만큼은 크리스도 던필도, 모든 근위기사들이 스토어웜을 저지하는 일에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땅을 박찼다. 나는 비로소 움직였다. 누구도 내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신이시여.......” 기사들 덕택에 간발로 살아남은 럼포드 자작은 덜덜 떨며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2중 영 창, 기반 실드에 증폭 마법. 그러나 드래곤 브레스에 대항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크와아아아아아!!” 스토어웜의 입에서 브레스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투명한 막이 머리 위에 펼쳐져 브레스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순식간에 실드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다, 다들 피해!!” 럼포드 자작이 시퍼렇게 질려 가까스로 소리 질렀다. 하지만 정작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마법을 구현하는 동안에는 움직일 수가 없다. 2가지 마법을 동시에 구현하는 2중 영창의 실체는 간단하다. 마법사가 고도의 훈련을 거쳐 2가지 일을 동시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2중 영창을 하면서, 날렵하게 움직이고 달리는 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면?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3중 영창을 하라는 말과도 같았다. 럼포드 자작은 3중 영창이 가능한 대마법사―메이지가 아니었다. 그가 발을 떼는 순간 실드 는 산산조각이 나서 사라질 것이다. 그는 기사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택한 것이다. “훌륭한 자세다!” 나는 감탄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럼포드 자작의 마정석을 움켜쥐었다! 우우우우우웅!! 마정석이 폭발적으로 마력을 발산하며 영창을 시작했다. 짧고 극히 높은 음역의 아리아! 3 중 영창으로 단숨에 세 개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순간 하늘이 세 번 열렸다. 세 개의 빛 무리가 차례로 스토어웜의 머리 위에 꽂혔다. 한번 직격할 때마다 땅바닥까지 뒤흔들렸다. 럼포드 자작의 실드는 완전히 부서져 사라졌다. 그러나 드래곤 브레스가 사람들을 덮치는 일은 없었다. 스토어웜은 폭포수처럼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단단하던 머리통이 세 번의 타격을 이기지 못해 완전히 으그러졌다. “크우어어어..........” 스토어웜은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똬리 를 틀었던 꼬리가 풀리면서 머리 위를 덮쳤다. 나는 럼포드 자작의 손에서 마정석을 빼앗아 가볍게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혀 꼬리는 간단히 튕겨 나갔다. 쿠우우웅! 스토어웜은 완전히 쓰러졌다. 워낙 덩치가 커서 엄청난 소음이 있었다. 그리고 고요가 찾아 왔다. “레, 레이.........”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외의 모든 이들은 놀라움에 달리 어떤 말조차 꺼내지 못했 다. 개의치 않고 스태프를 부러뜨려 마정석만 손에 쥐었다. 서늘한 촉감. 13년 만인가. 허나 마정석은 위화감이 들만큼 매우 익숙한 감각을 선사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나는 마정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드디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참지 않고 웃었다. 손바닥에서 팔을 타고 심장까지 전율이 강타했다. 참을 수 없는 유쾌함에, 커다랗게 웃어 제쳤다. “후후.... 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방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미친 듯이 웃었다. 그리고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들었다. 마침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지스카르. 그는 얕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스토어웜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뛰어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숨이 거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지스카르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팔을 앞으로 뻗었다. 쩌엉- 발목을 매인 족쇄에 금이 갔다. 다시 한번 귀를 찡하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족쇄는 산산 조각이 났다. 나는 옭죄던 모든 것과 함께 바닥에 흩어졌다. 다리가 지독하게 가벼웠다. 나는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거기 멈춰!!” 지스카르가 소리쳤다. 나는 멈춰 섰다. “마정석을 내려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숨을 가볍게 들이마셨고 다음 순간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발밑 에서 바람이 치솟았다. 모래와 나뭇가지 따위가 끌려올라와 사납게 휘몰아쳤다. 목구멍 저 아래서부터 들끓는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나는 노성을 터뜨렸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스겅! 지스카르가 검을 뽑아들었다. “놈에서 마정석을 빼앗아!! 지금 당장!!” 모든 이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으나 어느새 기계적으로 황제의 명령에 복종했다. 사방 에 기사들이 포위를 시작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즉시 마정석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우우웅--!! 마정석이 제각기 다른 세 개의 음역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닥의 얼음 실이 나선으로 회전했다. 한번 증폭되면서 회전이 빨라졌고, 또 한번 위력이 더해져 다섯 배 이상 커졌다. 길지 않아 왼팔이 뻐근할 정도로 묵직한 기운이 모였다. “말도 안돼......... 정말로 3중 영창.......” 럼포드 자작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는 기꺼이 그 경악성을 만끽했다. 다중 영창은 실로 멋진 것이다. 위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을 영창해야 한다. 그러나 다중영창이 가능하면 어중간한 위력의 마법을 거듭 강화함으로서 단시간에 대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 갑옷을 겨우 뚫던 마법이 나무기둥을 부러뜨리는 마법으로 변하며, 다음 단계엔 숲을 초토화시키는 마법으로 변한다. 3중 영창에 다다르면 더 이상 드래곤 브레스가 부럽지 않다. 하여 사람들이 대마법사라고 우러러 칭송하는 것이다. “어디 한번 막아보시지!” 팔을 크게 내뻗었다. 얼음 회오리가 귀가 먹먹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터져 나갔다. “폐하!!!” “안돼!!” 지스카르는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냥 피해버리면 직선거 리의 부하 기사들이 몰살당할 판이니까. 지스카르가 검을 높게 들어 힘껏 휘둘렀다. 오라가 폭발하듯 엄청난 양의 빛을 발했다. 소드 마스터의 검이 자를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존 재하지 않는다! 형체가 존재하는 덩어리도 아닌데 마법이 그의 오라 소드에 찢어지고 있었 다. 튕겨나가고 궤도가 뒤틀린 마법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산등성이에 지렁이 같은 흔 적을 남기고 있었다. 쿠콰콰앙!! 쿠구구궁!! 굉장한 소음. 거기까지만 확인했다. 지스카르의 발을 묶어놓고 나는 즉시 뒤돌아서 튀어나 갔다. 마법으로 포위망이 허술해진 곳을 노린 것이 아니라, 특히 마법사가 잔뜩 포진하고 있는 적진 한가운데를 향해 달렸다. “허헉?” “마, 막아야.......!!” 마법사들은 빨리 대처를 못했다. 사람들 중에 특히 놀라고 가장 당황하고 있는 것이 마법사 였다. 겨우 13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메이지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방금 두 눈으로 3중 영창에 성공하는 것을 보았다. 3중 영창이 가능하다면 그 자는 메이지다. 헌 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휘봉을 쥔 마법사가 소리쳤다. “당황하지 마라! 저렇게 움직이면서 중복 영창은 불가능해!!” 그렇게 생각하고 방심해준다면 나는 정말 감사할 일이지. 나는 전속력으로 돌진하면서 일단 정면의 방어에 치중했다. “온!” 우오오오오오---! 마정석이 이명을 남기며 웅장한 노래 소리를 토했다. 반투명한 막이 파라락 펼쳐졌고 공격 을 무난히 튕겨냈다. 과연 엘 파셔의 정예, 공격패턴을 달리하는 자도 있었다. 등 뒤에서 바늘 같은 얼음조각이 쏟아졌다. 나는 힐끗 뒤를 노려보았다. 순간 마법사를 공격을 위해 준비했던 폭열구가 터 져나갔다. 빙계와 화염 마법은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두 개의 주문을 동원하면서 전속력으로 돌진해 단숨에 마법사들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그 리고도 주문은 아직 남아있다! 콰즈즈즈즉!! “으아아악!! 이런 건 있을 수 없어!!!!” 왼손에서 빛을 뽑아내어 단숨에 배리어를 찢어발기자 당황하지 말라고 독려하던 마법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즉시 그 자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방어에 할애한 마법을 거두어 신체를 순간적으로 강화시키는 주문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신물을 주루륵 토해내며 마정석 을 떨어뜨렸다. 나는 중간에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옆에서 어어 하며 도망치려고 하는 마법사를 붙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근접한 상태에서 마법사를 제압하는 것은 코 푸는 것만큼 쉬웠다. 십여 명의 마법사들에게 서 마정석을 전부 빼앗았다. 그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하아!” 나는 아주 상쾌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뒤돌아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기분이 별로 인 모양이다. 입을 추하게 벌리고,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너는...... 너는 대체.......!!” 바닥에서 뒹굴던 마법사가 끄르럭대는 음성으로 물었다. 친절하게 대답해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안 좋았다. 나는 살짝 몸을 긴장시켰다. 마법을 완전히 걷어내고 지스카르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 안에서 오라가 성난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극도로 가라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마정석을 버려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게 생각하느냐?” 나는 럼포드 자작에게서 빼앗은 마정석은 바닥에 내던졌다. 고위급 마법을 거듭 사용한 덕 에 마력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다. 마력의 고갈! 바로 그것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보란 듯이 마정석을 한손에 움켜쥐고 내밀었다. 스태프나 장식은 모조리 부서지고 마정석만 손 안에 남았다. 나는 그것을 양쪽 소매 안에 나누어 집어넣고 매듭을 지었다. 간단히 조 치를 취하면서 이야기했다. “백 명의 수하만 데리고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고, 말을 탄 야만족을 맨손으로 상대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여기서 몸을 빼내는 것뿐이다.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지!!” “케액!” 도둑고양이처럼 뒤에서 접근하던 병사의 명치를 팔꿈치로 찍고, 그의 검을 빼앗아 다시 바 로 섰다. 지스카르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걸 내려놔!!” “너는 더 이상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나는 다시 움직였다. 병사가 많고 적음은 더 이상 문제시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단지 일 직선으로 모조리 돌파할 뿐이다. 정면을 가로막는 기사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근력 강화. 나는 더 이상 진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있었다. “괴, 괴물 같은 놈이!” 기사는 소리를 지르며 내 검을 막았다. 1격, 그리고 2격. 근력강화는 둘째 치고, 기사는 내 검술이 자신만큼 강하다는데 또 한번 놀라고 있었다. 그때 내 주위에 수십여 개에 이르는 불의 창이, 얼음의 화살이, 바람의 칼날이 나타났다. 기사는 망연히 마법을 쳐다보고 중 얼거렸다. “맙소사.........” 모든 마법을 한꺼번에 난사하면서 훌쩍 기사들을 뛰어넘었다.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베 고, 찌르고, 막히면 즉시 불덩이를 날렸다. 불시에 튀어나오는 공격은 실드가 가로막았다. 수십 명의 정예 기사들이 단 한 사람을 막지 못하고 낙엽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포위망 을 뚫는 것은 순간이었다. 너무 놀랐기 때문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공격패턴이었기에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추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옆으로 슉슉 스쳐갔다. 그때 검은 인영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불쑥 튀어나왔다. “레이!!!!!!” 지스카르가 목에 핏대를 올리고 소리 질렀다. 아주,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나는 이를 악 물 었다. 입 꼬리가 옆으로 당겨 올라갔다. 짜증인가? 아니면 지금 웃고 있나? 그래 나는 웃고 있다. 다시 한번 온 몸에 전율이 일고 있었다. “상대해주마.........!” 네 놈이 언제까지고 나를 밟고 내려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것을 지금 가르 쳐주겠다!! “온!” 처음부터 네 개의 주문을 한꺼번에 사용했다. 첫 번째 주문에 빛 무리가 응축해 모여들었 다. 일순 눈을 감아야 할 만큼 강렬한 광선이 터져나갔다. 그러나 효과가 요란했던 것치고 지스카르는 너무 간단하게 공격을 베어버렸다. 동시에 뒤 돌아서며 좌측에서 날아오는 불덩이는 피하고 우측의 공격은 오라로 베었다. “이건 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지스카르가 땅을 박차고 달려왔다. 나는 신경쓰지 않고 계속 정신을 집중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주문이 완성되고 있었다. 3미터에 달하는 바람 칼날. 나는 일부러 방어할 수 없도록 시간차를 주고 하나씩 교차해 휘둘렀다. “이거나 먹어!!!” 하지만 지스카르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오라 소드가 찰나의 순간 5미터 까지 늘어졌다. 나무기둥을 뽑아 휘두르듯 엄청난 기세! 한번 휘두른 것으로 두 개의 바 람이 두 동강 났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모조리 베어내고, 지스카르는 단숨에 들이닥쳤다. 방금 폭발적인 힘 을 내느라 오라 소드는 잠시 기세가 누그러져있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일반 강철검을 휘둘러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나는 가능한 주문을 모조리 회수하면서,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카캉!! “으으윽!!” 일순 어깨가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었다. 마법으로 근력을 강화 중이었지만 그것도 한 계가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악력! 지스카르가 몸을 들이밀고 말했다. “포기해라. 접근전에서 소드 마스터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순간 지스카르의 오라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다시 피어올랐다. 쩌저적하며 내가 쥔 검 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기의 순간, 나는 고개를 들어 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당겨 웃었다. 부웅!! 지스카르는 허공에 크게 헛손질을 했다. 나는 어느새 지스카르의 등 뒤에 서있었다. 아주 짧은 거리지만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 나는 빠져나오는 즉시 나는 뒤돌아 팔을 뻗었다. “엘 지스카르 파셔. 다중영창 전투마법사가 어떤 것인지 아느냐?” 손바닥에 붉은 기운이 모였다. 지스카르가 놀라서 그제야 돌아서고 있었다. 잔뜩 압축된 불 덩이가 쏘았다. 콰앙!! “크으윽!” 지스카르는 간발의 차로 몸을 틀어서 피했다. 그러나 검처럼 사정거리가 좁은 공격이 아니 다. 왼쪽 어깨가 폭발에 휘말려 제법 큰 화상을 입었다. “폐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사방에서 기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쪽의 움직임을 따라올 수도 없는 잔챙이는 아무래도 좋다. 양팔을 높게 치켜 올렸다. 어깨를 붙들고 뒤로 물러나던 지스카르가 그때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 작게 압축된 공기가 잔뜩 떠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끝도 없이 수가 추 가되는 중이었다. 한참 이전부터 주문 두 개를 할애해 눈 깜빡할 순간 완성할 수 있는 간 단한 공격 마법을 무한정 구현하고 있었다. 직격 당해봐야 주먹으로 얻어맞는 수준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시한 주문이라도 수십 발 이상을 맞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는 이를 갈았다. “몬스터나 때려잡고 한가롭게 살던 애송이 주제에.........!” 바람이 일었다. 허공에 띄워둔 압축탄이 휩쓸리며 다음 순간 비처럼 쏟아졌다. 이 마법으로 얼마나 많은 전장을 헤쳐 나왔던가. “이 몸에게 충고라니 백만 년은 일러!!!!” 집중포화! 지스카르는 급히 자리를 피했다. 괜히 접근했던 기사들만 애꿎은 공격에 비명을 지르고 있 었다. 그러나 지스카르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게 원을 그리며 달리다가 그는 다시 오라를 일으켜 휘둘렀다. 쿠와아아--- 빛줄기에 휩싸여 탄환들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소멸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을 끄는 것으로 충분하다. 끝없이 몰아붙이는 것이 핵심이니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스파크가 이는 양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땅이 쩌렁쩌렁 울리는 소음과 함께 낙뢰가 떨어졌다. “이깟 잔재주!!” 지스카르는 바닥에 검을 힘껏 내려 꽂았다. 오라가 빛을 폭사하며 마치 실드 마법을 펼친 것처럼 광범위한 전격공격을 막아냈다. 그 사이 나는 달려들어 허리를 겨냥해 검을 찔렀다. 지스카르는 간발의 차로 다시 그 공격을 막았다. 지독하게 신속한 움직임! 아니 감탄하는 것 은 거기까지다. 나는 단발만 치고 다시 빠졌다. 그 사이에 자그마한 공기 탄환이 다시 그 의 머리 위를 잔뜩 메우고 있었다. 서른 개, 아니 마흔 개? 일반 주문을 두 개 동원하면서, 검을 휘두르면서, 남은 두 개의 주문을 쉴 새 없이 가동하여 수분 만에 엄청난 수의 마 법을 완성해냈다. “철 쪼가리나 휘두르는 깡통 따위가!!!” 쿠구구구궁------- 공기 탄환 수백발이 바닥을 강타하며 지진이 일어난 듯 대지가 흔들렸다. 먼지구름이 자욱 하게 뒤섞였다. 나는 바람을 일으켜 다리에 휘감고 급히 뒤로 몸을 빼냈다. 과연 그 자리에 지스카르가 튀어나와 검을 휘둘렀다.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갈퀴가 지나간 것처럼 땅바닥 이 깊게 패였다. “레이!!!!” 지스카르는 즉시 뒤를 쫓았다. 어린애 다리로 그냥 뛰어서는 당연히 따라잡힌다. 나는 바람 을 타고 반쯤 날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갑작스레 방향을 바꾸었다. 일반 적인 움직임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급선회였다. 전방에 실드를 치고 벽처럼 이용해 박찬 것이다. 간단한 응용이지만 언제 마법사가 이런 식으로 사방팔방 날뛰는 것을 보았으랴. 과연 지스 카르는 대처가 늦었다. 손 안에 나선으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같이 궤도를 타고 한바퀴 돌며 포환을 던지듯 팔을 휘둘렀다. “전부 날려주마!!!!” 쿠웅, 쿠과과과과광! 귀청을 찢을 듯 굉음이 귀를 두드렸다. 나는 이를 악 물었다. 지스카르는 분명 오라를 끌어 올리는 것이 늦었다. 절대로 버티지 못하고 저만치 날아가서 처박히리라 생각했는데 지스 카르는 아직 막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점차 지스카르의 오라가 더욱 빛을 더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단칼에 두 동강내지 못한 것은 완벽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내겐 아직 주문이 하나 더 남아있다!! 지스카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의 두 눈에서 동요를 보았다. 탓- 땅을 밟았다. 그리고 뛰어들었다. 검날에 바람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뒈져버려!!!!!!!” 지스카르는 막기엔 타이밍이 한참 늦었음을 깨닫고 옆으로 피하려고 했다. 아니 그 순간 뭔 가를 보았다. 나도 볼 수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쪽에 시라크가 있었다. 지스카르는 갑자기 피하지 않고 오라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 엉성한 짓 으로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 피했으면 그나마 목숨이라도 부지했을 것을, 이제 놈은 형 체도 남기지 않고 찢겨나가리라. 이것으로 정말로 완벽하게 마지막이다. “............!” 나는 공격하기 직전, 손에 힘을 주고 잠깐 검을 고쳐 쥐었다. 아주 순간이었다. “폐하!!!”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든 자가 있었다. 눈에 익은 은발. 크리스티안! 필사적으로 달려왔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다시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동시에 크리스도 움 직였다. 죽을힘을 다해 먼저 내 배에 발차기를 먹였다. “................커헉!!!” 뱃속에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충격! 내 육체가 약해빠진 어린애의 것이라는 것을 순간 깨달 았다. 그 한방에 나는 족히 4미터는 날아가서 처박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충격과 고통이 머리 속까지 진탕으로 만들었다. “컥... 쿨럭!” “죽어! 이 악마 새끼!!” 바닥을 버르적대고 있을 때 근처에 있던 기사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마구잡이식으로 힘껏 걷어찼다. 옆구리에 강한 충격을 느끼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미 기절한 소년을 향해 기사는 다시 한번 발길질을 하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멈춰라!!” 던필이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그 무슨 꼴사나운 짓이냐! 먼저 마정석부터 회수해!”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들이 와르르 몰려들어 허둥지둥 레이의 손 안에서 마정석을 빼앗았다. 혹여 부스러기라도 남았을까봐 몸을 마구 뒤졌다. 던필은 돌 아섰다. “폐하.” 지스카르는 치열한 전투로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던필은 소드 마스터인 지스카르가 저 렇게 지친 것을 처음 보았다. 지스카르를 밀어붙인 것은 가슴에 간신히 닿는 어린애였다. 갑자기 몸이 으스스 떨렸다. 그는 서둘러 그 감각을 털어내고 입을 열었다. “폐하, 처분을 명해주십시오.” “.......” 처분. 레이는 황제를 공격했다. 황제를 시해하려고 한 중죄인이었다. 또한 그의 공격으로 십수 명 의 피해가 있었다. 분명히 사실이었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그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레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뗄 줄 몰랐다. 던필이 일부러 나 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단 어떤 조취든 취하고 봐야 한다. 그는 다시 한번 재촉했다. “폐하........!” “가둬라....” 던필은 고개를 숙이고 명을 받들었다. 천천히 어수선한 뒷정리도 이루어졌다.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야 정리가 끝났다. 병영은 조용했고 비틀어진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황제의 애첩이라고만 생각했던 소년이 보여준 능력 때문이다. 놀라서 대처를 못했다 손 쳐도, 수십 명의 기사들과 마법사가 손도 쓰지 못했다. 소드 마스 터인 황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제 갓 솜털을 벗은 나이라는 사실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믿을 수 없는, 너무 기괴한 일이었다. 뭐라 확언하기가 힘든 일이기에 다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하지만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자도 있었다. 바로 황후파 귀족들이었다. 그 소년이 황제 를 시해하려 든 것만 사실이다. 그들은 소년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과연 마크시 공작의 주장이 옳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아,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던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일이 꼬일대로 꼬였다. 마크시 공작이 매일 종알종알 떠들어대곤 했었다. ‘그 소년은 위험하니까 쫓아내야 한다. 이 대로 두면 언젠가 큰일을 당할 것이다.’ 정말 그 말대로 되었다. 마크시 공작이 이 소식을 듣고 좋아 죽으려 할 것이다. 레이 자체도 문제였다. 이렇게 된 이상, 레이는 절대 무사할 수 없다. 지스카르조차 레이를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던필은 한숨을 쉬고 크리스의 등을 툭 쳤다. “네가 황제폐하의 목숨을 구했군. 또 훈장 다는 거냐?”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그래....... 후우, 꼬맹이는 어떻게 되려나........” 던필은 턱을 괴며 말했다. 그때 크리스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황제폐하를 시해하려한 자다!!! 당연히 참수를 해 마땅할 일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던필은 갑자기 반문했다. 아주 딱딱한 음성이었다. “레이는 폐하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너도 알 텐데?” “..........” 크리스는 자신의 다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레이를 걷어찼을 때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 아이의 편이라도 들어주자 건가?” “편해지기 위해 꼬맹이를 왜곡해서 매도하지는 말라는 거다.” 던필은 한숨을 쉬며 크리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 일단은 좀 쉬어. 너는 항상 지나치게 진지한 게 탈이야. 나는 꼬맹이보다 네가 더 걱정 이다.” “저기............” 그때 근처서 이야기를 들고 있던 럼포드 자작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무척 조심스러운 자세 였다. “그 꼬마 이야기로 긴히 할 말이 있네만........ 분명 자네들도 보았지? 그 마법 말이네. 그 꼬마는 4중 영창을 했어. 3중 영창도 아니고!!” “.........” 던필도 생각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히 보았다. 꼬마는 4개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그냥 4중 영창을 한 게 아니야! 그 이아 는 마법을 다루며 동시에 검을 들고 종횡무진 했네. 모신께서 지상을 창조하시고 다섯 신의 무한한 영광이 내리기까지 오직 한 사람만이 그 일을 가능케 했지! 스트라스의 레브노아 드 황태자!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그 자는 황금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네. 아는가? 그 아이도 똑같은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가지고 있어. 어쩌면 연 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럼포드 자작의 이야기를 듣던 던필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 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 저 깊은 곳에 파묻혀있던 아주 작은 파편 조각이 그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하늘이 어두웠다. 보름에 가까운 달은 구름에 완전히 가려있었다. “크으윽.........” 몸을 조금 뒤척이다가 엄청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질렀다. 갈비뼈가 왕창 부러진 것 이 틀림없는데 나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꽁꽁 묶여 있었다. 온 몸이 뜨겁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싶다. 아니, 그 전에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을까 싶었다. 아아, 사실 왜인지 잘 알고 있다. 마음 이 흔들린 것이다. 엘 파셔의 황제가 죽으면 굉장한 파장이 생길 것이다. 황후파가 정권을 잡고 외척이 득세하 면서 엘 파셔는 필히 기울어진다. 스트라스와 엘 파셔 간에 국력 차가 심해지면 다시 전 쟁이 터질 지도 모르지.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또 있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시라크를 지키겠다고 물러서지 않는 놈을 보고 있자니 또 마 음이 흔들렸다. 또 있다. 이제 와서 지스카르를 죽이자니, 저런 놈도 인간이라고 그냥 마음이 흔들렸다. 그 따위 것들!! 내 알 바가 아니거늘!! 마음이 흔들려도 좋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할 때엔 반드시 행해야만 했다. 마정석을 쥐 었을 때 가차 없이 지스카르를 죽이고 그곳을 떠났어야 했다. 노예라는 굴레에서, 강제로 짓밟히는 굴욕에서 벗어날 가장 확실한 기회였다. 그것을 붙잡았어야만 했는데........! “으으......” 괴로워.... 뜨겁다. 머리까지 열이 올라 생각을 더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다시 보름달이 구 름 밖으로 나왔다. 이제 정말로 최후의 기회만 남았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서 식은땀에 흠뻑 젖은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스카르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스카르는 자주 내 얼굴을 응시하곤 했다. 나지 막한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내가 하는 말엔.... 의미가 없다.....” 내가 말해서는 의미가 없다. 내가 스스로 레브노아드 자신이라고 주장해봤자 허황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일 뿐이다. 때문에 지스카르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 확신해야만 한다. 지스카르가 알 수 있도록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내 자신을 전부 드러냈다. 가능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황성에 도착했던 그 날 나는 도박을 걸었다. 놈이 몇 번이고 내 얼굴을 응시했기 때문에. 똑바로 노려보고 건방지게 맞먹으려 드는 것을 용납했기 때문에. 짓밟아 흙탕구덩이에 처박을 수 있으면서 매번 그만두었기 때문에. 지 스카르가 꼬맹이 노예에게서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발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 지스카르가 ‘나’를 인정한다면, 도박은 성공이다. 지스카르는 입을 열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이윽고 움직였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지스카르가 다시 말했다. “너는 그의 아들이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지만, 울컥하고 속에서 치솟았다.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목에 핏대를 올리고 소리 질렀다. “웃기지마!! 누가 누구 아들이라고? 나도 20살이 되어서야 겨우 4중 영창이 가능해졌다! 그 런데 지금 내가 지금 몇 살인지 아느냐? 알고 있을 텐데?!” 지스카르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래!! 단순히 레브노아드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너는 지나치게 그 자를 닮아 있다!! 얼굴도, 사소한 취향도, 성격도! 검술에 마법까지도! 철저하게 그 자와 같아! 대체 뭐지? 누가 너를 그 렇게 만들어 냈느냐? 레브노아드와 똑같은 인물을 키워내서 무엇을 하려고! 스트라스 제국 의 누군가가 황실을 전복하기 위해 레브노아드의 재래라도 연출하고 싶어 하는 건가? 헌 데 어째서 엘 파셔에 있었던 거지? 정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얼굴을 바짝 가져다댔다. “짐과 조우한 것은 정말로 우연이냐?” 턱이 바르르 떨렸다. “뭐라고......” 숨소리까지 떨렸다. “뭐라고!! 강제로 끌고 온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키워? 어떤 놈이 무슨 수를 써서 13살 에 4중 영창을 가능하게 키워내!! 그런 놈이 있으면 지금 내 앞에 데려와 봐!” “그래, 누구냐! 어떤 수를 썼지? 단지 우연이었나? 또는 약물인가? 자질이 뛰어난 자를 선 별할 수 있는 기술이라도 얻은 것인가?” “닥쳐, 개자식아! 그런 게 있으면 누가 그 고생을 해서 마법사단을 육성하느냐! 매일 천재 소리 듣던 나도 4중 영창에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피를 토했는데!” “허면 대체 뭐야!! 너는 대체 누구냔 말이다! 말해!!!!!!!” 밀폐된 공간이 메아리가 쩡하고 울렸다. 단지 확인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물 었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 무엇을 더? 이미 모든 것을 다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할 참인가? 달은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지스카르는 대단히 신중한 인간이었다. 철저히 감상을 배 제하고, 효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 검푸른색 눈동자로 언제나 지극히 현실적인 것만 보았다. 깨달아야만 했다. 도박은 실패였다. “꺼져.......” “짐이 묻고 있다!! 네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누가 관계 되었는지 전부 실토해!!” “꺼지라고 말하는 게 들리지 않느냐?” 지스카르는 내 멱살을 잡고 와락 끌어올렸다.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온통 헤집는 것 같 다. 엄청난 고통에 비명이 나오다가 턱에 걸렸다. “더 이상 너를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살고 싶으면 대답하란 말이야!!!” 아찔한 고통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숨을 가까스로 몰아쉬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크윽, 하악. 혀, 현명한 판단을 했다, 엘 지스카르 파셔.... 혹여... 하아, 의심이 가더라도.... 그 허황된 망상 따윌 함부로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너는 한 나라의 황제이니까....... 철저히 계획된 스파이일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믿을 순 없지. 너는 옳았어!” 가슴이 타는 것 같다. 지독한 고통으로 이젠 정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대답해라.......!!” 지스카르는 내 옷깃을 찢어버릴 것처럼 강하게 그러쥐었다. 꽉 다문 잇새로 으르렁대며 말 했다. 이제 대답할 것은 정말로 없었다. 한참 후에 그는 나를 바닥을 거칠게 내팽개쳤다. 상처투성이인 몸뚱이가 바닥에 거세게 부딪히며 무시무시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나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고통에 완전히 지배되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입술에 닿는 공기가 싸늘했다. 나는 오래 하늘을 올려 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 크하하하하!! 지스카르 비호감도가 수직 상승하는 게 보인다!!! 지금 비호감 투표 한번 해보고 싶어요. (- 3 -) 너무 심하게 늦었습니다. 그게 전부 전투씬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내심 이번 편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레이가 졸라짱쎈 화력을 선보여 사람들을 허거걱 놀라게 만드는 장면을 아주 화려하게 길게 쓰고 싶었거든요. 그 런데 막상 글로 옮기니, 거 참 졸라짱쎈 레이군이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간 망상을 너무 많이 한 것도 슬럼프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테면 금발을 살랑 휘날 리며 존내 마법을 파바박 날리다가 씨익 웃는 우리의 레이군이라던가. 근데 이렇게 쓰면 개그잖아. 어떻게 하면 멋지게 쓸 수 있는 거야! 이런 식........- _-;; 안 되는 전투씬 짜내느라 그간 일주일 정말 괴로웠습니다. 다시는 전투씬 안 써, 라고 할 수 없겠지. 최대한 피해야지. 아 돌아버려. ㅜ_ㅠ 백금님 드디어 올렸어요~~~~~~~~~~~~~~~~~~~~~~~~~!! 다음 화는 이 정도로 오래는 안 걸리겠죠? ^^;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4화 “4중 영창? 설마 그럴 리가. 부풀리기 내지는 무슨 눈속임이었겠지.” “기백명의 마법사와 기사들이 착각을 한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부상까지 당하셨답니다.” “그 노예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폐하께서 유난히 집착하셨던 것은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호오라, 단순히 애첩은 아니었다는 게로군요. 폐하께서 선견지명이........” “바로 그겁니다!! 폐하께서는 소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족쇄까지 채우신 거죠. 아니 그렇습니까?” “허면 자객인 것을 알면서도 곁에 두셨다는 겁니까?” “본인이 듣자하니 그 소년은 스트라스와 관계가 있다는 모양이더이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시려고 그런 노예를 첩으로 삼으셔서......” “그 노예의 미색에 넘어가서 이성을 잃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이래서야 마크시 공작의 충언이 고깝게 들릴 밖에요.” 소문은 날로 부풀려져 갔다. 어느새 레이는 스트라스의 자객으로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황 제가 귀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증거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당연히 조작된 증거였으나, 황제를 시해하려했다는 사실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이 같은 위증도 효력을 보이고 있었다. 마크시 공작은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간악한 스트라스의 끄나풀이 폐하의 눈을 흐리고 급기야 해하려 들었으니 이 얼마나 큰 재 앙이오! 폐하!! 하루라도 빨리 그 악독한 놈의 목을 치고 나라의 위신을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페하!!!” “폐하!!” 수많은 군신들이 한 목소리로 결단을 독촉했다. “폐하, 설마하니 아직도 그 노예를 감싸려고 하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마크시 공작이 물었다. 무도하게도, 그는 황제를 비꼬고 있었다. 황제파 귀족들이 치를 떨었 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냉막한 얼굴을 들어 조용히 대답했다. “마크시 공작. 먼저 어떤 자의 사주였는지 밝혀내야 하오. 이 외에도 아직 밝혀내야 할 것 이 많소. 심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죽이라는 뜻이오?” “허허, 그건 그렇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신이 그저 마음만 앞섰습니다. 그 노예를 비틀어 쥐어짜고 가죽을 벗겨내어 반드시 배후를 밝혀내야할 것입니다. 혹여 진실을 토설하기 전에 숨줄이 끊어지는 일이 없게 긴히 주의를 기울여 주셨으며 합니다.” “물론 그리 할 것이오.” 내심 황제가 안절부절 못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마크시 공작은 입을 비틀었다. 그러나 결과 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마크시 공작은 기분 좋게 대전을 빠져나왔다. “오셨군요.” 마크시 공작이 황후궁에 들자 브뤼셀 황후가 시라크와 함께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성급하 게 질문했다. “아버님!! 그 노예의 어찌되었습니까? 제가 직접 그 발칙한 놈을 주리를 틀어 심문을 하고 싶은데.” “심문은 행해지고 있는 것 같지만, 황제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구나. 허허, 어리석은 지고. 결국 그 노예는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혹시 황제가 끝까지 그 노예를 보호하려고 든다면, 그것도 좋지!! 첩실에 정신이 팔려 앞뒤 구분도 못하는 황제를 누가 믿고 따르 겠느냐!! 그때야 말로 나의 천하다!” “오호호호!! 맞습니다! 이것은 천벌이 내린 게지요! 목숨 바쳐 충성한 우리 가문을 토사구팽 하려고 들었다가 지금 그 죄 값을 치르는 겝니다!! 시라크까지 그토록 업신여기고 모욕하 다니, 내 아직도 그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진 않구나. 하하하하!” 화기애애한 가운데 한사람만이 말이 없었다. 시라크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그 노예의 공격을 막지 못한 것은, 저를 지켜주려고 하셨기 때문입니 다.” 문득 브뤼셀 황후와 마크시 공작이 말을 멈추었다. 시라크는 다시 말했다. “게다가 그 노예는 사실 아버님을 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멈 추었습니다. 당시 바로 코앞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봤습니다. 크리스티안 경이 끼어들지 않았더라고 아마 그 녀석은.........!” “시라크!! 네 어찌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 노예는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다! 황 제의 앞에서 검을 들고 공격을 했지!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냐?” 마크시 공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라크는 한참 후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후, 우리 시라크는 너무 착해서 탈이예요. 그 사람이 얼마나 냉대했는데, 그래도 아버지라 고 공경하는 게죠.” “그렇구나. 이렇게 착한 것을 내치려 들다니!! 시라크,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말거라!” 시라크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노예가 말했다. 자신은 무력한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브뤼셀 황후와 마크시 공작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스카르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길은 갈수록 좁고 가파르게 변했다. 간 수가 작은 철제문을 열었다. 싸늘한 공기를 통해 아주 불유쾌한 냄새가 전해졌다. 비린내.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는 눈살을 찌푸릴 만도 했지만 지스카르는 표정 의 변화가 없었다. “화, 황제폐하!” 늙은 간수가 허둥지둥 달려와 지스카르를 맞이했다. 지스카르는 냉막한 음성으로 짧게 물었 다. “성과는?” “예, 예... 그, 그 놈이 보통 독종이 아니라....... 게다가 아무래도 아직 애새끼다 보니 잘못 건드리면 덜컥 죽어버릴 가능성이 있어서 약간 조심하는 편입니다. 하,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반드시 실토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때 좁은 통로를 타고 날카로운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스카르가 고개를 들었다. 늙 은 간수가 눈치를 보다가 안 쪽으로 가리켰다. “이, 이쪽입니다.” 잠시 후 지스카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가 풍겨오는 작은 밀실. 지스카르는 멈춰 섰다. 레이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미려한 금발은 겨우 이틀 만에 완전히 빛이 바래 있었다. 작고 하얗던 몸이 끔찍한 고문을 겪고 넝마처럼 변했다. “예에, 여기서 지켜보시겠습니까?” 늙은 간수는 괜히 굽실대면서 문가에 함께 섰다. 시커먼 털복숭이 고문관이 아직 황제가 지 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막대기로 레이의 머리를 쿡쿡 찍으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레이의 입술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의식이 남아있음을 확인한 고문관은 의자의 앞 다리만 들리도록 뒤로 당겼다. 의자 다리에 묶인 다리도 함께 들어올려졌다. “너를 사주한 놈이 누구냐. 짜증나는 새끼, 빨리 대답 안 해?!” “그, 그... 놈이 누군지... 나도 알고 싶구나........” 혀를 물지 못하게 끈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기에 음성이 부정확했다. 그러나 비아냥대는 어 조는 확실히 전해졌다. 고문관은 버릇인지 다시 입을 이죽거렸다. “언제까지 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한 번 볼까.” 다른 고문관이 넙적한 통을 의자 밑에 내려놓았다. 갓 끓어낸 기름이 통 안에서 엄청난 열 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레이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고문관은 레이의 귓가에 얼굴을 갖다대고 킥킥거렸다. “왜? 새끼, 기대 되냐? 두 번 다시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 감상은?” 지스카르는 입을 조금 벌렸다. 그러나 주먹을 천천히 그러쥐고 다시 다물었다. 그는 심문을 하러 이곳에 온 것이다. 제재는 없었다. 고문관이 예정대로 의자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의자다리에 묶인 발이 끓는 기름통 속에 빠졌다. “.........!!!” 레이는 비명을 삼키려는 듯 재갈을 악 물었다. 어금니가 바스러질 만치, 숨도 멈추고 너무 도 필사적으로. “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고통을 외면하고 견디려 애쓰던 레이가 끝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을 지르고 지 르다 레이는 제 풀에 푹 고개를 떨궜다. 아직 기절하지는 않았다. 고문관은 기름통을 발로 밀어서 치우고 레이의 머리채를 쥐고 들어올렸다. “너를 사주한 자는 누구냐?” “어..... 아.. 헉........”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문관은 머리채를 마구 흔들었다. 고문관은 다시 한번 물 었다. “너를 사주한 자는?” “커.... 아... 어, 없어..... 그 따위...” 여간해도 소득이 없으니 고문관은 짜증이 난 듯 했다.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머 리는 힘없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갑자기, 그는 두꺼운 손으로 레이의 사타구니를 덥썩 쥐었다. “.........!!” 순간 레이가 흠칫 떨며 눈을 크게 떴다. “소, 손...... 치워...........!” “왜? 남창 새끼 주제에, 네 놈도 이런 거 좋아하잖아.” 그는 너덜거리는 바지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대로 작은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레이 는 몸을 앞으로 확 구부렸다. 끓는 기름 속에 발을 집어넣을 때도 잠잠하던 레이가 온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찢어질 듯 소리를 질렀다. “치, 치워! 치워!! 치워!!” “호오라, 이거 반응 좋은데. 누가 남창 아니랄까봐.” “누가.........!! 아!!” 고문관은 아랑곳 않고 손을 좀 더 쑤셔 넣어 엉덩이 아래까지 집어넣었다. 손으로 다리 사 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치워!! 치우라고!!! 그만!! 크!! 아아!! 그 손....... 치...........!” 레이는 눈을 꽉 감았다. 싫다고 몸을 뒤틀어봤자 무엇이 바뀐단 말인가. 꼴사나웠다. 지독하 게! 그러나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손길을 느낄 때마다 저절로 다리가 움츠러들었다. 이가 따닥따닥 부딪히고 있었다. 고문관은 흡족한 듯 물었다. “어떠냐. 이래도 아직 말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냐?” 싱글대던 묻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가학적으로 바뀌었다. “아니면 만져주니까 좋아? 앙? 씨발, 손에 아주 착착 달라붙는군. 황제가 죽고 못 산다고 네 놈을 옆에 끼고 살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만!! 앙?” 그는 하반신을 더욱 세게 움켜쥐고 사납게 주물렀다. 의자까지 들썩거렸다. 레이의 몸이 움 직임에 따라 앞뒤로 마구 흔들렸다. 그 추잡한 손의 움직임이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레 이의 얼굴에 뜨겁고 비린 액체가 확 쏟아졌다. 레이는 흐린 시야를 간신히 되찾았다. 그를 모욕하던 고문관이 머리를 잃고 몸뚱이만 남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목이 잘린 몸뚱이 너머에 지스카르가 하얗게 빛나는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각상처럼 무감각하던 얼굴에 지독한 분노가 서려있었다. 늙 은 간수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고문관의 시체를 가리키며 ‘저런 미친 놈, 어디서 함 부로 입을 놀려’ 라며 정신없이 되뇌었다. 레이는 지스카르를 응시하다가 다시 힘없이 눈 을 감았다. 그때 손이 얼굴을 움켜쥐었다. “대답해라.......” 지스카르는 잇새로 가늘게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시 말했다. 초조한 듯 떨리는 음성으로 말 했다. “대답해라..... 네 배후가 뭔지. 어디 출신인지, 누구에게 배웠는지! 적어도, 적어도 어떻게 대책이라도 세울 수 있도록!!” “꺼.......져........” 레이는 사라질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와락 지스카르는 멱살을 잡고 끌어 당겼다. 의자째로 끌려오며 레이가 비명을 질렀다. 개의치 않았다. 지스카르는 고함을 질 렀다. 표정이 무너지고 목소리도 갈라졌다. “죽고 싶으냐!? 짐도 더 이상 너를 지켜줄 수 없다!! 때마침 좋은 때에 네가 분탕질을 친 덕 에 전부 모조리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하.... 그건... 네 놈 사정이고..... 그럼... 평생... 네놈 곁에... 붙어... 고분고분 살아줄 줄... 알았더냐?” 지스카르는 거칠게 멱살을 놓고 레이의 얼굴을 옆으로 짓눌렀다. 다른 손을 늙은 간수에게 내밀고 외쳤다. “가져와!!” 늙은 간수는 허둥지둥 화덕으로 달려가 시뻘겋게 달궈진 철 꼬챙이를 들고 왔다. 인두를 건 네받으며 지스카르가 말했다. “알고 있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수치라는 것을. 성노의 낙인을 몸에 새기고 살아갈 자신이 있느냐?” 길게 드러난 목줄기에 지독한 열기를 어른거렸다.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레이는 숨 통이 꽉 틀어 막히는 기분에 가까스로 숨을 삼켰다. “그..... 만둬........”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그냥... 죽여! 죽........!!” 더 말할 새도 없이 목덜미에 인두가 박혔다. 순간 레이의 등이 활처럼 안으로 크게 튕겼다. “악, 아......꺽!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철 꼬챙이는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약한 살이 시커멓게 타고 흉물스러운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 지스카르는 검으로 팔과 다리를 묶은 줄을 잘 라냈다. 배려도 없이 레이를 아무렇게나 집어 들어서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고문관에게 눈짓했다. “벗겨서 주제를 가르쳐줘라.” 동료의 죽음에 눈치를 보던 고문관은 결심했는지 바닥에 뒹굴고 있는 레이를 붙잡았다. 그 는 허리끈을 풀고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한번 손을 대자 나머지는 금방이었다. 바지가 완전히 벗겨져 엉덩이에 서늘한 돌바닥의 감촉이 닿았다. “하악! 시, 싫어! 멈춰! 멈춰...!!” 레이는 발작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지독한 화상을 입은 발을 돌바닥에 버 르적댔다. 자신을 짓누르는 몸을 손으로 밀었다. 처참할 만큼 무력했다. 사내의 몸은 마치 돌 벽 같았다. 손톱은 예전에 부러지고 뽑혀나가 할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지, 지스카르!! 지스카르!!” 애원에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 대신 고문관이 다리를 쥐고 옆으로 벌렸 다. 크게 드러난 비부에 뜨겁게 꿈틀대는 성기가 닿았다. “아.... 아.........!!” 레이는 턱을 덜덜 떨었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 팔로 밀어내며 버르적댔다. 고문관이 입맛을 한 번 다시고 단숨에 자신의 페니스를 갖다 박았다. “.........!!” 들어왔다! 레이의 몸이 아무렇게나 휘어졌다. 극도로 긴장한 입구는 무참히 찢어지고 극심 한 상처를 입었다. 그대로 척추까지 쪼개질 것 같다. 죽어버릴 것 같았다. 레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크으윽! 빌어먹을!! 씨바!!” 고문관도 좁은 입구를 억지로 벌리느라 몹시 괴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않았 다. 특유의 가학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며 미처 다 들어가지도 않은 것을 이리저리 쑤 시며 집어넣었다. “제기랄 끝내주잖아!!!” 떨리는 손으로 고문관의 가슴을 두드리며 레이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눈물이 아무렇게나 흘 러 피투성이인 얼굴을 더욱 더럽혔다. 갑자기 움직임이 멈췄다. 어디선가 날아온 발이 고 문관의 몸뚱이를 차서 옆으로 쓰러뜨렸다. 그 자는 등허리가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지스카르는 늘어진 레이를 잡아 일으켰다. 엉덩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더러운 것을 끄집 어내는 것처럼 긁어냈다. 이미 상처 입은 항문을 자신의 흔적으로 덮기 위해서 난폭하게 집어넣어 휘저었다. “아아아악! 하, 하악! 흐아아, 아악!” 레이는 목소리가 갈라지는 줄로 모르고 비명을 질러댔다. 극심한 고통으로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픽 고개를 떨궜다. 지스카르는 늘어진 몸뚱이를 끌어안 았다. 작은 머리를 품 안에 부서져라 껴안았다. 가슴이 꽉 틀어 막혀 숨도 쉴 수 없다. 어째 서 이토록, 이토록!! 그는 레이를 안고 일어섰다. “폐, 폐하?” 늙은 간수가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지스카르가 다가오자 스스로 문을 열었다. 황 제가 죄인을 데리고 사라지는 모습을 그는 망연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스카르는 레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레이는 몸을 뒤척였다. 전신이 빈 자리 없이 상처로 뒤덮여있었다. 바로 눕지도 못하고 엎드리지도 못한 채 괴로움에 허덕이다가 레이는 희미 하게 의식을 되찾았다.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천 때문에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낯익은 천장과 창문과 벽지였다. 레이는 갑자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틀림없이 안도 의 빛이 서려있었다. 지스카르는 입을 비틀었다. “무엇을 안심하고 있지? 이제 살았다고 생각한 건가?” 솔직히 정곡이었다. 레이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하지만 이내 비아냥대듯 되물었다. “아니...라고.... 말할 참인가......? 그럼 왜... 감옥에서... 데리고... 나온 거냐? 고문관을... 죽 여 버린 이유는?” “짐을 도발하지 마라!!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느냐?” 지스카르가 허리를 붙잡았다. 레이는 셔츠만 입고 있고 하반신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그곳엔 끔찍한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내부를 꿰뚫는 이물감과 고통이 아직도 생생했다. 레이는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몹시 놀라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일어서서 앉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저 엎드려서 허둥거릴 뿐. “비, 비켜! 비켜!”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저리.... 비......켜.........” 벗어날 수가 없자 레이는 조그맣게 몸을 움츠렸다. 지스카르는 손을 떼고 물러났다. 그는 더 이상 레이를 심문할 수 없었다. 레이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꽤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지스카르는 입을 열었다. “좋다. 허면 먼저 빈첸시오 성의 노예들을 하나씩 문초해보겠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군. 네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그것들을 먼저 잡아넣었어야 했다. 너를 보아 지금까지 계속 눈 감아왔으나 더 이상은 그럴 이유가 없군. 네 어미와 아비까지 소금칠을 해가며 심문해서 그때도 성과가 없으면 다시 오겠다!” 레이는 약간 반응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내려 깔았다. “...좋을..... 대로........” 몹시 피곤한 목소리로 레이는 대답했다. 지스카르는 일어났다. 문을 비틀어서 나가려는 순 간이었다. “기다려!!!!” 지스카르는 뒤돌아보았다. 레이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팔 과 다리를 버둥거려 기어왔다. 문드러지다시피 한 발이 시트에 긁혀 더러운 자국을 남겼다.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레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스카르가 지금이라도 당장 방을 나설까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었다. “하, 하지 마.........” 지스카르는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침대 맡으로 되돌아와서 걸터앉았다.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 레이는 서둘러 입을 떼었다. 대답해주자. 대답을, 어떻게. 무엇을?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손 안이 텅 비여 있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몰라... 저, 정말로..... 정말인데.” 레이는 바보처럼 비실 웃었다. 순간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약하다. 약하다. 끝도 없이 나 약한 인간으로 전락해버린다. 무엇이든 가차없이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 렇게 해왔다. 헌데 나는 어째서 도망가지 못했던 건가. 어째서 이리도, 그렇더라도 나는.......!! “그들을.... 용서해.... 제발....... 제발....! 뭐든지... 할 테니까.... 뭐든지.........” 지스카르의 옷자락을 그러쥐고 애원했다. 레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지스카르는 표정이 없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레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냉막한 얼굴이 아득히 저 높은 곳에 있었다. 문득 레이는 몸을 일으켰다. 팔 힘으로, 다리로 어떻게 무릎을 꿇 어 일어섰다. 레이는 지스카르의 입술에 키스했다. 차가운 입술에 메말라 찢어진 입술이 어색하게 겹쳐졌다가 다시 떨어졌다. 레이는 가늘게 떨면서 이번엔 혀를 내밀어 아래 입술을 머금었다. 동상처럼 차갑다. 레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지스카르의 손을 붙들었다. 그것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끌어왔다. 쓰라리고, 차가웠다. 가슴이 먹먹하게 아프지만, 괜찮았다. 레이는 더욱 안 쪽으로 끌어당겨 스스로 움직였다. 다른 손으로 지스카르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써 다리를 움츠렸다. 안 간힘을 다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지스카르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 듯 레이는 그의 사타구니 쪽으로 기 어갔다. 잘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바지를 열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어 떻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스카르의 것을 입 안에 넣었다. 아직 서지도 않았는데 턱이 뻣뻣할 만큼 크게 벌려야 전 부 삼킬 수 있었다. 서너 번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다 숨이 막혀서 뱉어냈다. 그러나 숨을 몰아쉬며 기둥을 핥고 다시 삼켰다. 이가 닿지 않을까 염려하며 열심히 핥았다. 문득 지스카르의 페니스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손이 머리채를 쥐고 사납게 끌어당겼다. 그대로 레이는 침대에 나가 떨어졌다. 지스카르는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레이의 목을 움켜쥐었다. 우악스럽게 두 손으로 목을 쥐 어서 짓눌렀다. 레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버둥거렸다. 손톱도 없는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긁었다. 혈흔을 남기고 미끄러져 떨어진 손으로 자꾸만 버둥댔다. “꺼억....... 헉........거....!!” 입가로 침이 흘러나왔다. 그 자존심 높던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지스카 르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레이처럼 그도 숨을 거의 쉬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죽여 버린다면, 그리하면 이 가슴의 고통이 가실까. “쿨럭쿨럭! 커헉! 쿨럭!! 콜록콜록!” 어느 순간 지스카르가 손을 놓았다. 레이는 심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떨었다. 지스카르는 일어났다. 그때 레이가 그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잡았다.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입술을 움찔거려 가까스로 말했다. “제...........발..... 부탁.........”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레이는 실신하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스카르는 껍데 기 마냥 널브러진 소년을 내버려둔 채 그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목이 칼칼했다. 그는 침대 맡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콰앙!!!! 갑자기 잔을 쥔 채 침대 기둥을 강하게 후려쳤다. 기둥이 부르르 떨릴 만큼 큰 타격이었다. 쥐고 있던 잔은 산산조각 나고 유리조각이 손바닥에 깊숙하게 박혔다. 그는 손을 약간 풀 었다가 다시 강하게 움켜쥐었다. 우두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각 하나가 살을 찢고 튀 어나왔고 검붉은 피가 주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짐은.......” 쾅!! 다시 한번 침대기둥을 후려쳤다. 또 한 번. 다시 주먹을 쥘 수 없을 정도로 왼손이 어그러 졌다. 지스카르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아무렇게나 털어내고 방을 벗어났다. “폐하!!!” 던필은 서둘러 지스카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스카르는 표정없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던필은 황제의 친구라 자부할 만한 존재였고, 무표정 속에서 그의 심리를 어렴풋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손은 어찌된 것입니까?” 수건을 동여맨 오른손을 분명 부상을 입고 있었다. 대답이 없자 던필은 일단 본론으로 들어 왔다. “폐하. 지겨울 만큼 들으셨겠지만, 그래도 들어주십시오. 레이를 다시 감옥에 가두십시오! 계속 그 아이를 감싸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감싸고 있는 게 아니다. 심문하는데 필요한 일이었을 뿐.” 지스카르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던필의 말처럼 지겨울 만큼 그 이야기를 들어왔고 지겨운 대답에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던필은 초조하게 외쳤다. “더 이상 배후를 캐내야 한다고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그런 구실로 언제까지 그 아이를 살 려둘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폐하! 이제 진상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장 그 노예를 죽 이라고 명해주십시오!!” “던필. 혓바닥을 다시 한번 그 따위로 놀린다면 너라도 두 번 용서는 없다.” 지스카르는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에서 분노를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더 이상 던필이 그의 감정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스카르는 그를 제치고 멀어졌다. 던필은 머리를 얼 굴을 쓸어내렸다. “맙소사, 맙소사! 이런 식으로는... 말도 안돼.” “먼저 레이의 편을 든 것은 네가 아니었던가?” 크리스가 차갑게 물었다. 던필은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 나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레이는 황제 시해범이나 스트라스의 스파이 따위가 아닐 거야. 나도 그 아이를 안타깝게 여겨.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괴롭더라도 레이를 처형시켜야만 해. 뒷말이 없도록, 이번 사건을 깨끗하게 일단락 시키지 않으면 안됀다. 그래도 황후와 마크시 공작의 위세를 누르기가 벅차단 말이다!” “그래, 이대로는 그랜트 공작가가 과거의 껄끄러운 관계를 무시하고 황제폐하의 편에 선 의 미가 없겠지.” “울펜가모트 공작가도 마찬가지잖아! 크리스!! 그깟 노예 때문에 대의를 그르칠 생각이냐?” “그깟 노예라고!!? 이제와 그 입으로 잘도 지껄이는구나!!” 쾅! 던필은 크리스의 어깨를 잡아 벽에 밀쳤다. “뭣........!!” “크리스티안! 제발! 제발!! 레이는 어린 아이임에도 놀랍도록 강하고 현명하다. 그 신비로움 이 폐하나 너를 그토록 현혹시키는 거겠지.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봐라. 황후파가 정 권을 잡으면 어찌되는지 알고 있겠지? 단지 너나 우리 가문의 몰락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스트라스는 그냥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엘 파셔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단 말이다!!” 크리스는 가만히 던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던필은 그 짧은 사이 움직임을 간파하고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피하는 것보다 크리스의 두 번째 공격이 더 빨랐다. 주먹이 약간 턱에 비껴막았다. 명중은 아니지만 덕분에 던필은 잠 깐 균형을 잃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리스는 던필의 팔을 잡아 아래로 비틀고 배에 발을 꽂았다. 던필은 억하는 사이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여전히 하단이 부실하구나. 그 실력으로 나를 제압하려 드느냐?” “크윽, 크리스......” 던필은 배를 잡고 일어났다. 크리스는 차갑게 돌아섰다. 순간 던필은 소리질렀다. “레이는 황제폐하의 것이야!!!” 번뜩 크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크리스는 낮게 으르렁거 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던필은 눈을 아래로 깔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란 녀석은.... 고지식한 척 하면서, 마지막 순간엔 언제나 감정적이 되지. 특히 그 아이의 일이 관계되면 더욱 그래. 나설 때가 아닌데도 나서고,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크 리스, 제발 내 말을 들어다오.” “...이미 충분히 들었다. 좋은 충고, 감사히 들으마.” “듣고 있지 않잖아!” 크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던필은 고통스레 얼굴을 감싸고 중얼거렸다. “네 곁에 있었던 것은 언제나 나다. 헌데 어째서 항상.... 내 이야기는 듣지 않는 거냐. 크리 스..........” 불쾌함이 어딘가에 찌꺼기처럼 끼여서 찌걱거렸다. 크리스는 애써 기분을 털어내고 황제궁 을 찾았다. 레이 일과 관련해 지스카르에게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폐하께서는 해리슨 자작을 만나고 계십니다.” 기사들의 대답을 듣고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바라보다가 그는 갑자기 말했다. “하지만 곧 이곳으로 돌아오시겠지?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예? 그것은.........” 기사들은 당황했다. 침실 안에는 예의 노예가 있었다. 평소에도 불가침의 영역이긴 하지만 특히 누구도 방 안에 들여서는 안된다는 엄명이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는 황제의 아주 개 인적인 부분까지도 함께하는 호위기사이고 친우였다. 게다가 어떤 사건이라도 일어나서 저 노예가 어떻게든 되어버렸으면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 에 오른 황제를 존경했다. 그들의 황제는 뛰어난 기사이고 동시에 현명한 성군이었다. 헌데 그가 노예 하나 때문에 계속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 기사는 처벌을 각오하고 충동적으로 비켜주었다. 크리스는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 다. 갑자기 역한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크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좀 더 걸어들어갔다. 침대 위에 뭔가 있었다. 레이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마치 핏덩어리처럼,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크리스는 숨을 멈추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움츠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에 손을 뻗었다. 움찔. 레이는 손을 피하듯 약간 더 움츠렸다. 크리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러났다. “......레이.” 조용한 목소리에 레이는 깜빡거리며 점멸하던 의식을 되찾았다.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며 그 가 눈을 떴다. 크리스를 확인한 것 같았다. 그러나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녹색 눈동자엔 빛이 없었다. 크리스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왜..... 왜 이러고 널브러져 있느냐. 무엇 하러 숨을 쉬고 있느냐. 이렇게 치욕을 당할 바에 차라리 죽어버리지!! 대체 왜!!” “.........” 레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크리스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바스러질 것 같은 촉감 에 깜짝 놀라 황급히 물러났다. 레이는 손이 닿았던 어깨가 고통스러운지 움츠리며 신음을 흘렸다. “레이!!” 크리스는 소리질렀다. 무슨 의도인지도 모른 채로 그저 이름만.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는 방을 박차고 나왔다. 기사들이 놀라 물러서는 것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독하게 어깨가 찌걱댄다. 먹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대낮인데도 침실은 어둑어둑했다. 지스카르는 다시 손을 쥐었 다가 폈다. 겨우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손수건이 번져가는 핏자국이 그의 눈에는 비춰지지 않는 것처럼. 부스럭. 지스카르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가 약간 뒤척였다. 뜨거운 숨을 토하다 입술을 안타깝게 움 찔거렸다. 문득 지스카르는 눈을 크게 떴다. 레이가 물을 입에 댄지 며칠이나 지났지? 덜컹!!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동요하던 푸른 눈은 다시 침전해 검게 가라 앉았다. 한참 후 지스카르는 움직였다. 줄을 당겨 시종을 호출했다. 시종은 명을 받고 물과 부드러운 죽을 가지고 왔다. 문이 닫기자 지스카르는 침대에 걸터앉 았다. 한쪽 손으로는 물을 들고 다른 손으로 레이를 안아 일으켰다. “으.............” 레이는 고통에 떨다가 의식을 찾았다. 그러나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정 신이 들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컵을 레이의 입가에 대어주었다. 물이 입술에 닿자 레이는 무의식 중에 한모금 마셨다. 순간 갑자기 움찔거리더니 얼굴을 내밀고 허둥지둥 물을 삼켰다. 너무 마음이 급했다. 레이는 이내 기침을 하며 먹던 물을 토해냈다. “커헉!! 쿨럭쿨럭!! 카학!!” 지스카르는 레이가 쓰러지지 않게 품으로 당겼다. 발작처럼 일어났던 기침은 한참 후 가라 앉았다. 지스카르는 그 상태로 좀 더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컵을 대어주었다. 레이는 다시 물을 한 모금 아주 조금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지스카르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죽을 한 수저 떠서 가져왔다. 적당히 따뜻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 그는 스푼을 레이의 입으로 가져갔다. 식사를 한 지 까마득히 지났는데도 레이는 고개를 약간 돌려 죽을 거부했다. 그러다 문득, 어깨를 감싸고 있는 지스카르의 손이 이상한 상처를 입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스카르가 다시 스푼을 입술에 가져왔다. 레이는 눈을 감으며 또 피했다. 순간 지스카르는 왈칵 소리쳤다. “네 어미의 입에 쑤셔 넣을까?!” 고함소리에 녹색 눈동자가 잠깐 떨렸다. 지스카르는 다시 스푼을 가져갔다. 레이는 입술을 오물대다 벌렸다. 죽을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굉장히 힘들게 꿀꺽 삼켰다. 지스카르는 거기까지 확인하고 다시 한 스푼 떠왔다. 흘리지 않게 주의해서 먹여주었다. 레 이는 다시 우물거리다 삼켰다. 지스카르가 다시 죽을 떠왔을 때였다. “우웨에엑!! 커헉!! 카학!!” 레이는 먹었던 것을 전부 토해냈다. 시트를 쥐고 고통에 경련했다. 지스카르는 흠칫 놀라 스푼을 떨어뜨렸다. 레이는 한참 피 섞인 위액 따위를 토하다 실신해버렸다. 지스카르는 레이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일어났다.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 반복했다. 우드득. 강하게 움켜쥔 왼손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핏방울이 카펫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 다. 커튼 그림자가 그 위로 길게 드리웠다. 하늘을 뒤덮던 먹구름은 어느덧 서로 멀리 흘러가 보이지 않았다. 초봄에 피던 꽃이 하나둘 씩 떨어지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는 변함 없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시트를 덮어 상처투성이인 몸은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시트가 가만히 올라갔다가 한참 후에 내려왔다. 아주 느릿한 박자로 천천히 움직였다. 문득 지스카르는 그것을 깨달았다. 얼굴은 하얗게 식어있었다. 겨울의 나뭇껍질 처럼 메말랐다. 지스카르는 손을 뻗어 레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지푸라기 마냥 머리카락이 바스락거 렸다. 숨소리가 거의 들지지 않았다. 뺨을 톡톡 두드렸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갑자기 지스카르는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무언가가 숨통을 짓눌러 또 다시 숨을 쉴 수 없었다. 지스카르는 비틀거리며 왼손으로 침대기둥을 꽉 쥐었다. 그는 돌아섰다. 레이는 뺨에 닿는 둔탁한 통증에 눈꺼플을 들었다. 지스카르가 깨우기 위해서 뺨이라도 때 린 것 같았다. 그리고 안아서 일으킨 상태였다. 레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잘 인식할 수 없었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다. 뻐근하고 쓰리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있었다. 그것들은 어쩐지 아득했다. 문득 레이는 손 안에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작은 구슬 같은 것이었다. 아니 강한 힘으로 박동치는 또 다른 어떤 것이다. 지스카르는 마정석을 레이의 손에 쥐어주고 그의 어깨를 꼭 안았다. 레이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눈가가 몹시 뜨거웠다. 레이는 가만히 늘어져 있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온..........” 마정석이 조용하게 노래를 불렀다. 레이는 몸을 움츠렸다. 희미한 빛에 싸여 몸이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한 대가로 다시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치유되는 힘이 조금 더 강했다. 꽤 오랫동안 빛무리에 싸여 있었다. 레이는 조금 가쁜 숨을 내쉬었고, 스스로 손을 풀었다. 마정석이 시트 위에 굴러떨어졌다. 레이는 눈을 감았다. 얼마 안가 잠에 빠지듯 의식을 잃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꽃잎은 이제 거의 다 떨어졌다. 레이는 또 잠에서 깨어났다. 지스 카르가 깨운 것이다. 그는 레이를 일으켜 앉히고 손 안에 녹색 마정석을 쥐어주었다. “......온...” 희미하게 주문을 읊자 치유가 시작되었다. 지스카르는 입술을 떼었다. “발부터.....” “.......” 레이는 눈을 내려깔았다. 빛무리가 다리 아래에서 좀 더 강하게 발광했다. 화상을 입은 발 이 아물기 시작했다. 아직 한참 더 지나야겠지만 그래도 나아가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오 랫동안 기다렸다. 레이도 오래 그렇게 있었다. 서서히 빛이 줄어들었다. 마법이 끊어지자 레이는 다시 잠에 빠졌다. 지스카르는 시트에 굴 러다니는 마정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레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지스카르는 자신이 지독하게 비겁하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 해를 입을까봐 , 스스로 만든 족쇄에 묶여 이제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는 레이는 눕히고 일어났다. 하얀 꽃은 완전히 떨어지고 새파란 잎사귀이 잔뜩 늘어졌다. 지스카르는 소파 근처에 서서 말했다. “이리로 걸어오너라.” 레이는 기둥을 쥐고 일어섰다. 비쩍 마른 다리가 힘들게 떨렸다. 그것보다는 발에서 오는 통증이 극심했다. 레이는 한 걸음 내딛었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신음을 참고 다시 움직였다. 걸을수록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바로 앞에서 위태롭게 비틀거리는데도 지스카르는 지켜만 보았다. 도움을 주면 걷는 연습이 성립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레이는 지스카르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는 가만히 레이를 감싸안았다. 그대로 들 어올려서 다시 침대로 걸어갔다. 깨끗하게 갈아놓은 시트에 레이를 눕혔다.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아내었다. 레이는 이제 픽 픽 기절하는 일은 적었지만, 하루 중 아주 많은 시간을 잠든 채 보내었다. 시트를 들어서 덮어주었다. 레이를 다시 조용히 잠들었다. 마물 사냥은 봄과 가을에 두 번씩 있었다. 시기가 되어 황제는 두 번째 사냥에 나섰다. 황 궁은 극도로 어수선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사냥을 반대하고, 염려했다. 그러나 사냥은 결국 속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출발하는 날, 지스카르는 레이를 안고 마차에 올랐다. 수많은 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작은 소년에게 꽂혔다. 그 날 또 다른 마차에는 시라크 황자도 타고 있었다. 마차를 탈 수 없는 지역에 도착했고 행군이 시작되었다. 레이는 땀을 흠뻑 흘리며 뒤를 쫓 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려고 애썼으나 발에 감각이 없었다. “하아. 하아.... 지스카르.......” 한계에 이르러 레이는 힘들게 지스카르를 불렀다. 기사들이 보이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를 듣고 앞서가던 지스카르가 되돌아와서 레이를 안았다. 땀이 턱에 고여 뚝뚝 흘렀 다. 지스카르는 소매로 얼굴을 몇 번 훔쳐 땀을 닦아내었다. 그도 더 이상 걷는 것은 무 리라고 생각했다.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두고왔다면 틀림없이 불 만 세력들에게 변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레이를 안고 마물을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리스티안.” “예! 맡겨주십시오.” 크리스의 주 임무는 마물 소탕보다는 황제의 호위였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사실 큰 호위가 필요없었다. 크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즉시 대답하고 레이를 받아들었다. 받는 순간 크리 스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지스카르는 크리스의 반응을 느꼈다. 창백한 레이의 얼굴을 잠 시 응시하다 그는 돌아섰다. 못박힌 듯 서있던 크리스도 다시 움직였다. 산행은 계속되었다. 크리스에게 안긴 채 레이는 어느새 잠들었다. 그러나 편해보이지는 않 았다. 몸이 뜨겁고 연신 숨을 거칠게 쉬었다. 크리스는 가만히 이를 깨물었다. “…단장님. 무거우실 텐데 잠시동안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던필이 다가와서 대신 레이를 안겠다고 말했다.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너무나 가볍군.” 과거에 비하자면 레이는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지나칠 정도다. 손에 닿는 몸이 부러질 듯 약했다. 크리스의 시선이 지스카르의 등에 멈춰 있었다. 마물 사냥은 수월하게 진행 중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분위기가 가히 좋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몬스터에게 당할 만큼 엘 파셔의 전력은 약하지 않았다. “크크르르륵!!” 오크가 고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마법사들이 재빨리 마법으로 발을 묶자 기사들이 연이어 그들을 학살했다. 그때 미처 인지하지 못한 수풀에서 다시 오크 이십여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들만으로 감당하기엔 수가 약간 많았다. 그때 지스카르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폐하.....!” 기사들은 안도했고 기뻐했다. 소드 마스터인 황제에게 오크 따윈 하찮은 미물에 불과했다. 신기에 가까운 황제의 검술을 기대하며 그들은 어린애처럼 눈을 빛냈다. 오크 두 마리가 동시에 뛰어들어 각자 도끼와 몽둥이 따위를 휘둘렀다. 지스카르는 슥 옆으 로 물러서 도끼를 피하는 즉시 한 마리를 베고 검을 다시 쥐어 다른 한 마리의 뱃가죽을 쑤셨다. 딱히 힘도 들이지 않고 검을 슥슥 베는 동안 오크 다섯 마리가 더 죽었다. 남은 오크들은 멈칫거렸다. 지스카르는 쫓지도 않고 먼저 공격하지도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상념은 오라를 흐리고 집중력을 앗아갔다. 그때 오크 하나가 시험해보듯 도끼를 휙 집어던졌다. 지스카르는 제대로 도끼를 막지 못했 다. 날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균형을 잃고 있는 동안 이때다 하고 오크들이 동 시에 달려들었다. “폐하!!” 기사들이 다급히 외쳤다. 그래도 정말로 위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몇 년이나 황제 의 검을 지켜봤기에 그 같은 믿음이 있었다. 지스카르는 물러서며 오크 두 마리를 베었다. 그러나 세 마리째 오크는 그의 검을 피했다. 소드마스터의 검을. “크웨엑!!” 오크가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가슴부터 허리까지 붉은 피가 훅 번져나왔다. 지스카르는 인 상을 찡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 놈은 단칼에 목이 날아갔다. 그러나 다른 놈들이 한꺼 번에 덮쳐왔다. 지스카르는 오라를 전부 끌어올렸다. 백색 빛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그 는 크게 검을 휘둘렀다. 콰구구궁! 더 이상 살아있는 오크는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오라를 끌어쓴 대가로 상처가 크게 벌어졌 다. 피가 후둑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지스카르는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검을 꽂고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맙소사, 신관을 불러와!! 치유마법을 아는 마법사는?!” 기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일대 난리도 아니었다. 지스카르는 이 모든 소란에서 관계없는 사람 처럼 앉아있었다. 문득 머리 위에 작은 그림자가 졌다. 소란을 피우던 기사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레이는 팔을 뻗었다. “온.” 마정석이 조용히 울렸다. 기사들은 다른 무엇보다 레이가 마정석을 가지고 있다는데 놀랐 다. 어떤 자는 검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는 지스카르만 응시했다. 마법이 벌어진 상처를 메워갔다. 한참 후에 그는 팔을 내렸다. “이것으로 한 가지 빚을 졌다고 할 수는 없겠나? 대가로 그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지스카르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는 쓰게 웃었다. “무린가?” 레이는 손을 폈다. 마정석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과민반응하던 기사들은 여전히 긴장하는 중이었으나, 그나마 눈에 보이던 마정석을 손에서 놓은 것에 안심했다. 레이는 쩔뚝거리며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마법을 사용한 후유증이었다. 레이는 손등으로 피를 훔치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리스가 레이를 안아서 들어올렸다. 레이는 어느새 의식을 잃고 있었다. 달뜬 숨을 계속 내쉬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열이 올랐다. 마물 퇴치가 끝나고 밤을 보낼 준비를 시작했다. 크리스는 약간 외진 곳에서 레이를 눕히고 대기하고 있었다. 레이는 계속 몸을 뒤척거렸다. 이마에 손을 대려고 하자 그것마저 고통 스러운 듯 피했다. “레이......” “하아, 하아.......” 나지막한 부름에 가쁜 숨만 되돌아왔다.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레이의 머리칼을 넘겼 다. 매끈거리며 흘러내리던 머리결이 퍼석거렸다. 크리스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지스카르는 레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않고 외면했다. 하기야 죄인을 신관의 힘으로 치유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죄인이라는 말은 유명무실했다. 그런데도 이게 뭔가! 어중간하게 지키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아이는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그때 수풀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소년이었다. “혹시 그 노예를 가엾게 여긴다면..... 그 녀석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도록 손을 빌려주겠 나?” 목소리의 주인이 시라크라는 사실을 깨닫고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라크의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나왔다. “이들이 그 녀석을 데리고 멀리 떠날 것이다. 경은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간단히 연극에 동 참해주면 돼.” “무슨 생각입니까?” “저 녀석이 사라지면 아마도 아버지는 더욱 불안해지시겠지. 꽤 괜찮은 결과가 있으리라고 본다. 나도 보기 싫은 녀석을 볼 수 없게 되어 기쁘고.” 시라크는 레이를 내려다 보았다. 고통스레 움츠리는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꼴보기 싫다. 추하다. 그가 아는 노예는 오만방자하고 거침없이 모든 자를 내려다보는 놈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힘으로 해보겠다. 크리스티안 경, 이들에게 녀석을 넘 겨!” 검은 사내들이 다시 한 걸음 나왔다. 저런 수상한 놈들에게 레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크리 스는 레이를 끌어안았다. “제가 아이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시라크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고, 솔직히 묻고 싶었다. 아니 그만 두었다. 그는 소리쳤다. “그럼 떠나! 아버님을 붙들어두겠다. 길면 반나절, 녀석의 부재를 모르게 해줄테니까!” 크리스는 레이를 안고 일어났다. 그가 떠나기 직전 시라크가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크리스 는 공중에서 낚아채었다. 잘그락거리는 다섯 개의 보석. 마정석이었다. “녀석에게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해!!” “........” 크리스는 잠시 시라크 황자를 응시하고 돌아섰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레이는 몹시 흔들리는 감각에 눈을 떴다. 주위가 휙휙 지나쳤다. 무슨 일일까. 열 때문에 뭐 가뭔지 잘 알 수 없었다. 레이는 의지와 무관하게 다시 정신을 잃었다. 레이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깊은 밤이었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분명 일전에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와 같은 밤은 아니다. 하루가 지났나? 발치에는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는 애써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크리스가 보였다. 그리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병영이 근처에 있는 것치고 모든 것이 아주 고요했다. 레이는 일어나고 싶다는 표시를 보냈다. 크리스가 그를 안아서 일으켜주었다. “정신이 드나?” “여기는.........?” 레이는 아직 몽롱한 상태였다. 눈을 깜빡거리며 묻자 크리스는 대답했다. “너는 자유다. 아직 안전해진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멀리 이동하지 않으면......” “아.......? 무슨 소리....” 레이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퍼뜩 눈을 떴다. 그는 크리스를 붙잡았다. “뭐, 뭐야! 지스카르는....? 뭐, 뭘한 거냐, 크리스티안!!” 크리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솔직히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그는 어쩐지 화까지 나서 소리쳤 다. “허면 그대로 있는 게 좋았다는 거냐?!!” “시끄러워!! 돌아가야 해.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도망쳐버리면 아머니와 아버지가 죽을 거 야!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게..... 어쨌든 돌아가야, 지스카르에게 돌아가야.......!!” “뭐라고? 그런 것 때문에......! 기회가 오면 언제고 그들을 버릴 수 있다고 네 입으로 말하 지 않았느냐!” “이거 놔!! 빌어먹을!!” 레이는 크리스를 밀어내려고 발버둥쳤다. 밀려나가지 않는다. 팔이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너무 무력해서,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크리스는 소리질렀다. “레이!! 어째서!!” “시끄러워! 시끄러워! 어머니가 안아줘서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는 성실한 사람이라서... 나 는, 나는 행복했다. 행복했어!! 그러니까 그들은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어!! 내가... 내가.....!” 녹색 평원이 펼쳐진 아름다운 대지, 스트라스여! 어린 레이는 가끔 오래된 고국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도 낡아빠진 노예숙소가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 쓰디쓴 독차를 마셨을 때의 기억 따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언제나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꿈만 꾸었다. 버둥대던 팔에 힘이 풀렸다. 레이는 기력이 다해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크리스는 레이를 끌어안았다. 이외에 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뜬 눈으로 얼마나 시간을 보냈던가. 크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일단 레이 를 바닥에 누였다. 얼굴에 눈물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있기에 소매로 대충 닦아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작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원래는 해가 뜨기도 전에 떠나려고 했지만 계획은 이미 틀 어질대로 틀어져 있었다. 그는 무작정 숲을 돌아다니며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웠다. 대충 양이 차자 그는 다시 레이를 뉘여놓았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우뚝, 크리스는 멈추 어섰다. 인상적인 역광이었다. 아침해를 받으며 소년이 서있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녹색 눈동 자가 크리스를 발견하고 웃음기를 띄웠다. “이제 왔구나. 마정석은 가지고 있느냐.” “떠나겠다는 뜻인가?” 크리스는 딱딱하게 물었다. 그러나 살가죽 아래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레이는 입술 을 살짝 벌려 웃었다. “내가 요 근래 너무 감상적이 된 모양이다. 좀 추했더냐?” 그는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황족을 대하는 예우로 극히 정중히 레이를 부축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글쎄.......” 레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스트라스에 가볼까?” 크리스가 흠칫하자 레이는 어깨를 들썩였다. “왜? 정말로 스트라스의 스파이를 도주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죄책감이라도 느끼느냐?” “...이제와서 무슨. 고향에 되돌아가고 싶은가?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이번에는 레이도 놀란 얼굴을 했다. 그는 싱긋 웃었다. “글쎄다.” 레이는 고개를 들어 널리 굽어보았다. 아침해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났다. 크리스는 이를 데 없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만 가자. 크리스티안.” 그는 전부 털어버리고 명을 받들었다. 여명이 대지에 드리웠다. ------------------------------------------ 으아 넘 힘들다;; 이번에도 변명을 한 마디 날리자면. 금방 쓸 줄 알았는데, 수위가 너무나 높아서 쓰다 지우고 자르고 수정하고 생쇼를 부린다고 늦었습니다. 머리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직접 쓰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 글로 표현해 놓으니 너무 잔인해서, 레이가 너무 가엾고.;; (지가 써놓고) 지스카르는...........;;; 과연;; (--)(__);;; 2007.07.23 새벽 다운받은내용입니다. 15화부터.. 완결이래요~ ^^*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5화 리메 버전입니다. 스토리 다 갈아엎으면서 쓰는데 엄청난 시간을 소비했으나 사실상 스토리 진행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정말 허무하네. 다음 편은 3일 후에 갑니다! “평화롭군.” “평화롭다고?” 마지막 오크를 베어내며 크리스가 반문했다. 주위엔 스무 마리의 오크가 널브러져 있었고 코가 삐뚤어질 것처럼 역한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산 아래를 가리 켰다. “마을마다 논과 밭이 기름지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몬스터가 문제인 것 같지만, 황제 가 매년 직접 사냥에 나서던 것으로 봐서 마물퇴치에 관한 지원정책도 잘 갖춰놓은 것으로 보인다. 몇 년 사이에 엘 파셔가 아주 윤택해졌군.” “물론이다.” 크리스는 검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지울 수 없는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갑자 기 조금 심술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구나. 지스카르가 수차례 황후파에 꼬투리 잡힐 일을 만들며 실정 을 거듭했으니 곧 민간에도 그 여파가 있을 것이다. 제 손으로 쌓아올린 영예를 제 손으로 망치는군.” “.......” 크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어나고 싶다고 말하자 조용히 다가와서 부축해주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낮게 숨을 토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특별히 티를 내지도 않 았는데 크리스가 귀신같이 그 사실을 눈치 챘다. “레이, 몸이.....” “어쩔 수 없지...... 좀 쉬면 나을 게다......” 시들어버린 나뭇가지처럼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다시 원기를 되찾으려면 아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나는 힘없이 숨을 몰아쉬며 크리스에게 의지했다. 아니,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어. 어디서 신관이라도 납치해야지.” “진짜 납치라도 해서 신성력을 빌리고 싶을 지경이군.” “그래, 내일 마을에 내려가자. 일단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괜찮 은 신관을 물색해야겠구나.” “..........진심이었나?” 크리스가 오랜만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삐딱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황제의 애첩을 데리고 도망친 전적도 있는데 신관을 납치했다는 죄목이 하나 더 늘어 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지?” “농담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 쫓기고 있는 도중이라는 것을 잊었나? 신전의 추격까지 받고 싶은 건가?” “이래봬도 나는 꽤 절실해. 몸이 약해지니까 정신도 자꾸 약해지려고 하잖아.” 나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크리스로 말할 것 같으면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주는 일이 없는 인 간이다. 그는 침중한 얼굴로 분위기를 잡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레이, 너무 길을 돌아왔다. 스트라스에 가기 위해서는 마을 쪽으로 내려가서는 안 되고 여 기서 남으로 산을 더 넘어야 한다.” “나는 이래저래 스트라스와 인연이 많지. 추적자들도 내가 스트라스에 가기 위해 서남으로 이동할 것이라 예상할 것이다. 스트라스에 급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의 예상대로 움직여줄 필요는 없지 않느냐? 세상의 반이 스트라스다. 북으로만 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스트라스가 나오게.... 하아... 되어 있어.......” 크리스는 더 이상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다. 열이 올라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르 렀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나를 등에 업고 급히 쉴 곳을 찾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갑자기 도망치느라 모포 하나 제대로 갖추고 있질 못했기 때문에 밤을 보내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다. 오늘은 운 좋게 얕은 동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나뭇잎 따위를 잔뜩 깔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았다. 덮을 것은 크리스가 두르고 있던 망토 하나뿐이었다. 몸이 안 좋았기 때문에 처음 며칠간은 내가 망토를 사용했다. 크리스는 맨 몸으로 산속의 밤을 보냈다. 하지만 크리스가 아무리 신체 건강한 기사라도 그 상태로 계속 버티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결국 망토를 같이 덮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크리스는 나를 품에 안고 망토를 둘렀다. 추위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것은 대단히 성공 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크리스는 어정쩡한 자세로 아 직까지 손 둘 데를 찾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덕분에 망토가 흘러내려 찬 공기가 들 어왔다. “내가 생각보다 계집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 보지?” “무슨?” 뜬금없이 날아온 질문에 크리스는 의문을 표했다. “대답부터 해라!” “.....그다지 여자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본다만.” “그런데 뭘 그렇게 의식하는 거냐?” “무슨.. 뜻이지?” “아니라고? 넌 던필과 한 이불을 덮을 일이 생겨도 그렇게 눈알을 굴릴 생각인가 보지!!” 서슬 퍼런 반문에 크리스는 방황하던 손을 어깨에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팔이 뻣뻣했다. 나는 이를 북북 갈았다. “뭐 좋아. 일단 쓰러뜨려서 안아 버리는 놈보단 나으니까.” “나는........” 크리스가 변명을 하다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갑자기 팔을 들어올리더니 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순간 머리 꼭대기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멀찍이 떨어졌다. “레이, 그건?” 뒤늦게 과민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과민한 행동도 별 소용이 없었다. 크리스는 이미 목에 난 상흔을 본 후였다. 나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성노의 낙인이다. 그래, 네게도 이 몸뚱이를 즐길 권리가 있겠군.” “그런!!!” 크리스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동굴이 쩌렁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농담이다.” “해서 될 말과 안 될 말이 있다!” “그래? 이건 지스카르가 손수 찍은 낙인이다만.” 크리스는 갑자기 말을 잃었다. 나는 낙인을 매만졌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굴욕이었지.” “..........” 크리스는 여전히 동상처럼 선 채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까 그만 앉아라.” “폐하....께서 그런 일까지.......” “한심한 놈이거든.” 지금까지 엘 파셔를 잘 꾸려온 것을 보면 그렇게 한심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적어 도 내가 아는 그 놈은 아주 멍청하다. 얼마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매번 내 앞에서 폭군 흉내를 낸다. 감당도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매일 후회하지. 멀쩡한 왼손은 왜 뭉개나 몰라. 나 는 코웃음을 쳤다. “......지울 수 없는 건가?” “왜 없을까봐. 여건이 안 되서 미처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다친 몸으로 치유마법을 쓰자니 몸에 무리가 가서 기껏 치료된 부분이 다시 벌어지고 도대체 진척이 없군. 게다가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고......” 나는 약한 현기증을 느끼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크리스는 서둘러 맨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품 안으로 끌어와서 망토를 눈 아래까지 덮어주었다. 하지만 역시 움직임은 어색했다. 그는 절대로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흙냄새가 나는 망토에 얼굴을 묻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 던필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이를 악 물었다. 밤이 되자 그림자가 늘어져서 주위가 더욱 을씨 년스럽게 보였다. 죽어버린 무덤처럼 모든 것이 끔찍하게 적막했다. 던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곳은 엘 파셔의 중심이며 정점,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리던 황제궁 이었다. 이윽고 황제의 침소 앞에 당도했다. 근위병들은 던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떤 자도 들이지 말라는 폐하의 분부십니다.” 던필은 근위병을 무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발 알현을 허락해주십시오!!” “던필 경. 돌아가 주십시오.”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폐하!!” 거듭 소리를 지르던 던필은 주위를 살피더니 갑자기 황제의 침실문을 발로 걷어차서 열어젖 혔다. 근위병들은 일순 때와 장소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 던필이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던필은 즉시 방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무시하며 던필은 방 안을 응시했다. 빛 한 점 들지 않아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던필의 눈이 지스카르를 발견했다. 그는 창문 앞에 서서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동여맨 왼손이 눈에 뜨였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왼손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실은 알고 있다. 레이를 지켜줄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레이가 상처 입을 때마다 왼손의 상처도 늘어났다. 누구도 감히 황제를 해할 수는 없었다. 그를 해할 수 있는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던필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자해라니! “지스카르........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네가 이 방 안에 처박혀 있은 지 벌써 보름째다. 지금 나라꼴이 어떤지 알고 있나? 황후와 마크시 공작이 마치 제 세상인 양 날 뛰고 있단 말이다!” “누가 네 출입을 허했느냐?”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아!!” “마지막 경고다. 짐의 눈앞에서 사라져라.” 울컥 치밀어 올랐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던필은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주먹을 쥐고 힘 껏 휘둘렀다. 지스카르는 어느새 돌아서서 주먹을 붙잡았다. 던필은 잠깐 놀랐다. 주먹을 붙잡은 것이 왼손이었기 때문이다. 던필이 잠깐 틈을 보인 동안 지스카르는 팔을 꺾고 등 을 발로 걷어찼다. 던필은 바닥을 구르다가 이를 악 물고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났다. 손에 집히는 대로 도자기 잔을 쥐고 집어던졌다. 동시에 튀어나가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목을 왼 쪽으로 비틀어 너무 간단히 잔을 피했다. 다시 반대쪽으로 물러나며 던필의 주먹도 흘려 버렸다. 빠르다! 보름간 방에 처박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더니! 놀란 던필이 신음을 삼킬 새도 없었다. 지스카르는 주먹으로 그의 턱을 쳐올렸다. 뒤돌아서 며 수도로 뒷목을 후려갈겼다. 그 상태로 날아가듯이 던필은 구석에 처박혔다. 와장창!! 콰당!! “크악! 쿨럭........ 커헉!!” 뇌가 진탕이 된 느낌에 던필은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땅을 짚고 일어 나니 코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손등으로 피를 계속 훔쳐내던 그는 바닥을 힘껏 내려쳤다. “제기랄!! 제기랄!!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전부 힘은 지랄 맞게 세서!!” “짐에게 지금 검이 없는 것을 행운으로 알아라.” 머리 위에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던필은 주먹으로 바닥을 치다 부족했는지 머 리를 땅에 처박았다. “빌어먹을!! 어째서, 어째서!! 지금 괴로운 것이 너 하나 뿐인 줄 알아? 너는 알고 있잖아! 나야 말로.....!! 나는 어찌해야만!! 크리스, 크리스!!” 던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바랐더냐. 지독하게 오랜 옛날부터, 단지 네 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단 말이다! 어째서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거냐! 크리스티안!! 던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제발.... 제발..... 들어주십시오.... 황제폐하. 황제폐하.....” 그는 고개를 들었다. 부서져라 턱을 짓이겨 물고 말했다. “제가..... 크리스를 죽여서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감히... 신하된 몸으로... 군주의 것을 탐한 그 놈을, 계집에 눈이 멀어 군주를 배신한 그 파렴치한 놈을!! 제가, 이 손으로 목을 잘라 폐하의 발밑에 바칠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그 꼬마를 죽이십시오! 죽이고, 다시 엘 파셔의 하늘이 되어주십시오!!” 눈과 코로, 입으로 피를 흘리며 던필은 성대를 쥐어짜내었다. 그를, 지스카르는 극히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크리스티안을 죽이는 것은 네가 아니다.” 그는 등을 돌렸다. “네게 보여주마.” 던필은 고개를 들었다. 지독한 불안이 잠식해 왔다. 실로 오랜만에 황제가 아침 정무에 얼굴을 내밀었다. 마크시 공작이 가장 먼저 나서서 고개 를 숙였다. “황제폐하, 그간 이 노부 걱정이 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제 쾌차하셨 는지요.” 그간 마크시 공작이 미친 듯이 기뻐하며 새로이 판을 짜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그랜트 공작마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곁에 늘상 함께하던 울펜가모트 공작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도망한 노예와 크리스티안은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어린 소년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황제의 앞 에만 서면 항상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던 시라크 황자가 지극히 도전적이며 무례한 눈 빛으로 지스카르는 노려보고 있었다. 시라크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크리스티안 그 놈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당장 놈 을 잡아들여 오체분시하고, 특히 울펜가모트 가의 풀 한포기까지 불태워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이다. 허나 소리 소문 없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필시 놈을 도와준 자가 있을 터.” 지스카르는 턱 끝을 들어 시라크를 내려다보았다. 시라크는 숨소리를 가다듬었다. 계속 추 궁하면 증거를 내놓으라고 큰소리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누군가를 끌고 와서 무릎을 꿇게 했다. 귀족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 울펜가모트 공작이었다. 며칠간 고초를 겪어 언제나 깔끔하게 빗어 넘긴 백발이 아무렇 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공작이 스스로 고개를 들도록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공작의 턱을 쥐어 당겼다. 그는 수치심에 이를 악 물었다. 며칠 전만 해도 수많은 군신을 거느리던 3대 공작 중의 하나인 울펜가모트 공작. 그러나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수백 년 간 쌓아올린 긍지와 명예가 일거에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믿기지 않을 만큼 수치스러운 죄목 때문에 . 황제의 첩을 데리고 달아났다고? 악몽이다. 악몽이라면 이보다 더 끔찍한 악몽은 없었다. 지스카르가 손을 저었다. 그제야 병사들이 공작을 놓고 물러났다. “울펜가모트 공작.” 지스카르가 정사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울펜가모트 가문의 형 집행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아직 울펜가모트 공작이었다. “크리스티안은 너의 무엇이냐?” 지스카르가 질문을 던졌다. 울펜가모트 공작은 갑자기 던져진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 었다. 그러나 의도를 생각하는 것은 그만 두었다. 단지 끝 갈 데 없는 분노만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쥐어짜듯이 대답했다. “놈은...... 외람되옵게도, 신의 친아들입니다......!!” “놈을 어찌해야겠는가?” 울펜가모트 공작은 바닥을 내려쳤다. “놈을! 그 놈을 찾아내어 찢어 죽이십시오!! 감히 주군의 것을 데리고 도망치다니!! 수치스 러워서! 그 놈이 울펜가모트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 니다!! 부디 놈을 뼛째 갈아서 시궁창에 처박으십시오!!” “잘 말했다. 울펜가모트 공작. 진정 이를 수치로 여긴다면 가서 크리스티안을 찾아내라. 그 리고 네 손으로 그 놈을 찢어 죽여라. 네 손으로 살을 바르고 뼈를 갈아 시궁창에 처박 아라. 바로 짐의 눈앞에서, 너의 충성심을 보여 다오.” 울펜가모트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장내의 귀족들도 숨을 들이켰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것 이 맞나? 아비에게 친아들을 찢어죽이라고 한 것인가? 찬물을 끼얹은 듯 모든 것이 침묵이었다. 울펜가모트 공작은 떨리는 눈으로 지스카르를 응 시했다. 이내, 그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말씀대로.... 그것으로 가문의 수치를 씻어낼 수 있다면... 울펜가모트의 오랜 영광과 명 예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 놈을 죽이고, 가문의 모든 식솔을 처 죽이신다 해도, 평생 이 영혼까지 폐하께 감사할 것입니다!!” “가서 놈을 끌고 와라!!” 울펜가모트 공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근위병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지스카 르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다. “죄인의 신분으로 두 발로 당당히 걸어 나갈 생각은 마라. 그들은 네 감시역이 될 것이다. 크리스티안을 찾는다는 구실로 도주하다면 곤란하니까.” 지스카르가 손을 저었고 울펜가모트 공작은 죄인답게 병사들의 손에 질질 밖으로 끌려 나갔 다. 장 내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때 마크시 공작이 나섰다. “폐, 폐하.... 폐하의 격분하신 마음 알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이러지 마시고 하루라도 빨리 울펜가모트 공작의 목을 베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제국법에 따라 울펜가모트의 모든 직계 혈족을 잡아들여 당장 처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울펜가모트 공작이 동정이 되어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하루라도 빨리 그가 죽어버 려야 뒷구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다른 귀족들도 나섰다. “폐하, 이성을 찾으십시오!! 이 같은 방식은 전례에도 없던 일입니다! 제국법에 따라할 줄로 아옵니다!!” “폐하! 마크시 공작의 충언을 들어주십시오!” 회장이 극히 시끄러웠다. 모두 지스카르의 결정에 반발하는 말 뿐이었다. 기회를 보다 신흥 귀족 하나가 나설 자리가 아님에도 과감히 앞으로 나왔다. “폐하, 신 이렇게 간청 올리옵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이 기회를 틈 타 울펜가모트 공 작이 어떤 딴 마음을 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자유로이 돌아다니게 하다니, 가당치도 않 습니다!! 놈을 죽여야만 합니다!!” 지스카르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가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렁하는 소리가 소름끼쳤 다. 지스카르가 앞으로 걸어 나와 검을 휘둘렀다. “무엇이 가당치 않다고?” 깨끗하게 한번 내려쳐서, 소리 지르던 신흥귀족의 목을 잘랐다. 사람들의 눈에,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두 눈을 뻐끔하게 뜬 머리가 천천히 미끄러지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자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아... 허헉!!” 어린 시라크가 가장 먼저 기겁을 하여 헛숨을 들이켰다. “폐, 폐하!!” “맙소사! 무슨 일이!!” 시라크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경악한 이들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아버님! 지금 무슨 일을.......!!” “어전에서 무례를 범한 자를 벌하였다.” 지스카르는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라크가 고개를 휘휘 젓다가 갑자기 발악하듯이 외쳤다. “그런, 그런......! 그는 작위를 가진 제국의 귀족입니다! 비록, 비록 죄를 범하였으나, 정식으 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죽여 버릴 수는 없단 말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짓을 하면........!!” “저 놈의 몸뚱이와 머리를 가져가서 개의 먹이로 던져줘라.” 지스카르는 시라크를 무시하고 머리가 잘린 시체를 가리켰다. 병사들이 눈치를 보다 시체를 끌고 나갔다. “아버님!!” 시라크가 파랗게 질려 외쳤다. 지스카르는 시라크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검을 갈무 리해 넣었다. 스르렁하는 소리가 소름이 끼치게 들렸다. “울펜가모트 공작에게만 맡겨놓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군. 새로 수배령을 내려라. 그 두 놈 의 손가락을 하나 가져온다면 50만 골드를 포상으로 내리겠다. 팔 하나, 다리 하나에 10 0만 골드를 하사하겠다. 산 채로 끌고 오는 자는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을 것이다. 허나 죽여서 시체를 가져온 자는 머리를 으깨고 삼대를 멸할 것이다. 반드시 숨이 붙은 채로, 그 두 놈을 잡아와야 할 것이다.” 지스카르는 결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다만 메마르고 무감각한 음성으로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침묵 속에 어전에 흐른 피가 번지고 있었다. 오전 정무에서 보여준 황제의 모습은 엄청난 파장을 남겼다. 던필은 귀족들을 제치고 급히 지스카르의 뒤를 따라갔다. “폐하!! 이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는!!” “네 의견을 물은 기억이 없다.” 근위기사들이 던필을 떼어놓았다. 지스카르는 더 이상 던필의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명령 이 번복되는 일도 없었다. 던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아는 황제는 두려운 절대자이나 폭군은 아니 었다. 모든 것은 명분을 얻고 제도의 틀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권 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귀족들이 황제의 폭정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마크시 공작은 이제 정당성까지 얻을 것이다. 시라크 황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순식간에 정권을 휘어잡으리라. 모든 것이 끝장이다! 불연 듯 인기척을 느끼고 던필은 휙 돌아섰다. 복도에 어린아이가 홀로 서있었다. 등을 똑 바로 펴고 형형한 두 눈으로 던필을 노려보았다. “아버님은 정말로 귀를 틀어막아 버리셨군.” “시라크.. 전하?” “무슨 수를 쓰든 아버님을 설득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아버님께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 한다면, 나는 그 분께 대적할 테니까!”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던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 뭐라고?! 지금 무슨 말을 입에 담았는지 알고나 있는 겁니까? 지금 감히........!!” “나는 황궁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 아버지에게 대들었을 뿐이야. 내게 아버 님은 하늘과 같았다. 그 분이 항상 무서웠지만 그래도 항상 존경했어! 그런데 지금의 아 버님을 존경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어전에서 보여주었던 시라크의 태도에서 충분히 놀랐지만, 던필은 또 다시 놀랐다. 그는 정 말 시라크를 한심한 어린애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라크는 완 전히 변했다. 시라크는 거친 걸음으로 떠났다. 던필은 머리를 움켜쥐고 오랫동안 복도를 지키고 있었다.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6화 나는 크리스의 등에 업힌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 좌우로 가지각색의 가판대가 잔뜩 늘어 서 있었다. 시장을 오고가는 인파도 굉장히 많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마을인데 대단히 번화하군.” “이렇게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걱정 마라. 실제로 아무도 눈치를 못 채고 있잖느냐.” 크리스와 나는 머리를 검게 물들였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 바뀌자 첫눈에 우리들의 신부 분을 알아보는 이들은 적어졌다. 준비도 없이 산행을 강행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지저분해 졌는데 그것도 인상을 많이 바꾸어주었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씻을 수 있을 때도 일부러 씻지도 않고 머리 손질하는 일도 소홀히 했다. 특히 크리스는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기르 고 있었다. 세상 어디를 뒤져봐도 크리스만한 미남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 때 시대를 풍미하던 절세미남은 지금 상거지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최근 사소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인간이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거 한 순간이라는 것. “음! 상거지라니 실례군.” “크리스, 자신을 과소평가마라. 너는 이미 훌륭한 걸인이야.” 그때 누군가와 어깨를 가볍게 부딪쳤다. 덩치가 큰 사내는 당장 욕부터 쏟아냈다. “웬 거지새끼들이 아침부터 시장바닥을 어슬렁거려!! 제기랄, 냄새 밴 거 아냐?!” “.......” 함께 있던 유순한 인상의 청년이 그를 말렸고, 덩치 큰 사내는 욕을 한바가지 더 퍼붓다가 돌아섰다. 나는 웃으면서 크리스의 뺨을 콕콕 찔러주었다. 녀석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시장에 워낙 사람이 많아서 자꾸만 부딪혔다. 정 신없이 시장통 안에서 휩쓸려 다니다가 문득 유독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손짓했다. “크리스, 저쪽으로 가보자.”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피하는 게 좋다.” “말이 많구나! 이곳이나 저곳이나 다를 게 무어냐. 내 성격 알 텐데? 기어코 내 발로 걸어 가게 만들 작정이냐?” 결국 크리스는 내 말대로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새로 벽보가 나붙어 있었는데 사람들 이 그걸 보겠다고 모여든 것이다. 가장 먼저 대문짝만한 초상화부터 눈에 뜨였다. 다음 아닌 크리스와 내 얼굴이었다. 크리스는 그 즉시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이 녀석! 좀 기다려. 수배가 떨어진 지 꽤 되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는 이유 가 궁금하지 않느냐?” 나는 말고삐를 잡듯 크리스의 귀를 붙잡고 유심히 벽보를 살펴보았다. 내용은 크리스와 내 게 현상금을 건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상금 내역이 대단히 특이했다. 그냥 잡아오라는 게 아니다. 손가락 하나만 가져와도 50만 골드, 팔 하나 다리 하나에 100만 골드의 상금이 붙었다. 크리스는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선 채 벽보에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얼굴색이 천천히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근처에 서있던 노인이 불안한 자세로 지팡 이를 짚고 중얼거렸다. “뭐, 뭐여 이게..... 드디어 황제께서 크롬산의 고블린을 퇴치하러 와주시나 싶어 좋다하고 뛰어나왔더니.....” 그때 차림새가 거의 건달에 가까운 사내가 노인의 팔을 툭 쳤다. “영감. 내 이야기를 들으니 이번 일 때문에 황제께서 제정신이 아니라 하더이다.” “뭐? 그게 무슨 소린가?”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저걸 보니 이제 확실해지는구먼. 저게 어디 정상인가? 황제는 미치고, 엘 파셔 3대 공작가 중 하나인 울펜가모트가 스트라스의 주구라고 드러나질 않나.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하는지. 캬아악~ 퉤엣.” 사내는 걸쭉하게 가래를 뽑아 바닥에 뱉었다. 그런데 노인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사내의 머 리를 세게 내리쳤다. “우앗? 뭐야! 이 노인네가!!” “닥쳐라 이 눔아! 우리 나랏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까짓 스트라스 놈들 따윈 단 칼에 베어 버릴 분이시란 말이여! 미치긴 누가 미쳐! 혹 네 놈이 진짜 스트라스의 첩자 아닌겨?” “아니 이 영감이 진짜 미쳤나!” 사내는 그대로 노인을 칠 것처럼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흠칫 움직임을 멈추 었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노인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차마 그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사내는 침을 뱉고는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일단 그 곳에서 물러났다. 크리스는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능한 빨리.... 마을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겠군... 위장을 해도 언제 눈에 띌지 알 수 없 다.” “글쎄다. 내용이 참 재미있지 않나?” 나는 피식 웃었다. “사살하는 것보다 생포하는 것이 수십 배 더 어렵다. 하물며 이 몸을 생포하겠다고? 몸이 많이 약해졌지만 마정석이 이 손 안에 있는 한 절대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오라를 사용하는 기사가 행동을 함께하고 있지. 우습군! 게다가 마지막 단서를 보거라. 만약 생 포하지 못하고 사실해버리면 머리를 으깨고 3대를 멸하겠다는군.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 자살하겠다고 협박을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수배령의 내용이 바뀌면서 나는 훨씬 더 안전해졌구나.” 크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불연 듯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 스트라스의 현재 상황은 어떻지? 아니, 내가 죽은 뒤 13년 동안 스트라스에서 어 떤 일이 있었는지 간략히 이야기 해다오.”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되지?” “내가 죽은 직후부터 전부.” 크리스는 갑자기 새삼 신기한 눈으로 날 보았다. “그간 스트라스의 근황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던가?” “물론 궁금했지. 그런데 어쩐지 기회가 안 닿아서. 이래봬도 내가 노예잖아?”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회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스트라스와 전생의 기억을 잊고 싶었던 건가?” “넘겨짚는구나. 나는 빈첸시오 성에서 태어나 당시의 생활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아버 지와 어머니는 노예였지만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게 세심히 보살펴주었고 사랑해주었다. 가슴이 벅찰 만큼, 나도 그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스트라스의 모든 것이 그렇게 절실하 지 않았다. 그저 좀 궁금했을 뿐.”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는 지스카르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로서 부모님의 생명은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벌써 예전에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고 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보다 스트라스는?” 크리스는 입을 열었다. “휴전협정 직후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암살당한다. 당시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온 나라에 절 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독살한 범인으로 에드리히 11황자가 지목되었다. 11황자는 극구 자신 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동기나 정황이 너무 뚜렷했다. 그는 꼼짝없이 처형당할 상황에 처 했지. 그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어났다. 스트라스의 황제가 나서서 에드리히 11황자의 손 을 들어준 것이다. 스트라스의 황제가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지극히 편애하였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다. 정말 11황자가 황태자를 독살하였다면 누구보다도 분노할 사람이 바로 스트라스의 황 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11황자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11황자는 기회를 얻었다. 다시 한 번 범인을 색출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지휘를 11황자가 맡았다. 결국 진범은 다이모스 후작이라는 결론이 났다. 자신을 한지로 몰아낸 레브노아드 황태자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후작은 알몸으로 성난 군중에게 던져져 몰매를 맞고 죽었다.” 크리스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 만한 자들은 다 알고 있지. 다이모스 후작은 단지 희생양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유는?” “다이모스 후작이 범인이라고 말하기엔 에드리히 11황자가 얻은 것이 너무 많으니까.” 나는 약간 눈을 내려 깔고 다시 말했다. “계속해라.” “황태자가 죽고, 11황자가 죽으면 황실의 혈통이 끊긴다. 그 이후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이 몰아닥칠 것이다.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나 스트라스는 여전히 엘 파셔와 대립하고 있었다. 스트라스의 황제는 레브노아드의 원수를 갚는 일에 앞서 제국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는 잠시 내 얼굴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편, 에드리히 11황자는 이후 황태자위에 오르고 멀지 않아 옥좌를 물려받는다. 그는 혐 의를 벗은 이후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업적을 기리고 칭송하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 것이 정말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경외하였기 때문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당시 각 계의 중요 요직은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사람들이 꿰차고 있었다. 마찰 없이 그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11황자는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우방을 표명할 필요성이 있었다. 우상화를 추진하는 가운데서도 11황자를 의심하고 그를 따를 수 없다고 반발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 11황자는 그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숙청했다.” 크리스는 얕게 숨을 쉬고 물었다. “진실은 어떻지? 너를 죽인 것은 에드리히 11황자가 아닌가?” “.........글쎄.... 아니, 나는 에디에게 죽었지.” 에디라는 이름이 약간 껄끄럽다. 크리스도 내 입에서 습관적으로 흘러나온 애칭에 주목하고 있었다. 씁쓸하게 웃었다. 결과적으로 에드리히가 범인으로 처형당하지 않은 것은 바람직 했다. 엘 파셔를 등 뒤에 두고 집안싸움을 벌이다 스트라스가 몰락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몰랐다. “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스트라스는 최근 어떤 상태이지?” “사실 스트라스도 정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11황자, 즉 현 스트라스 황제는 제위한 뒤부터 계속 공포정치를 펼쳐왔다. 피 냄새가 가실 날이 없으니 나라가 평안할 수가 없지.” “공포정치? 그 유순하던 녀석이?” “......내가 아는 한 스트라스의 현 황제는 유순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내가 아는 에드리히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서 제대로 큰소리 한번 내질 못하는 아이였다. 나 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본성이었다, 라는 이야기가 되나?”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암살 건을 명분으로 난을 일으키는 자들이 많은 탓도 있으리라 본다. 반란은 모두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강압적인 정책이 필요했을 것 이다.” “남의 이름을 핑계로 삼아 반란을 획책하다니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군. 어쨌든 스트라스 도 여유는 없군. 지스카르에게 좀 더 시간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가?” 주민들은 여전히 벽보 근처를 떠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군중을 향해 시선 을 고정시킨 채 생각에 잠겼다. “엘 파셔의 황제는 스무 살에 소드 마스터가 된 위대한 기사이고, 존경받는 군주였다. 백성 들은 아직 황제를 믿고 있다. 황제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군신들이 아직은 남아있을 것 이다. 황권이 많이 위태로워졌지만 바로 잡을 기회는 남아있다. 하지만 황후파를 잡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지부진한 상태로 황후와의 마찰을 지속하면 자연히 국력이 쇠락한다. 스트라스가 여력이 없다고는 하나, 만신창이가 된 엘 파셔를 보고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겠지. 그냥 황후파를 제거하는 것으로는 부족해. 단시간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더 이상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않나? 왜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는 거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크리스가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전쟁이 시작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산골의 촌부 한 명까지 그 여파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 그런데 나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그렇군...” 크리스는 애매한 표정이었으나 지금은 납득하고 넘어갔다. 산을 내려오기 전에 사냥해둔 토끼를 싼 값에 팔아서 가장 시급한 모포를 사들였다. 시장 바로 근처에 광장이 있었다. 크리스는 갑자기 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중앙의 분수대 주 위에 설치된 의자에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놓았다. 아직 살 것도 남아있는데 영문을 몰라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쯤에서 쉬는 것이 좋다. 무리하면 다시 열이 오를 거다.” “정말 걱정도 팔자군.” 나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크리스의 말대로 잠시 쉬기로 했다. 업혀있는 것도 의외로 기력 을 소비하는 일이라고 할까. 나는 의자에 앉아 분수를 구경했다. 분수 꼭대기에는 드래곤 석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오랜 옛날 대륙 여기저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종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번 성하기 시작한 뒤로부터 그들은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정령을 부리는 아름다운 엘프, 뛰 어난 광부이며 대장장이인 드워프, 장난을 치길 좋아하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페어리 등. 시간이 지날수록 이종족에 대한 환상은 부풀려져 갔는데 그 중에서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 는 것은 단연 드래곤이다. 드래곤은 엄밀히 따지면 몬스터의 일종이다. 기록에 따르면 드래곤은 거대한 몸뚱이를 비틀 며 괴성을 지르는 마물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고차원의 지식이 요구되는 마법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오랜 옛날 인간들이 드래곤의 전능한 힘을 따라하 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마법의 원류가 되었다. 드래곤은 한 모금의 숨결로 대륙의 반을 불태워 버릴 수 있다. ‘드래곤 브레스’는 이미 공격 의 차원을 떠나, 지진이나 화산폭발에 비견될 일종의 재앙이었다. 인간들은 드래곤을 감히 우러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드래곤을 특별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오직 선택받은 존재들만이 드래 곤과 접촉할 수 있었다. 허락받지 못한 자들은 손을 대는 순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 그 대로 소멸해버렸다. 이유를 아는 자는 없다. 드래곤이 어떠한 마물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 그래서 인간들은 더욱 드래곤을 경외하게 되었다. “내겐 그런 행운이 오지 않으려나. 나도 아직 드래곤은 본 적이 없는데.” “드래곤‘은’ 본 적이 없다고?” 웬일로 크리스가 제법 날카롭게 단어 하나를 짚어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각한 얼굴 로 분수대를 올려다보았다. “아......!! 어디서 신관을 하나 구해야 할 텐데.......!” “무슨 뜻이지? 드래곤이 아닌 다른 것은 본 적이 있다는 건가?” 이 놈이 평소답지 않게 끈질겼다. 나도 끈질기게 무시했다. 그때 웬 사내가 바삐 지나가다 가 어깨를 세게 쳤다. 다 죽어가는 내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나는 그대로 휩쓸려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크윽!” “레이!” 크리스가 크게 놀라서 부축했다. 가만있는 사람을 친 사내는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먼저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할, 또 뭐야! 엇, 이거 아까 본 그 거지새끼들 아냐? 이런 재수가 없으려니......!!” 짜증을 내던 사내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벌컥 외쳤다. “잠깐! 이거 낙인이잖아!!” 쓰러질 때 옷깃이 흐트러지면서 목이 드러났다. 동행하던 순한 인상의 청년도 다가왔다. “정말인데요? 제이크씨, 그것도 성노의 낙인입니다! 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벌써 부터 밑바닥까지 굴러먹었군!” 크리스가 순간 주먹을 꾹 쥐고 일어서려고 했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놈들의 입을 다 물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 놈들을 때려눕히는 곳은 곤란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물론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으슥한 곳으 로 자리를 옮겼을 때 한방씩 먹여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내 고민거리는 이 놈들을 그냥 죽여 버릴까, 갱생의 기회를 한 번 줄까 하는 것이다. 이쪽 사정과는 관계없이 두 놈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제이크라 는 이름을 가진 덩치 큰 놈이 으름장을 놓았다. “노예가 왜 거지꼴을 하고 이런 곳을 어슬렁대고 다니지? 주인새끼는 누구야!” 황제새끼라고 말하면 뭐라고 반응하려나. “왜 말을 못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군! 이 새끼들 도망쳤지!?” 주위 사람들이 웅성대며 이쪽을 주목했다. 일단 주눅이 든 척 고개를 눈치만 봤다. 현상수 배범이라고 생각지는 못하고 단순히 도망친 노예라고만 생각하고 있으니 아직은 주목받아도 괜찮았다. 그때 유순한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헌데 도망친 노예가 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응? 것도 그러네.....” “........” 두 놈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황제를 시해하려고 든 스트라스의 자객으로 수배되었지 도망 친 노예로 수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놈들이 좀 덜 떨어진 놈들이라 삽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끌고 가자. 요 놈 얼굴을 봐.” 제이크는 내 턱을 쥐고 들어올렸다. 나는 다시 한번 발끈하는 크리스를 붙잡았다. “녹색 눈동자다! 색이 흐리지 않고 아주 선명하군! 게다가 보면 볼수록 이목구비가 번듯한 게........ 옳거니!! 마침 잘 됐다! 경매가 코앞인데 아직 괜찮은 물건을 못 구해서 진땀을 빼고 있었는데 하늘이 주신 기회구만!!” “경매에 내시려고요? 얼굴색이 창백한데다가 비실거리는 것이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것 같은 데.” “비실대는 건 그냥 못 처먹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잘 먹이면 금방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를 거다! 아서, 저 놈들 끌고 와!” 이제 보니 이 놈들 노예상인인 모양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노예를 경매에 내놓겠다고 말하 는 꼴을 보니 질이 아주 안 좋아 보였다. 노예를 사는 것은 대부분 귀족이다. 귀족을 능 멸한 죄는 즉결처분이다. ‘적당한 곳에서 처리해라.’ 목소리를 낮춰 말했고, 크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들 재수도 오라지게 없구나. 어찌 용케 도망을 친 모양인데 이런데서 갑자기 붙잡히다 니.” 아서라는 이름의 청년이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손으로는 어느새 단검을 꺼내 위협하고 있었 다. 인상이 좋아도 역시 한 통속이었다. 나는 입을 비틀며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랐다. 마을은 대단히 번화했으나 인적이 드문 장소도 얼마든지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마침 인적 이 없는 골목길이 나타났다. 크리스가 눈짓을 보내 확인을 요구했다. 나는 승인해주는 대신 벽을 짚고 멈추어 섰다. 몇 걸음 걸었다고 그새 이 놈의 허약한 몸뚱이가 고통이 호소하 고 있었다. “레......!!” “체, 체르도 형.” 나는 크리스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이름을 부르려던 크리스도 내 의도를 깨닫고 입을 다물 었다. 기분 좋게 출발했던 제이크와 아서는 어느새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상태가 생각보다 나빠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뭐야 저 새끼, 다 죽어가잖아. 이런 제길! 아무리 얼굴 반반하면 뭘 해. 저런 걸 어떻게 팔 아먹지?” “제이크 씨가 먼저 괜찮을 거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시끄러워! 데려가 보면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겠지. 제기랄, 별 탈 없어야 할 텐데....” 제이크는 투덜거리면서 돌아섰다. 그 순간 머리 속에 번쩍하고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 다. 나는 즉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딱 한 번 용서를 베풀기로 하자. 사기 한 번 쳤다고 목숨을 잃다니 너무 과하잖아? ‘크리스, 일정 변경이다. 이 놈들을 따라간다.’ ‘뭐라고?’ 크리스는 물론 매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제이크가 벌컥 소리 질렀다. “뭐야, 이 자식들!! 어디서 귓속말이야!!” “저기... 형에게 업어달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제이크는 짜증 어린 얼굴로 노려보다가 내가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는 이내 허 락해주었다. 크리스는 내 말을 따르기로 결심한 듯 잠자코 나를 등에 업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4층짜리 거대한 건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거 대한 상회였다. 직원들이 제이크가 들어오자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제이크는 제법 직 위가 높은 인간 같았다. “뭘 꾸물거려!!” 주위를 탐색하고 있자니 제이크가 성질을 부렸다. 제이크가 독촉을 하면서 곧바로 직행한 곳은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병실이었다. 크리스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등에 기대어 싱긋 웃었다. 노예도 아프면 치료를 받는다. 노예는 생각보다 아주 비싼데, 평민 1년 생활비를 탈탈 털어 도 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치료비 몇 푼 아끼겠다고 고가의 노예들이 병에 걸려 죽 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로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자랑하는 노예도 있었다. 이들은 병에 걸리면 여느 평민들보다도 훨씬 극진한 치료를 받았다. 물론 주인마다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노예를 파는 것이 목적은 노예상회는 항상 노예의 상태를 관리 했다. 병에 걸린 노예 따윈 아무도 사가지 않을 테니까. “의원 어딨어!! 의원!!” 제이크의 고함소리에 흰 가운을 입은 사내가 서둘러 뛰어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저 애새끼 상태 좀 봐라. 어디가 아픈 거지? 정말 무슨 병에 걸린 거야?” “아, 예.” 의원이 다가와서 옷을 벗기려고 했다. 물론 순전히 진찰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가 여기에 또 반응했다. 그는 의원을 거부하고 나를 내려놓지 않으려고 했다. 제이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저 새끼는!” 나는 크리스의 손을 밀어냈다. “형, 괜찮으니까.” “하지만........!!” 나는 스스로 의원 앞으로 걸어갔다. 겉옷을 벗고 셔츠까지 반쯤 벗겨졌을 때, 병실은 적막 감에 빠졌다. 성한 곳 없이 몸을 가득 새기고 있는 상처들 때문이다. 특히 양 쪽 손의 손 톱이 모두 빠진 것을 보고 제이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건 사고로 입은 상처가 아니잖아. 어떤 새끼가 이런 짓을..........” “아아, 왜 도망을 쳤는지 대충 알 것 같군. 주인이 아주 더럽게 썼구만. 이제 보니 요 꼬맹 이 제대로 굴러먹던 놈이었어?” 아서가 입을 이죽이면서 말했다. 크리스는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질 만큼 주먹을 힘껏 움 켜쥐었다. 크리스는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아주 불같은 인간이다. 덕분에 나는 크리스를 말려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제이크씨, 저런 취미를 가진 놈이니 뻔합니다. 이것저것 지저분한 사정이 얽힌 거죠. 사실 노예가 도망쳤는데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이면 백 신고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마 코앞에 들이대도 자기 노예라고 주장 못할 겁니다.” “과연 그건 좋은 소식이구만!” 두 놈이 자기 희망사항을 마음껏 펼치고 있을 때 의원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는 다른 일에는 상관하지 않고 지금까지 내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제이크씨, 상처가 너무 심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속병이 중하진 않고, 대부분 외상이니 신 관을 부르면 빠르게 차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았어! 공짜로 노예를 얻었는데 그 정도 투자는 해야지. 누가 튀어가서 신관을 불러와 라!!” 그 말을 1초만 늦게 했어도 크리스가 모조리 뒤엎어버렸으리라. 나는 싱긋 웃으며 크리스를 다독였다. 하지만 크리스의 얼굴을 펴질 줄을 몰랐다. 아서가 신관을 부른다며 병실 밖으로 나갔고 제이크가 할 말이 있는지 급작스레 뒤를 쫓아 나갔다. 의원도 잠시 자리를 비웠다. 둘만 남게 되자 크리스가 즉시 입을 열었다. “레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제부터는 레아드라고 불러라. 나는 체르도라고 부를 테니까.” “차라리 내가 신관을 납치해 오겠다!!” “그만둬. 내 입으로 꺼낸 말이지만 신전을 적으로 돌리면 뒷감당이 정말 만만치 않아. 그것 들은 신성력 외에 대외적인 이미지로 먹고사는 지라 한 번 일을 공표하면 곧 죽어도 타협을 안 하는 인종들이다. 정상적인 루트로 신관을 불러서 치료해준다는데 감사해야하지 않겠어?” 그때 문이 벌컥 다시 열렸다. 제이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야? 무슨 얘길 했지? 이 놈들이 심심하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데 말이야.........” 나는 급히 일어나며 우연을 가장해 탁자 위를 팔로 쳤다. 유리병과 십여 개의 잔이 한꺼번 에 요란하게 깨졌고, 제이크는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고 달려왔다. 덕분에 크리스와 나누던 대화는 완전히 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역시 뒷감당이 고달파질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제이크가 불같이 화를 내며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아서가 뒤따라 들어오다가 난리통을 보고 는 혀를 찼다. “저 놈이 첫날부터 일을 저지르는군.” “겁도 없이 도망까지 쳤으니 처음부터 싹수가 노랬던 거지! 아서!! 채찍을 가져와라!! 이 새 끼, 이 김에 쥐죽은 듯 처박혀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지 확실하게 보여주마!!” “맡겨주십시오. 곧 신관도 오겠다, 마음 놓고 손맛을 즐길 수 있겠구만.” 나는 제이크의 손에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때 크리스가 급히 뛰어나왔다. 나는 일을 망치지 말라고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기다려...주십시오!” 어딘가 어색한 존대가 튀어나왔다. 제이크는 눈엣가시 보는 것처럼 크리스를 흘겨보며 외쳤 다. “저 새끼는 지하에 쳐 넣어!!” “대신 저를 벌해주십시오! 보시다시피 동생은 몸이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채찍질을 당하면 신관분이 오셔도 치료할 수 없는 상처가 생길지 모릅니다!” “니가 뭘 안다고 주둥이를 놀려대!!” 제이크는 왈칵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내심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다. 그는 힐끗 날 훑어보았다. 신관이 오면 금방 나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받았으나 적어도 지금 보기에 나는 병마로 다 죽어가는 꼬마였다. “저 괜찮은데........” 제이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여기서 상처를 더 늘이긴 싫었지 만, 크리스에게 떠넘기는 것은 좀 탐탁치가 않았다. 그때 아서가 입을 비틀며 나섰다. “작은 놈이 보는 앞에서 큰 놈을 채찍질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제법 우애가 깊은 형제 같은 데.” 나는 처음으로 이를 빠득 깨물었다. 순하게 생긴 놈이 제이크보다 몇 배 더했다. 제이크는 옳다구나 하고 그 방법을 채택했다. 체벌은 노예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쩐지 처형당하는 장면, 체벌을 받는 장면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 사방이 탁 트인 뒷마당에서 크리스는 웃통을 벗은 채 양쪽 팔을 기둥에 묶였다. 아서가 직접 채찍을 들고 나와서 이죽거렸다. “이 놈은 몸이 아주 멀끔하구만. 체벌을 받은 적이 없나? 동생과 극과 극인데?” 부욱!!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살을 찢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나는 제이크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다. 역시 보기가 껄끄럽다.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제이크는 그것까지 제지하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채찍소리가 귀를 때렸다. 나는 눈을 떴다. 똑바로 앞을 보 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눈에 담았다. 아서가 채찍의 손잡이로 크리스의 턱을 들어올렸다. “이야, 잘 참는데.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 지 한 번 볼까?” 크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보면 오히려 화를 부추길 뿐이다. 아서는 입을 비틀며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스무 대를 맞고 크리스는 풀려났다. 구경하러 모여든 이들도 그제야 뿔뿔이 흩어졌다. 마지 막에 제이크가 팔을 놓아주었다. 나는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크리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대단치는 않다.” “하기야 정말 대단치는 않군.” 나는 피식 웃으며 등을 툭툭 쳤다. 등가죽에 거미줄 같은 상흔이 남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진짜 상처는 별 것 아니다. 내 상처에 비하면야 새발이 피지. 다만, 걸리는 것은 그것이다. 기사니까 상처에는 익숙할 것이다. 그래도 채찍질을 당해 등이 찢어질 일은 없 었으리라. 나는 물끄러미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서는 한 일은 아니겠지만, 너의 노고에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뭐라고?” 마음이 지극하고 한결 같은 자는 설령 내 것이 아니라 해도 역시 함부로 내쳐버릴 수가 없 었다. “나중에 흉터까지 깨끗하게 없애주마. 그동안은 좀 참아라.” “두 놈 다!! 언제까지 꾸물대고 있을 셈이냐! 따라와!!” 제이크가 목청을 돋워 외쳤다. 나는 크리스를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 놈이 끝까지 내 도움을 거부하고 오히려 나를 부축하겠다고 우겼다. 나는 발로 놈의 정강이를 차주었다. 결국엔 각자 자기 발로 걸어서 제이크를 따라갔다. *** 엘 파셔의 대전은 큰 소리가 나는 일이 적은 편이었다. 황제의 성정이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소란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마크시 공작이 목소 리를 높여 외쳤다. “노스랜드의 도적놈들이 다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 무도한 놈들이 주제넘게도 또 다시 무역을 요구했습니다! 폐하! 엘 파셔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아룁니다!” “가서 무역을 허가하겠다고 이르라.” 지스카르는 짤막하게 명령을 내렸다.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는 벌써 수 년 째 쟁점 이 된 문제였다. 한마디로 끝낼 문제가 절대 아니었다. 엘 파셔는 13년 전 대전쟁에서 대륙의 반을 평정했다. 하지만 북부의 빙하지대나 작은 섬들 은 아직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엘 파셔는 그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도적놈들, 해 적놈들 정도로 일축했다. 당연히 무역도 용납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엘 파셔는 일 년 내내 눈으로 둘러싸인 노스랜드 따위 조금도 흥미 없었다. 거 기서 살긴 원하는 것은 원래 거기서 태어난 소수민족뿐이다. 소수민족들은 얼음물 속에서 싱싱한 생선을 능숙하게 낚아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선과 엘 파셔의 곡물을 거래하길 원했다. 엘 파셔도 북부의 생선이 필요했다. 곡물은 남아도는 것이 있었다. 그런 데도 단지 명분상의 이유로 무역을 허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스랜드는 급기야 보복 성으로 약탈을 시작했다. 소탕하고 싶어도 바다에 빙하가 떠다니기 때문에 추격조차 불가 능했다. 이렇다할 대책도 없이 북부지방의 주민들은 항상 고통 받고 있었다. 그래도 명분은 중요하다. 무역을 허가하면 노스랜드는 엘 파셔가 인정한 독립된 국가가 된 다. 한번 예외가 안정되었으니 13년 전 통합된 식민지역에서 자신도 예외가 되길 원하며 반란을 획책할 수도 있었다. 무역을 허가하는가, 인정치 않는가. 전자는 황제의 의견이었고 후자가 마크시 공작의 의견 이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마크시 공작을 위시로 귀족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폐하!! 그리 간단히 말씀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잃는 격 이 될 것입니다!!” “마크시 공작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찌 경솔하게 결정을 내리려 하십니까!” 오직 반대의견 뿐이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반대 의견만 터져 나왔다. 콰앙!! 지스카르가 옥좌를 세게 내려쳤다. 잠깐 장내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지스카르는 다시 명령 했다. “무역을 허가하겠다.” “폐하!!” “마음에 들지 않거든 마크시 공작 그대가 선봉에 서서 노스랜드를 평정하고 오시오. 허면 짐도 인정하겠소.” “그것은..........” “못하겠소?” 지스카르는 대전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들었는가? 무역을 허가한다. 더 이상 반언은 용납하지 않겠다.” 반언을 용납 않겠다고 말했지만 당연히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구석진 자리에 있던 귀족이 목청을 높였다. “폐하! 그건 억지입니다! 어찌 문관인 마크시 공작님께 소탕을 강요하십니까! 이제는 귀를 열고 마크시 공작님의 충언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미 한번 실수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폐하를 위한 길입니다!!” 지스카르는 손을 들었다. 등 뒤에서 갑자기 근위기사들이 뛰어나와 그를 붙잡았다. “뭐? 이, 이건 무슨.......!!” “반언을 용납지 않겠다 했다. 끌고나가 목을 베라.” “예?! 폐, 폐하!! 폐하!! 마크시 공작님!!” 그는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마크시 공작이 다급히 나섰다. “폐하!!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인 줄로 아룁니다!! 당장 명을 거둬주십시오!!” “자네는 항상 목청이 크군. 마크시 공작.” 근위기사들이 지스카르의 등 뒤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대전 내에서는 누구도 무장을 할 수 없었다. 황제가 일순 정신이 나가서 진짜로 공격을 명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대 신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모든 이들이, 마크시 공작조차 입을 다물었다. 끌려 나가는 귀족만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다음 안건.” 적막 속에서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던필은 지스카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크리스 대신 근위기사단장직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때로 크리스를 이기고 이 자리에 앉기를 열망해본 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다. 방금 처형한 귀족을 떠올렸다. 대전에서 고개를 숙이던 귀족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지스카르에게 굴종했다. 하지만 대전을 나서는 순간 분노에 치를 떨 것이다. 휘하 수천의 가신들을 이끌고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하리라. 지스카르는 순식간에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데도 방법이 없었다. 지스카르가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주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던필은 머리를 짚었다. 그때 문관 하나가 다급히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지스카르는 하루 중 세 번은 반드시 보고 를 받았다. 크리스와 레이에 대해서. “놈들은 찾았느냐?” “여기저기서 제보는 들어오고 있지만 아직 신빙성 있는 것은 찾지 못했습니다.” 문관은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어찌 생각하느냐? 짐은 놈들에게 날개가 달리지 않은 다음에야 이렇게 꼬리가 잡히지 않을 수는 없다고 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놈들의 등에는 날개가 달려있지 않지. 아직까지 놈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네놈 들이 일에 태만하였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예? 아,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던 문관은 갑자기 등을 찌르르 울리는 불길함에 무례를 각오하고 고개 를 들었다. 그 순간 지스카르는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잘려나간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와 바닥과 지스카르의 바짓단을 적셨다. 근위기사들과 함께 뒤따르던 시녀들이 급히 달려와 황제의 바지단과 신발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 중에 금발의 시녀가 유독 심하게 떨며 연방 헛손질을 했다. 그녀는 항상 황제를 어려워했다. 황제의 그림자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그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황제는 공명정대한 사람이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벌을 받았지만, 일을 잘 처리하면 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매일 한 사람 이상 황제의 손에 죽어나가고 있었다. 모두 단지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버님!” 어린애 목소리가 복도를 짜랑 울렸다. 시라크가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서있었다. 그는 목이 자린 시체를 보고는 이를 악 물었다. “........긴히 상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는 보름밤에 저를 찾아주십시오.” 지스카르는 시라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대신 금발을 가진 시녀의 무릎 위에 발을 올려놓 았다. 시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열심히 걸레질에 집중했다. 지스카르는 손을 뻗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더욱 공포에 질려서 온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스카르는 몸을 숙야 금발에 입술을 대었다. “아버님!! 뭘 하시는 겁니까!!” 시라크는 핏대를 세워 소리 질렀다. 지스카르는 그제야 일어섰다. “네가 그 놈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라크는 일순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담담한 체 고개를 치켜들었다. 더 이상 과거에 그 랬듯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지는 않을 것이다. “증거는 있습니까?” “모르는 것 같군. 너는 예전과는 달라졌으나, 그러함에도 네 손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극 히 적다. 너는 올해로 몇 살이 되지?” 시라크는 당황했다. 지스카르가 아무리 자신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해도 자신의 나이를 모 를 리가 없었다.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지 시라크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라크는 머뭇거리면서 눈치를 보다가 대답했다. “.....11살입니다.” “어린애 주제에 주제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라크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사실일지 모르나, 그 렇다고 지스카르의 실정이 덮어지는 것도 아니다. 시라크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 질 렀다. “그렇다면 아버님은! 당신이 하는 일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따위 노예나 찾으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정도 나도 알아!!” “이걸 보거라.” 지스카르는 검을 뽑아들었다. “네가 얼마나 경솔한 지를 보거라.” 검을 쥐고 지스카르가 성큼 다가왔다. 시라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전에서 귀족이 죽는 것을 보았고, 방금 문관이 죽는 것도 보았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다가 이미 수없는 이 들이 죽어나갔는데, 자신이 그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호위 기사들이 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들은 도저히 황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지스카르는 오라 소드를 휘둘렀다. 호위기사가 가까스로 막아든 검은 종잇장마냥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났다. 호위기사는 당황해서 뒷걸음질쳤다. 지스카르는 팔을 뒤로 당겨 위로 꽂았다. 검이 턱부터 머리를 완전히 관통했다. 두 번째 호위기사가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들었다. 그는 일검을 막을 수도 없었다. 지스카 르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은색 호선이 번쩍한 다음에 기사의 머리에 땅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시라크 혼자만 남았다. 지스카르는 은색 찬란한 보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시라크 는 일순 자신의 목을 토막 나는 환상을 보았다. 카앙!!! 지스카르가 휘두른 검은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던필이 이를 악 물고 그의 검을 막아내고 있 었다. 그는 즉시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 됩니다....!! 폐하......!!” “닥쳐라.” 지스카르가 다시 검을 들었을 때였다. 털썩하고 소리가 들렸다. 시라크가 견디지 못하고 땅 바닥에 주저앉은 것이다. 새파랗게 질려서 턱을 달달 떨고 있었다. 오줌을 싸지 않은 것이 용했다. 지스카르는 입술을 비틀었다. “벨 생각도 나지 않게 만드는군.” 그는 비로소 검을 거두었다. 눈길도 주지 않고 가차 없이 돌아섰다. 시라크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한 걸음, 또 한 걸음 더 멀어지자 시라크는 이를 악 물었다. 아직 공포를 이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아버님!! 보름에 반드시 절 찾아주십시오!! 정말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지스카르는 완전히 자리를 떠났다. 시라크가 마지막으로 내민 기회를 저버 렸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님...........!”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7화 각양각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만큼 완연한 여름이었다. 신 관이 발목을 좌우로 돌려보며 물었다. “걸을 때 당기는 느낌은 없고?” “약간이요.” “흠, 그래? 일단 여기까지 하자. 물 속에 발을 넣고 자주 주물러 주거라.” “예.” 신관은 물건들을 챙겨서 일어났다. 일이 바쁜 제이크 대신 아서가 상태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를 배웅했다. 신관이 사라지자 아서는 갑자기 되돌아와서 팔을 비틀어 쥐었다. “윽!” 나는 고통에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아서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셔츠를 젖혀서 벗겨냈다. “흠. 상태는 나쁘지 않고.... 좋아. 거의 새것처럼 깨끗해졌군. 좋은 값이 나오겠어.” 아서는 번들거리는 혀를 날름거렸다. 나는 똑바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문득 눈이 마주치 자 아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아무것도요.” 나는 방긋 웃었다. 아서는 못마땅한 얼굴이었으나 좀 전부터 뭐가 그렇게 바쁜지 그냥 팔을 놓아주었다. “버릇을 고쳐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안 되겠군. 여기서 얌전히 앉아 기다려라. 오늘은 귀하신 분이 오실 것이다. 제이크씨의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져 있지.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당해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말썽을 부리라고. 거기! 네 녀석도 마찬가지다!” 발 마사지를 하기 위해 물을 떠오고 있는 크리스를 향해 아서가 으름장을 놓았다. 아서가 병실을 나서자 크리스는 물병을 내려놓고 반쯤 벗겨진 옷을 다시 입혀주었다. 나도 쓴웃 음을 지으며 옷깃을 여몄다. 크리스가 갑자기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난 그의 머리를 다독거렸다. “자자, 착하지? 조금만 더 참거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참인가?” “글쎄. 가능하면 몸이 완전히 다 나을 때까지 붙어있고 싶지만, 역시 이쯤에서 슬슬 움직여 야겠지.” 불연 듯 입을 다물었다.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다행히 제이크나 아서는 아니었다. 문이 열리며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빗자루며 걸레 따위를 들고 있는 것을 봐서 청소를 명받은 것 같았다. 아이들이 날 보고 손을 흔 들었다. “와, 레아드!” “체르도 아저씨도 안녕?” 크리스는 가볍게 눈짓만 하고 대야에 물을 부었다. 신관의 말대로 발을 마사지해주기 위해 서였다. 노예상회에서 시간을 보낸 지도 근 한달 쯤 되었다. 이 병실은 어린아이들이 머무는 숙소와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나는 물론이고 크리스도 몇 없는 꼬마 노예들과 자연스럽게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제법 능숙하게 빗질을 하며 주근깨가 가득 박힌 소년이 이야기를 꺼냈다. “레아드 이거 알아? 여기 렘므에서 열리는 노예시장은 굉장히 유명하잖아. 내가 들었는데 여긴 진짜 높으신 분들도 많이 온대. 막 공작님 같은 분도 온다는 거야.” “그래? 어쩐지 마을이 번화하다고 했더니 노예시장 때문이었던가?” 하지만 공작이 온다는 말은 십중팔구 유언비어다. 울펜가모트, 그랜트, 마크시 세 공작들은 전부 중앙정계에 진출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어떤 한가한 인간이 수도에서 여기까지 내려와서 노예를 사간단 말인가. 그때 갑자기 다른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뭐야, 정말이야? 진짜 공작님도 오시는 거야? 나도 공작가문 같은데 들어가고 싶은데.” “꿈 깨. 설마 공작님이 오실까봐. 무식한 녀석들! 우리나라에 공작가문은 딱 세 개뿐이라는 것도 모르지?” “뭐야! 내가 제이크님이 하는 말 진짜 들었어!! 공작님도 오신다고 그랬다고! 잘하면 진짜 공작가문에 들어갈 수도 있어!!” 나는 크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에게 잘 보이면 소원 성취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크리스는 발을 주물러주는 데만 집중하고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공작가문엔 왜 가고 싶은데?” “바보같긴! 파티가 끝나면 남은 음식을 먹을 수 있잖아. 그 날은 진짜 최고야! 공작가문에서 는 정말로 성대한 파티를 연대. 음식도 훨씬 더 굉장할 거야.” “아, 그런 거였어?” 나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그때 꼬마 하나가 시비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냐, 레아드. 넌 꼭 다 아는 것처럼.”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꼬마 노예들 중에서도 대장 격을 맡는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 제 보니 이 녀석이 내게 묘한 경쟁심리를 불태우는 것 같았다. 걸어오는 싸움 피하지 않 으리라. 나는 보란 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정도는 나도 다 알지! 나는 스트라스의 남쪽 바다에서만 잡히는 덩치 큰 가재랑 속이 빨간 고기들도 먹어 봤는걸!” “우와 정말?” 아이들은 몹시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녀석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거 한 번 먹어봤다고 뭐가 달라져?” “그럴까? 맛있는 것만 있는 게 아니지! 명문가에 들어가면 벌써 입는 옷부터 달라져. 진짜 높으신 분들일 수록 명예를 중시하는데, 아랫사람이 지저분하게 있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 다고 생각하거든.” “진짜?” “그래도 너무 좋아하면 안돼. 좋은 옷을 입혀주는 만큼 단정한 몸가짐을 요구하지. 옷자락 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큰 벌을 받을 거야.” “그런 건 싫은데!” 아이들은 어느새 내가 해주는 말에 홀딱 빠져버렸다. 예의 그 녀석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 만 은근히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잠깐 손짓을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대귀족 가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그, 그게 뭔데?” 결국 그 소년도 눈을 반짝이며 직접 질문해왔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수행원이 한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정자세로 서있는 자들은 대체로 대귀족일 가능 성이 높아. 그들은 너무 주눅이 든 노예는 원하지 않거든. 하지만 너무 건방지게 보이는 녀석도 안돼. 그래, 어깨와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르게 서서 시선은 약간 아래를 향하고 있으 면 가장 바람직하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장격의 꼬마까지 저마다 한번씩 해보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크리 스가 발을 주물러주며 한숨을 쉬었다. “저런 어린애들과 잘도 어울려 노는군.” “뭐 어때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만한 또래 친구랑 신나게 밭이나 들을 뛰어다녔는데.” “누가?” “내가.” “........” 곧 죽어도 상상이 안 된다는 표정. 나는 1살을 더 먹어서 올해로 14살이 된다. 어디로 보나 바깥에서 뛰어놀만한 나이잖아? 실없이 크리스를 타박하다가 문득 구석에서 혼자 청소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다른 아이들이 전부 깔깔대면서 노는데 그 아이만 유독 아 주 어두운 얼굴이었다. “저 아이는 누구지?” 아이들 중 하나가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몰라. 말 걸어도 대답도 안 해. 매일 구석에서 훌쩍거리고.” “흠....... 크리스, 잠시만.” 나는 발을 닦고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소녀는 갑자기 움츠리 며 약간 물러섰다. 나는 소녀가 놀라지 않도록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천천히 다가갔다. “왜 혼자서 이러고 있지?” 아이는 힐끗 날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눈높이를 맞추고 머리카락을 쓰다듬 었다. “왜?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대답은 없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자 아이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저, 저리가.” “왜 그래? 내게 이야기 해 봐.” “저리 가. 노예 주제에...... 난 노예가 아냐. 그냥 삼촌이랑 놀러 온 거란 말이야. 개울 건너 가면 바로 우리 마을인데....” 방금 뒤따라온 크리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질이 안 좋은 줄은 알았지만 양민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먹는 짓까지 자행했던가.” “그야말로 재고의 가치가 없는 놈들이군.” 나는 아이를 다독거려주고 일어났다. 그때 밖에서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새끼들이 뒈지고 싶어 환장을 했나!! 지금 귀빈이 오셔서 난리인데 어디서 감히 소란이 야!!” 재잘대던 아이들은 기겁을 해서 와르르 흩어졌다. 아서는 주위를 두루 노려보다가 구석에 서있는 나를 노려보았다. “네 놈은 또 거기서 뭐해?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고 했을 텐데? 한동안 편하게 먹고 자고 하 니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더라 이거지?” 아서는 이를 갈면서 다가왔다. 갑자기 또 난감한 상황에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아서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문이 열리며 제이크와 또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서는 그 즉시 태도를 180도 바꿔서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어이쿠, 백작님! 어서 오십시오. 어찌 이런 지저분한 곳까지. 여긴 나이어린 노예들 밖에 없는데.” “노예를 구입하기 전에 그냥 두루 둘러보려고 하는 거니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보고 있게.” “아니 저희가 어찌 그렇게 하겠습니까.” 저 백작이 요주의 귀빈인 모양이다. 아서는 물론이고 그 성질 더러운 제이크도 그 커다란 덩치로 어울리지 않게 저자세로 아부를 떨었다. “아서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피안델 대공께서는 평안하시고요? 요즘 영 찾아주시질 않으 셔서 저희가 어찌나 섭섭했던지. 하하, 물론 백작께서 이렇게 대신 방문해주셔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 렘므에 며칠 머물며 대공께 바칠 노예를 고를 생각이네. 너무 독촉하지는 말게 나.” “물론이고 말굽쇼!! 마음껏 천천히 머물다 가십시오.” 그들의 대화에서 사소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아이들이 말하던 높으신 분은 공작이 아니 라 대공이었다. 명목상 지위는 대공이 더 높으나 실제권력은 공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피안델 대공의 가신, 모 백작씨는 약간 피곤한 얼굴로 노예들을 두루 훑어보고 있었다. 문 득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그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이유를 몰라 눈을 끔뻑 거리는데 크리스도 갑자기 어깨를 뻣뻣하게 굳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바룸 백작.......!” 나도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피안델 대공의 휘하에 있는 유능한 문관으로 지스 카르와 데려오니 마니 옥신각신거린 적이 있는 자다.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나는 한때 황궁의 연회에서 나간 적도 있으니 그는 내 얼굴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 근위기사단장인 크리스의 얼굴은 더더욱 잘 알 것이다.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염색했 다고 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바룸 백작은 나를 보고 연이어 크리스를 보고 새파랗 게 질렸다. “너..........!!” 바룸 백작이 입을 열기 직전 나는 소매에서 마정석을 꺼내 손가락사이에 끼웠다. 제이크와 아서는 등을 돌리고 있어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바룸 백작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법 요직에 앉아있는 자이니 내가 마법사라는 보고는 들었으리라. 크리스까지 조용히 준비 를 취하고 있었다. 바룸 백작은 눈동자를 잠시 굴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노예들을 대충 보고 바룸 백작은 제이크와 아서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놓칠 수는 없지. 나는 뛰어가서 그의 옷자락을 붙 잡았다. “백작님! 저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 뭐!? 이 놈이 감히!!” 제이크는 물론 아서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서가 즉시 나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바 룸 백작이 그것을 막았다. “그만두게.” “예?” “그만두게나. 시간도 많겠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한 번 들어보지.” “예, 아 예! 그렇게 하십시오! 뭐하느냐, 아서! 어서 응접실로 안내해드려!!” 제이크는 즉시 안면을 바꾸었다. 아서도 굽실거리며 앞장섰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아서가 문을 나서고 응접실에 나와 크리스, 그리고 바룸 백작 이렇게 셋만 남게 되었다. 나 는 일단 위협용으로 들고 있던 마정석을 거두었다. 어차피 보이게 쥐고 있든 보이지 않고 소매에 숨겨두든 마법을 쓰는 데는 아무런 차이도 없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로 우연이군, 바룸 백작.” 바룸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노예 신분에 어린애인 내가 하대를 하니 화가 나다 못해 아 주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다 리를 꼬았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지? 황제가 멍청한 짓을 반복하고 있으니 황후파로선 절호의 기회일 텐데?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가 아닌가?” 그제야 바룸 백작의 표정이 전과는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등급이 꼬맹이 노예에 서 그래도 기본은 아는 스트라스의 자객으로 승격된 것이다. 바룸 백작은 크리스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그는 마치 내 호위기사 마냥 내 뒤로 와서 섰다. 백작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질문은 내가 한다. 물론 네 의문을 적당히 해결해줄 용의도 있으나, 먼저 내가하는 질문에 대답부터 해야 할 것이다.” “........!” 바룸 백작은 내가 툭툭 내배는 말들에 반응하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고민을 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피안델 대공께 충언을 했다. 대공께서는 그 의견을 탐탁치 않게 여기셨고, 자주 애용하던 노예상회로 가서 대신 노예를 사오라고 명령하셨다. 한마디로 쫓겨난 셈이다.” “무슨 충고를 했지?” 나는 턱을 괸 채 빙그레 웃었다. 바룸 백작은 더욱 땀을 흘렸다. 전보다 더욱 고민을 했다.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황제는 그리 쉽게 무너질 인물이 아니니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황제는 임의 로 대신을 잡아 죽였으나, 그들은 모두 없었던 일로 덮어버릴 수도 있는 별 볼일 없는 하급 귀족이고, 진짜 거물에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황제가 죽인 시종들과 전령들, 그들은 모두 이쪽의 입김이 조금씩 닿아있던 자들이었다. 황제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만백 성의 존경을 받는 현군이었다. 그는 너무 급작스럽게 밑바닥까지 무너졌다. 근위기사단장이 너무 급작스럽게 배반을 했어.” 바룸 백작은 크리스를 주목했다. 크리스에게 표정의 변화가 없자 다시 날 보았다. 그는 지 긋한 눈초리로 나를 주시하며 물었다. “꼬마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하겠나?” 나는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퉁겼다. “이것 봐! 내가 처음부터 쓸만한 놈일 줄 알았다니까!!” “뭐라고?” “어쨌든 좋아, 쫓겨나서 한가하거든 내가 할 일을 주마. 여기서 렘므 노예상회를 밟아버려 라. 방법은 간단해. 놈들은 평민을 무단으로 잡아가 노예로 만들었다. 그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해라. 평민을 잡아간 전적이 있으니 귀족의 자산인 농노를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근방의 영주들이 의심을 품고 네 주장에 힘을 실어 줄 것이다. 노예상업이 번성하면 세 금을 낼 백성이 줄어드니 국가로서도 좋을 것이 없지. 네 편은 아주 많을 것이다.” 내 입에서 쏟아지는 말에 그는 반쯤 넋을 놓았다. 내가 14살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마법 사들이 4중 영창을 하는 나를 보고 패닉에 빠졌듯, 바룸 백작도 혼란에 빠졌다. 나는 깍 지를 끼고 빙긋 웃었다. 그제야 바룸 백작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침착함을 찾으려고 애쓰 며 일단 가장 급한 것부터 짚어냈다. “내,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내 말을 따른다면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바룸 백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크롬산을 넘어 아베크 중립국으로 갈 생각이다.” 그 말에는 크리스가 반응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들이 도망치면 노예상 쪽에서 수배를 내릴 것이다. 양 쪽으로 추적자가 붙으면 너무 성가셔. 하지만 네가 노예상에 문제를 제기하면 수배를 내릴 여유는 없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노예상에 원한도 있거든. 내 말을 따라준다면 나로선 아주 고마운 일이 되겠지.” “다시 말하지만 내가 왜 네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스트라스의 자객인 네 말을!!” 바룸 백작은 강하게 외쳤다. 나는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바룸 백작, 나를 봐라.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위협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다시 물었다. “황제가 어째서 내게 집착했던 것 같으냐?” “..........” “외모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나는 웃으면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바룸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드는군.” “왜지?” “네 정체는 뭐냐?! 이런 건 불가능해!! 네가 덮어쓰고 있는 어린애의 껍질을 벗겨내면 진짜 정체를 알 수 있을까?” 그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껍질을 벗겨도 피 밖에 안 나와. 잘 생각해 봐라. 지스카르가 궁지에 몰리면서까지 나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이유를. 그리고 여기서 얌전히 시키는 일이나 하면서 기다려라. 황도로 기어 올라가서 진흙탕에 뛰어들지 말고.” 중요한 것은 렘므 노예상단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시키는 것. 내게 대단히 중대하고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주입시킬 것. 바람 백작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 의도는 충분히 성공한 것 같았다. 나는 바룸 백작을 남겨두고 크리스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서, 그 놈은 죽이지 말고 반드시 살려 놔라. 직접 손봐줄 테니까.” 이번에야 말로 방을 나왔다. 그 길로 나는 미리 봐둔 탈출로를 통해서 유유히 상회를 벗어 났다. 힘없는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는 놈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니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그때 뒤를 따 르던 크리스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뭐지?” “...........처음부터 스트라스로 갈 생각이 아니었나? 그래서 이렇게 돌아온 거군!” “흐음, 난 처음부터 스트라스로 가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다.” “레이!!!” “너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네게 모든 것을 이야기 해줘야 하느 냐. 네 놈이 나의 무엇이기에?” 크리스는 멈칫했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지스카르의 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최후의 마지막까지, 너는 지스 카르의 기사로 남을 것이다. 네가 나를 지키는 것은 지스카르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아 닌가?” 대답은 없었다. 긍정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느낀 것이므로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나로서도 추측하기 힘든 것이 있다. 어째서 나를 데리고 도망쳤지? 마치 지스 카르를 배반한 것처럼.” “..........” “말하기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겐 명령할 자격이 없으니까.” 나는 휙 돌아섰다. 그때 등 뒤로 크리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를 알고 있다. 그는 대륙을 질타하던 자. 스스로 제국의 절대 자로 그 지위를 굳건히 만들고 원하는 모든 정책을 거침없이 실현시키던, 그는 실제로 영 웅이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그 사실을 기억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 그래서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네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헌데 그 꼬락서 니는 뭐냐? 그는 비참하게 쓰러져 자비나 구걸하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적국의 황태자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을 줄 미처 몰랐군.” “관심이 많다마다! 폐하께서.......!!” 크리스는 불연 듯 말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폐하께서는 언제나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시는 분이었다. 너를 죽일 수 없었다면 차라 리 모든 것을 등지고 철저히 지켰어야 했어. 헌데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어중간한 태도 라니. 본디 폐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내가 모든 것을 걸었던 주군은 그런 분이 아 니었다!" “나를 데리고 도망친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다.”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네가 그런 꼴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폐하께서.... 폐하께서 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그것만은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기회가 온 순간 결심했다.” 결국 나는 덤이고 지스카르가 핵심이었다는 거지. 속에서 심술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폐하께서는 잠시 혼란하신 것뿐이다. 그것이 전부 네 탓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단지, 폐 하께서 이성을 되찾으실 수 있도록 잠시 그 분의 곁을 떠나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폐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너를 찾으실 것이다. 그동안 내가 너 를 지키겠다.” 나는 약간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네가 직접 나를 데리고 나올 필요는 없지 않았나?” “너의 죽음을 원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폐하께 실망한 이들이 그 모든 것을 네 탓으로 돌리고 있다. 황후파는 그들 나름의 이득을 위해 너의 목을 원하고 있다. 던필마저 너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대대적인 추적을 따돌리고 너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있는 자가 달리 존재하는가? 네가 죽으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어.” “주군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지극하시군.” 목소리가 살짝 꼬여 있었다. 퉁명스럽게 크리스를 대하는 것은 지스카르의 밑에는 충성스러 운 신하와 백성들이 잔뜩 있으나 내 밑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은 별로 상 관없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옆집 베티와 흙발을 하고 뛰어다녀도 아주 행복했다. 이건 그냥 약간의 질투고, 심술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냉정해질 수 없다면, 그때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헌데 나는 지스카르의 옷자락에 매달려 인정에 호소했지. 그래.... 경멸스럽게도!” 빠드득, 이를 사려 물었다. 시궁창에 처박혀도 그의 자긍심은 결코 모욕당할 수 없었다. 하 지만 그날, 나는 스스로 자긍심을 시궁창에 처박았다. “마물 사냥에 따라나섰던 날, 비로소 마정석을 손에 넣은 그 때, 나는 훨씬 더 좋은 선택지 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정석만 챙긴 다음 천천히 방법을 모색해도 좋았다. 지 스카르와 거래를 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지! 헌데 힘을 되찾았다고 보라는 듯이 모조리 뒤엎어 놓았다! 어린애처럼 잘난척하면서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힘자랑을 한 것이다. 하 !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다음 눈물로 애걸복걸하다니!!”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 과오는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도, 그리고 지스카르도.” *** 황제는 한 달이 넘도록 독선과 폭정을 일삼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종 시녀들 과 황후파 인사들을 함부로 베었다. 작은 노예 소년의 미색에 눈이 멀어 실정을 거듭하 다가, 그 총애하던 아이가 근위기사와 함께 도망가 버리자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 위대하였던 엘 파셔의 현군은 그렇게 미쳐버렸다. 더 이상 황제를 두둔하는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자는 황제의 변화를 조롱했고, 어떤 자는 황제의 변화에 눈물로 슬퍼했다. 중론은 완전히 기울었다. 던필은 그 날도 황제궁을 찾았다. 지스카르를 설득하기 위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황제궁을 찾았다. 매일 절망을 보았고, 오늘 또 절망을 보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늘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던필은 침침한 눈을 부볐다. 마치 꿈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인 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것도 있다. 지금 황제가 무너지면 엘 파셔는 틀림없이 기울 것이다. 온 대륙에 다시금 전화의 불길이 덮칠 것이다. 그 무거운 책임을, 그 목숨보다도 중한 의무를 어찌 잊는단 말인가. 사랑이라는 이기적인 감정으로 미화하여 수백만의 제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정말 미소 지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문득 던필은 시끄러운 소음을 듣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황제궁을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금방 정문이 뚫렸고 병사들이 궁내로 진입했다. 반역! 던필은 생각보다 놀라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반역은 벌써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 었다. 그는 힘없이 복도를 걸었다. 계단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니 황제궁은 허무할 만큼 쉽게 제압되고 있었다. 전투다운 전투 도 없었고 흐지부지 상황이 종료될 모양이다. 그 와중에 던필은 한 가지 놀라운 것을 발 견했다. 시라크 황자가 선두에 서서 제법 꼿꼿한 음성으로 외쳤다. “먼저 아버님을 찾아라! 아버님께서는 심신이 불편하시니 조심스럽게 모셔야 한다!! 결코 무 례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라크 황자가 저런 녀석이었던가. 떼쟁이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언제 저렇게 컸지......” 던필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현 황제는 심신이 불편하니 조용한 곳에 요양이라도 보내리라. 그곳에 유폐되어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시라크 황자가 새롭게 황제가 될 것이다. 이제 조금 성장한 아이가 황후와 외척의 간섭을 뿌리치고 엘 파셔를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 아니, 이제는 그 것만이 최후의 희망이다. “크아악!!” 그때 다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 왔다. 황후 측 병사들이 어디선가 뛰어나온 기사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던필은 황급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밖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도 다른 병사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어디 서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나타났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습격을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숫자였다. “대, 대체..........!” 시라크는 몹시 당황했다. “시라크 황자!!! 감히 반역을 주도하다니, 그 대가를 치를 각오는 하고 예까지 왔는가!!!!” 커다란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랜트 공작이 계단 가운데에 서서 외치고 있었 다. 반역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황후 측 병사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반역이 얼마나 중죄인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왔지만,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예감하는 순간 그들은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도 그랜트 공작이 독려 중인 병사들의 수는 충분히 많았다. 너무 간단하게 황제궁에 침입 했던 것처럼, 너무 간단하게 시라크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 아버님.... 대체........” 던필은 아직 현실감이 없어서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문득 눈에 익 은 사람을 발견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다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틀림없었다. 그 뒷모습은. “울펜가모트 공작님!!”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울펜가모트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여기 있었나? 대외적으로 얼굴을 내밀 몸이 못되니 조용히 하게.” “하, 하지만 어찌 이곳에.........” “폐하께서 크리스티안을 찾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고 하셨네. 그래서 잠시 체류하고 있는 것뿐이야.” 던필은 심장이 거칠게 날뛰는 것을 느꼈다. 황제는 국법에 따라 울펜가모트 공작을 처형하 지 않고, 친아들을 잡아와서 죽이라는 사상초유의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울펜가 모트 공작은 아직 살아서 이 자리에 있었다. 울펜가모트 공작가도 아직 연금 상태이고 멸 문당하지 않았다. 문득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차분하게 규칙적으로 내딛는 걸음. 던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 지스카르가 복도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황제가 실성을 했다고 매일 땅을 치고 통곡하던 노귀족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총총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쿠웅- 조용하지만 무겁다. 발자국 소리가 일순 멈추었다. 지스카르는 엄히 물었다. “던필! 너는 크리스티안이 관련되면 항상 짐을 의심하는군!” “..........!!” 던필은 무릎을 꿇었다. 실은 왜 자신에게만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원망도 앞섰다. 하 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 자리에서 목을 잘려도 좋았다. “폐하!! 신을 죽이시고 화를 푸십시오!!” “일어나라.” 던필은 냉큼 일어났다. 정말 죽여도 관계없었지만, 지스카르가 이런 곳에서 시시한 죄목으 로 자신을 죽일 리도 없고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이 황후파를 일소하기 위한 연기였단 말입니까?” “황후파를 제거하기 위해 이런 일을 주도했다면 그건 벼룩을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짓이나 다름없지. 반은 거짓이지만, 반은 진실이었다. 짐이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은 분명한 진실. 그로 인하여 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생겨날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 난 것 이 아니다.” 지스카르는 명령했다. “한시라도 빨리 레이를 찾아라! 그러나 공식적으로 내려진 수배령과는 별로, 비공식적으로 행해져야만 한다. 결코 무의미하게 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노예 소년에게 집착하고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 불쑥 걱정부터 앞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도 황제의 명령에 반발하지는 않았다. 주군을 의심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모든 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고 황제의 지엄한 명령을 받들었다. 황제가 실정을 거듭하자, 시라크 황자를 내세운 황후파가 반역을 일으킨다. 그러나 반역 실 패로 돌아가고 황자와 황후, 마크시 공작은 그 자리에서 붙잡힌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남부 귀족들이 미친 황제를 모실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시라크 황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전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 삭제된 글의 복선 세 개는 이거입니다. 1 레이가 엘파셔가 평화롭다고 말하자(엘 파셔를 꾸려온 것은 지스카르죠?) 크리스가 자부 심을 보입니다. 지스카르가 잘난 황제라고 자신하는 것입니다.-이건 아무도 모를거라 생 각했습니다만;; 2 크리스가 레이를 만지지 않으려고 하며 그것을 “불경하다”고 합니다. 레이가 발끈해서 “누구에게?” 라고 묻습니다. 레이를 만지면 지스카르에게 불경죄가 된다 이거죠. 3 카스팔이 레이에게 가까이가려고 하자 크리스가 과민 반응합니다. 네가 손을 댈 분이 아 니라고 소리칩니다. 지스카르의 애첩이기 때문이죠? (이건 알아보신 분 두어 분 발견) 크리스가 질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지스카르의 첩이기 때문에 손을 못 대게 하는 건지... 일부러 애매하게 적었죠^^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8화<<여기 3주에 걸친 사투 끝에 비로소 크롬산을 벗어났다. 크롬산은 엄청난 수의 고블린이 터를 잡 고 있어 보통사람들은 근처에 다가가지도 않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내 실력에 너무너무 자신이 있었다. 크리스도 말만 안하지 은근히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넘치는 놈이다. 기사 단장직을 역임했는데 자신을 연약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놈 바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단 둘이서 거침없이 크롬산으로 발을 들였다. 고블린은 각각 개체의 힘도 별로 강하지 않고 많아야 20마리 정도 무리를 지어 활동하기 때문에 오크보다 훨씬 위험도가 낮다. 하지만 한 마리가 남으면 도망을 쳐서 주위의 다른 무리를 불러 모은다. 불러온 무리가 당하면 또 무리를 부른다. 주위의 모든 고블린이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크롬산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고블린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크리스와 나는 크롬산을 넘는 동안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차라리 길을 돌아서 오는 편이 빨랐을 정도로 시간이 걸렸다. 실수로 딱 1마리를 놓친 대가였다. 내가 몸이 성하지 않았으면 벌써 예전에 고블린의 저녁식사거리가 되었으리라. 좀 고달팠지만 노예상에 빌붙어서 치료를 하길 잘했지. 산을 내려오자 멀지 않은 곳에 성이 보였다. 내가 뻔히 고개를 들고 문을 통과했지만 병사 는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도망친 지 3주일이나 지났는데 노예상에서 신고를 하지 않았군. 바룸 백작이 내가 말한 대 로 렘므 노예상을 뒤집어놓은 건가?” “........” 대답이 없다. 그 날부터 크리스와 사이가 약간 어색해졌다. 물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 동했으나 크리스가 문제였다. 뻣뻣하게 있거나 뭘 말하려다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였다. 나는 기지개를 크게 폈다. 이제 아베크 중립국은 바로 코앞이다. 여기서 하루 정도만 쉬고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여관을 찾았다.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 표정이 어둡고 어쩐지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작당한 여관을 택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구질구질하게 생긴 두 사람이 들어오자 눈 살을 찌푸렸다. 그는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거칠게 내 팔을 휘어잡았다. “썩 나가지 못해! 이 거지 새..........” 쾅!! 크리스가 돈을 꺼내 프론트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돈을 두 배로 주겠다. 그 팔을 놓아라!” 주인은 일순 그 위압감에 질려 스르르 손을 내렸다.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게 위협할 건 없잖아?” “더 이상 모욕당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다.” “지스카르를 위해서 나를 보호하려고 드는 것은 아는데 말이야, 너무 과민반응 말자고. 내 가 해를 입지 않으면 되잖아? 이쪽은 기껏해야 지스카르의 남첩일 뿐이야. 네 논리대로라면 지스카르의 양말에도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지스카르의 밥그릇에도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크리스는 또 입을 열다가 말았다. 저 놈이 왜 자꾸 그러는지 안다. 내가 심심할 때마다 갈 구는데 저 놈은 말주변이 없거든. 주인은 영문을 모른 채 여전히 멀뚱하게 서있었다. 나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의 팔을 붙 잡았다. “저기 아저씨. 왠지 마을 분위기가 어두침침한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주인은 아직 기가 질려서 크리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가 턱짓을 하자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야 여관을 나서자마자 바로 신고 당하겠군.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식 때문이죠. 그래서 다들 겁에 질렸습니다.” “전쟁?” 크리스는 표정을 확 바뀌고 반문했다. 나는 턱을 만지다가 물었다. “혹시 최근 황도에서 큰 사건이 있었나요?” 주인은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자 전하께서 반란을.......” “뭐라고!?” 나는 크리스를 뒤로 밀어내고 물었다. “황자를 내세워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예, 그냥 황제께서 당일 날 확 싸잡아 들이셨죠.” 나는 쓰게 웃었다. 바룸 백작의 발언을 통해 대강 예상은 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 나 역시 생각한 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높으신 분 몇몇이 황제폐하의 행동을 문제 삼으며 황자전하의 석방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소에즈부터 저 쪽 아래 남부 지방이 대부분 황제께 반기를 들고 있어요. 대체 뭐가 뭔지! 반란을 일으킨 황자 따위가 뭘 잘했다고.” 주인을 뒤늦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상대가 남부귀족의 사람일 지도 모르는데 멋대로 입을 놀린 것이다. 다행히 나는 남부귀족 측의 인사는 아니다. “좋은 정보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하루만 묵어갈 테니 신고는 내일 하세요. 하루만 참아주 시면 별 일 없으실 겁니다.” 주인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나는 2층 방으로 올라갔다. 크리스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 자 머리를 짚었다.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말에 한숨 돌리는 것 같았으나 여전히 문제가 산 적해 있다. “내전....인가.......” “지스카르가 그동안 빌미가 될 일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이제 와서 마크시 공작만 잡아들 인다고 끝나는 게 아니지.”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온 몸이 노곤하고 특히 발이 욱신거렸다. 노예상에서 기부금과 뇌물을 잔뜩 받아먹은 신관들이 열심히 치료해준 덕분에 거의 완치된 상태지만, 그래도 예전만할 수는 없었다. 이건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쉬어줘야만 해결될 문제다. 내가 축 늘어져있는 것을 보고 크리스가 다가왔다. 세수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물을 부었 다. 신관이 충고한 대로 발을 주물러주겠다는 뜻이다. 나는 일어나서 앉았다. “공작가문 출신에 평생 출세가도만 달려온 기사단장에게 시종이나 할 짓을 시키자니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군.”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런 내가 착각을 했군.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경애하는 주군을 위해 서 하는 일이었지! 나중에 지스카르에게 감사해야겠는데?” “.........” 이 놈은 참으로 발전이 없다. 던필이 상대였다면 권위로 억눌러 말을 못하게 했을 텐데 내 가 상대니 함부로 할 수도 없고. 생각해보면 던필과 티격거릴 때도 큰소리만 치고 이기질 못했지. 크리스는 이제 만사 포기한 얼굴로 내 발목을 잡아 물 속에 넣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살짝 누르고 발을 도로 꺼냈다. “됐다. 네가 이런 허드렛일까지 할 필요는 없어. 여관에 사람이 있을 테니 불러서 시중을 들게 해라.” 크리스는 나를 올려보다가 자리서 일어났다. 여관에서 일하는 소년이 올라와 시중을 들어주 었고, 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희미하게 얼굴을 드리우던 달빛이 갑자기 가려졌다.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고 개를 돌리자 크리스도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하고 있었다. 창가에 사람이 서있었다. 문 밖에도 인기척이 있었다. 수는 일곱 정도 될 것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복면을 쓴 놈들이었다. “뭐하는 놈들이지?” 내가 묻자 창가에 서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밀명을 받은 자다.” “지스카르란 말이군.........” 난데없이 어떻게 우리들을 찾아냈는지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물론 여관주인이 신고해서 그런 건 아니다. 지스카르가 제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반나절 만에 여기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겠는가. 바룸 백작이다. 진짜 스트라스의 자객일 가능성도 있는데 내 말을 그냥 따를 수는 없으리 라. 그래도 직감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일단 노예상을 누르면서 한편으로 지스카르에게 내 행방을 알린 것이 틀림없다. 죄인이 여기 있다고 제보한 것뿐이니 피안델 대공에게 거역 한 것도 아니다. 수완 좋은 건 알았지만 의외로 요령도 좋은 놈이다. “그래서 용건은? 와르르 들이닥쳐 그냥 잡아들이지 어째서 잔뜩 폼을 잡고 있지?” “수배령 때문에 잡아들이려는 것은 아니다. 폐하께서 긴히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시 니 조용히 따라라.” 나는 코웃음을 치며 턱 끝을 들었다. “너희 황제에게 가서 이렇게 전해라. 아쉽거든 네 놈이 직접 와라. 내게도 일정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보고 오라가라야?!” 복면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도 눈짓을 하며 말했다. “레이. 만약 정말 폐하의 밀정이라 한다면..........” “그래서?” “그 분께 생각이 있으실 것이다!” “그 놈의 생각 따위 내 알 바 아니고.” “레이!!” 나는 왈칵 인상을 쓰고 크리스를 노려보았다. “네 정체성은 충분히 숙지했다!! 네 놈은 더할 나위 없는 지스카르의 충신이야!! 이제 충분 하니 저 놈들을 따라 네 주군의 곁으로 돌아가거라! 전부터 어떻게 네 놈을 떼어놓을까 고심했는데 마침 잘 됐군!” 일순 크리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안돼?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내 몸이 성치 않을 때까지의 이야기지. 네가 지 금의 나를 저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저 놈들과 합공이라도 해서 시험해보겠느냐?” 나는 마정석을 꺼내들었다. 복면인들이 눈에 띄게 긴장했다. 내 신상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는 게 틀림없다. 복면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순순히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 어미와 아비, 그 외의 많은 노예들의 목숨을 지 키고 싶지 않은가?” 잠깐 멈칫하고 복면인을 보았다. 나는 이내 싱긋 웃었다. “재미있군. 이제 와서 그런 제안이라니. 내가 도망친 순간 부모님의 목숨도 보장받을 수 없 는 것이 아니었나? 나는 납치를 당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로 도주를 감행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너희들의 골 때리는 황제는 모른다고 하더냐? 노예들 따위 갈아먹든 토막 을 내던 마음대로 하라고 해.” “..........” 내 반응이 몹시 의외였나 보다. 복면인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 후, 우두머리 격인 자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다. 후회하지 않은 자신이 있는가?” “조신하게 돌아가서 황제께 보고나 올리거라.” 복면인들은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강제로 나를 끌고 돌아갈 것인지 고려해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아무 것도 않고 물러났다. 나는 가볍게 숨을 돌리며 침대에 도로 앉았다. 방 안에 아직 인기척이 하나 남아있었다. “크리스, 놈들을 따라가라고 했을 텐데?” “........그리 할 수는 없다.” “어째서? 나는 쾌유했고 충분히 힘을 되찾았다. 더 이상 내가 위험에 처할까봐 노심초사하 며 지켜줄 필요가 없어.” 나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게 아니지. 내가 쾌유한 날부터 네 역할은 감시로 바뀌었군. 내가 지스카르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말이다.” “.........” 크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맞는 말만 하니까. 나는 길게 하품을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여관을 나섰다. 여관주인의 아마 신고를 했을 테니 추격이 붙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베크 중립국은 코앞이고 국경을 넘으면 숨을 돌릴 수 있다. 물론 중립국 측에 공조를 얻어 그쪽에서도 병사를 파견하겠지만 그건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 내 진짜 목적지는 아베크 중립국이 아니다. 며칠에 걸쳐 아베크 중립국의 동부를 에워싸고 있는 앰버 산맥을 탔다. 구슬땀을 흘려가며 산등성이를 한참 오르다가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하아, 크리스 너는 여기서 그만 돌아가라. 네가 지스카르의 가신인 이상, 계속 동행을 할 수는 없다.” 크리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표정을 굳히고 강경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리는 못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몸을 숨기고 일주일만 기다려.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이것으로 어떤가?” 내가 그저 자신을 떼어놓고 멀리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되돌아 온다는 말에 크리스는 멈칫했다. 동시에 어째서 일주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거절하겠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이럴 것 없이 저런 말도 안 통하는 녀석 따위 그냥 따돌리고 혼자 가버릴 수도 있었다. 벌써 오래 전에 그렇게 했으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가 없다. “제대로 설명을 하겠다. 아베크 중립국이 목적지라는 것을 아는 네게 이런 이야기는 하는 것부터가 곤란한 일이지만. 내가 찾아가는 곳에 스트라스의 기밀이 있다. 나는 엘 파셔가 그 사실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 너를 떼어놓고 가길 원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스트라스의......?” “끝까지 나를 따라오겠다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한 가지 약속을 해라. 여기서 본 모 든 것에 대해 죽을 때까지 함구하겠다고.” 몇 분간 대답을 기다렸다. 수긍하는 답이 없자 나는 가차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겠다.” 이젠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쓰게 웃으며 앞장섰다. “이제부터는 네 마음대로 걸어서는 안돼. 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내 뒤를 정확히 밟아 라.” “.......” 아마 이것저것 묻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묵묵히 따랐다. 내가 스트라 스 제국의 기밀이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아베크 왕국만이 중립지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아는가?” “.......알려진 바에 의하자면 스트라스와 엘 파셔의 세력권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어부지리 를 얻은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스트라스와 엘 파셔가 어느 쪽으로 진군하는가에 따라 휘에른 왕 국이나 파오니소스 공국이 중립지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 내가 우연히 아베크 중립국 근처에서 ‘어떤 것’을 발견했지. 그래서 아베크 왕국이 중립지역이 될 수 있도록 안팎으로 힘을 썼고 운도 따라주어 내 의도대로 일이 성사되었다.” “어떤 것이라면?” “기도(氣度)가 극의에 다다른 이들만이 이 일대의 펼쳐진 길을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이 근방의 이질감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한사람뿐이었다. 하지만.... 아마 지스카르 라면 볼 수 있겠지.” 특별한 것 없는 숲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정표를 따라가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걸었다. 점점 숲이 무성해졌다. 나무가 틈 없이 빽빽이 들어섰고, 잎사귀는 풍성하며, 끝 없이 하늘 위로 뻗어있었다. 나무 기둥은 열 사람이 둘러서도 전부 잡지 못할 만큼 굵었다 .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나무가 무성해졌다. 모든 것은, 그렇다. 실로 웅장했다. 모든 나무들은 그 둘레만 집채 만 했다. 그리고 감히 높 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곳까지 뻗어 있었다. 가지 하나하나가 수십 년 묵은 나무 기둥만 했는데, 기괴한 방향으로 꺾으며 무성한 잎사귀로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그 럼에도 어디선가 은은하게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얼굴을 배꼼 내밀었다. 비정상적일 만큼 길고 뾰족한 귀가 강아지처럼 쫑긋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가늘고 하얗고 아름다운 팔다리로 유연히 나 무를 밟고 바닥에 내려섰다. 색소가 빠진 것 같은 연녹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나무 사이에서 소녀와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때로 작은 반딧불 같 은 것이 그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기도 했다. 가만히 보면 반딧불은 작은 사람의 형태를 한 발광체였다. 그것이 바로 정령이다. 이 자리에 들어선 순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현실감각 을 잊어버리리라. 크리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꿈을.... 꾸는 것 같군. 엘프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나도 당시엔 그런 기분이었지. 14년 전 그 날, 나는 우연히 발견했다. 엘프의 마을을.” 감상에 잠겨 있을 때 엘프 중 드물게도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엘프는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고 영원히 늙지 않는다. 하지만 긴 세월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하여 보다 높은 경지에 들어서면 엘프는 늙어간다. 허리가 꼬 부라지고 흰 수염이 성성 난 노인은 더 없이 위대한 존재였다. 늙은 엘프는 우리들을 하나 씩 바라보며 물었다. “결계를 한 눈에 파해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네.” “두 번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다. 위대한 카리스웰.” “두 번이라고?” 카리스웰은 의문을 표했다. 대답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라고 한다. 긴 세월이 흘렀으나 현명한 그대라면 기억하고 있 으리라 본다.” 카리스웰이 아니라도 모든 엘프들이 레브노아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 엘프가 신기 한 것처럼 엘프들에게도 인간은 신기한 존재였다. 엘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시 레 브노아드는 20살의 청년이었다. 제 아무리 눈썰미가 없는 자라도 이 조막만한 꼬맹이와 같 은 인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스키아라의 후손을 앞에 두고 거짓을 말하는가. 너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가 아니다. 나는 그를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다. 내가 시답잖은 거짓말이나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 같은가?” 크로스웰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매를 좁혔다. “무엇이 네 존재를 증명한단 말인가?” “이것으로 증명해 보임은 어떤가?” 나는 마정석을 꺼내어 마력을 끌어올렸다. 신체 건강한 엘프 셋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주위를 돌고 있던 작은 정령들이 빠르게 점멸하며 경계했다. “소년이여, 네가 결계를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위대한 마법사임을 알고 있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도 위대한 마법사였느니라.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는 그대와 똑같은 오만한 인간이었고 그대와 똑같은 얼굴과 녹색 눈동자를 가졌다. 허나 그것으로는 너를 증명할 수 는 없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는, 죽었다.” 쿵! 카리스웰은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찍었다. 크지도 않은 소리가 인상적으로 귀에 박혀들었 다. 결계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고 있으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군.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위대한 카리스웰, 네가 하는 말은 옳다. 무엇도 나를 증명할 수는 없다. 레브노아드 반 스 트라스는 14년 전에 죽었다. 그럼에도, 나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다! 그것은 진실이므로 너희들은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더 나아가 팔을 내밀었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증표를 다오! 증표는 무엇보다도 특별하고 무엇보다도 고결한 것이어 야만 한다!” “우리들이 어째서 그렇게 해야 하느냐?”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카리스웰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의 시 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을의 모든 현명한 엘프들과 네가 제의한 문제를 상의 해보겠다. 마음이 닿는 곳에서 자 유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거라.” 카리스웰은 조용히 말한 다음 돌아섰다.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크 리스가 다가왔다. 그는 조금 납득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실.... 그건 억지가 아닌가? 어째서 그런 억지를 받아들이고 심사숙고해보겠다는 거 지?” 나는 피식 웃고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크리스, 그들을 인간과 똑같이 여기지 마라. 저들은 인간이 아니라 엘프다.” 내 말에 크리스는 새삼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경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에겐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엘프는 미묘하게 인간과 사고방식이 다르거든. 사람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 을 말이지만, 엘프니까 한번 밀어붙여보는 거지. 잘 되면 좋은 거고.” 크리스의 표정이 참 볼만하다. 그러잖아도 지저분한 수염 때문에 비호감인데 말이야. 크리 스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나는 부가설명을 덧붙였다. “그들이 진실이라는 단어에 민감하다는 것도 사실이지. 엘프의 전신(前身)이라고 믿어지는 에스키아라는 녹음과 진실의 신이니까.” “만약 일이 뜻대로 안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엘프들은 신기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달라고 할 생각이다. 그걸 증표로 삼아야지.” “..........” 나는 훌쩍 뛰어서 나무 위에 올라탔다. 눈높이가 비슷해지자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인상 펴. 농담이 아니다. 사실은 엘프들의 잡다한 생활물품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 것도 모 르는 이들의 눈에는 이를 데 없이 신비로운 물건으로 보이지.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물을 손에 넣은 가문과 영웅을 전보다 더욱 경외하 고 우러러 보았지.” “이미 그런 식으로 사용해 본 적이 있군.” 나는 빙긋 웃으며 입가에 손가락을 댔다. “요는 실체가 드러나지 않으면 되는 거다. 물론 신기한 물건만 얻고 끝나는 건 아니지. 나 는 이곳에서 정령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스트라스의 마학은 일보 거대한 진전을 이루 었다. 이것은 스트라스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극비 중의 극비다. 다시 한 번 강조 하지만 너는 입 조심을 해야 것이다.” 크리스가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너는 더할 나위없는 스트라스 인이군. 그래도 13년 동안 엘 파셔에서 살지 않았나?” “하!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건데 누구 좋으라고 공짜로 가르쳐 줘. 딱 까놓고 말해봐라. 네가 나라면 그 자식한테 가르쳐 주겠느냐? 지난밤에 뼈다귀가 아득거리는 느낌을 아직 기억해!” “.....그런 이유인가?” 그때 익숙한 얼굴이 불쑥 눈앞을 가렸다.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연녹색 머리카락 의 소녀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소녀는 그 상태로 뱅그르 돌아 바닥에 착지 했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레브노아드를 알아. 너는 가짜야.” “안타깝지만 나는 진짜 레브노아드란다. 네리네.” 나는 옛 기억에서 이름을 기억해냈다. 예전처럼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자 네리네는 흠칫 놀 랐다. 그러나 고개를 팩 돌렸다. “흥! 그 인간에게 내 이름을 들은 게 틀림없어! 너 같은 땅꼬마가 그 멋있는 인간과 동일인 물일 수가 없어!” “내가 땅꼬마면 네리네도 땅꼬마가 될 텐데.” “그래도 너는 땅꼬마야!! 내일 하늘이 녹색이 되도 너는 땅꼬마야!! 모신의 세기가 끝나는 날에도 너는 땅꼬마야! 영원히 땅꼬마다!!” 자꾸 듣고 있자니 이거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그러잖아도 레브노아드 때와 비교해 성장 속도가 영 둔해서 신경 쓰이는데 말이야. 그때 네리네와 흡사한 생김새를 가진 청년이 다 가왔다. 그는 네리네를 번쩍 들어 품에 단단히 안고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네리네가 너무 심한 장난을 쳤군요.” “그렇게까지 사죄할 필요는 없다. 그냥 어린애 장난인데.” “아, 모르셨군요. 엘프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간 눈앞에 번개가 번쩍 치고 지나가는 환상을 보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침착함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지금 침착하게 생겼어?! 모신의 세기가 끝나는 날에도 땅꼬마!! “설마 평생 키가 안 클 거라는 말이오?!” 흥분상태인 나대신 크리스가 물었다. “그럴 리가요. 드래곤의 용언도 아니고, 엘프의 언령은 그 정도로 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키가 잘 안 클 거라는 뜻이지 않소?” “영양가 많은 음식을 많이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면 틀림없이 언령의 힘을 이겨낼 수 있 을 것입니다. 힘내세요.” 엘프는 참 아름다운 얼굴로 참 예쁘게 미소 지었다. 저걸 잡아다가 국 끓여 먹을 수도 없 고!! “죄송합니다. 화가 많이 나셨군요. 제가 사죄의 의미로 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며칠 보내실 동안 저희 집에서 머무시겠습니까?” 크리스가 돌아보았다.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 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엘프 마을을 방문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철없는 꼬마의 아주 악질적이고 흉악 한 범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나는 그간 보상 차원에서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네리네의 아버지인 이디스덴이 발갛게 잘 익은 사과를 내밀었다. “친구가 찾아준 과일입니다.” “고맙군.” ‘친구’란 정령을 말한다. 엘프들이 먹는 과일들은 대부분 아주 맛이 좋았지만 정령이 특별히 골라주는 과일은 정말로 대단했다. 한 번 맛을 보면 다른 과일은 입에 대기 싫을 정도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비유가 아니라 가감 없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 특별한 맛에 중독 이 되서 한동안 평범한 과일은 그냥 종잇장 씹는 것 같아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다. 나는 크리스에게 친구표 사과를 던져주었다. “크리스, 선물이다.” “아.” 크리스는 사과를 받고 뒤따라 나오려고 했다. 그때 네리네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나는 손 을 내저었다. “따라오지 말고 놀아 주거라. 바로 앞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창 밖을 보면 내 머리통이 보일 게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느냐?” 네리네는 일주일 간 크리스에게 바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확신하는데 저 흉 악한 아동 범죄자는 성인 인간이 취향인 것이 틀림없다. “모신이 창조한 일곱 주신의 대지는 이제 인간의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더 이상 결 계 밖으로 나가지 않아요. 우리들은 지금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그곳은 엘 프를 위한 성지. 지금은 불안한 모양새로 겹쳐져 있지만 언젠가 일곱 주신의 대지와는 완전 히 분리 되겠죠.” “결국 한 곳에 섞여 살다가 각자의 영토가 주어져서 떠나가는 것이군. 지금은 과도기 단계 이고.” “응,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드워프, 페어리도 마찬가지죠. 카리스웰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그건 무식한 엘 파셔 놈들만 모르지 스트라스의 역사학자들은 벌써 다 아는 이야기다. 나는 창문을 통해 나무줄기로 엮은 테라스로 나왔다. 네리네의 집은 나무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일순 아찔할 정도였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땅꼬마는 정말 레브노아드인가요?”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라. 그는 ‘레이’라는 훌륭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쳇.”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레브노아드 황태자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볕이 따뜻했다. 눈을 감고 편하게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당신도 레브노아드의 기사인가요?” “음?” “예전에 레브노아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왔어요. 그들이 전부 레브노아드를 위해 존재하는 기사래요.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당신 한 사람 밖에 없나요?” “.........” 그게 아니라, 귀여운 네리네. 이번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단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박자 맞추듯 여기저기서 파스스 파스스 소리가 들려왔다. 엘프들이 사는 곳은 풍요롭고 신비로운 만큼 아름다웠다. 여름도 겨울도 없고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이 를 언제까지고 아름다고 느낄까, 같은 풍경이 지겹다고 느낄까. 문득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크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가끔 귀여운 면도 없지 않은 네리네는 어디론가 놀러나간 것 같았다. 크 리스는 갑자기 무게를 잔뜩 잡고는 입을 열었다. “레이.......” “아 맞아! 지난번에 채찍질 당한 상처, 치료해주겠다고 말해놓고 깜빡했군. 거기 웃통을 벗 고 앉아라.” 나는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상처는 벌써 다 아물었다.” “하지만 흉터가 남았을 것 아니냐. 없애줄 테니 앉아.” “그럴 필요 없다.” “앉아. 그런 게 남으면 내가 찜찜하니까.” 크리스는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아 셔츠를 벗었다. 근육으로 단련된 매끈한 등에 보기 흉 한 상처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마력을 끌어내서 치유마법을 시행했다. 희미한 빛이 닿을 때마다 흉터들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마정석의 울림만 빼면 모든 것이 조용했다. 크리스는 벌써 한참 전부터 말을 꺼내려고 준비 하고 있었다. 겨우 그가 입을 열었다. “레이....... 나는.......” 나는 대뜸 크리스의 턱을 잡고 뒤로 당겼다. 놀란 크리스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댔다. “알고 있다. 너는 지스카르를 위해 존재하는 기사이며 어느 때고 그를 최우선으로 보필하겠 지만, 그래도 가능한 모든 예를 갖추고 나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나를 업신여긴 적은 없다는 것 정도는. 다만 나는 잠시 심통이 난 것뿐이다. 나도 사람이니까. 왜? 그 정 도 투정도 받아줄 수 없나?” 나는 싱긋 웃었다. 크리스는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으나 내가 삐죽 턱짓을 하자 이내 피식 웃었다. 그는 웃음기가 살짝 어린 눈으로 오래 내 눈을 응시했다. 천천히 웃음기는 가라 앉았다. 크리스가 팔을 들었다. 손은 내 얼굴 언저리에서 맴돌았으나, 결국 아무 것도 건 드리지 못하고 다시 내려갔다. 나는 깡총 뛰어서 뒤로 물러났다. “그래,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한 놈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차.” 크리스는 약간 동요해서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네리네가 얼굴을 내밀고 외쳤다. “카리스웰님께서 두 분을 부르세요!!” 크리스와 나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리네를 따라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마을 입구 즈음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엘프들이 나와 있었다. 예상대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나는 카리스웰을 향해 물었다. “어찌 하겠는가, 위대한 카리스웰.” “일곱 번 달이 뜨고 지는 동안 수없이 지혜를 나누었다. 그리고 결론은 내렸다. 우리들에게 는 진실을 헤아릴만한 능력이 없다.” 카리스웰은 지팡이를 가볍게 들었다 놓았다. 실망은 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에 들어있던 결 과였다. 그때 카리스웰이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었다. “다음달 마지막 날에 크롬산맥 여섯 번째 봉우리에 올라라. 네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증 표를 얻을 것이다.” 따앙!!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정말 인상적이다. 나는 하얗게 웃었다. 살갗에 가볍게 소름이 일었다. 엘프는 결코 허튼 소리를 않는다. 에스키아라의 율령을 어긴 자는 혀를 자르고 눈을 뽑아 평생을 살게 하였다. 엘프의 대지를 딛고, 나는 가차 없이 돌아섰다. “가자, 크리스!” ---------------------------------- 레이군은 눈치 백단. 둔함과는 (대략 일천만 광년 정도) 거리가 멀다. 두 개의 제국,제국의 노예-특별편 탁자 위에 발그스름한 색채를 자랑하는 과일들이 올라와 있었다. 지금 바깥엔 눈이 펑펑 내 리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엘 파셔 황제의 권력으로도 이 시기에 과육이 스며 나 오는 과일을 맛보기는 어렵다. 따뜻한 남부에서 물러터지기 쉬운 과일을 온전히 운반해오 긴 쉽지 않을 테니까. 한 마디로 이것들은 특식이다. 턱을 괸 채 과일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이 신년 첫날이란다. 그래서 시녀들이 특별히 가져온 것이다. 지스카르에게 붙잡혀 황궁으로 끌려온 뒤로 지금껏 계속 침실에 갇혀 있었다. 한동안은 지 스카르와 짜증나는 거래를 해가며 밖을 몇 번 드나들었는데, 황후파와 지스카르의 대립이 본격화 되고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그것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영부영 침실에서만 생활한지가 얼마던가. 그러던 중에 달이 몇 번이고 차고 기울다가 어 느새 낡은 해가 휙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길게 한숨을 거듭 쉬고 과일을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저 하늘처럼 높 고 고귀하신 황제폐하께서 행차하셨나 보다. 내 노예된 도리로 황망히 몸을 일으켜 만인 지상을 맞이해야겠으나 그냥 턱을 괸 채 과일 먹는 걸 계속하기로 했다. 저 오만방자한 노예를 벌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는 둥 노여움에 찬 호통소리는 들려오지 않 았다. 지스카르는 무심해 보이는 얼굴로 조용히 내 맞은 편 자리로 와서 앉았다. 과일 하나를 홀랑 까먹고 씨를 내려놓았다. 방안에 들어와 지금껏 한마디도 않고 있던 지스 카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먹을 만 한가?” “좀 더 생색내도 돼. 한겨울에 생과일을 내주면서 먹을 만 하냐고? 남단에 식민지를 둔 스 트라스에서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북방의 엘 파셔에서야. 점잖 빼지 말고 그쪽도 먹 으라고.” 나는 과일을 하나 들어 지스카르에게 던져주었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서 받은 과일을 도로 쟁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보석류는 좋아하나?” “흠? 보석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나는 과일 두 개 중에서 어느 것을 집어 들지 고심하며 건성으로 답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손바닥만한 상자를 하나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싫어하지 않는다니 다행이군.” 그제야 과일에서 시선을 떼고 상자를 주시했다. 지스카르가 상자를 향해 살짝 턱짓했다. 나 는 다소 탐탁치 않은 기분으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우아한 한 쌍의 브로치가 자태를 드러냈다. 순간 나는 와그작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 이거 멋지군! 하긴 아끼는 첩을 위해 보석을 선물하는 건 사내대장부의 의무가 아닌가! 내 이래봬도 황비를 제치고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데 그간 너무 소홀히 대우받 았지! 그러면 이 다음은 뭐지? 귀걸이? 반지? 혹시 드레스도 있는 건가?” 머리에서 스팀이라도 치솟는 것 같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채 소리치자 지스카르가 답했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라.” “호걸이었던 사자왕 드미트리 1세는 말년에 어린 첩비를 얻자 그 사랑스러운 소녀를 위해 금은보화로 언덕을 만들어 선물하였다 하는데 너는 어찌 이것뿐이냐? 네 배포는 고작 이 정도야?” “단지 신년 선물일 뿐이다.” 지스카르가 다소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새해선물? 그제야 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스카르를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좋아, 그런 거라면 고맙게 받지.” 나는 상자 안에서 브로치를 꺼내어 들었다. 과연 황제의 손에서 나온 물건답다. 섬세한 넝 쿨 조각에 세련된 문양. 이건 단순한 장신구라기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까웠다. 문득 눈에 띄는 부분이 있어 브로치 두 개의 끝을 이어 맞춰보았다. 그러자 딸깍하며 이가 맞물렸다. 한 쌍이지만 넝쿨처럼 조각된 부분을 끼워 맞추면 하나의 브로치로 변한다. 제법 예술적인가 했더니 이거야 독창적이기까지 하다. 이만한 물건은 황태자 시절 레브노아드 도 본 적이 없었다. 최고의 장인이 오랫동안 고심하여 만들어낸 대작이 틀림없었다. 브로치를 손끝으로 쓸어보다가 문득 가운데에 한 알씩 박힌 보석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짙 은 녹색의 사파이어였다. 그에 피식 웃음이 비집고나왔다. 나는 검지를 들어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내 눈동자는 녹색이지. 흑발 흑안이 많은 엘 파셔야 말 할 것도 없고, 스트라스에서도 이 런 색은 흔치 않아. 그렇지 않나?” 내가 브로치를 구경하는 동안 지스카르는 무슨 기척이라도 살피듯 내 반응에 주목하고 있었 다. 그러다 내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내자 의아해 하는 느낌이다. 물론 어떠한 표정의 변 화도 없었고, 이건 그냥 내 추측일 뿐이다. 어쨌든 나는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 차고 넘칠 만큼 다양한 인간들이 있는데 그들의 뇌 속 사고는 한심할 정도로 똑같 단 말이야. 녹색 눈이니까 녹색 사파이어! 아아, 상상이 가느냐? 그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사파이어들의 행렬이라니!” 탁 소리 나게 브로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생일 때마다, 달리 경사가 있을 때마다 레브 노아드가 받는 보석의 반수 이상은 녹색 사파이어였다. 때때로 녹색 일색의 보석들을 감 상하며 나는 그 진부한 발상에 실소를 흘리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진부한 물건이라도 기껏 새해선물이라고 마련해 온 것에 이렇게 트집 잡는 건 너무 박하지 않냐고? 흥, 난 좀 전부터 이미 심사가 뒤틀어진 상태라고! 애초에 말이다, 내가 왜 저 놈에게 개인적으로 새해선물을 받아야 하느냔 말이다. 몇 달 간 방 안에 갇혀 지내느라 시간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 된 건 바로 저 놈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저 놈이 이 딱한 처지를 생각해 일부러 신년선물을 챙겨주는 데에 감격을 해야 하나? “후.” 깊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스카르는 브로치를 집어 도로 상자 안에 넣었다. 브 로치를 도로 챙기는 모습이 다소 쪼잔하게도 보이지만 솔직히 이해는 간다. 저 정도면 보 물이라고 불려도 아깝지 않을 수준이거든. “그럼 달리 무엇을 원하지?” 지스카르가 물었다. 나는 그를 보고 한쪽 눈을 찌푸렸다. 내가 쳐다보기만 하자 지스카르가 덧붙였다. “풀뿌리로 연명하는 자들조차 새해첫날에는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그러니 너만 홀로 예외가 된다면 아쉬울 일이 될 테지.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하나쯤은 들어주겠다.” 코앞에서 선물에 책을 잡고 퇴짜를 놓았는데,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것을 선물해준다고 한 다. 저렇게까지 말하자 나도 더 이상은 심통을 놓기가 다소 멋쩍어졌다. 나는 괜히 콧김을 풍 뿜고는 고개를 돌렸다. “없어.” 물론 원하는 것이 진짜 없지는 않지. 날 여기서 풀어 달라던가, 부모님이 있는 빈첸시오 성 으로 돌려보내 달라던가 이런 것 말이다. 물론 들어줄 턱이 없다. 딱 새해선물로 적당할 수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내가 팔걸이에 몸을 기대 아예 엎드려 버리자 지스카르가 다시 물었다. “전혀 원하는 게 없나?” “그래, 없다.” 다시 한번 선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쩍 몸을 일으켜서 돌아앉았 다. 지스카르가 물었다. “원하는 게 생각난 모양이지?” 번개같이 움직인 것과는 달리 나는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생각 했을 때는 간단했으나 정작 그 말을 압 밖으로 꺼내려니 어쩐지 쉽지가 않았다. 제법 망 설이고, 상당히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결심을 굳히고 손가락을 두개 폈다. “일주일에 두 번.” “........?” “아예 손대지 말라고 말하면 안 들을 테니까! 밤마다 하는 그거 말이다. 일주일에 두 번만 하라고. 이 정도는 들어 줄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는데.” 지스카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낸 것 같다. 덕 에 내 얼굴이 전보다 더욱 화끈거렸다. 새해 정초부터 선물 받고자 하는 게 이거라고? 내 구질구질한 처지를 떠올리게 하는 멋진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 정말이지 구질구 질하다. 잠시 후 지스카르가 얕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주일에 한 번 정도는 쉬게 해주마.” “뭐? 지금 장난해? 좋아, 그럼 일주일에 세 번!!” 이번에야 말로 지스카르의 얼굴에 제대로 황당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떤 한편으로는 다소 굳은 표정이기도 했다. “브로치는 거절이고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인가. 그렇게 질색인 듯 말하니 들어주고 싶지 않 군.”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일순 몸을 굳히고 뒤로 물러났다. 실은 소파에 앉아 있는 상태였기에 물러났다기보다는 움츠렸다는 게 맞았다. 힘없는 약자가 됐다고 떨고만 있는 건 내 지론과 거리가 멀지만, 바로 살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도 평정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야!” 놈의 접근에 잔뜩 이빨을 세우고 외치자 지스카르가 손을 뻗어 어깨를 붙들었다. 녀석은 펄 쩍 놀라는 나를 붙잡아 누르며 말했다. “좋아. 네 말대로 하마. 그것이 네 신년선물이 된다면.” 지스카르가 그 상태로 내 목덜미에 입술을 대려 했으나, 나는 순간 그 대답의 내용 때문에 피할 생각을 못하고 되물었다. “정말로?” 지스카르는 대답하는 대신 얼굴과 목덜미를 감싸 안고 눈꺼풀 위에 키스했다. 그제야 나는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놈을 밀어냈다. “대, 대낮부터 무슨 짓이야!” “네가 먼저 말을 꺼내서 생각나게 만들었지 않느냐. 책임을 져야지.” “그런.........!!” 지스카르는 오른쪽 팔목을 휘어잡고 그대로 나를 소파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었다. 다리를 족쇄 때문에 거치적댈 뿐이고, 남은 건 팔 하나다. 이걸로 놈의 행동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추를 전부 풀어낸 후 셔츠를 완전히 제쳤다. 단지 상반신 이 드러난 것뿐인데 나는 계집애마냥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비, 비켜!!” 말 그대로, 생각보다 주먹이 먼저 날아갔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가볍게 내 주먹을 막고 그 팔까지 붙들어 역시 소파 위에 찍어 눌렀다. “일 주일에 세 번, 약속은 지키겠다. 너도 그 정도라면 응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얼굴이 화끈했다. 분명, 내 제안을 역으로 뒤집으면 그런 뜻이 된다. 할짝. 혀가 목덜미를 핥고 지나갔다. 순간 그 살갗에 소름을 쫘악 끼쳤다. 욕지거리가 목구멍 끝 까지 치밀어 올라왔으나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욕을 해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모를까, 욕을 하든 반항을 하든 어차피 똑같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수치스러워도 실리 를 구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세 번 응하면 더 건드리지 않는단다. 저 놈은 한 번 말한 것은 분명히 지킨다. 내가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있자 지스카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쓴웃음에 가깝다 생각되었 다. “현명하군.” 녀석이 목덜미를 살짝 아프게 깨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팔을 비틀어내려 했 으나 손목이 여전히 단단하게 붙들려 있었다. 아니 반항은 하지 않기로 했잖은가. 나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지스카르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아래로 스르르 내려갔다. 이를 갈았다. 무슨 지렁이 라도 스물스물 기어가는 것 같다. 완전히 옷을 풀어헤친 맨가슴 앞에서 녀석이 멈추었다. 나는 내도록 눈 둘 데를 몰라 망설 이다가 문득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마치 보라는 듯이 지 스카르가 가슴 돌기를 입으로 빨았다. “윽!!”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도로 삼키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스카르는 오래지 않아 입을 떼고 떨어졌다. 또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긴장으로 유두의 끝이 약간 솟아올라 있었다. 내게 그걸 확인이라도 시키는 것처럼 가슴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가 혀를 길게 내서 끝을 날름 핥았다. “......!!!” 어깨를 흠칫 떨었다. 지스카르는 그 반응을 구경하고 있었다. 충분히 노골적인 시선이었으 므로 나는 치를 떨며 놈을 노려보았다. 내 시선이 닿자 그는 다시 유두를 핥았다. 끝을 이리저리 핥고 지그시 짓눌렀다. 돌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기다린 후 다시 끝을 핥아갔다. 나는 어깨를 잔뜩 굳힌 채 가늘게 떨었다. 간지럽고 축축하고 미칠 것처럼 부끄럽다. 숨 이 점점 더 거칠어져가고 있었다. 혀만 쓰던 지스카르가 돌기를 입으로 완전히 물고는 빨았다. 그러다니 갑자기 이를 세워 유 두를 질끈 깨물었다. “헉!!” 정수리 꼭대기까지 소름이 끼쳤다.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몸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양쪽 팔목을 휘어잡은 지스카르의 손아귀는 돌처럼 견고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틀림없이 자신이 하는 걸 보라는 눈빛이다. “읏!” 녀석이 다시 돌기를 물었다. 달래듯 지그시 빨다가 다시 끝을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다. 아 프진 않지만......!! 깨물린 덕에 돌기가 빳빳하게 서고 살갗은 불그스름했다. 지스카르는 혀로 유두를 슥 눌러 달래고 내킬 때는 질근 깨물었다. 그 음란한 감각에 머리털이 삐쭉삐쭉 섰다. 도저히 가 만히 있을 수가 없어 다시 팔을 비틀었다. 나는 어느새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토하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때 녀석이 돌기를 이로 문 채 위로 쭉 잡아당겼다. “억! 치워!!!” 순간 저절로 고함소리가 튀어나왔다. 세 번만 참자던가 뭐 그딴 빌어먹을 덜 떨어진 생각은 이미 별세계 밖이었다. 미친 놈!! 그게 가능하면 나는 벌써 창부가 되서 지스카르 놈을 어 떻게 유혹하고 꼬여내려고 애쓰는 중이었겠지! 나는 이를 갈면서 팔을 뒤틀었다. 그러나 짓눌린 팔은 꿈쩍도 않았다. 팔꿈치만 겨우 들썩 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부끄러움만으로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온 몸이 뜨겁군.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지스카르가 낮게 속삭이며 갑자기 한쪽 팔을 놓았다. 그 손으로 내 허리를 붙잡고 겨드랑이 를 쓸어 올렸다. “흡!” 저도 모르게 헛숨이 터져 나왔다. 손에 잠시 잠깐 신경이 쏠린 사이 놈이 아플 정도로 유두 를 세게 깨물었기 때문이다. “개.... 개자식이........!” 시뻘개진 내가 미처 욕지기를 다 토해내지도 못했는데 지스카르의 손이 다른 쪽 유두를 쥐 었다. 나는 당연히 기겁을 했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그 팔을 붙들었지만 놈의 힘을 이기고 그것을 떨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스카르가 손끝으로 유두를 질근 잡아 문질렀다. 내가 아무리 질색을 해도 돌기 끝은 자극 에 조금씩 단단하게 솟아올랐다. 그것을 지그시 쥐고 잡아당겼다. 반대쪽을 희롱하던 입 술도 손으로 지분대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스카르는 바짝 잡아당긴 유두와 근처의 살갗을 혀로 핥았다. “아.... 아.....! 비, 비켜....비켜!” “벌써부터 이렇게 숨이 거칠어졌군.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지스카르가 심장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놈은 조롱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이 분위 기는 분명 조롱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훅 들이마시고, 멈추었다. 동시에 자유인 왼손을 말아 쥐고 이번에는 제법 날카롭게 휘둘렀다. 턱! 역시 그 공격도 가로막혔다. 그러나 운이 좋았다면 놈의 목덜미에 제대로 타격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눈을 약간 좁히고 마치 노려보는 것처럼 나를 주시하다가 팔을 거칠게 소파에 찍어 눌렀다. 지스카르는 다시 벌거벗은 내 몸뚱이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목덜미를 핥고 민감한 살갗을 핥아 내려갔다. 이윽고 돌기 근처에 다다라 끝을 꽉 깨물자 나는 다시 펄쩍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팔에 양껏 힘을 주었으나 비참할 정도의 무익한 발버둥이었다. 내 저항에 지스카르의 조롱이 더 심해졌다. 춥-하고 민감한 부위를 빠는 소리가 귓가를 어 지럽혔다. 기습적인 자극에 깜짝깜짝 놀라고 허리를 흠칫 들썩거렸다. 애무를 하는 놈이 너무나 흡족할 정도로 나는 충분히 반응을 해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 을 놈! 정말로.... 싫다.....! 이젠 정말로 싫어! 숨이 고르게 나오지 못하고 마구 엉켰다. 고개를 옆으로 비튼 채 나는 그저 경직되어 벌벌 떨기만 했다. 지스카르는 내 꼴을 슥 한번 보더니 돌기를 핥았다. 잠시 둔해지던 혀를 다시 놀려 지분거 렸다. 그렇게 있더니 갑자기 얼굴을 떼고 일어났다. 팔목을 짓누르고 있던 손을 떼어 내 등을 감싸고 품으로 끌어안았다. 나는 약간 경련 상태로 뻣뻣하게 놈을 밀어내려 했다. 지스카르는 내 뒤통수를 완전히 제 가슴께로 끌어당기고 등을 손으로 가만히 문질렀다. 그 상태로 한동안 조용히 기다렸다. 머리 위에서 지스카르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빌어... 먹을 놈이........” 나는 아직 숨을 다 고르지 못하고 욕만 간신히 토해냈다. 지스카르는 조금 더 기다린 후에 나를 떼어냈다. 좀 전에 하던 짓을 더 할 생각은 없는 듯 하다. 뭣 때문에 갑자기 그런 식으로 나를 다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더 이상은 그렇게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저 놈은 원래 내게 모욕을 주다가도 금방 제 풀에 그만두곤 하니까. 그래서 더 짜증난다. 얼마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니 맘대로 굴렸다가 놨다 하면 다야?! “레이........” 지스카르가 징글맞게 남의 이름을 부르더니만 천천히 입술을 덮었다. 혀를 내어 입 안을 확 인 하듯 훑어내고 빨아서 머금었다. 기분 탓은 아니다. 키스는 평소보다 조심스럽고 부드 러웠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약간 틀어 다시금 입 안을 빨았다. 다음엔 혀를 밀어 넣었다. 순 간 기다렸다는 듯 나는 그 혀를 콱 깨물었다. “욱!” 지스카르가 어울리지 않게 신음까지 질렀다. 당연히 악 소리나게 아프겠지, 왜 안 아플까봐! 그 신음이 실로 통쾌했다. 나는 놓칠세라 더 강하게 깨물고 늘어졌다. 이대로 확 물어뜯어 버릴까!! 질근대며 깨물고 있긴 한참, 나는 슥 입을 열었다. 짜증나지만 엘 파셔 황제를 벙어리로 만 들고 난 후의 국제정세나, 이것저것 뒷감당이 좀 신경 쓰였다. 지스카르가 인상을 잔뜩 지은 채 떨어져 나왔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황제폐하 의 용안에 생채기를 낸 것도 아니고 용설(龍舌-이딴 용어가 있다면 말이야!)을 피나게 깨 물었으니 이거 오체분시 하라는 명이라도 떨어지는 거 아닌가 몰라! “........” “........” 먼저 눈싸움을 그만둔 것은 지스카르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입맛을 다시듯 혀를 좀 굴렸 다. 무척 쓰라린 듯 답지 않게 또 한번 인상도 찡그렸다. 그러다 갑자기 뭘 잘못 먹었는지 혓바닥까지 깨물린 놈이 또 한번 키스를 시도했다. 부드럽 던 전과는 비할 수 없게, 먹어치울 듯이 입술과 입 안을 빨아 당겼다. “푸하! 뭐....! 이 자식........!” 내가 가까스로 떨어지는데 성공하여 물러나려 했지만 지스카르가 어느새 뒤통수와 목덜미를 붙잡아 움직임을 봉쇄하고 힘껏 끌어당겼다. 그리고 침도 삼키지 못하게 이리저리 빨다가 이내 제 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때는 이때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놈의 혀를 와그작 물어뜯었다. “........!!!” 신음소리는 없었지만 그 놈은 흠칫하면서 온 몸으로 고통을 표현해냈다. 분노를 토해내듯 놈의 혀를 막 나무뿌리처럼 짓씹다가 놓았다. 지스카르는 제법 볼만한 얼굴표정으로 입을 가리면서 물러섰다. “씹어 먹을 자식아! 그렇게 뭘 빨고 싶으면 홍등가라도 찾아가!! 전문 직업인 여성들이 반갑 게 맞이해 줄 테니까!!” 내가 이를 갈며 소리치자 고통에 겨워 끙끙대기만 하던 지스카르도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뭘 봐? 눈빛으로 얼굴에 구멍이라도 내겠군!” 지스카르가 손을 뻗어 내 턱을 붙들었다. 깨물지 못하게끔 이와 이 사이 부분을 손으로 누 르며 다시 키스했다. 이 미친놈이 입술박치기에 한이 맺혔나!! 내가 팔로 발버둥치자 지스카르는 다른 한 손으로 그 팔을 잡아 눌렀다. 그나마 왼팔은 붙 잡히지 않았기에 나는 발버둥치다가 그것도 안돼 손톱을 세워 할퀴었다. 물론 꿈쩍도 않 았다. 턱을 붙잡은 채 혀를 넣어 마음껏 입안을 휘젓고 혓바닥을 꽉 감아왔다. 강하게 억눌린 턱 과 뺨 때문에 나는 정신없이 허우적대기만 했다. 침이 고여서 어느새 주룩 흘러내렸다. 지스카르는 혀로 그걸 슬쩍 핥아내고 턱을 쥔 손에 힘을 좀 더 주어 고개를 위로 젖히게 만들었다. 아, 아파! 그걸 말할 새가 없었다. 지스카르는 격정적으로 입술을 빨아댔다. 그러나 이내 그게 목적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듯 입천장 윗니와 아랫니, 특히 혓바닥을 집요하게 탐했다. 혀 위아래를 핥고 맛보고 찔러보았다. 마음대로 입을 움직일 수 없으니 다시 침이 고여 흐르기 시 작했다. 지스카르는 오히려 더 흘리라고 턱을 더욱 바짝 붙잡고 아예 목구멍을 쿡쿡 찔렀다 . 한참 후에야 지스카르가 물러났다. “쿨럭! 하악!” 나는 뒤로 고개를 젖힌 상태로 기침 섞은 숨을 토해냈다. 그것을 지스카르가 안아서 도로 일으켜 주었다. 나는 정말로 숨을 몰아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스카르는 내가 숨을 고르는 것을 기다리며 뺨을 혀로 핥았다. 침이 흘렀던 부분이다. “더럽게!!!” 나는 숨쉬다말고 발칵 소리 질렀다. 지스카르는 피식 웃었다. 안 어울리게도 저 놈이 웃었 다! 그러나 나는 웃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아파...” 진짜 턱하고 뺨이 아파 죽겠다. 좀 전까진 이러다 으스러지는 거 아닌가 걱정까지 했을 정 도다. 그 말에 지스카르가 내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여기저기 손끝으로 세심히 만지는 것이 다친 데는 없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전부 확인이 끝나자 지스카르는 언뜻 보기에 도 시뻘겋게 된 혀(저런 혀로 잘도 키스에 집착하는구나!)로 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한 것에 비하면 약과이지 않나?” “약과라고? 좋아! 그동안 네 놈이 휘두른 폭력과 내가 쓴 폭력을 전부 모아 합계 결산을 내 볼까?!” “.............” 지스카르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할 말 없을 만도 하지!! 어쭈 시선도 피한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이내 내 시선을 똑바로 대했다. 그의 시선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고 한 편으로 엄격한 기세가 담겨있었다. “네가 노예임을 잊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짐은 황제이고 너는 노예인데 어떤 이 가 같은 기준을 들이댄다더냐. 키우던 강아지를 다루는데 손을 올렸기로 그것이 일일이 비난을 받을 일이란 말인가.” “키우는 강아지가 네 입 안의 혓바닥까지 질근질근 씹어대는데 왜 아직 갖다 버리지 않고 끼고 도는 거냐? 노예인 걸 까먹은 건 네 놈 아닌가?” “........” 지스카르는 대답을 피했다. 대신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때때로 노예임을 까먹는 건 당연히 내가 아닌 저 놈이다. 나라면 웬 비루한 노예 하나가 눈 앞에서 깐죽거리는 꼴 따위, 결코 그냥 참고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지스카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내가 보기에 저 놈은 그 정도로 대범한 인물이 못되거든! 그래,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저 놈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취미가 있음 도 알고 있다. 아니 취미가 아니라 떨칠 수 없는 의심, 의혹이겠지! “날 모욕하지 말라고. 비록 네가 강하여 나를 사로잡았을지언정 나를 함부로 짓이겨 밟지 말란 말이다!” 내가 분에 차서 외치자 지스카르가 물었다. “신분이 높은 자라면 비록 사로잡았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해주는 것이 도리겠지. 하지만 너는? 네가 무엇이기에?” 나는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이를 빠드득 갈며 외쳤다. “나는 여기에 그대로 있다! 니 놈 눈에는 내가 뭘로 보여?!” 지스카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지스카르는 나를 안고는 일어났다. 어어-하는 동안 녀석에게 안겨 와서 도착한 곳은 바로 침대 위였다. 마치 조금 전엔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 끝을 보지 않았다는 투로, 지스카 르는 모든 진도를 생략하고 단번에 바지 안으로 손을 쑥 넣었다. “잠깐! 싫........어!!” 지스카르는 소리치는 내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한편 오른손으로 순식간에 허리끈을 풀고 바지를 벗기려 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으로 녀석의 팔을 붙들었다. 지스카르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놈이 그새 새빨갛게 변한 나를 향해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괴롭히지 않을 테니.” “이미 괴롭히고 있잖아!” 지스카르는 답하는 대신 바지를 확 끌어내렸다. “너........!!” 그 수치심은 상반신이 벗겨지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냥 숨이 턱 막혀 미처 다 소 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그러는 동안 손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치부를 슥 움켜쥐었다. “헉...!” “레이....” 자지러지는 나를 지스카르가 바짝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가에 키스를 하며 아래쪽으로 집중 된 신경을 조금 빼앗았다. 내가 간신히 실눈을 떠 녀석을 보자 이번엔 입술에 키스를 했다. 가볍게 머금은 다음 이번엔 혀를 넣으려 했다. 순간 나는 모든 울분을 담아 이를 딱 깨 물었다. 지스카르는 물리기 전에 얼른 물러났다. 지스카르는 못마땅한 듯 나를 내려다보고는 마치 심통이라도 났다는 양으로 움츠리려고 발 버둥치는 다리를 한쪽 무릎으로 지그시 눌렀다. 발목은 족쇄와 벗겨지다 만 바지로 얽혀 있었고 허벅지는 옆으로 눌리니 마치 개구리마냥 다리가 훤히 벌어졌다. “그만해!!” 나는 왈칵 소리쳤다. 발버둥치는 나를 지스카르가 바짝 당겨 단단히 끌어안았다. 키스 대신 얼굴을 핥으며, 그러나 다리 사이를 만지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은 그 무엇보다 강한 자극이 된다. 가벼운 접촉에도 나는 온 몸을 민감하게 반 응했다. 그리고 성기를 움켜쥔 채 가볍게 주무르던 손이 움직임을 바꾸는 순간, 살덩이를 잡아 위로 슬쩍 당기는 그 때, 나는 정말이지 과도하게 느끼고 턱을 바르르 떨었다. 부끄럽다. 무엇보다도 내가 느끼고 있다는 게 정말 지독히 부끄러웠다. 얼굴이 시뻘개지는 건 물론이고 숨이 턱턱 막혔다. 지스카르가 눈가에 계속 키스하며 속삭였다. “괜찮아.” “흑....!! 으!” “자, 괜찮다. 짐이 그리 유도한 것이니까 뜨거워질 수밖에 없을 게다.... 레이.......” “집어쳐! 그냥 손떼면 될 거 아냐!” 놈이 헛소리를 나불나불 대는 게 더 신경 거슬려 와락 소리를 질렀다. 가볍게 웃는 것이 느 껴졌다. “그 정도 기세면 되겠군.” 지스카르는 귓불을 꽉 깨물었다. 이어서 다리 사이를 움켜쥐고 있던, 잠깐 잠잠하던 손도 다시 움직였다. 귀두를 엄지로 문지르면서 살살 피를 몰기만 하다가 단숨에 아플 만큼 강 하게 쥐어 몰아붙였다. “.........!!!!!” 나는 허리 전체를 튕기며 뒤틀었다. 입이 크게 벌어지자 지스카르가 냉큼 자기 것으로 막았 다. 맛만 보고는 잠깐 떨어져 내가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쉴 수 있게 기다리고, 다시 틀어 막아 키스했다. 혀는 넣지 않고 빨기만 하는 키스다. 성기를 틀어진 손은 더욱 과감해졌다. 아래위로 당기고 손 전체로 주물러댔다. 나는 그 손아귀 움직임만으로 저만치 딸려 올라 갔다 내려왔다 했다. “후우, 정말 뜨겁군.” 지스카르가 잠깐 키스를 멈추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렇다. 몸이 뜨거워지고, 특히 다리 사 이는 견딜 수 없게 흥분해 달아올랐다. 땀이 스며들어 잔뜩 습해지고 끈적거렸다. 어찌되어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지 슬쩍 지스카르의 시선이 아래로 가는 걸 느꼈다. “지스카르!” 내 외침에 눈을 내리다 말고 지스카르가 내 얼굴을 보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가 짓궂게 말했다. “그럼 대신 입을 빌려다오.” “아?” 정신이 없어 일순 무슨 소린지 깨닫지 못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쑥 혀를 집어넣었다. 어느 새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저걸 확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순간 지스카르가 몸을 확인하는 대신 무엇을 원했는지 깨달음을 얻었다. 차라리 무지가 행복이지, 그걸 알 자 도저히 물어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을 느낀 듯 지스카르는 무척 만족스럽게 키스를 즐겼다. 빨고 핥고 하 는 도중 지스카르와 내 타액이 입 안 가득히 섞여들어 금새 절척거리는 음란한 키스로 변 했다. 지스카르는 어느새 손도 다시 움직였다. 그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자극이었다. 나는 입맞춤에 저항하여 고개를 비틀고, 손에 반항하며 다리를 움츠렸다. 사실 아무렇게나 힘주어 뒤튼 것뿐인데 갑자기 지스카르의 무릎에 눌려있던 허벅지가 휙 벗어났다. 허벅지를 완전히 짓누르지 않고 아프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누르고 있다가 실수한 것이다. 지스카르도 놀란 듯 키스하는 것을 멈추었을 정도다. 그러나 이내 커다란 손으로 뒤통수와 목덜미를 한 손에 쥐고 다시 입맞춤을 했다. 혀를 쭉 빨며 성기도 동시에 바짝 끌어당겼다. “우으음!!” 억눌린 신음을 터뜨리며 나는 다리를 와락 움츠렸다. 그러나 움츠린다고 손을 떨어져 나갈 리 만무하다. 외려 움츠리자 지스카르는 갑자기 성기를 반대로 잡고 손목의 힘으로 중심을 꾹 눌렀다. 누르면서 전체를 강하게 압박하고 자극했다. 온 몸의 떨림을 막을 수가 없었다 . 몸이 들썩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허리와 허벅지,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고 발끝으로 시트를 이리저리 끌었다. 이대로 죽을 성 싶다. 너무 부끄러워서! 그러나 참으라는 이성과는 달리 틀어 막힌 입에서 어느덧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신음소리까지 맴돌았다. 그때 지스카르가 입술을 잠깐 해방시 켜주었다. “하악! 아아!!” “아직은 안돼. 어서. 자 말해 보거라.” 난데없이 지스카르가 속삭였다. 그러나 무슨 헛소리냐고 소리칠 여력조차 없었다. 지스카르 는 나를 꽉 끌어안고 귓가에 또 속삭였다. “어서. 레이.” “으, 싫어!” 순간 지스카르가 내 중심을 와락 움켜쥐었다. 나는 놀라서 바락 소리 질렀다. “지르카르!!” 막바지에 몰린 건 난데, 갑자기 지스카르가 견딜 수 없다는 듯 귓불을 꽉 깨물었다. “한 번 더.......!” “읏...... 아........!!” 거길 쥔 손이 허리가 들썩거릴 만큼 거칠게 움직였다. 이대로 낭떠러지까지 몰아 떨어뜨려 버리겠다는 심사 같았다. 이를 악 물고 견디고 참고 팜았다. 그러나 나는 벌써 저만치까지 끝 갈 데 모르고 마구 내몰리고 있었다. “지스......카르.......!! 싫어!” “다시....!” “놔... 놔....... 지스... 지스....!!” 지스카르가 머리를 터뜨릴 듯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내 그 끄트머리에서 나는 억눌린 목소 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지스카르!!”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굉장한 기세로, 빌어먹게도 같은 사내놈 손에 전부 다 토해버리고 나는 그만 축 늘어지고 말았다. 지스카르는 내가 여운을 느끼게 내버려두며 한편으로는 팔로 머리를 받쳐 피가 몰린 듯 뜨거운 얼굴을 식혀주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놈을 보았다. 지스카르가 주제에 꽤나 자상한 얼굴로 이마에 키 스했다. 내가 물었다. “한 건 난데, 왜 네 놈이 한 것처럼 만족한 얼굴이야?” “.......” 지스카르는 입을 맞춘 상태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변태 같은 놈.” 내가 놈에게 이 말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지스카르가 이번만은 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 를 들었다. “말이 심하군.” “내가 모를까봐. 사실 잘 몰랐지만, 이제는 확신이 생겼지. 방금 말이야. 이름 불러주는 것 만으로 흥분했잖아.” “........흥분....” 뭔가 해명 비슷한 걸 하려던 놈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렇고 저렇고 해서 이러 저렇거든 이라며 변명을 하기엔 놈의 과묵한 다크 속성에 안 맞는 거다. “내 네 놈이 변태인 건 진즉 알았지만.....” 나는 지그시 놈을 보며 말했다. 이 기회 아니면 언제 저 놈을 쪽팔리게 만들겠냐 하는 마음 이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때 지스카르가 갑자기 자기 옷을 확 벗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거의 벌거벗은 상 태였으나 녀석은 아직 옷을 하나도 벗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무척 부끄러운 일이지만 미처 자각할 틈도 없었고, 모든 게 끝난 이 상황에서 저 놈이 옷을 벗는다는 건 조금도 반가 운 소식이 아니었다. 지스카르는 웃통만 벗고 아직 바지까지는 벗지 않았다. 그러나 내 예상을 거스르지 않고 목 덜미를 덥석 물고 핥기 시작했다. 나는 놈을 밀어내려 애쓰며 외쳤다. “이 자식이.......! 할 말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지스카르는 어느 집 개가 짓냐 식으로 내 말을 무시했다. 목덜미에서 아래로 내려가 쇄골에 서 한번 입 맞추고 단숨에 가슴께까지 내려가 유두를 슬쩍 입으로 머금었다. 질색하는 나를 달래듯 손으로 등허리를 쓸며 혀로 돌기를 굴렸다. 똑같은 접촉지만 좀 전과는 전혀 다 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상태가 좋으냐 하면 너 죽을래 라고 답해줄 것이다. “읏... 이 변태 놈이!!” 무익하게 휘두른 주먹이 지스카르의 손에 붙잡혔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금방 손을 풀어주고 배를 핥아가면서 배꼽까지 나아갔다. 그즈음에서 움츠리고 있는 무릎을 잡았다. 나는 놈이 앞으로 어찌할 건지 금세 의도를 깨달았다. “하, 하지 마!” 나는 얼굴을 벌겋게 만들고 외쳤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이런 종류의 요구를 단 한 번이라도 들어준 적이 있던가? 지스카르는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거길 움켜잡았다. 무릎으로 한쪽 허벅지를 누르고 나머 지 한 손으로 다리를 완전히 벌렸다. 약간 열기가 남아있는 곳에 찬 공기가 확 들어왔다. 치부를 타인의 앞에 전부 드러내는 것도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다. 지스카르는 거기서 당장 어찌하지는 않고 시선도 아직은 내 얼굴에 둔 채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긴장 안하게 생겼어!?!?!? 지스카르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기는 놈이 손으로 쥔 상태라 당장 시야에 보이지는 않 았다. 녀석은 굳이 손을 떼지 않고 먼저 허벅지에 얼굴을 대었다. 비록 중심은 아니었으나 허벅지만으로도 나는 쉽게 반응을 보였다. 이윽고 입술이 허벅지 가장 안쪽 여린 살에 와 닿았다. “아........!!” 아직 신음이 나올 정도는 아니나 꼬리뼈까지 찌릿했다. 틀림없이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으 리라. 지스카르는 혀를 내밀어 허벅지를 슥 맛보았다. 그러나 더 지분대기보다는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무슨 좋은 냄새라도 난다는 듯 거기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좋은 냄새는 무슨 빌어먹을! 방금 한 직후인데!! 저 지저분한 놈은 잘도......! 내가 욕 비슷한 걸 토해내기 직전 지스카르가 성기를 쥐어 세웠다. 그리고 기둥을 혀로 길 게 핥아냈다. 나는 숨을 헉 들이키며 다 팽개치고 지스카르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발끝 발꿈치에 절로 힘이 들어가 바짝 세워졌다. “그만둬!!!” 지스카르는 사정 봐주지 않고 단숨에 내 것을 입에 물었다. 춥 하고 분명 빨아 당겼다. 순 간 눈앞이 번쩍 하는 듯 했다. 나는 아예 숨쉬는 것조차 잊고 헐떡대며 팔을 버르적거렸다. 저 놈에게 주먹질은 소용이 없다. 나는 차라리 그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버렸다. 이렇게 하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자, 레이......” 내가 극도로 흥분하자 지스카르가 잠시 떨어져서 기다렸다. 덕분에 숨통이 겨우 터졌지만 놈의 느끼는 음성에 온 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아니 느끼했던가? 저 무감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겠다. 저 놈이 내 이름을 부르면 닭살이 돋아 못 살겠다. 문득 지스카르가 말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 부인하지는 않겠다. 네게서 짐의 이름을 듣는 것이 나쁘지 않으니 까.” 지스카르는 그리 말하고 내 성기에 슬쩍 입 맞췄다. 저런 미친!!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대 론 내가 대신 미쳐버릴 지경이다. 나는 흠칫 반응을 해버리고 그로 인한 수치심에 얼굴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었다. 지스카르가 말했다. “힘들면 이름을 불러 보거라. 편하게 해줄 테니.” “웃.....기지 마. 변태!” 지스카르는 지그시 날 보더니 그걸 도로 입으로 물었다. 도저히, 도저히 이건 참을 수가 없 다. 나는 다리를 움츠리고 다리를 허둥대며 지스카르를 떼어내려 애썼다. 지스카르는 급 하지 않게 꼼꼼히 혀를 사용했다. 처음은 간지러움, 다음은 찌릿거리는 느낌이었고, 곧 말 할 수 없는 자극이 허리등줄기를 흘렀다. 이내 벼락같은 감각에 일순 허리를 크게 퉁겨 일으켰다. 지스카르가 다리를 꽉 잡고 다리 사이를 더욱 괴롭히다가 갑자기 입을 떼고 떨어 졌다. 일순 나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던 것도 썰물처럼 쓸려나갔다. 침대에 일순 축 늘어져 나는 고개를 옆으로 떨궜다. “하아, 하아.....” 헐떡이는 나를 보며 지스카르가 말했다. “이름을 부르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이 변태!!” “........레이.” 다시금 지스카르가 속삭였다. 그 느끼한 음성으로. 아, 이제야 알겠다! 왜 저놈에게 이름 듣 는 게 이렇게 낯 뜨거운 지. 저 놈이 평생 살아봐야 누구 앞에서 좋아하니 사랑하니 애정 넘치는 말 한 마디 가능하겠는가? 이름을 부르는 것은 녀석에게 있어선 호감의 끝을 표하 는 지상최후최종의 수단인 것이다. 놈 자신도 아마 잘 모르겠지만! “악! 죽어버려!!” 별로 유쾌할 것도 없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발악을 했다. 지스카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 정이다. 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나는 소리쳤다. “어쨌거나 정말 그만해! 애초에 왜 나만 이렇게 괴롭히는 거냔 말이야! 이름 따위로 흥분하 지 말고 그냥 해버리면 될 거 아니냐!! 이러고도 니가 변태가 아니야?” 지스카르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는 이윽고 답했다. “정식으로 해버리면 아무래도 의욕이 줄어드니, 거듭해서 오랜 시간 관계를 가지기가 힘들 지.” “아?” “일주일에 세 번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나. 겨우 삼일이다. 건드리지 못하는 날을 미리 대비 해 충분히 안아둬야 하지 않겠나?” “뭐!?” 이게 무슨 소리야! “내일 충분히 쉴 수 있을 게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오늘밤은 재우지 않을 테니 까.” 뭐라고? 지금은 아직 대낮인데 지금부터 밤을 새워? 순간 지스카르는 거짓말처럼 사악한 얼 굴을 했다. 아니 이건 내 눈의 착각이고 녀석은 별 표정 안 지었지만. 그래도 이게 내 착 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자식이 지금 새해선물이니 뭐니 하면서 미끼 하나 던져놓 고 나를 가지고 놀았다 이거지?!! 아니 갑자기 혼란스럽다. 이 놈은 약속을 하면서 남을 교묘히 기만하거나 장난질을 치는 놈 이 아니다. 이거야 뭐에 단단히 뒤틀리기라도 한 듯이. 그래,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지. 그때 지스카르가 다시 내 것을 혀로 핥아냈다. 나는 화들짝 다시 놀라며 놈의 어깨를 붙들 었다. “하, 하지마! 그리고 노, 농담이지?” “농담은 즐기지 않아.” 지스카르는 중심을 그대로 입에 넣고 갑자기 질끈 깨물었다. 정말로 놀라버렸다. 놈이 이런 방식으로 날 괴롭히는 일은 잘 없었다. 순간 내 머리에 하나 번개처럼 내려 꽂히는 것이 있었다. 나는 벌컥 외쳤다. “네 놈 내가 브로치 선물 퇴짜 놨다고 이러는 거지!!” “.........” 지스카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허벅지, 중심과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저 안쪽에 입을 대고 강하게 빨았다. 떨어지자 그곳에 불그스름한 표식이 생겼다. 그에 멈추지 않고 지스 카르는 더 안쪽으로 내려가 또 낙인을 찍을 태세였다. “시, 싫어!” 지스카르는 절대 멈출 태세가 아니었다. 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잠깐! 그 브로치 도로 받을 테니까!!” “.........억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받을 필요는 없다.” “마음에 들어! 든다고!” 지스카르는 아랑곳 않고 다리 사이에 다시 입술을 댔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지스카르가 오랜만에 내게 맡기겠다며 서류문건을 보냈다. 시종이 해도 충분한 일인데, 웬 근위기사들이 이렇게도 한가한지 크리스와 던필이 일부러 그걸 들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나는 서류를 받아들고 몇 장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군주께 내일까지 끝내놓겠다 하였다고 전해라.” 크리스는 알았다고 답하고 물러나려고 했다. 정중하게, 그러나 용건만 간단히. 그것은 진정 기사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던필이 건들거리며 어느새 자리 한 켠을 척 하니 차지했다.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 말라고. 우리 황제님께서 방에 갇혀있는 꼬마 심심할까봐 잠깐이라 도 말상대를 해주라고 보낸 거잖아. 크리스 너도 앉지?” “.........” 크리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던필 말대로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그 저 코웃음이 나왔다. 크리스와 던필에겐 솔직히 전혀 유감이 없다. 다만 지스카르가 시킨 일이라니까 그냥 무조건적으로 반감이 드는 것이다. 나는 지금 지스카르는 물론이고 황제 의 ‘황’자나 폐하의 ‘폐’자만 들어도 그만 짜증 왈칵 치민다. 이 심리상태는 아마도 굉장히 오래갈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욱신거림이 다 낫기 전에 사라지기는 힘들 테지! “흥! 말상대라면 조롱새처럼 지저귀는 여자아이여야 마땅하지, 덩치도 커다란 시커먼 사내 놈들이랑 대체 뭘 하라고!!” “조, 조롱새 같은 여자애... 음, 꼬마야. 그건 좀 문제발언인데... 일단 넌........” 던필이 오묘한 표정으로 말을 하려다 말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 안다. 황제의 총애를 담뿍 받는 미동美童이 여자타령을 하니 황당하다는 거지. 크리스는 눈치가 좋은 건지 달리 이유가 있는지 던필의 황당함에 동조하지 않고 가만히 있 었다. 나는 크리스의 얼굴을 봐서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짜증을 일단 밟아 넣기로 했다. 그래 새해정초부터 큰 소리를 내는 건 좋지 않지. 암. 그때였다. 크리스가 어쩐 일로 흥미로운 얼굴을 하며 내 가슴께에 시선을 주었다. “못 보던 브로치인데..... 아, 사파이어가 네게 굉장히 잘 어울리는군.” 크리스는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진심을 담아서 잘 어울린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순간 목구 멍까지 치미는 욕지거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 하반신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일 어서지 못해 다시 팩 쓰러졌다. 크리스가 놀라 얼른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사람을 불러야겠군. 일단 폐하께.........” “다들 나가 죽엇!!!!!!” 새해 정초부터 큰소리를 내지 말자는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 끝~ 다운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료 출처 엔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