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코나흐타 력(歷) 345년에서 400년에 이르는 55여년의 기간동안 통치한 왕의 이름은 크로우 크루아흐였다.
그는 일명 죽음의 신이라 불리워졌으며 코나흐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고 가장 강대한 왕권을 구축하였던 호전적인 왕이었다.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당시 피의 군주였던 크로우 크루아흐가 믿을수 없게도 따르던 신이 있었으니
...............
그 신의 이름은 유하르였다.




아사 유하르 [1]

그곳을 빠져나오는 건 보통의 소년으론 분명 까다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나흐타에서 가장 골치덩어리로 불려지고 있는 크로우에겐 콧웃음을 칠 정도로 우스운 일이었다. 
일단 가까이에 있는 시동의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하면서 그 시동이 들고 있는 음료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옷을 적시게 한 후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성질 고약하기로 유명한 크로우의 악명을 익히 들었던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사이에 크로우는 아주 관대한 척 하면서 그 시동만을 잡아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어딘지 알수 없는 방으로 끌고갔다.
그리고는 시동을 묶어놓고 옷만 갈아입었다.

자신의 붉은 기운이 잔뜩 낀 눈을 가리기 위해 올렸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이며 이마를 가리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것쯤은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터득한 크로우는 시동의 옷을 입고 궁을 빠져나올 때까지 시동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신없는 발걸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크로우 크루아흐는 라인의 대궁 카이르시디에서 아무런 어려움없이 빠져나올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해가 저물기 전에 병사들에게 발각이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비록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연회라 할지라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였기에 잠시만의 탈출이 주는 자유를 충분히 만끽할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일전에 얼핏 지나가면서 보았던 웅장한 호수가 궁 카이르시디 근처였음을 기억하고는 다른 시동에게서 빼앗은 망토를 머리에 쓰고는 기억을 더듬으며 호수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에린의 오대 강국 가운데 하나인 라인은 에린의 남서부에 위치했고 따뜻하고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였다.
경치가 뛰어나기로 유명하고 숲이 울창하고 호수가 많으며 미인이 많은 나라다. 
그래서 라인에서 오는 공물가운데 뛰어난 미녀도 꼭 포함이 된다. 
어린 나이지만 이미 작년에 여자를 품었었는데 그 여자가 바로 라인의 여자였다.

라인의 9대 왕의 대관식에 참석했지만 화려하고 무희들의 춤이나 음식따위야 코나흐타에서도 언제든지 볼수 있고 먹을수 있는 것이기에 크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루할 따름이었다.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긴 했지만 라인에서 제공하는 여자를 안고 잘만큼 욕정이 일지는 않았고 받쳐주는 여자를 거절하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크로우에겐 이렇게 바람이나 쐬며 유유자적 라인의 경치로 눈보신하는게 더 기분 좋은 일이었기에 라인을 방문할때면 종종 성을 도망쳐나오곤 했다.

다음 대의 보위를 인정하는 검 프라가라흐의 화려한 검신을 빼어들고서 크로우는 이름모를 숲으로 들어섰다. 

짙은 녹색의 조용한 숲은 겉보기엔 평화롭기 그지없지만 울창한 숲이란 언제든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숲의 가운데즘에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고 들었다. 

주위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걸음을 옮기던 크로우의 무표정한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산책이란 어쩌면 변명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며칠동안 몸이 근질거렸는데 몸을 풀기위해서 몰래 성을 빠져나온건지도.. 
크로우는 일부러 등을 무방비하게 내놓고 앞만 보고 전진하였다. 

그 순간 크로우의 드러난 등을 항해 날라오는 표창을 왼쪽으로 몸을 비틀자 표창이 아슬아슬하게 크로우의 옷을 스치며 지나가 땅에 꾲혔다. 
풀 숲에 꽂힌 표창이 푸시식...거리는 연기를 내뿜는 걸보며 크로우는 미소를 지었다.

허..이거 단단히 작정을 하셨군. 독이라.. 잘못하면 위험하겠는걸?

연이어 쏟아지듯 내리꽂히는 표창들 사이를 검으로 정신없이 막아내며 크로우는 왼손으로 주머니속에 폭파의 기능을 가진 타흘룸이라는 작은 공을 꺼내 오른쪽 뒷 편에 있는 나무를 향해 던졌다. 

쾅~ 하는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나무위에 있던 사내가 시커멓게 타서 땅으로 곤두박질을 치자 몇몇 숨어있던 사내들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파악한 크로우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훗, 모처럼 재미있군. 그래. 이왕이면 조금 더 놀아달라고. 시시하게 끝내면 재미없어져."

첫 번째로 목표를 잡은 것은 왼쪽 나무위의 사내였다. 
나무가지를 잡고 그 반동으로 굵은 가지위에 올라선 크로우는 사내가 크로우의 존재를 눈치채는 순간 억 하는 비명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검을 휘둘러 프라가라흐의 첫 희생자를 만들었다. 
남자의 뜨거운 피가 식기도 전에 나무사이를 건너간 크로우는 두 번째 사내의 심장을 단 칼에 꿰뚫자 나머지 두 사내의 기척이 사라졌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크로우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넓은 곳으로 내려오면 은폐물이 있는 두 사내들이 훨씬 유리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등한 실력을 가졌을때의 이야기였다. 
몸을 숨긴 상대에게 급습을 당해도 이길 자신감이 크로우에게 있었기에 당당하게 몸을 드러냄으로 인해 상대를 자극하는 것이다.

"자. 먹이감이 여기 있다고. 겁먹지 말고 나오지 그래? 시시하게 표창이나 던지면 재미없어"

크로우의 앞을 두 사내가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가로막았다. 
복면을 한 사내들의 모습에선 어디서 온 자들인지 알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사내들이 어디의 청탁을 받고 온 것인지 하는 것 따위는 아니었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드러낸 자는 언젠가 다시 한 번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자들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자신을 즐겁게 해줄수 있는지.. 자신의 피를 얼마나 뜨겁게 달굴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지루하고 무료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벗어나 위험하기 그지없는 타국에서 몸종하나 거느리지 않고 나온 것은 바로 뜨거운 피의 들끓음을 느끼기 위해서니깐.

말도 없이 서로의 눈빛만을 교환한 두 사내가 크로우의 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 노리고 들어왔다. 
자세를 낮추며 크로우는 왼쪽편의 사내의 검부터 받아내며 몸을 왼쪽의 사내에게 실었다. 
설마 힘에서 밀릴줄 몰랐는지 놀란 왼쪽편의 사내가 급하게 호흡을 들이키며 몸에 힘을 주었지만 마치 거인과 힘겨루기를 하는 양 주르륵 뒤로 밀렸다. 

뒤로 밀린 사내에게 겨룬 검을 빼는 동시에 자세를 더 낮추어 오른편 사내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생각지도 못한 어린 소년의 쾌검에 남자가 놀라 주춤하는 사이에 소년의 검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있었다.
한 번 뽑으면 반드시 피를 본다는 프라가라흐는 못 자르는 것이 없다. 
하물며 인간의 다리뼈즘은 연한 두부를 써는 것보다 더 부드럽게 잘라내였다. 

오른편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다리가 잘린 부위를 잡으며 쓰러졌고 왼쪽 사내가 동료를 바라보며 주춤하는 사이에 프라가라흐는 정확하게 사내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사내는 자신의 심장을 찌른 프라가라흐의 검신을 바라보며 믿을수 없는 듯 크로우를 바라보았다.

"어...어..어떻게.."
"훗, 왜 억울한가? 겨우 다섯명정도로 나를 어찌할수 있다고 여겼나보지? 누구야? 그런 엉터리 정보를 준 자가? 설마 당신들 숙청하기 위해 내 손을 빌린건 아닐테지? 그러게.. 상대를 알고 덤벼야되지 않겠어? 오래 살려면 말이야"

크로우는 한층 미소를 짙게 지으며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사타구니까지 몸을 양분시키며 피를 뿜어대며 사내가 쓰러지자 크로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나... 시시한 상대였다.

다리가 잘린 사내가 벌벌 떨며 크로우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어떻게 해줄까? 손마저 그렇게 잘라줄까? 응?"
"제...제...제발..."
"쯧쯧.. 이런 사내를 은자로 보냈다니.. 허참, 당신네들을 의뢰한 자는 정말 바보군 그래. 나에 대해 도데체 뭘 알고 있기에 겨우 이런 조무래기 다섯명을 보냈나? 내가 우습게 보였나보군."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있는 사내의 손목을 의도적으로 천천히 자르자 사내의 비명소리가 숲을 진동시켰다. 
딱히 사내를 추궁해서 자신의 목숨을 노린 자를 알아낼려고 하지 않았기에 귀에 거슬리는 비명소리에 인상을 찌뿌리며 크로우는 바로 사내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자신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사내를 편하게 보내줄 생각은 없었지만 모처럼 라인의 호수가에 왔는데 시간을 지체하기도 싫었고 비명소리또한 듣기 싫었기에 쉽게 보내준 것이다. 

자신의 궁 같았으면 천천히 피를 보며 즐겼을터이지만.

이왕 자객을 보낼 것 같으면 긴장감으로 땀을 흠뻑 빼낼수 있는 사람을 보내라고 크로우는 알수 없는 상대에게 중얼거리며 숲의 안 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이 자객을 보낸 무안의 왕이 무안에서의 최고의 자객을 세 명을 보내자고 했을 때 무안의 군부통치자인 갈프가 왕을 달래고 달래서 다섯 명을 결정보았었다. 
그때 무안의 왕은 크게 웃으며 겨우 열 다섯설짜리 꼬마에게 무안에서 가장 강한 자객 다섯 명이나 보낸다고 갈프의 소심함을 비웃었다. 
갈프가 보고한 에단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크로우의 전투실력을 나이로 간과한 무안의 왕 벨레누스의 경솔함이 가져온 패배였다.
아무리 뛰어난 검을 가졌다고는 하나 열 다섯 살의 소년이 가지기엔 너무 지나친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크로우는 자각을 못한채 더 강한 상대를 보내달라고 투덜대는 것이다.



과연...이라는 감탄사를 뱉으며 크로우는 호수에 다가갔다. 
빽빽한 나무로 둘러쌓여진 연푸른 빛의 호수는 정말 그 경치가 뛰어났다. 
호수 바닥까지 내려다보일만큼 투명한 호수는 금방 겪었던 전투(?)가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할 정도로 평화롭고 조용했다.
밝은 햇볕이 푸른 물을 더 푸르게 보이게 하였고 시원한 공기는 상쾌했다.
정화를 하듯 프라가라흐의 검신을 호숫물로 씻고 크로우도 손과 얼굴을 씻었다. 
뼈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은 오히려 개운했고 크게 숨을 들이키니 청명한 호수의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히까지 들어왔다.

코나흐타에도 호수와 숲이 많지만 코나흐타의 숲은 낮에 들어가도 어둡고 위험한 동물들도 많으며 또 늪도 많았다.
그런 숲을 보다가 깨끗하고 밝은 숲을 보니 기분까지 좋아졌다.
코나흐타의 숨죽인 숲보다는 새소리도 들리고 작은 동물들이 움직이며 내는 사각거리는 풀의 소리들이 크로우의 마음에 들었다.

이 호수를 그대로 눈에 담아서 자신의 궁에 실현시키리라 다짐을 하며 호숫물을 손으로 받아 크로우가 마실려고 할 때 였다.
어디선가 하프소리와 함께 미성의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하고 맑은 호수와 너무 잘 어울리는 미성의 목소리. 
그리고 당장이라도 요정들이 뛰어나와 노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깨끗한 하프소리.

크로우는 주위를 두리면 둘러보다가 자신과 조금 떨어진 호숫가의 바위에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행여 자신의 발자국소리에 노래소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하프소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며 발걸음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가까이에 다가가면 갈수록 크게 들려오는 미성의 목소리는 가히 하늘에서 내려준 목소리인 듯 고왔다. 
숲에 사는 험악한 동물들도 이 달래주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면 꼬리를 내릴 것이다. 
고음도 껄끄럽지 않고 부드러웠고 자장가와 같은 친근한 목소리엔 따뜻한 배려가 잔뜩 서려있었다.

묘한 기대감으로 걸어가는 순간 두근, 심장이 벌렁 거리는 것을 느끼며 크로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한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눌러 진정을 시키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어느 강한 상대를 만났을때보다 더 긴장이 되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알수 있었다. 
입 안이 마르고 즐거운 긴장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 고운 목소리로 자신의 침대에서 노래를 불러준다면 기분 좋게 잠을 들수 있을 것 같았다. 
흐르는 전사의 피때문인지 깊은 잠을 못 자는 크로우로서는 뜻밖의 느낌을 주는 신선한 목소리였다.
뚝, 하고 하프소리와 노래소리가 끊어지자 크로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들켰을까? 왜....

"누구십니까?"
중성의 목소리이긴 했지만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크로우는 들려오는 목소리가 분명 사내의 목소리임을 깨달으며 하프를 쥔 소년의 앞으로 나갔다.
노래할때는 가느다란 미성이 되는데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는 확실히 노래부를때와는 달리 조금 굵다. 

"너는 누구의 종자냐?"
종자?? 그제서야 크로우는 자신의 시종의 옷을 입고 있는데다가 모자달린 망토까지 입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모자달린 옷은 얼굴을 가려야하는, 즉 시종이나 얼굴을 드러낼수 없는 자들만 입는 옷이다. 
신분이 귀하면 귀할수록 얼굴을 드러내는 옷을 입는다.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소년은 옆으로 자리를 비켜앉으며 크로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뭐, 누구의 종자건 상관없지. 너도 답답해서 바람이나 쐬러나온 것이겠지. 여기 앉겠느냐?"
고개를 끄덕이며 크로우는 가볍게 바위위로 올라앉았다. 
가까이에서 본 소년의 눈동자는 호수와 마찬가지로 투명한 푸른 빛이었다. 

호수밑이 바라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그 깊이를 헤아릴수 없는 것처럼 소년의 눈동자 역시 보면 볼수록 헤어나올수가 없었다. 
자신의 나이와 비슷해보이는 소년은 피부는 고운 목소리처럼 곱기만 하였다. 
전체적으로 미형의 소년은 아니지만 어린 나이임에 불구하고 소년은 고아한 한 마리의 학처럼 그렇게 빼어난 단정함이 있었다. 
옅은 갈색빛의 머리칼은 어깨정도로 내려와 있었고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머리칼은 가늘었다. 
소년이 고개를 돌리고서야 크로우는 자신이 넋을 놓고 소년을 바라본 것을 깨달았다. 
소년의 옆 얼굴또한 수려하였지만 크로우는 소년의 옆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호수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이 싫은 것이다.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자신이 소년을 넋을 잃고 바라본 것처럼 그 소년 역시 자신만을 봐주기를 원했다. 
느닺없이 느껴지는 소년에 대한 욕심에 스스로 놀랍긴 했지만 마치 처음부터 그랬는듯 당연하게 여겨졌다.

"가인(歌人)..입니까?"
거의 존대를 하지 않았기에 혹시 어색하지나 않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후훗.. 가인이라.. 그래, 지금은 가인이다."
"시종이나 가인이나 둘 다 얼굴을 드러낼수 없는 자이니 그럼 말을 놓아도 되겠군."
"후훗.. 단 한마디만 말을 높여놓고선 그리 억울하더냐? 그래, 가인과 시종은 그러하니 말 놓아도 무방하겠지"
가볍게 미소 짓는 가인의 모습에 크로우의 심장은 또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하였다. 
여태 이런 긴장감, 이런 묘한.. 간지러운 듯한 감각은 없었다. 
어떤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려도, 어떤 강한 사람과 싸워서 이겨도 이만큼 기분 좋지는 않았다.

"노래.. 다시 한 번 더 들려줄수 있겠어?"
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게 좋았다. 
이렇게 투명한 눈빛으로 호의만을 가득 품고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저 작은 붉은 입술을 빨아당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것을 상상하자 심장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크로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프를 켜기 시작하였다.
호수가의 바위에 걸터앉은 채 하프를 켜기 시작하는 소년의 모습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것만 같았다.
숲의 깊은 나무틈사이를 힘겹게 벗어난 한 줄기 햇살이 소년의 옆을 비추고 있었고 하프란 악기가 내는 맑은 소리는 소년의 눈동자와 잘 어울렸다.

내용을 알수 없지만 모든 탄생을 축복이라도 하는 듯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대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호숫가를 맴돌았다. 
크로우는 가인의 곁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자극적이지 않는 가인이 체향이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나긋하면서도 순백색에 가까운 자세히 맡지 않으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체향이다. 
하지만 지독히 달콤하다. 
안개가 온 몸을 감싸듯 편안한 노랫소리가 자신의 몸을 감싸안는다고 느끼며 어느새 크로우는 잠에 빠져들었다. 


코나흐타는 대륙 최강의 전사들이 모인 나라인만큼 호전적인 나라였다. 
코나흐타에 공물을 받치는 나라도 많았고 또 코나흐타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잃은 소국들도 많았다. 
그런 호전적인 국가의 왕족은 크루아흐다. 
코나흐타의 최고의 전성기라 일컬어지는 현 국왕 루 코나흐타의 장자이자 열 다섯이란 어린 나이에 전투경험마저 수차례가 되는 크로우 크루아흐를 바라보는 주위사람들은 모두 긴장을 하고 있다.
최강의 전사들을 통치하는 코나흐타의 제일 뛰어난 전사라고 불리우는 스렝을 크로우가 열 네 살의 나이때 이겼고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의 말을 듣는다는, 한 번 검신을 드러내면 반드시 피를 부른다는 에린 최고의 검 프라가라흐가 크로우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못했다. 
역사를 통틀어 프라가라흐를 손에 쥐었던 영웅은 몇 되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프라가라흐는 주인을 알아보는 검으로 주인이 아닌 자는 만질수도 없는 검이라 일컬어졌는데 그 전설의 명검이 어떤 경로로 크로우의 손에 떨어졌는지 알바는 아니나 중요한 것은 그 검이 크로우를 주인으로 섬겼다는 점에 놀라는 것이다.

안그래도 나이에 걸맞지 않는 힘과 실력을 지닌 무엇하나 꺼릴게 없는 왕자가 전설의 명검마저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을 날고 있는 용의 입에 여의주를 물어준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왕이 되기전에 크로우를 제거할려는 자가 무수히 덤벼들었다. 
살아 왕이 된다면 역사상 대륙에 가장 많은 피를 뿌리리라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호전적인데다가 잔인하기 그지없다고 소문이 나 있으니 코나흐타의 주위 나라들은 크로우의 관심을 사거나 혹은 크로우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빠른 크로우가 모를리 없었다. 
그래서 잘때도 항상 프라가라흐를 머리맡에 두고 자고 또 깊은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크로우였다.


그래서 놀랐다. 
잠이 든지도 몰랐는데 가인이 부르며 흔들어서 깨우자 크로우는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궁도 아닌 곳에서 부르는 것으로 모자라 흔들어서야 잠에서 깨다니..이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의 궁에서조차 작은 소리에 잠을 깨던 자신이 아닌가.. 짧은 시간이겠지만 깊은 숙면탓인지 크로우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나, 가야해."
"뭐??"
몸 상태가 최상임에도 불구하고 크로우의 기분은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본지 얼마가 되었다고, 잠이 드는 바람에 말도 제대로 못해보았다. 
모처럼만의 편안한 숙면이었건만 자신의 숙면이 이토록 원통한 적이 없었다.
이대로 놓칠수는 없다. 이대론, 절대.
억지라도 끌고 갈 요량으로 가인의 손을 움켜쥐었을 때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찾는게 분명할 소리에 안색을 굳히며 크로우는 지금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게 좋은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잠시 고민을 했다.

분명 시종이라고 했기에 이 가인은 자신의 곁에 다가오게 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그것도 코나흐타의 왕자라고 했다면 결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거짓말 했다는게 들통이 나서 좋을게 없을게 뻔하다. 
이 맑은 사람이, 이 푸른 눈동자에 두려움이나 긴장감이 서리는 건 정말 싫다. 
아까 보았던 것처럼 잔잔한 평화가 작은 미소가 스며들기를 크로우는 바랬다. 
그래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이 숲에서 찾을 곳이라고는 이 호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숲 중간에 버려진 몇 구의 시체를 보았다면 호수쪽으로 방향을 확실히 잡을 것이다.
자리를 피해야 하는데.. 이 가인을 두고 떠날수는 없었다. 같이 가면 모를까.. 

"같이 가. 나랑 같이 가자."
"안돼. 놔."
"이봐!!!! 일단 숲으로 몸을 숨기고 이야기해"
"놓으라 했다. 놔!!!"
가인답지 않은 위엄한 호통에 크로우는 가인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 사람이 화내는건 어쩐지 무섭다. 
그답지 않는 '무섭다'라는 말에 스스로 놀랐지만 그 놀람도 잠시 바위에서 내려 숲으로 뛰어들어가는 가인의 뒤를 크로우는 쫓아갔다. 

가인이 들어간 숲에는 말이 한 마리 매여있었다.  
익숙하게 가인이 말 위로 올라서자 크로우는 가인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았다. 
이대로 보낼수는 없다. 절대 .. 이대로는.
혹시 놓쳐버릴까 두려운 마음마저 드는 크로우의 심장은 다시 격렬히 뛰기 시작했다.
놓치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못 가. 이대로는 못 가!!!"
"뭐하는 짓이야!!"
"같이 가. 아니 지금 못가면 어디에 누군지 말해. 내가 찾아간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채 너 보낼수 없어. 라인의 사람인거냐? 이름이 뭐야? 어디에 살어!!!!"
가인의 투명한 푸른 빛이 안타까움으로 젖어들었다.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 내 노래를 다시 듣고 싶은거야?"
"그래"
"정말? 내 노래를 다시 듣고 싶은거야?"
노래가 아니라 너를 다시 보고 싶은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점점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크로우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내 노래를 들어준 사람. 날 가인으로 봐준 사람. 고마워. 하지만.. 다시는 못 만날 것이야. 아쉽지만..하지만 잊지 않을께..아얏!!!!"

다시 못 만난다고? 내가 원하는 일에 누가 방해를 해. 그게 설사 너가 되었더라도 방해하지 못한다. 너를 다시 못 만난다고? 날 처음으로 재운 사람을, 내 심장을 이리 격렬하게 뛰게 한 사람을? 하. 어림도 없는 소리. 난 크로우 크루아흐다. 내 앞에서 안된다는 말을 하지 말아. 

"이름을 말하라. 가인."
프라가라흐가 가인의 다리에 실핏선을 그리며 가인의 다리살을 파고 들고 있었다.
차마 가인의 목을 겨눌수는 없는 일이고 팔은 하프를 켜야하니 건드리기 싫었기에 어쩔수 없이 다리를 겨냥한 것이다. 
깊이 파고 들지는 않았으니 흉터가 남지는 않을 터이지만 하얀 종아리에 붉은 핏자욱은 자신이 낸것이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찌뿌렸다.

"어디에 사는 자인지, 이름이 뭔지 말하라. 그럼 보내주지. 설마 내가 말을 못 죽여 이리 다리에 칼을 겨누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를 바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는 걸 알기에 이러는 것이다. 너도 피해야한다면, 이름을 말하라. 그리고 나중에 내가 찾아갈때까지 기다려라. "
"유하르"
"유...하..르..."
잊지 않겠다는 듯 크로우는 유하르의 이름을 몇 번이나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유하르... 기다려라. 이런 숲에 함부로 들어다니지 말고 기다려. 리안의 유하르. 일년 안에 내가 다시 오겠다. 반드시 일년 안으로.  유하르. 넌 기다려. 꼭, 기다려야 한다."

시종 따위가 주인의 허락없이 움직이는 것도 어려울텐데 어떻게 찾아오느냐, 라는 말을 가인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인인것처럼 이 사람도 차림새처럼 시종은 아닐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시종치고는 자신을 빤히 바라다보았고 행동엔 거침이 없다. 
아마도 지금 라인제국에 온 여러나라 귀족이나 왕족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자신처럼 답답해 바람이나 쐬기 위해 온 것일테지. 
사람들의 소리가 더 가까이에 들려오자 가인은 자신을 뚤어져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의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몸을 숙이자 소년의 젊고 정열적인 뜨거운 체향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날 가인으로 봐 준 사람. 처음으로 날 나 자신으로 봐주고는 필요하다 말해준 사람. 
고마워서 고개숙여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소년이 멍하니 서있는 동안 말의 옆구리를 박차고 숲 속을 달렸다. 

소년의 고함소리가 들려온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멀어서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기다리란 말이었던 것 같았다. 
가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이 숲이 가져다준 하나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풋풋한 소년의 기억을, 가볍게 느껴지는 다리의 통증을 잊지 않기로 했다. 비록 만날수는 없겠지만..

"기억해라. 프라가라흐. 너에게 기억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 고운 다리에 흠집을 내었다."
이젠 숲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 유하르의 뒤를 보며 크로우는 검을 들었다. 
웅웅..거리며 검이 응답을 한다.
모든 피를 머금지 않고 흘러보내던 검의 끝에는 붉은 피가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마치 그 피내음을 기억이라도 할 듯 흘러야 할 매끈한 검신에 묻혀진 피가 검신이 세워져도 흐르지 않고 검 끝에 매달려 있다.

"이 피 주인의 이름은 유하르. 넌 다시는 유하르의 피를 몸에 묻혀서는 안된다. 설사 내가 널 들고 유하르의 몸에 들이댈지라도 넌 날 멈추게 해야한다. 알았느냐? 기억해라. 나의 검 프라가라흐. 너의 또다른 주인 유하르의 피를."

라인의 사람들과 코나흐타의 군사들이 크로우를 발견하고 몇 몇 용기있는 자가 크로우에게 위험한 일을 하셨다고 몇 마디 할 때까지 크로우는 유하르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아사 유하르 [2]


크로우는 의자에 몸을 푹 담근 채 시선을 내리깔며 물었다.
"정말 이 자들이 다겠지? 브란."
"그럼요. 코른의 모든 가인(歌人)들을 다 모았습니다. 물론,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제법 고생을 했는지 낮게 이를 가는 듯한 브란의 목소리엔 불만이 가득맺혀있다.
그런 그를 알면서도 크로우는 능청스럽게 대꾸하였다.

"아아..물론 그랬을테지. 안 그랬으면 네 놈의 목이 몸뚱이에 붙어있지 않을테니깐 말이야."
아무리 익숙한 말이라고하나 몇 푼 남지 않은 정마저 떨굴 차가운 농담에 매번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떠는 브란은 속으로 '이번에는 제발...'이라는 말을 되뇌였다.
하지만 왕의 붉은 기운이 서린 눈에 한 줄기의 반가움조차 서리지 않는 것을 보며 자신이 또다시 헛고생을 했음을 깨달은 브란의 어깨는 저절로 축 쳐졌다.

한 눈에 봐도 없다. 
근 이십여명의 젊은 가인들이 모여있지만 크로우는 한 눈에 알수 있었다. 자신이 찾는 그가 여기에 없다는 것을.

"이 중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자가 누구냐?"
머뭇거리며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아마 궁중에서 가인으로 있었던 자인지 옷차림부터 다른 가인과는 달라보인다. 
크로우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래를 시키자 가인은 이 잔인한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목을 가다듬고 최고의 노래를 불렀다. 
코른 왕국에서 그토록 칭찬을 받던 목소리가 내는 노래를 한 구절도 채 듣지 않고 코나흐타의 왕은 손을 휘휘 젓는다. 
그러자 가인들의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다가와 가인을 모두 데리고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넓은 대전에 왕은 그답지 않게 힘 빠진 모습으로 의자에 몸을 더 깊숙히 묻고 있는 것을 보며 친구이자 대신인 브란이 그에게 다가갔다.

"크로우"
벌써 몇 차례 있었던 일이고 다른 사람의 위로엔 능숙한 브란이지만 크로우에겐 어떤 위로를 건네야할지 매번 곤란하기만 하였다. 
저 코른 가인들의 목숨을 보장받는 말부터 받아야하는데 브란은 그것보다 자신의 왕의 처진 어깨가 더 걱정이 되었다. 

한 나라의 수장인만큼 왕의 건강이나 기분이 최우선임에 불구하고 앞으로 한동안은 왕이 술에 빠져있을 것을 알기에 어떻게 해결도 못해주고 바라보는 일만 할수 없는 브란의 마음은 무거워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왕을 보필하고 그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 신하된 도리이자 친구의 우정일진대 그의 고민을 덜어줄수 없는 자신의 가난에 브란까지 덩달아 우울해진다.
무엇하나 꺼릴게 없는 왕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는 경우는 단 하나, 바로 그가 찾는 가인이 없을 경우였다. 
도데체 그가 누구인지 브란 역시 왕만큼은 아니겠지만 왕이 찾는 가인을 빨리 찾고 싶었다. 
더 이상 찾지 못한다면 대륙은 피로 젖어들 것이다. 

"이번엔.. 어느 나라를 칠까? 샤논 강(라인과 코나흐타의 경계에 있는 강)을 넘을까??"
시니컬한 크로스의 말에 브란이 벌컥 큰 소리를 질렀다.
"라인은 안된다고 말했잖아!!"
"왜?"
비딱하고 불량스러운 시선으로 브란을 바라보는 왕은 정말로 이해가 안된다는 듯 설명을 해보라고 손짓을 했다.

"기억안나? 그 때 라인에 가서 뒤집었잖아.  벌써 십 년이다. 크로우. 이제 그만.."
화려한 코나흐타의 문장이 새겨진 검집이 브란의 턱을 치켜세웠다. 
물론 웬만해선 크로우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칼을 들이대진 않겠지만 싸늘하게 식은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니 저절로 긴장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게 된다.

"설사 너라도 그런 말 하는거 용납못한다. 찾아낼꺼다. 겨우 십 년이 걸렸을 뿐이야. 앞으로 많은 세월이 남아있지 않겠어? 아직 멀었다. 브란."
검이 물러나자 길게 한숨을 내쉬며 건방지게도 브란은 크로우의 의자 옆에 앉았다. 
물론 다른 신하들이 본다면 크로우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겠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친구라는 자리로 여기 있기에 편하게 대하는 것이다. 

"라인에서 나에게 숨기진 않았겠지?"
"당연하지. 감히 숭배의 평야 주인 크로우 크루아흐전하에게 거짓을 고할만큼 용감한 자가 라인에는 없어."
"그럼..어디에 있는거지? 어디로 숨은거야"
그답지 않은 애타는 목소리에 브란을 자신의 왕을 바라보았다.
집착인지 아집인지 아니면 과거의 감정에 대한 현재의 확인을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왕은 십 년전의 한 사람을 찾는 일에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하다.

어릴때 잠시 스친 인연으로 보기엔 그 집착이 너무 심하다. 
그것도 십년이나 지난 일인데다가 몇 마디 말도 못 나눈 사이라면서 왜 그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지. 
수 많은 가인들이 빼어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하프를 켜도 크로우는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었다.
이름이 같은 사내만 벌써 몇 번이나 찾아 대령시켰지만 크로우가 찾는 사내는 없었다. 
크로우가 종종 꿈을 착각한게 아닐까..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런 생각이 들정도로 헷갈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크로우..."
"라인을 쓸어버리면 찾을수 있을까?"
"크로우. 그때 라인에 모였던 나라만해도 열 개국이 넘었고 참여한 귀족의 수도 엄청많았다고. 라인 사람이 아닐수 있어. 알면서 왜 그래?"
"모든 것을 아는 브란. 어디에 있지? 그는... 나의 유하르는 도데체 어디에 숨어있는걸까"
잠시 스쳐지나갔던 볼의 온기를 더듬듯이 크로우는 자신의 뺨을 만져보았다. 
거친 사내의 뺨에는 그때 그 기억이 거짓이었던 것 마냥 푸르고 따스했던 감촉이 남아있지 않았다.

"찾는다고해도 그가 널 기억못하면? 잠깐 만났을 뿐이라고 했잖아. 십 년이 지났어. 얼굴도 많이 바뀌었을테고.. 너도 그를 못 알아볼지도.."
"아니, 난 알아본다. 그가 날 못 알아볼지는 몰라도 난 알아 볼수있어. 느낄수 있다고. 만나서 기억을 못한다면 다시 만들면 되. 날 다시 그의 기억에 새겨놓으면 된다고."
"그것보다 크로우."

왕의 거침 심사를 위로하기 위해 신하는 말을 가볍게 돌리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리안님이 한 번 뵈었으면 하던데, 모리안님이 보고싶어한다고. 응? 테오르왕자를 생각해서라도.."
대답없는 크로우를 바라보며 브란은 또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 기회에 모리안님을 왕비로..."
다시금 검집이 브란의 목 아래로 들어오자 브란은 긴장보다는 어이가 없어 거만하게 팔짱을 끼었다.
"아아..알았다고. 알았어. 말로하면 되지 왜 걸핏하면 검을 들이대고 난리야? 알았어. 왕비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을테니 모리안님께는 가봐. 알았지?"

왕비자리는 비워둘 예정이라고 크로우는 어렸을때 부터 말했었다.
언제든지 안을수 있는 후궁들이 많은데  왜 구태여 왕비라는 자리에 여자를 앉혀야 하는지, 그래서 그 여자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어 기고만장한 꼴은 절대 보기 싫다며 크로우는 왕비라는 자리를 아예 없앨려고까지 하였다.
물론 브란을 비롯한 대신들의 만류로 빈자리이긴 하나 겨우 남겨둔 과거가 있었다.
정말 크로우만큼 자기 멋대로이고 무지막지한 왕은 역사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탓하지도 못하는 것이 다른 그 어떤 나라보다 왕의 말이 곧 하늘의 말과 같은 효력을 지닐만큼 왕권이 센 나라인 탓도 있지만 크로우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인 면으로 잘 이끌어나아가기때문이다.
문제라면 자신의 고집을 절대적으로 관철시키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과 지나치게 잔혹한 면이 있다는 것.
브란은 어쩌면 크로우가 찾는 그 가인이 나타나면 자신의 왕의 단점이 조금은 누그러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물론 십년 전의 사람이고 찾는다해도 잠자리의 상대에 대해 유난히 변덕이 심한 크로우여서 믿을수는 없지만 현재 상황으로봐서는 그가 가장 유력한 후보이긴 했다.
하지만 역시나 브란은 곧바로 고개를 절래 저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왕인 크로우를 잘 알기 때문이다.


"준비해."
"뭘??"
위험하게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브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을에 무안을 친다."
"뭐?? 크로우!!!"
"걸려. 계속 무안이 걸려. 안되겠어. 좀 힘겨운 상대겠지만 내가 왕자일때부터 자객을 보내던 곳이라 기분이 안 좋아. 요즘 분위기도 영 심상치 않고.. 무안에.. 뭔가 있어. 준비해라 브란. 가을이다."
"젠장. 코른을 친지 얼마나 되었다고.."
"브란!!!"
검집을 들자 착하고 왕의 검을 두려워하는 브란의 대답이 곧장 나왔다.

"네네..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그리고.."
"네네..알겠다니깐요. 무안을 치고 가인들을 찾아내는 것 또한 알겠습니다. 휴.. 하지만 아셔야 합니다. 크루아흐전하. 무안은 코른처럼 만만한 곳이 아니란 것을. 저희 코나흐타처럼 전사의 피가 흐르는 호전적인 국가라는 것을요. 그래서 여태 역대 그 어느 왕도 무안을 밀지는 못했습니다. 어려운 상대라구요. 더더군다나 지금 무안에는 그 갈프가 있다구요. 갈프가."
"갈프라.."
"네네. 스렝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절대 뒤지지 않는 장군중에 으뜸인자입니다. 그가 있는한 무안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겁니다. 그리 만만하게 보실 나라가 아니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네?"
"못 들었나? 갈프를 감시하라고"
"그래서요? 어쩌실려구요?"
"잠행한다."
"네에???"
브란이 놀라 입을 벌리는 것을 보면서도 크로우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 자신의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갈프만 없다면 무안도 크게 힘들거 없지. 내가 직접 갈프를 처단하겠다."
"세상에.. 그러니깐 적국으로 단...독으로 가시겠다는??"
"당연하지. 잠행을 하는데 그럼 떨거지들을 주렁주렁 달고가란 말이야?"
"크로우!!! 말도 안돼!!!!"

브란의 절규를 뒤로 한채 크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궁으로 걸음을 옮기며 크로우의 발언이 자신의 책임인양 괴로워하는 브란에게 당부의 말을 던졌다.
"잊지마. 브란. 무안에도 분명 가인이 있을테니 무안의 모든 가인들을 흠집내지 말고 고스란히 코나흐타로 데리고 와야한다. 그 일은 네가 직접해야한다는 것을 말 안해도 알겠지?"

자신이 뱉은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고야마는 고집과 아집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왕의 말에 브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지만 어쩔수 없는 일. 
될 수있는 한 자세히 갈프의 뒷조사를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왕에게 보탬이 되는 일이겠지. 
하지만..어째서 왕이란 직위에 있는 자가 자신의 몸에 대해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는지 브란은 밤새 지시를 하면서도 내내 괴로워했다. 

술독에 빠져 지내는 것이 나은지 적국에 혼자의 몸으로 잠행을 해서 들어가 장수의 머리를 치겠다는 말도 안되는 일을 꾸미는게 나은지 브란을 알수없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의 왕이자 친구인 크로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다.



**

크로우는 그의 애마 안바르위에 앉아 느긋이 성 아래를 살펴보았다. 
곳곳에서 올라오던 연기는 이제 거의 수그러들었고 코나흐타의 문장이 새겨진 병사들이 왔다 갔다 하며 무언가 지시를 내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위에까지 들려왔다.
어렵게 여겼는데 너무 쉽게 무너진 무안은 단 두 달만에 코나흐타의 령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갈프가 없어서 그런지 병사들은 사기도 없었고 왕 또한 졸속한 인물로 자신의 목숨부터 구걸하는 자였다.
물론 자신의 손이 아닌 병사의 손에 의해 간단하게 목을 쳤었다.
왕의 목이 달아나도 울부짓는 부하 하나 없었고 원통에 서려 반항하는 자 하나 없는 무안의 대궁의 일이 서서히 마무리 되어가는 것을 크로우는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종자들이나 병사들을 깔끔하게 처형시키면 될 일을 그들을 살리겠다고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는 브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저렇게 정이 많은 녀석이 어떻게 코나흐타의 태대신 노릇을 하는지 알수 없지만 당분간 살려달라고 조를 녀석을 생각하니 벌써 골치가 아파지는 크로우였다.

가인들을 모아놓았으니 코나흐타로 데리고 갈 필요없이 잠시 살펴볼까 하는 마음으로 크로우는 궁정 광장으로 말을 이끌었다.
이곳 무안을 향할때부터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설레였다.
꼭 가야만 할.. 비록 버거운 곳이라 할지라도 이곳으로 와야할 것만 같은 감각이 있기에 잠행이라는 무리수를 두고서 무안을 쳤다.
그리고 물론 잠행도 성공하고 갈프가 없어 혼돈에 빠진 군대를 가진 무안을 치는 것 역시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그러나 뭔가 빠졌다.
허전한 마음이 계속 들어 두 달이나 걸려버린 전쟁이 끝난 지금도 아직 코나흐타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할 일없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시체들 틈에서, 시끄럽고 깨끗하지 못한 곳에서 더 이상 왕으로서의 볼 일은 없건만 코나흐타로 돌아가기엔 게름찍하니 자신을 끌어당기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크로우로서도 알수 없다. 
하지만 여태 그래왔듯이 크로우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너때문인가. 유하르. 네가 무안에 있느냐."

우우우웅...

무심코 뱉은 중얼거리는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프라가라흐가 가늘게 울었다.
프라가라흐는 주인의 목숨이 위험할때나 그렇치 않으면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운다.
크로우가 여태 상대해왔던 그 어떤 자보다 강한 갈프와의 전투에서도 울지 않던 프라가라흐가 낮게 진동을 하며 울어대었다.
놀란 크로우는 프라가라흐의 검신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했다.

"정말이냐? 프라가라흐. 나를 잡고 있는게 유하르냐? 유하르가 정말 무안에 있단 말이냐?"

우우우우웅..

프라가라흐의 대답을 확신한 크로우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아마 브란이 보았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만한 환한 미소가 말이다.

"하하하하핫. 정말이냐? 나의 프라가라흐. 정말이냐? 정말 그가 여기에 있단 말이냐? 하하하핫."

광장에는 병사들의 고함소리로 시끄러웠다. 
자신이 내려오는 것을 본 병사들이 시립하는 것을 보며 손을 흔들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보기 시작하였다.
멀리서 브란이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것을 잠시 보며 크로우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설마 성 안에 있는 건 아니겠지? 성 밖이냐? 어디든 상관없다. 무사히 있어만 다오. 내 반드시 널 찾아낼테니

"아무리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나 여기는 적국입니다. 왜 혼자다니십니까? 도데체 제가 붙여둔 녀석들은 지금 뭘하고 있구요!!"
"아. 브란. 네가 무안의 백성을 이렇게 구분해놓았겠지? 그래 이 녀석들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길게 말 안하는게 좋을꺼다."
뿌드득 이빨을 가는 브란의 어깨를 툭 치며 가인을 모아둔 곳이 어딘지 물었다. 
항의 한 번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절대로 속으로 하지 않고 작은 소리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한탄하는 브란의 뒤를 따르며 크로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자신의 웃음소리에 놀란 브란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크로우의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십 년이다. 십 년동안 기다렸다. 유하르. 이제 내가 널 만나러 간다. 

우우우웅............

프라가라흐의 진동이 심해졌다.
크로우는 걸음을 멈춘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자들은 뭣하는 자들이냐"
한시바삐 가인들이 모인 곳으로 갈줄 알았던 왕이 걸음을 멈추자 브란 역시 서서 크로우가 가르킨 자들을 보았다.
"보시다시피 궁에서 시종을 하였던 자들입니다. 몇은 가려 코나흐타로 데려갈 생각입니다만.."
"여기냐, 프라가라흐. 너의 또 다른 주인이 있는 곳이.."

크로우의 말에 브란이 놀라 왕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절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검임을 잘 아는 크로우의 저 말은 무엇을 말하는건가?
크로우가 시종을 모아둔 곳으로 향하자 브란이 뒤따랐다.
왕이 다가오는 것을 본 시종들을 지키는 병사중 우두머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코나흐타의 왕 크루아흐전하시다. 모두 부복을 하여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앉아있던 시종들이 모두 급히 두려움에 떨며 배를 땅에 대었고 병사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알았다. 프라가라흐. 이번엔 내가 맞추어보지."
크로우가 엎드린 시종들 사이를 지나가자 그를 지나친 시종들은 안도의 한숨을, 기다리는 시종들은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죽음의 신, 크로우 크루아흐가 아니던가.
공포의 대상이자 사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현 크루아흐 국왕이었다.
크로우는 정확하게 한 시종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공포가 아닌 분노의 색을 띄고 있는 자. 
비록 엎드리고는 있으나 배를 땅에 붙이지 않고 상체를 꽂꽂하게 세우고 있는 자. 
몸을 지탱하고 있는 땅을 딛고 있는 손가락이 다른 시종과는 달리 유난히 곱고 하얀.. 하프라도 키는 손인양 길다랗고 고운 손을 지닌 자.
무향에 가까운 체향을 지녔으면서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달콤한 체향을 지닌 자.
잔인한 죽음의 신이라 일컬어지는 크로우, 그의 심장을 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뛰게 하는 자.

크로우는 그 자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시종들의 습관인 고개숙임이 없이 바로 자신의 눈을 직시하는 푸르고 맑은 눈동자가 크로우의 눈 앞에 드러났다.
자신을 알아보았는지 눈동자가 커졌다가 다시 사그라든다.
십 년이 지났건만 그때처럼 깨끗한 피부는 그의 나이를 짐작키 어렵게 하였고 그때처럼 자신보다 한 뼘이나 작은 키는 아담하니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크기였다.
기대와 어긋나지 않는 모습에 새삼 심장이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침이 바짝 마르고 이 사람을 먹고싶다, 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크로우는 유하르가 입술을 꽉 깨물며 무언가를 참는 듯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앙팡지게 쥔 것을 볼수 있었다.
하지만 크로우는 그것마저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 어떤 반응이던 크로우는 상관이 없었다.

찾았으니 되었다. 이젠 다시는 내 눈 앞에서 도망가게 하지 않겠다. 유하르

"오래간만이군. 유하르."
그리고 놀랍게도 유하르라 불리워졌던 사내는 반가움으로 미소를 한껏 짓고 있는 크로우를 향해 숨겨진 다른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햇살아래 그 손이 들고 있는 작지만 충분히 날카로운 단검이 반짝 하고 빛났다.




아사 유하르 [3]


"그를 처형해서 무안의 본보기로 삼아야합니다. 감히 크루아흐전하의 앞에서 검을 들이대다니요.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대신 베일라의  말을 받아 에이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 자는 무안의 왕자, 그것도 태자이옵니다. 지금이라도 처형하지 않으면 차후..."

쾅!!!
프라가라흐를 감싼 검집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대전은 일순 조용해졌다.
크로우의 옆에 시립해있던 브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보들. 무엇을 건드려야하는지, 무엇을 건드리면 안되는지도 모른채 왕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가.
그가 어떻게 찾은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내뱉는 대신들의 안위가 브란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부디 대신들 모두를 숙청하라는 기가막힌 명령만은 내려지지 않기를 브란은 내심 빌었다.

"처형하라고? 누구를 말하는가? 오호라. 내 말에 감히 토를 달고 항명하는 그대들을 말하는가?"
대신들은 왕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 자신이 알고 있는 왕은 그의 말에 거역하는 자가 대신들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는 왕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함구에 붙이겠다고 말했다. 못 들었나? 좋아. 다시 한 번 말하지. 차후 무안의 태자에 대한 발언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겠다. 나를 거역하고 싶은 자, 언제든지 나와라. 내가 어떤 본보기로 삼을지 보여주지. 자, 누가 나올테냐? 어떤 자가 다시 무안의 태자를 입에 담겠는가? "
싸늘하게 대전을 살펴보던 크로우가 콧웃음을 쳤다.

"그래, 내 말이, 나 크로우 크루아흐의 말이 다들 우스웠나보군. 브란!!!"
"네. 전하."
"여기 이 자들 모두 한 달동안 근신토록!!!"
"모..모두라니.. 저..전하."
"오냐, 너도 항명이더냐? 브란?"
"아....아닙니다. 명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전하."

크로우는 아직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대신들을 싸늘히 바라보고는 망설임없이 대전을 빠져나왔다.

**
크로우는 자신의 몸 일부분을 머금고 있는 이름 모를 남자 성노(性奴)의 애널을 바라보았다.
남자를 안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여자를 좋아하는 편인 크로우의 후궁 및 성노가 머무는 로흐 벨에  남자 성노는 겨우 서너명 정도뿐이었다.
후궁들이나 후궁의 직위를 얻지 못하는 성노들은 왕이 찾지 않더라도 언제어느때고 왕의 방문을 받더라도 무리가 없도록 시종장의 명령에 의해 교육을 받게되어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찾은 남자 성노라 할지라도 크로우에게 아프게 할 정도로 조이지는 않지만 모처럼만의 왕의 물건을 받다보니 긴장으로 인해 성노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을 받은 성노는 곧 왕의 쾌락을 위해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며 주기적으로 조여오는 성노의 움직임에 크로우의 성기는 점차 고조가 되었지만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마치 토악질을 한 듯 기분 나쁘게 성노의 몸에다 자신의 정액을 쏟아내고는 크로우는 곧장 몸을 빼내었다.

머리를 바닥에 댄 채 엉덩이를 한껏 치켜들고 자신의 정액을 뚝뚝 떨구던 성노의 모습을 보며 원인모를 화가 울컥 치민 크로우는 침대 곁에 시립하고 있던 시종장 샬비에게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버려."
"네. 전하."
팔을 벌리자 샬비가 조용히 크로우의 옷을 입혔다.
잠자리를 가진 성노를 죽이는 일이 가끔 있는 일이긴 하지만 아무런 이유없이 죽이지는 않던 왕의 명령에 샬비는 더 조심해서 몸을 움직였다.
옷을 다 입혀주고도 한참 동안 생각에 빠진 듯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왕의 곁에 조용히 머리를 조아리며 시립하고 있던 샬비는 곧이어 들리는 왕의 말로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것도 같았다.
하지만 샬비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피나하로 간다."
"네. 전하"



크로우는 피나하궁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두 달전 무안에서 만났던 유하르를 떠올렸다.
믿을수 없게도 유하르는 무안의 태자였다. 
제법 빠른 손놀림이긴 했지만 왕의 보위에 오르고도 직접 전장에서 뛰었던 크로우로서는 유하르가 내리치는 단검정도야 쉽게 막을수 있었다.
비록 십 년전의 일이긴 하나 자신이 유하르에대해 호감을 가지듯 그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크로우는 유하르의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놀랐다. 
유하르가 크로우의 목숨을 위해할 각오를 하고 들고 있었던 검보다  두 손을 잡힌 채 억울한 듯 떨고 있는 유하르의 눈에 비친 분노와 원망, 증오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종의 옷을 입은 유하르가 어째서 이토록 자신에게 분노를 터트리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시종이 크로우의 발목을 잡으며 애원을 하였다.

"저..전하. 부디 손에 인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시종이옵니다. 그저 돌아가신 벨레누스왕께 은혜를 받아 그러는 것이니 부디..부디 너그러히 살펴주십시요. "
크로우의 곁에 있던 병사가 크로우의 발목을 잡던 시종의 머리를 세차게 떼어내었다.
"감히 전하의 옥체에 손을 대다니!!!"
떼어낸 시종을 몇 차례 구타하던 병사가 칼을 뽑아내자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유하르가 그제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죽이실려거든 단 칼에 내리그어주십시요."
병사가 크로우를 바라보자 크로우는 손을 들어 병사를 제지하였다.
유하르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쓰러진 시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가 뭐가 중요하고 왕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더냐? 이미 따를 백성은 포로가 되고 나에게 관을 내려주실 아버님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거늘. 뭐가 그리 아쉽고 뭐가 그리 미련이 많아."
"저...전하..."
쓰러져있던 시종의 입에서 나온 말에 주위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브란이 놀라 왕의 안위를 걱정하여 크로우의 앞을 가로막을려하자 크로우가 막아섰다. 
병사들이 유하르에게 다가서는 것 또한 막은 크로우는 그토록 찾았던 유하르를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푸르고 맑은 눈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크로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을 이렇게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한 크로우로서는 반갑기도 하고 또 생소한 일이기도 하였다.
또다시 두근, 하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머리속을 울렸다.

"시종의 목숨건 간청에 어쩔수 없이 시종의 옷을 입고 만나게 되었군. 허나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해본들 내가 무안을 새로 일으킬수 없음 또한 알고 있는 터. 이런 허울따위야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테지"
유하르가 칙칙한 회색의 망토를 벗자 속에 받혀입고 있었는 듯 검소하지만 고급원단을 썼는게 틀림이 없는 의복이 나타났다.
푸른 눈을 지닌 그와 너무 잘 어울리는 연하늘색의 평상복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줄은 정말 몰랐어. 코나흐타의 죽음의 신 크루아흐전하. 난 무안의 왕 벨레누스의 아들이자 태자 피누알라다. 모쪼록 신분에 걸맞게 자결할수 있도록 해줄수 있겠나? "

십 년만에 만난 사람은 십 년전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자신을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는데..얼마나 보고싶었던 눈동자였는데.. 
목소리는 죽음을 달라하고 눈동자엔 자신의 아비를 죽이고 자신의 어미를 죽인 적군을 향한 분노만을 담고 있다.

브란이 종종 묻곤 했었다.
어떻게해서 십 년전에 만난, 그것도 잠시 스쳐간 자를 그토록 찾을수 있냐고, 어떻게 그렇게 못 잊어하느냐고,
대답을 할수 없었기에 더 찾고 싶었다.
십 년이나 지나서 만나도 과연 그 알수 없는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는가에 대해 브란보다 자신이 더 궁금했기때문이다.

그래서 만난 지금 크로우는 알수 있었다.
최소한 이 자가, 내 눈앞에서 죽는 꼴 따위는 절대 볼수 없다고.
그래서 유하르를 피나하궁으로 데리고 왔다. 
그의 눈 앞에서 그 시종을 죽이고서야 걸음을 떼었던 유하르는 그때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드러냈던 칼날과도 같던 분노도 사라졌고 자신이 태자로서의 대우가 아닌 성노처럼 대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치 영혼이 분리된 사람처럼 말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

생기가 넘치던 푸른 눈은 그 힘을 잃었고 힘을 잃어버린 눈을 외면하지 못하는 크로우의 가슴도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눈 앞에 가지고 싶던 상대를 두고도, 상대의 몸속으로 자신의 일부를 밀어넣어도 상대는 자신의 눈 앞에 없고 상대의 몸은 몸 속에 들어오는 사내의 물건을 거부했다.

대신들은 그들의 왕이 적국의 태자를 노예도 아니고 후궁으로 덜컥 삼아버리자 끊임없이 왕에게 그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크로우는 후궁으로 밖에 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안타까울 따름이어서 그들의 말을 일언지하로 거절했다
태자였는데, 얼마나 받듬을 받고 살았을까..라는 생각에 후궁외엔 더 방도가 없어 그리 하고 말았지만 행여나 그가 타국에서의 홀대로 모국을 그리워하질 않기를 바라는 크로우로서는 그나마 다행인것이 피나하궁이었다.
유하르의 거처로 삼은 피나하궁은 규모는 다른 후궁의 궁보다 작았지만 그 터는 가장 넓었고 그 터를 매우고 있는 것은 정원이었다.
그로 인한 빼어난 경치는 코나흐타의 궁 가운데 최고로 손꼽을수 있을 것이다.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궁은 요정들이 사는 곳인것처럼 깨끗하고 다른 후궁전과도 제법 떨어져있어 조용하기 그지없다.
그를 생각하고 만든 궁의 뒤에는 라인의 그 호수와 닮은 작은 호수도 있다.
피나하궁은 만든지 오년만에 그 주인을 찾은 것이다.
왕이 침실로 들어서도 후궁의 거처에 있는 사람은 침대에서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피나하궁의 시종 스렐이 놀라 뛰어가 주인을 불렀지만 스렐의 주인이자 피나하궁의 주인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크로우는 늘상 있었던 일인양 손을 저어 모두 물러나가게 한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단순히 갑작스러운 남색이라고 하기엔 이 자의 기술이 너무 미흡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뛰어난 성노라도 이 자보다 더한 만족감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만족하지 못했다.
억지로 관계를 가지면 오히려 더 기분만 나빠지고 이상하게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안지 않을수 없다.
보지 않으면 보고 싶고 보면 안고 싶고 안으면 언제나 후회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성노들처럼 함부로 손을 놀리기도 싫고 그의 목숨을 위협해봐도 그는 오히려 다행이라 반색을 하며 자신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미소까지 지었다.

대신들의 따가운 소리도 듣기 싫으니 쳐내면 간단한 것을 알면서도 크로우는 결코 이 사내를 자신의 눈 밖에 두고 싶지 않았다.

십 년을 기다렸다. 너를. 

후궁주제에 왕이 방문했는데도 엎드린 채 누워있는 유하르의 갈색머리칼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나직히 속삭였다.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하르. 널 먹이기 위해 죽어간 시종이 다섯이었지. 기억하나?"
자신의 손을 피할려는 듯 움찔거리는 유하르의 등을 부드럽게 매만지면서 밀어를 속삭이듯 그의 귀 가까이에 대고 크로우는 타협을 시작하였다.
자신과는 달리 타인의 목숨을 들었다 놓았다 해야지 그의 고집이 꺽인다는 것을 터득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 그게 겨우 이틀전의 일이지. 뭣 좀 먹으니 이젠 좀 살만하지? 쯧..이렇게 말라서야..원. 그 고운 목소리로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응? 비명이라도 질러보란 말이다. 유하르"
크로우는 천천히 유하르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였다.
매끈하고 하얀 등에 입을 맞추자 도망이라도 갈려는 듯 유하르가 침대위쪽으로 피하자 크로우는 그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벌을 내리듯 손가락으로 유하르의 뒤를 바로 꿰뚫자 낮은 신음소리가 유하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허리를 잡고 있으니 도망을 치지도 못할터이고 이틀전에서야 뭘 제대로 먹기 시작했으니 기운 또한 없을터였다.
바둥바둥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크로우는 준비된 향유에다가 손가락을 적시고는 다시 한 번 그의 뜨거운 내부를 휘저었다.
향유따위는 써본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처음 유하르를 안은 날 피범벅이 된 유하르를 보고 지시한 것이 의사를 부르는 것도 아니고 샬비에게 앞으로 피나하궁의 침실에 향유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으......윽...."
"괴롭나? 아프지? 조금 더 가면 네가 정신을 잃을정도의 고통이 온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테지. 그래도 싫어? 그래도 나와는 말하기 싫어?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멈춰달라는 말조차 나에겐 하기 싫은건가? 그런거야 유하르. 후.. 그래 해보자. 유하르 네 고집이 이기는지 내 고집이 이기는지."
그 누구보다도 아껴주고 싶었던 상대의 낮은 신음소리에 가슴이 지끈거릴 정도로 아팠지만 그보다 더한 아픔은 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였다.
그의 부모를 살해해놓고선, 그가 아끼는 시종을 그의 눈 앞에서 도륙을 했으면서도 그에게 사랑 받기를 원하는건 아니었다.

그래,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았다. 
다만 이렇게 눈에 띄일 정도로 마르지 말며 마주친 눈을 피하지 말고 마주잡은 손을 뿌리치지 말기를..
그리고 어떤 말이 될지라도 , 설사 그것이 욕이 될지라도 자신을 상대로 그 고운 입에서 단 한 마디의 말이라도 나오길 바랬을 뿐이다.

아예 상대할 가치가 없는 듯, 무생물을 보듯 그렇게 자신을 보면서 입을 꽉 다무는 유하르를 볼때마다 그를 다그치고 그가 기절을 할 정도로 매몰차게 몰아붙여도 그의 입에선 그만하라는 말이나 고통을 호소하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오랜 시간을 공들여 넓혀도 유하르의 등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한 번 관계를 가지면 오 일 이상 쉬어야했기에 오 일만에 찾아온 낯선 침입자에 몸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주인의 거부하는 마음을 알아채고 이 요망한 구멍조차 주인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울컥 치미는 분노에 크로우는 제대로 풀려지지 않은 곳으로 자신의 성기를 들이밀었다.

"아...아아...아악!!!!"
비명소리라도 좋다. 
그 소리가 나 때문에 나는 것이라면.
크로우는 자신의 성기에 묻어나오는 피를 보며 입술을 깨물고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잘게 떨리는 하얀 등에 입을 맞추고 손을 앞으로 뻗어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힘 없이 흔들리는 유하르의 성기를 잡아 흔들어주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조금 일어설듯 움찔거리는 유하르의 성기는 결국 제대로 웅트림조차 하지 않았다.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극에 움직여야하는 독립적인 감각을 가진 것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되질 않자 크로우는 그의 성기를 내팽게치고 유하르의 비명을 들으며 격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렇게 관계에 미숙한 사내를 안아보기는 처음이지만 이렇게 흥분하기는 또 처음이다.
얼마 후 축 쳐진 유하르의 몸 안에 흥분의 찌꺼기를 뱉아내자 몸은 충분히 만족을 하는데 항상 그래왔듯이 관계를 가지기 전보다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정신을  잃어버린 유하르의 몸은 안아들고는 침실 안 쪽에 준비된 욕탕에 유하르를 조심스럽게 안고서 몸을 담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뜨겁게 자신의 성기를 담았던 곳에 손가락을 넣자 무의식중에서도 그것이 싫은 듯 피하는 유하르의 허리를 잡고 그의 하얀 어깨에 입을 맞춘다.

"유하르.. 유하르.."
대답을 듣기 위해서도 아닌데 크로우는 연신 유하르의 등에 입을 맞추며 그를 불렀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고 보아도 보아도 눈을 맞추지 않는 유하르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가슴속에 불이 확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온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수 있는지 도데체 알수 없어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곧 자신을 진정시키고 자신의 화가 상대의 상처로 이어지지 않는 유일한 사람, 유하르를 깨끗하게 씻겨주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의 곁에 자신도 누워 자고 싶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다가 이렇게 오 일마다 한 번씩 흔들리고 나면 기운이 쇠해질텐데 자신이 그의 곁에 누워 잔다면 그나마의 취해야 할 수면시간조차 유하르가 거부할 것임을 알기에 크로우는 아쉬운 듯 그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일어섰다.

"샬비"
유하르를 안을때는 항상 문 밖에 대기시키던 샬비가 크로우의 부름에 대답하며 들어와 시립을 하였다. 그의 뒤를 따라 유하르의 시종 스렐이 부복을 한다.
"의사 미아흐를 불러라. 그리고 스렐이라고 했나?"

왕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자 스렐은 더 깊이 부복을 하며 왕의 부름에 대답을 하였다.
"예. 전하."
"넌 앞으로 유하르에게 어떤 일이 생기던 간에 작은 일이라도 생기면 곧장 나에게로 와서 보고 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전하."
"혹 네 보고가 늦거나 빠졌을 경우 네 가족은 물론 네 일가친척까지 해를 못 보게 할 것이다. 유하르는 네 주인이다. 네 목숨을 걸고 지켜라."
"예..전하."

크로우는 유하르의 궁을 빠져나오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샬비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검사원을 뒤져서 가장 입이 무겁고 검을 잘 쓰고 배반하지 않을 자를 구해라. 유하르의 곁에 둘 자다."
"내일까지 대령하겠습니다. 전하."

너의 무엇이 나를 잡고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 간질거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너를 보면서 버리지도 못하고 내 멋대로 안을수도 없는 너가 주는 이 갑갑증이 무엇인지 이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내버려두면 언젠가 그 해답을 알수 있을테지.
다만, 명심해라 유하르.
널 도망가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네 두 발로 이 성을 빠져나가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네 두 손으로 너의 목숨을 끊는 일도 절대 생기게 하지 않을 것이야.
네가 누구인지, 네가 나에게 어떤 단점으로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것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 넌 어디에도 못 간다.
내 눈을 벗어나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나에게 벗어날수 없음을 기억하고 거역할수 없는 나를 기억하라.
유하르.



아사 유하르 [4]




고통에 익숙해지기란 힘이 들겠지만 그래도 처음 겪는 일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낯선 고통은 유하르로 하여금 입술을 꽉 깨물게 할 정도로 힘들었다.

이틀이나 지났건만.. 

유하르를 침대에서 일어서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등까지 짜르르 하게 번져오는 고통을 신음소리 없이 참아내었다.
꼼짝도 하기 싫지만 침대에 할 일 없이 누워있는 것은 더 싫었기에 고통을 무릅쓰고 유하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곁에 다가온 스렐이 부축할려는 것을 손으로 막고 궁의 뒷 뜰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그나마 코나흐타의 왕은 손톱만한 자애심은 있는지 매일 찾아와서 괴롭히지는 않는다.
허긴 대 코나흐타의 왕이니 후궁의 수야 헤아릴수 없을터이고 기껏해야 남자후궁인데 아무리 괴롭히는 재미가 있다고는 하나 매일 들를수야 없겠지

유하르는 시니컬하게 미소를 지으며 호수가에 걸터 앉아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었다.
바닥에 앉는다고 걱정이 되어 무어라 그러는 스렐을 향해 마실 것을 달라는 손동작을 하자 자신에게 부탁을 한 유하르에게 감격을 했는지 크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웠다.

처음 자신의 거처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도 아니고 후궁의 처소라고 하길래 어이가 없었다.
본 국에서도 남자 후궁이 종종 있었기에 크게 경외스러운 일은 아니나 남자 후궁은 여자 후궁들 보다 못한 우스게감이었다.
후궁이란 자고로 아이를 낳아 자신의 입신을 세우는 자리여서 남자 후궁은 그야말로 밤 일을 위한 존재일뿐이었고 왕에게 버림받은 남자 후궁은 나중에 거친 전장으로 쫒겨나 병사들의 노리개로 전락하는게 보통이었다.
여자 후궁의 경우 왕권이 교체가 되더라도 자식이 있으니 거리로 내몰리지는 않는게 일반사이고 또 여자의 손이 많이 가는 궁이기에 후궁을 내치지는 않지만 남자 후궁은 힘도 못 쓰고 그야말로 쓰잘데가 없어 왕권이 교체되지 않아도 왕의 버림을 받으면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모욕을 주고 싶었나.. 코나흐타 왕이여.

남자 후궁이 많다고 해도 일국의 태자가 포로가 되어 후궁이 된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태자란 목을 자르고 그 피 방울 하나하나까지 추적을 해 일가친척 모두 말살하는게 적장의 관례였다.
한마디로 밀어버린 나라를 세울만한 한 톨의 여력도 남겨두지 않는 법인데 태자의 신체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거세도 하지 않은 채 후궁으로 앉혀두다니..

허긴, 이것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일테지.
똑똑해. 코나흐타 왕.
하지만 당신이 죽였잖아. 나를.
그때 내 시종을 몇 동강이나 내면서 죽였지 않나.
그런데 뭐가 또 남아서 이리도 가만두지 않는지..

푸른 호수물이 유혹을 한다.
왜 이렇게 살아있는지,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왜 숨을 쉬는지.
유하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살은 하지 않는다. 
기다려야 한다. 살아서 널 기다릴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누이. 아네. 
넌 도데체 어디에 있는 것이야. 
널 만난후에는 이 모욕을 참지 않아도 될 터이지.
모국의 소식은 들었어? 이 바람같은 녀석. 보고 싶어.. 아네.

"유하르님."
스렐이 부르는 이름에 곧장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못한 것은 그 이름이 낯설기 때문이었다.
전하나 피누알라님, 또는 가끔 브리안으로 불리워졌던게 익숙하건만 여기 코나흐타의 사람들은 그를 모두 유하르라고 불렀다.

유하르...
그때 보았던 소년이 당신일줄이야..

유하르는 스렐이 내미는 음료를 마시며 잠시 십 년전 붉은 기운이 잔뜩 서린 어린 소년을 떠올려보았다.
처음 자신을 제대로 보아준다고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외로운 궁에서 그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었는데 마치 벌을 받듯 그에 의해 나라가 망하다니. 
자신이 화근이라는 생각을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는 유하르였다.

"유하르님. 전하께서 방문하신다는 전갈입니다. 지금 오신다고 하시니 어서 궁으로..."
유하르는 눈살을 찌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도 아닌 낮 시간에 그가 찾아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다가 그런 모욕적인 관계를 가지면 꼭 오 일후에나 오건 하던 자가 벌써 오다니..
반갑지 않는 소식에 발걸음이 저절로 무거워졌지만 일전에 자신의 게으름에 시종하나가 주인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그 자리에서 참수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는 그가 온다는 전갈이면 바로 움직이게 되었다.
이미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무안에서 시종하나와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음직한 소년하나가 태자라는 너울을 쓰고 죽은바가 있었다.
그 후로 유하르는 자기 자신때문에 타인이 죽어가는 걸 다시는 보기 싫었다.

태어나 가치가 없다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종이라고, 신분이 비천하다고 죽어 마땅한 자 또한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벌써 다섯 명의 시종이 죽었다. 자신이 밥을 안 먹는다는 그 이유하나로.

유하르는 성질급하고 잔혹한 왕이 행여나 애꿎은 시종들의 목을 치지나 않을까 바삐 걸음을 옮겼다.

**


"이 자는 샤치다. 앞으로 너를 보호해줄 무관이니 항상 곁에 두도록 하여라."
유하르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왕이 말에 대답을 하였다.

"아앗"
유하르는 느닷없이 잡힌 팔의 고통에 놀라 왕을 바라보았다.
붉은 눈은 타오르듯 더 짙어 검붉었고 꽉 다운 입새는 그가 화났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대답조차 하기 싫더냐? 싫으면 싫다. 좋은면 좋다, 그 정도도 대답 못해?  샬비!!!!"
시종장이 왕의 곁에 다가오자 왕은 유하르의 팔을 놓아주며 손가락으로 유하르의 시종 스렐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저 자를 이리로 데려오라. 그리고 피나하궁의 모든 시종들을 다 데리고 와!!!!!"

스르르릉..

검집에서 검 프라가라흐가 그 위상을 드러냈다.

프라가라흐의 검 끝이 무릎을 꿇은 스렐의 턱을 향하고 있었다.
공포로 스렐의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차마 죽음의 신 앞이라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소리없는 눈물이 스렐의 뺨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비록 제대로 말조차 섞지 않았지만 자신을 성심껏 보살펴주던 자가 흘리는 눈물이 품고 있는 공포를 유하르는 볼수 있었다.

"내 오늘 기필코 너의 목소리를 듣고야 말겠다. 이 자 부터 시작하지."

잔혹한 왕은 절대로 단 칼에 휘두르지 않는다. 공포가 깃든 생물을 보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프라가라흐의 검은 주인 크로우처럼 뜨거운 검으로 유명하였다.
검이 스렐의 목에 닿기도 전에 검신이 일으키는 붉은 기운이 먼저 스렐의 목을 태우는 듯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뜨거움을 참는다고는 하나 스렐의 고통스로운 신음소리마저 죽이지 못했다.


더 이상 망설일것도 없었다.
뭐가 아까워서 목소리를 감춘다는 말인가.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더 이상 무관한 사람이 다쳐나가는 것을 이젠 두 눈으로 보기 힘들었다.

유하르는 왕의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이젠 자신은 태자란 신분도 없고 이 남자의 후궁일 뿐이다.
스스로 그렇게 세뇌를 시키며 유하르는 머리를 조아렸다.

"저..전하.. 부디 용서를.. "
한 번 모습을 드러내면 반드시 피를 본다는 전설의 명검의 화려한 검신은 검집안으로 조용히 갈무리 되었다.
왕은 드디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후궁을 일으켜세웠다.

이렇게 억지로 입을 열 요량이었으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유하르가 스스로 입을 열고 마음을 열기를 바란 것인데 결국 입을 다문 유하르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그를 재촉하고 만 자신의 조급증에 허탈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어디 도망가지도 못할 자인데 뭐가 그리 급하고 뭐가 그리 답답하였는지..
크로우는 생전 무릎이라고는 꿇어본적이 없을 것 같은 유하르가 서슴치 않고 자신앞에 머리를 조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는 이 자를 이렇게 강제적으로, 어쩔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고개를 숙이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크로우는 나름대로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이상하기도 하지. 어떻게 넌 다른 사람때문에 네 고집을 꺽는거지? 너 스스로의 고통으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안 할 것 같더니. 어찌되었던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입을 다문다면 경고로 끝나지 않는다. 대신, 더 이상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겠다. 너에게 다른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 너의 고집을 꺽는 짓은 다시 하지 않아. 그러니 넌 약속을 지켜라. 유하르."
"네..전하."

왕은 고개숙인 유하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기서 자고 싶다는 말이 입 안을 헤엄쳤지만 한 눈에봐도 자기를 어려워하고 불편한 몸이 눈에 거슬려 힘겹게 발을 돌렸다.

왕이 나가자 가볍게 숨을 내쉰 유하르는 고맙다고 인사를 거듭하는 스렐에게 다시 한 번 차를 부탁하고는 왕이 데리고 온 무사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라고 하였느냐."
"샤치입니다."
"그래, 샤치.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네. 유하르님."

유하르는 말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한 갑갑증을 느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왕이 다시 피나하궁으로 찾아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보통의 경우 왕이 후궁전을 찾을때 기별을 해 준비를 하게 하는게 보통이건만 현 왕은 유독 피나하궁의 후궁에게 찾아갈때는 기별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다행히 잠을 자지 않고 있던 스렐과 샤치가 그를 맞이했다.

샬비와 스루드라는 무관(유하르의 단검을 본 브란의 격렬한 주장에 의해 왕의 보호를 책임지는 무관이 왕을 따르고 있었다)만을 대동한 왕은 스렐이 유하르를 깨우기 위해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깨우지 말거라."
"하..하지만 전하."
"잠시..잠시 보러 온 것 뿐이니 깨우지 말거라."

왕이 방문을 했는데도 잠들어 있는 후궁이란 있을수 없다고 생각한 스렐이 왕의 명령이기에 어찌하지는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을 샬비가 보면서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
충직한 시종 스렐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작게 충고해주었다.

왕은 후궁의 침실에 들어가고도 침대에 앉지도 않고 서서 가만히 후궁을 내려다보기만 하고 깨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깰까봐 조심스러운 손동작으로 후궁의 뺨을 쓰다듬으니 후궁이 잠결에 뒤척이자 놀라 손마저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왕은 후궁의 얼굴을 내려보기만 하였다.

왕의 태도를 도통 이해할수가 없는 스렐이 후궁의 본분을 잊은 자신의 주인과 하늘의 뜻과 같은 왕의 명령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왕은 어느새 스렐의 앞에 섰다.
부복을 할려고 하자 누군가 부복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어렵게 고개를 드니 샬비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오늘 뭐하고 지냈느냐?"
누구에 대한 물음인지 금방 알아챈 스렐은 머리를 조아려 자신의 주인의 하루를 읊기 시작했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셔서 가벼운 식사를 하신 후 뒷 뜰로 가셨습니다."
"혼자 일어섰단 말이냐?"
"네. 부축해드릴려는 것도 만류하시고는 힘드신 걸음으로 천천히 혼자 걸으셨습니다."
"후후..고집스러운 녀석. 시종의 도움을 그때 안 받고 뭐하러 그리 어려운 길을 가는건지 원. 그리고는?"
"차를 한 잔 달라고 하시길래 잘 드시는 쥬스를 한 잔 드렸습니다."
"쥬스라..어떤 걸 즐기지?"
"모린다 쥬스입니다."
"호.. 그래? 모린다 쥬스를 즐겨마신다고? 혹 필요한 과일이 더 필요하면 지체말고 요청을 하여야 한다. 내 미리 통보를 해놓을터이니. 네 주인이 먹는 것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호숫가에 오래 머물렀더냐?"
"네. 전하께서 부르시기 전까지 호수에 발을 담그고 계셨습니다."
"발을?? 쯧.. 아직 물이 차가울텐데.. 행여 기침이라도 하지 않게 살펴라. "
"네. 전하."
"혹, 오늘 하프나 노래부르는건 보지 못했느냐?"
"네."
"....알았다. 너의 주인에겐 내가 왔더란 말은 하지 말거라."
"네 전하."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의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말을 해야한다. "
"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어리둥절해있는 스렐과 샤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샬비는 왕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호수는 마음에 들었나보군.. 이라고 중얼거리는 왕의 말을 못 들은 척 샬비는 스렐과 마찬가지로 아직 왕이 피나하의 후궁에게 대하는 태도에 익숙하지 않은지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스루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도 처음엔 이들처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깐.





아사 유하르 [5]




사람의 욕심이란 한도 끝도 없는 법인가..
크로우는 자신의 욕심에 어이가 없었다.

처음엔 그저 마주 잡은 손이나 뿌리치지 말기를 바랬다.
말이라도 해주기를, 그 맑고 푸른 눈을 볼수만 있다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유하르의 성기를 끊임없이 희롱하면서 크로우는 자신의 태도에 놀라 허우적 거리던 손이 이제는 참을수 없는 쾌감에 침대 시트를 움켜쥐는 유하르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쾌감에 부르르 떠는 유하르를 지켜본 자신의 성기가 해소하고픈 욕망에 불끈 거리지만 뭐, 까짓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그렇게 단아하고 맑던 사람이 욕망에 흐트려져 증오도 아닌 무관심하게 식은 눈동자도 아닌 열망으로 흐트러진 푸른 눈동자를 볼수만 있다면 자신의 욕구즘은 한 번 참을수 있었다.
여태 그 어느 누구와 관계를 맺더라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대의 쾌감을 그 상대가 유하르가 되니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손가락으로는 연신 유하르의 뒤쪽을 공략하고 남은 한 손으로는 유하르의 옆구리를 쓸고 입으로는 그의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혀로 그 세워진 기둥을 쓰니 바르르 그의 허벅지가 떨려왔다.

"하...하읏.. 으...."
처음엔 그리 어색해하며 내뱉는 신음소리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낼수 있기 까지 무려 석 달이나 걸렸다.
석 달전에는 그의 신음소리에 크로우가 맛이 가 그를 험하게 몰았지만 석 달즘 되니 이제 그의 신음소리도 제법 참을만 했다.
물론 방금 전 그의 것을 같이 맞잡고 자신의 욕망을 한 번 해소했기에 참을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제...제발... 저..전하.."
애타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그의말을 무시하기란 참으로 힘든다.
하지만 오늘 크로우로선 목표가 있으니 꾹 참으며 분출할려는 그의 요도끝을 막자 유하르가 몸부림을 친다.
눈물방울이 맺혀 곧 떨어질듯 물기어린 푸른 눈이 자신에게 애원을 하자 크로우는 결국 유하르의 눈을 뒤처리를 위해 곁에 가져다 둔 수건으로 덮어버렸다.
그런 눈은 도무지 참을수 없기 때문이다.
눈이 가려졌다고 해도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달삭거렸고 이미 한 번 해결했다고는 하나 이렇게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유하르를 앞에두고선 그 횟수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참기 힘들지? 쏟아내고 싶지.유하르. 그럼 말해라. 말해보라고. 크로우..라고 크로우라고 불러. 이름을 불러. 그럼 풀어주마. 그럼.."
언제나 그랬지만 유하르는 크루우에겐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였다.

결국 해결하지 못하는 갈증에 유하르가 몸을 비틀며 우연히 그의 발가락이 크로우의 중심을 스쳐지나가버리자 크로우는 그만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풀려버린 손에 유하르의 정액이 크로우의 배를 적시었고 그와 동시에 크로우의 성기가 유하르의 뒤를 꿰뚫었다.

"유하르..유하르...."
"하...하흣.... 으으읏...."
질척거리는 마찰음과 자신이 안고 있는 자를 끊임없이 부르는 크로우의 목소리와 몰아붙이는 크로우에 의해 신음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유하르의 낮은 목소리만이 피나하궁의 침실을 메우고 있다.

오랜 시간이 걸려버린 정사 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하르를 씻기기 위해 들어선 욕탕에서 가볍게(?) 마지막 관계를 가지고 크로우가 유하르를 침대에 눕혔을때 유하르는 그답지 않게 녹초가 되어있었다.
젖은 머리칼과 지나친 정사로 지친 유하르의 시선은 노곤하게 내려있었고 그런 유하르를 크로우는 곁에 누워 가만히 안아주었다.

이제서야 느끼기 시작한 유하르가 사랑스러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이 사람에 대해선 욕심이 끝도 없었다.
처음엔 그저 호감으로 시작한 감정이 십 년동안 삭히긴 커녕 눈두덩이처럼 불어나더니 다시 만나고 나니 이젠 자신을 잡아먹을만큼 커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처음엔 적대감만을 나타내며 음식도 거부하고 말도 거부하던 이가 이젠 잠자리에서마저 이렇게 녹아드니 크로우의 눈엔 유하르가 자신의 몸을 넘어선 하나의 우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달 그 애틋한 감정을 말하고 말았다.
'사랑한다'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마치 희안한 동물을 보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유하르의 맑은 눈을 보며 어이없게도 크로우는 부끄러워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관계가 끝나고 난 다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었고 호흡마저 가빠져왔었다.
말을 뱉으니 정리가 된 기분이었다.
사랑한다, 라는 말이 그렇게 무겁고 어려운 말인줄 새삼 깨달은 크로우는 말이 언령이 되었는 양 그전보다 더 유하르가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사랑한다고 백 번, 천 번이라고 말할수 있는데 그 고백을 받은 유하르는 처음에만 그렇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 그 다음엔 반응이 거의 없었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마치 아무런 말도 못 들었는 양 알았다, 라는 대꾸조차 없는 유하르를 보니 가슴이 저절로 지끈 아파왔다.


크로우는 유하르를 마주 안아 머리칼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나의 유하르. 넌 언제쯤이면 나에게 온전히 너를 맡길테냐? 응?"
"지금 이렇게 맡기고 있지 않습니까."
"쯧. 또. 둘이 있을 땐 전처럼 존대를 하지 말라고 했지 않아. 이름을 불러달라고도 하지 않을테니 침대에서까지 존대는 하지 마라. 침대 밖에선 종종 말을 편하게 하면서 어찌 침대에선 그리 야박하게 존대를 하는 것이야. 날 놀리는 거냐?"
"어찌..제가 감히 전하께.."
"됐다. 됐어. 내가 뭘 바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되겠지? 응? 어젠 그냥 갔으니...응? 유하르.."
"내일 아침에 그냥 간다면 허락하지."
"으흠..유하르. 대신 한 번만 할께. 응? 내 두 번도 안 바래. 응?"

이자가 죽음의 신이라고? 유하르는 그의 별명답지 않는 응석에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선택하시겠습니까? 전하.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전하가 원하시는대로, 그것이 두 번이 되었던 세 번이 되었던 허락하겠습니다."

붉은 눈이 반짝거리며 유하르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은 찢어질 듯 벌려진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대신, 다시는 저의 침대에서 주무시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
"이봐. 유하르!!!!"
"아니면 내일 아침에 고이 가시던지요. 그럼 언제든지 이 침대는 전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젠장. 아침은 힘들다고. 널 안고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 그냥 지나칠수가 있냐 말이야. "

투덜거리는 그의 소리를 자장가삼아 유하르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일어서지 않는 모양을 봐서는 잘 모양인데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또 실갱이를 벌릴 것을 생각하니 매몰차게 내쫓을 걸 그랬나..라는 생각마저 드는 유하르였다.



그래, 어차피 닳지도 않을 것. 
하면 할수록 더 빨리 질리겠지
왕에게 질려 버림을 받으면 잃어버린 누이동생 아네를 찾으러 떠날 것이다.
행여 거친 사내들에게 먹이로 던져주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네고 뭐고간에 질긴 목숨 쉬이 끊을수 있을터다.
어차피 질리면 버려질테고 이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가 없음을 깨닫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관계도 가지고 그가 원하는 대로 몸도 긴장도 푸니 쾌감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욕망을 풀 곳이 없는 사람도 아니니 당분간은 다른 나라의 태자란 사람을 아래에 깐 정복력에 물들테지만 곧 그것도 기한을 다 할 것이다.
끝이 없는 것은 없으니깐.
하물며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사랑쯤이야 쉬이 질려버릴터이다.
사람이란 자고로 쉽게 손에 넣어지는 것보단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끌리게 되어있으니.
왕이여, 그때 부디 나를 자유롭게나 해 줘.
잃어버린 내 누이나 찾으러가게.




"널 사랑한다. 유하르.."
잠들무렵이면 어김없이 고백하는 왕의 목소리가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짓으로 사탕발린 달콤한 말을 뱉을 필요가 전혀 없는 왕의 말은 분명 진심일터이다.
다만 그 기간을 믿을수 없다.
어느 후궁에게도 다 말했을 그 고백을 믿는 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가 누구인가. 대 코나흐타제국의 왕이 아닌가. 
무안마저 귀속시킨 코나흐타제국은 에린땅의 오른편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
오대강국이 아닌 사대강국이 되어버린 나머지 나라는 울라와 미, 라인뿐인데 땅덩어리조차 작은데다가 코나흐타만큼 호전적인 나라는 없으니 가히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다고 봐도 손색이 없는 나라의 왕이다.
그런 그가 사랑의 영원성을 말한다? 아무도 믿지 못할 말이다.

믿지도 않을 뿐더러 믿기도 싫다.
믿었을 때 버림 받는 다는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잘 아는 탓이다.
믿었던 만큼 기대를 했던 만큼 버려졌을 때, 넌 가치가 없다고, 네 존재는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말을 다시 믿고 있는 자에게 듣는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기분 나쁜 생각에 유하르는 지금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남자의 품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생각을 아는 듯 꼭 안아주는 남자의 강한 팔 안에 유하르는 잠시 기대어 쉬었다.
비록 언젠가 떠날 휴식처이지만 이제는 안기기로 했다.
믿지 않으면 된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된다. 그에게 기대고픈 마음이 들어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된다. 그의 말이 진심으로 와 닿아도.



"어떻게 하면 넌 날 믿어주지? 유하르. 어떻게 하면 너의 모든 것을 난 가질수가 있지?"
"더 이상 줄 것도 없는데 뭘 바라는거야?"
"아니, 아직 덜 가졌다. 몸은 가졌지만 마음은 다 못 가졌어. 어떻게 하면 너의 마음까지 가질수 있는거야? 응? 유하르"
"날 아스(신)로 섬기면 생각해보지."
"뭐??"

기가막힌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로우의 시선을 느꼈지만 유하르는 내일 당장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휴식처에 몸을 떼지 않았다.

"맙소사. 아스라니.. 아스라니.. 허참.."

욕심 많은 후궁이 요구하는 것이 기껏해야 자식을 가질수 있게 해달라거나 아니면 목을 내놓고 말을 해본들 왕비자리를 말하는 것 정도인데 아스라니, 크로우는 유하르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어느 후궁이 자식운운을 해서 그 자리에서 목을 쳤던 때와는 달리 전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당당한 요구가 마음에 들었다.

"코나흐타에선 어떠한 신도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이라고는 오직 왕 뿐이지. 알고 하는 말이겠지? 맹랑한 유하르?"
"설마 내가 당신에게 날 아스로 섬겨달라고 말하는거겠어? 어림도 없는 소리. 말이 그렇다는 거지."
"참내. 이거 어렵군. 내가 주는 사랑으로는 부족해? "
"아스처럼은 아니잖아. 날 나로 믿어주는 사람.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을 원한다는 말이야"
"난 널 믿고 널 필요로 해 유하르. 설마 그걸 여태 몰랐다는거야?"
"아니, 그정도가 아니야. 말했잖아. 아스라고. 날 아스처럼 믿고 따르는 자를 원한다는 거야. 내 말을 아스의 말인양 무조건 믿어주고 날 언제든지 떠올리며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나를 불러주는 ..그런 사람...단 하나의 유일한 존재. 아아..물론 내 희망사항이라는거지 전하와는 상관없는 말이야."
"이야.. 알고보니 대단한 욕심쟁이군 그래? 넌 무안에서 태자로 충분히 사랑을 받았을텐데 왜 그렇게 사람의 관심을 하나도 못 받은 사람처럼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 넌 태자였잖아."

유하르는 대답을 피해 크로우의 가슴을 더 파고들었다.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유하르를 꼭 안아주며 크로우도 서서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크로우는 잠결이지만 낮은 유하르의 중얼거림을 들을수 있었다.

"처음부터.....태자는 아니었어."




아사 유하르 [6]


아이를 발견한 곳은 자신의 거처인 피나하궁의 호수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따라나서는 샤치를 겨우 떼어놓고 산책삼아 유유자적 걷다가 발견한 6살즘 되어보이는 작은 소년이었다.
넓은 성인데다가 자신의 궁 외엔 거의 걸음을 하지 않는 유하르였기에 아이는 이 코나흐타에 들어서고는 처음 보았다.
머리를 무릎에 묻고 훌쩍이는 아이에게 가까이가니 그제서야 자신을 발견한 아이는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이런..미안하구나.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누..누구??"

신분도 없고 직책도 없으니 이름을 대는 수 밖에 없었다. 
유하르는 어린 나이지만 옷차림으로 봐서 왕족의 아이라 여기며 공손히 대답해주었다.

"유하르"
이젠 이 이름을 대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의 모습이 우습지만 아이는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 작고 동그란 눈망울이 커진다.
"유..유하르???"
"응??"
"그..남자 후궁 유하르??"

역시나.. 없지는 않으나 흔하지는 않는 것이 남자후궁이기에 소문이 났나보다 싶어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유하르는 내색없이 어린 소년과 마주 볼수 있도록 두 무릎을 굽혔다
아직 어린 소년에게 왕이란 존재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않고 아무나 안을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왜 울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머리를 쓰다듬자 흠찟 아이가 놀라는 것 같아 급히 손을 거두며 조용하게 물었다.

"왜.. 울고 있었니?"
"아..안 울었어!!!"

남자 아이는 울면 안된다고 배운 모양이다.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아이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려는 듯 앙팡지게 말했지만 그러면서도 울었던 이유가 생각이 났는지 놀라서 숨어들어갔던 물방울이 금새 눈가에 맺히고 말았다.
유하르는 아이가 멈칫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처음엔 버둥거리던 아이가 차츰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이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주었다.

아이들은 작은 것에 상처를 받고 작은 것에 위로를 받는다.
비록 상종하기 싫은 남자 후궁이라 할지라도 안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유하르는 아이를 오래도록 안아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네 편이 되어줄거라고. 울지 말라고 속으로 계속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가 밀어낼때까지.

유하르의 품에서 벗어난 아이의 작고 귀여운 얼굴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아마 이렇게 안아준 사람이 없어서 낯설을 것이다.
그것 역시 유하르는 알수 있었다.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하였으니..

"어째서.. 안아준거지?"
"넌 위로가 필요했으니깐"
"하지만 당신은 유하르잖아."
"그게 왜? 설마 유하르가 안아주면 안된다고 배운거니?"
"그건 아니지만.. 아주 못된 사람이라고, 남자를 홀리고 다니는 꼬리 달린 여우라고.."
"후훗. 그래서 만나보니 어때?"

붉어진 작은 얼굴이 땅을 바라본다. 
아마 자신이 알고 있던 것에 혼돈이 와 말하기 곤란한 것 같아 유하르는 아이의 허리를 잡고 근처 바위에 올려주었다.
혼자서는 못 올라갈 큰 바위에 자신이 앉혀지자 아이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왜....왜 그래? 내........내려줘!!!!"
"무서워??"
"나 혼자 못 내려간단 말이야. 내려줘!!!"
"바보. 내려올 때 당연히 내가 안아줄껀데 뭘 그런 걱정까지 해?"
"나 여기에 두고 혼자 두는거..아니야?"
"내가 왜? 내가 쪼그리고 앉으니 다리가 저린단 말이야. 여기에 올려놓으니 내가 쪼그리지 않아도 눈을 맞출수가 있잖아. 그래서 올렸어. 이야기 끝나면 내려놓을테니 걱정하지마."
"에에.. 왜 눈을 맞춰?"
"눈을 맞추고 이야기 하면 거짓말하는 안 하는지 알수 있거든. 자. 꼬마. 예의란게 뭔지 배웠겠지? 내 이름을 소개해주었으면 답이 있어야지. 안그래?? 이름이 뭐야?"

어른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보이는 아이는 머뭇거리며 시선을 어색하게 맞추었다.

작은 키로 아버지와 눈을 맞추기위해 발버둥을 쳤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이름을 불러주며 눈을 맞추었더라면.. 아버지의 소원대로 무안의 걸맞는 태자로 성장했을 것이다.
아니면 말동무라도 될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또 자신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린 모습을 훔쳐보던 유하르는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미 시간이 흘러버린 과거에 집착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이 아이에게라도 그런 상처를 안 줄수 있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대리만족이라도 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잘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테..오르"
"호우. 멋진 이름인걸. 반가워 테오르"
"으응.."
"그런데 왜 울고 있었어?"

테오르의 인상이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부드럽게 풀렸던 얼굴이 금새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이의 시선이 자신의 다리로 가자 유하르는 아이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겨우 6살난 아이의 다리는 피로 얼룩져 엉망이 되어있었다.
도대체 회초리로 얼마나 때려야 이렇게 너덜너덜해질수 있는지 유하르는 섣부른 위로는 생략하고 곧 자신의 하늘거리는 겉 옷을 벗어 찢었다.
가까운 분수의 물을 묻혀 아이의 상처를 닦아 주었다.
해줄수 없는 것이 그것 뿐이었다.

"약을 구해줄까?"
도리도리 고개를 젖는 아이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유하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누구니? 널 이렇게 한 사람은. 왜 맞은거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유하르는 진심으로 상처를 받았는 양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그래. 난 그 쓰잘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후궁이지. 잠시 잊었네 . 그래,  남자후궁한테 말 안 해도 되.."
"아니. 말할께. 어머니가 그랬어."
"어머니가? 왜?"
"아..역..사 공부를 내가 안 했거든."

애정을 준 적은 없지만 매를 맞은 적도 없었다. 
어떨땐 차라리 매를 맞는게 더 애정이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애정이 아니라 증오에 가까운 매질인것 같았다.
공부때문에 어린 아들을 이토록 걷지도 못하게 때리는 어머니를 상상할수가 없는 유하르는 아직 가늘게 실핏선을 그리는 작은 다리를 보듬어주었다.
매끄러워야할 아이의 다리는 울퉁불퉁하게 부어있었고 손이 스칠때마다 아이는 따가운지 이마를 찌부렸다.
자신의 안색을 살피고는 바로 손을 떼는 유하르를 보면서 테오르의 다물어졌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내가 싫다고 했어. 내가 뛰어나질 못해서 아버지한테 어머니마저 버림을 받았다고. 그래서 어머니가 내주시는 시험을 틀리면 항상 이렇게 맞아. 잘..참았는데.. 흐...흑..잘 참았는데..오늘은.. 폴라가 보고 있었단 말이야. 흐흑.."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유하르는 바위위로 올라가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폴라? 누구니?"
"으응. 어머니 시녀의 딸인데 엄청 귀여워."
아이는 금새 환해진 얼굴로 이야기하다가 또 금방 눈물을 떨구었다.
"폴라가 어머니 보고 무서워서 울고 말았어. 참을수 있었는데..폴라가 우는 걸보니..흐흐..으아앙~~"

참듯 울먹이던 아이가 드디어 울음을 터트리자 아이의 몸을 자신의 가슴으로 당겨 꼭 안아주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한다. 참으면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자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위로하듯 유하르는 낮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자신이 할수 있는 노래가 더 나을 것이다.

내 귀여운 여동생 아네는 말이야 내가 너처럼 정원의 구석에서 이렇게 울고 있으면 언제나 이 노래를 불러주었어.
힘내렴. 테오르.
나에게 이네가 있었듯이 너에겐 내가 있어줄테니
힘내렴. 테오르.
아네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지만 너에겐 내가 있어줄수 있을 만큼 있어줄께.
약속. 테오르.


유하르의 가느다란 미성의 목소리는 테오르를 놀라게 하였다.
수많은 연회에서 가인들을 그토록 많이 만나봤지만 유하르만큼이나 노래를 잘 부르는 가인은 못 만났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연하면서도 위로하는 듯한 유하르의 다정한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눈을 감으면 금방 잠이라도 잘수 있을 듯 토닥거리며 속삭이는 유하르의 미성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여태 어른 그 누군가에게도 진심어린 위로를 받은 적이 없던 테오르는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이 소문의 남자 후궁 유하르가 너무 좋아서 그를 꼭 껴안았다.

"테오르.."
노래를 마친 유하르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데 테오르는 꼭 껴안은 테오르의 등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껴안은 상대의 심장의 박동을 처음 느껴본 테오르로서는 사람의 체온이 가져다주는 따뜻한 안도감이 생소하기만 하였다.

"유하르....."
"힘든 일이 있으면 여기로 와. 테오르. 우리 여기서 만나자. 응?"
그제서야 유하르의 품에서 벗어난 테오르는 벌써 어둑해질려는 주위를 살피고는 유하르에게 약속을 다시 한 번 새겼다.

"정말이지? 다시 여기로 올꺼지? 응? "
"그럼. 테오르 자..약속."
"엉??"
"자..이렇게 새끼 손가락을 거는거야. 약속이란 말이지. "
"아... 응. 나 내일 올 때 폴라 데리고 와도 되지? 응??"
"물론, 테오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물론이지."
"아..조..좋아하는..건..아니고..저기..그냥.."
"후훗.. 내일 이 시간즘에 봐. 자. 다시 해봐. 여기 약속~"

테오르의 작은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에 걸리는 것을 보며 유하르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유하르가 테오르의 엄마 모리안을 보게 된 것은 불과 열 흘도 걸리지 않았다.




아사 유하르 [7]




매일 두어 시간정도 스렐과 샤치를 떼놓는 일은 간단했다.
호수가에서 목욕을 한다고 말하면 두 사람 다 놀라 가까이 오지 않았다.
부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르고 급한 일이 있어도 다가오지는 못하는 것이다.
다른 후궁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나 자신의 경우에 관계를 가진 후 뒤처리마저 왕이 직접 하였다.
그때문인지 왕이 아껴 후궁의 시종에게조차 씻는 것을 돕지 않게하니 왕의 심기를 헤아려 스렐과 샤치가 조심하는 것 같았다.

그걸 빌미삼아 유하르는 매일 테오르와 폴라와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물론 멀리 나가지는 못하지만 다닐수 있는 곳을 몰래 다니며 같이 소꼽놀이도 하고 흙장난도 치고 분수에서 놀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끔이긴 하지만 테오르의 끈질긴 요구에 몇 번 노래도 불러주었다.
알고보니 그들이 만나는 곳은 선대의 옛 후궁의 터였는데 쓸 사람이 없어 방치해둔 곳이어서 제법 놀만한 공간도 많았다.
테오르는 정확하게 7살난 크로우의 아들이었고 폴라는 테오르의 엄마 모리안의 시녀의 딸로 6살난 귀여운 소녀였다.
테오르가 폴라가 춤을 추는게 가장 이쁘다고 해서 폴라에게 춤을 춰보라고 했더니 무희못지 않게 춤을 추는게 아닌가.
어린 나이에 어디서 그런 춤을 배웠는지 어이가 없는 유하르였지만 폴라의 춤은 확실히 귀여웠다.
마지막에 크게 포물선을 그으며 박수를 유도하는 모습을 보며 유하르를 크게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유하르는 불안하게 바위에 걸터앉았다가 분수대위에 앉았다가 하면서 잠시도 가만히 서 있지를 못했다.
테오르가 오지 않았다. 폴라도 역시.
거의 열 흘 가까운 시간동안 한 번도 늦게 나온 적이 없던 아이들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까 불안으로 초조해하고 있을 때 유하르는 테오르의 울먹이며 뛰어오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유하르......으으으앙...유하르.....유하르,...어떻게..어떻게..아아아아앙"
이제 우는 법을 배운 아이의 울음소리는 폐궁에 크게 울려퍼졌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테오르. 폴라는? 폴라는? "
"으아앙.. 폴라..죽으면 어떻게.. 유하르...어떻게..어떻게 해~"

아이를 겨우 달래서 자초지정을 들으니 아침에 모리안의 시중을 들던 폴라의 어머니가 잘못을 해 모리안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것을 보고 폴라가 뛰어들었다가 화가 치민 모리안으로부터 모질게 맞았다는 것이다.
시종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폴라를 데리고 왔지만 시종에겐 의사를 붙여줄수가 없기에 폴라는 의식불명인채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유하르는 피나하궁으로 뛰어가 스렐에게 의사를 모리안 시종방으로 보내라고 지시하고는 곧장 테오르와 함께 모리안의 시종들이 거처하는 곳을 뛰어갔다.

허겁지겁 뒤따라오던 샤치가 어디로 가냐고 물었지만 테오르를 앞장세워 대답할 정신이 없이 뛰어가던 유하르는 모리안의 시종들이 모인 방에 들어서고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의 등장에 놀라 주춤 물러서는 시종들 사이를 헤집고 나아가니 낡은 침대에 정신을 잃고 누운 폴라가 보였다.
폴라의 모습을 보자마자 테오르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고 시종들은 말로만 듣던 낯선 후궁의 모습에 놀라 아무도 입을 떼지 못하였다.
샤치가 뒤따르며 유하르님이라 고하니 그제서야 시종들은 부복을 하였다.

겨우 여섯 살 난 아이의 등은 채찍에 못 이겨 옷이 다 헤어질 정도였고 등에는 연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때릴 곳이 없을 것 같은 아이의 자그마한 등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살갗이 다 일어나 보는 것만으로 쓰라려 유하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모리안에게 달려가 자초지정을 따지고 싶긴 하나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님을 알기에 인내로 참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속해있는 시종을 죽이더라도 다른 사람이 제재를 가할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유하르는 모리안에게 폴라를 자신에게 달라고 할 참이었다.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안 일어나리라는 법은 없으니깐.

곁에 있는 수건으로 폴라의 등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니 한 시녀가 다가와 부복을 하였다.

"유하르님.. 손이 더렵혀집니다. 저희가 살피겠으니..."
"더러워진 손은 씻으면 그만이다. 허나 아이의 이 상처는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은 아이가 무얼 그리 잘못했나?"
"모리안님이 폴라의 어미를 치는 것을 보고는 달려들어서...모리안님께서 더 .."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우가 그르다해도 아랫사람들이 보는데서 위의 사람을 흉볼수는 없는지라 유하르는 입을 다물고 샤치를 불렀다.
"샤치. 의사는. 의사는 어찌 되었어!!!!"
"저기 옵니다. 유하르님"

의사라고는 왕의 명령에 의해 피나하궁을 드나들던 미아흐만 보았던 유하르로서는 처음 보는 중년의 의사였다.
후궁의 부름에 거역은 하지 못하고 달려오긴 했지만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한 의사의 얼굴을 알면서도 유하르는 의사에게 아이의 치료를 부탁했다.
"이리로. 이 아이의 상처가 심하다. 이 아이를 살펴라."
"아..저..유하르님.."

한시라도 바쁜데 더딘 의사의 행동에 유하르는 그답지 않게 호통을 쳤다.
"뭐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아이를 치료하라는데도!!!!!"
"하..하지만.. 시종은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뭐??"
"그리고..외람되지만 모리안님의 시종이 아닙니까. 모리안님이 처벌을 하신거에 대해 허락도 없이 치료를 했다간 제가.."

유하르는 일어서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샤치를 비롯한 시종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쉬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하르는 낮고 단호하게 말을 뱉아내었다

"들어라. 의사"
왕비가 아닌 후궁의 존재는 미미하기 그지없고 그의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어서야 큰 소리를 낼수 있었던 후궁들의 모습만 보아왔던 시종들과 의사는 유하르의 과격한 몸놀림에 놀라고 말았다.
왕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으나 낮은 목소리로 의사에게 그 부당함을 말하는 유하르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시종을 치료할수 있으니 없으니 말하지 마라. 내가 치료하라면 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여기 왔을때 저 아이가 눈을 뜨지 못한다면 너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야. 만약 치료를 하지 않을시엔 내 설령 내 목숨이 위험할지라도 너를 죽이고 말리라. 의사가 된 자가 환자의 신분을 가리는 너 따위에게 이 귀한 아이를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여기 있는 자 중에 이 아이를 치료할수 있는 자는 너 뿐이니 너에게 맡긴다. 명심해라. 의사. 내가 돌아올때까지 이 아이는 눈을 떠야한다. 알겠나?"

유하르의 말을 옹호하듯 샤치가 유하르의 뒤에서 살짝 비켜나와 의사를 보며 검의 호수(護手;검의 손잡이부분과 검신의 사이에 있는)를 살짝 들어보였다. 의사가 유하르의 말에 긴장을 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검의 날카로움을 흘낏 보는 것을 보고서야 샤치는 뒤로 물러섰다.
의사를 단번에 들어올리는 것이나 멱살을 틀어쥔 손 모양을 보면 역시 무안의 태자라는 소문이 헛 소문은 아님을 알수있었다.
정적인 것을 좋아하긴 하나 가끔 왕과 함께 활을 쏘기도 하고 대련을 하곤 했으니 보통 남자의 힘은 할 것이나 어쩐지 후궁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약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도 사내임을 샤치는 새삼 깨달았다.

의사를 내팽게치듯 바닥에 던져놓고 유하르는 샤치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리안님의 거처로 간다. 안내해라"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샤치는 걱정스럽게 유하르를 바라보았지만 뜻을 굽힐 의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전에 모리안이 피나하를 방문하였을 때 왕의 허락없이 그 누구의 방문을 거절하라는 엄명이 있어 모리안을 문 앞에서 내친적이 있었다.
돌아서며 이를 갈던 모리안을 기억하는 샤치로서는 자신의 주인과 만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주인의 명이니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스렐은 대전앞에 다다랐다.
"아니, 너는 피나하궁의 스렐이 아니냐?"
샬비와 스루드가 반기자 스렐은 어쩔줄 몰라 허둥대었다.

"샬비님. 전하께서는..."
"아..지금 대신들과 말씀중이시지. 이제 막 시작하였으니 아마 두어시간은 더 걸릴터이다. 어쩐일이냐? 설마 유하르님께 무슨 변고가 생긴건 아니겠지?"
"네.그건 아니옵고..."
"그럼 왜 온게야. 유하르님을 곁에 모시고 보필해야하는 네가.."

말은 꺼내야할지 말아야할지 스렐은 혼돈이 되었다.
크루아흐전하는 당연히 어려웠지만 눈 앞에 있는 시종장 샬비또한 스렐으로서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각 궁마다 있는 시종들은 많게는 50여명부터 작게는 5명정도가 있는데 그 수많은 궁에 있는 시종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시종장이다.
시종들의 목숨을 건드릴수 있는 사람은 그 궁의 주인과 또 다른 사람이 있다면 바로 시종장인 것이다.

유하르의 시종이 안되었다면 결코 마주보고 말도 제대로 못 꺼낼 장 앞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을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유하르님의 일을 모두 보고하라고 한 것이 얼마만큼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 스렐으로서는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보통 후궁의 경우에야 당연히 사소한 일은 보고하지 않으나 상대가 유하르였기에 스렐은 더 헷갈리는 것이다.
스렐의 갈등을 아는지 샬비는 그에게 다가와 다시 한 번 대답을 재촉하였다.

"유하르님께 무슨 일이 생긴거냐?"
"저기..그게 아니옵고.."
"일단 말해보거라. 스렐"
"큰..일은 아닌것 같지만..그래도 전하의 어명이 계셨기에.. 유하르님께 가기전에 일단 보고를 드릴려고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잘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잠시 호수로 나가셨던 유하르님께서 갑자기 궁으로 돌아오셔서는 의사를 모리안님의 시종처소로 보내라고 말씀하시고는 급히 달려나가셨습니다. 일단 의사를 보내놓고서는 모리안님과 안면이 없으신 유하르님이라 생각이 들어 이상해서.. 대전으로 오는 길입니다. 제가..너무 사소한 일로.. 샬비님을 귀찮게 해드리는건 아닌지..."
"흐음.."

샬비 역시 이 일로 회의를 끊어야 하나 아니면 잠시 뒤에 보고를 올려야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샬비님. 모리안님의 시종 가운에 아는 시종이 있어 유하르님께서 그리 조취를 취하신게 아닐까요?"
스루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샬비는 결정을 내린 듯 대전의 문으로 향했다.

"샬비님..설마 지금 고하시게요??"
"스렐."
"네. 샬비님"
"이 일의 경중은 전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오늘 잘 왔다. 설사 별 일이 아닌 것이 된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너에게 회의를 중단하게 한 책임을 묻지는 않으실게다. 지나치다고 생각하시면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한 마디쯤은 하실수 있겠지. 하지만 스렐. 만약 오늘 네 보고가 늦어져 만의 하나 유하르님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넌 죽은 목숨이야. 전하께서 당부하고 또 당부하셨던 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알겠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샬비님"



"전하"
샬비의 부름에 대신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크로우가 고개를 들고 샬비를 바라보았다.
"회의중임을 모르지 않을터, 그래 무슨 일이냐."
"피나하궁에서 전갈이 왔기에 무례임을 알면서 들어섰나이다."
"뭐? 피나하?"

크로우는 샬비의 뒤에서 부복하고 있는 스렐을 보며 이맛살을 찌부렸다.

"가까이 들라."
대신들이 가볍게 웅성거리는 것을 알면서도 크로우는 샬비를 가까이로 불렀다.
대신들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로우의 곁에 다가서자 샬비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들은 그대로 왕에게 말을 전했다.

그리고 곧 샬비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수 있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다.

"전하. 무슨 일이..."
"뒷수습해. 브란. 내일로 모든 일정을 미룬다."
"저..전하!!!"
느닷없는 왕의 말에 태대신 브란과 어이없어하는 대신들의 목소리를 뒤로한채 크로우는 대전을 빠져나와 모리안의 거처로 걸음을 옮기었다.




아사 유하르 [8]


모리안의 거처는 피나하보다 배는 넓어보였다.
화려한 카펫으로 바닥을 깔았고 높은 등 또한 그 모양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곳곳에 벽을 거울로 도배를 해 방이 더 넓게 보였다.
커다란 탁자위엔 꽃이 무성하게 꼽혀있었고 짙은 사향냄새가 온 방을 가득채우고 있어 유하르의 머리를 아프게 하였다.
그리고 폴라의 어머니인듯 폴라와 닮은 얼굴의 시녀가 시립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은 맞았는지 퉁퉁 부어있었다.


"호라~ 이렇게 귀한 분을 보게 될 줄이야. 유하르라고 했던가? 무안의 태자까지 지냈던 자가 전하께 엉덩이를 흔들어댄다고 하길래 빼어난 인물인줄 알았더니, 뭐야, 시시하게. 평범하게 생겼잖아?"

크로우의 후궁으로는 처음 보는 모리안은 화려한 장미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커다란 눈동자와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은 오밀조밀 귀여우면서도 농염하게 불빛아래 빛났다.
어깨까지 내려온 화려한 금발은 그녀의 미모를 더 빛나게 해주었고 상의와 망토는 황금 자수로 뒤덮여져 있었다.

성급한 마음이 앞서긴 하지만, 그리고 모리안의 불쾌한 말에 화부터 치솟지만 유하르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것으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유하르라고 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모리안님."
"그래, 더러운 남창따위를 한시도 내 궁에 들이고 싶지 않으니 무슨 일인지 고하고 물러가라."
"초면에 실례지만 모리안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라??"

반짝이는 보석을 박은 금 브로치로 여밈을 한 망토안에는 속이 훤하게 비치는 얇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의자의 손잡이에 발을 올리며 모리안은 다리를 흔들었다.
느긋한 모양에 마음이 급해졌지만 유하르는 폴라를 생각해서 다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은관도 못 쓴 미천한 후궁따위가 감히 금관의 나에게 청이라? 건방지기 짝이 없군."

금관의 후궁이란 후궁사이의 상하를 말하는 것과 같았다.
몇 대 전의 코나흐타왕이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궁에게 수고의 표시로 작은 금관을 하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왕의 아이를 낳은 후궁에게 금으로 된 브로치를 하사하는게 관례가 되었다.
또 아이를 낳지 않아도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 역시 금브로치를 선사받았고 그 외의 후궁은 은 브로치를 선물로 받는다.
그것도 아니고 겨우 하룻밤만 상대한 후궁은 아무것도 하사 받지 못한다. 이른바 무관의 후궁인것이다.
무관의 후궁과 성노는 거의 비슷하지만 성노는 노예이고 후궁은 시종장이나 왕에 의해 선발된 자이어서 대우가 엄연히 다르다.

무관의 후궁이 하룻밤의 관계가 있은 후 석 달이 되도록 왕이 찾지 않으면 여자의 경우엔 다시 시녀로 일해야만 했다.
왕에게 총애를 잃은 은 브로치의 후궁도 여섯 달이 넘도록 왕이 찾지 않으면 브로치를 빼앗기고 다시 석 달 후 왕이 찾지 않으면 그 역시 시종이 되어 일해야만 한다.

그러나 금 브로치를 하사받은 후궁들은 설사 왕의 보위가 바뀌게 되더라도 그 안전과 직위를 그대로 보장받게 되기때문에 은 브로치의 후궁들이나 다른 후궁들이 그토록 아이를 원하며 왕에게 총애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브로치를 받는 것을 후궁들 스스로 금관, 은관이라 칭했다.

그리고 왕비를 선발하는 것도 금관의 후궁가운데 선발하는게 종종 있었으니 무관이나 은관의 후궁들은 금관의 후궁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연회에 왕과 함께 참석할 수가 있기에 왕을 가까이에 모실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게 금관의 후궁이다.
브로치를 하사하는 것은 왕이 결정하는 것이나 후궁들과 성노가 머무는 로흐 벨을 관리하는 것은 시종장의 관할이다.
왕의 심기를 헤아려 설사 무관의 후궁을 왕이 일년동안 찾지 않더라도 후궁의 직위에 그대로 둘수도 있는 재량권을 가진것도 시종장이다.
현 코나흐타의 왕 크로우 크루아흐에겐 금관의 후궁이 열 명쯤 되었다.



여자도 아니고 보석에 관심이 없는 유하르는 설사 왕이 주는 보석이라할지라도 몸에 걸치지는 않았기에 모리안은 소문난 남자 후궁이라고는 하나 은 브로치하나 하사 받지 못한다 여겨 유하르를 없신여기는 것이다.
물론 다른 후궁과는 달리 저런 무사를 붙여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하르가 무안의 태자였기에 감시차원에서 붙여둔 것이고 소문처럼 총애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여겼다.
총애한다면 왜 금관을 하사하지 않았겠는가

"썩 물러가거라!!!!"
"모리안님. 부탁드립니다."
"내가 뭣하러 너의 청을 들어주어야하지? 내게 이득이 되는게 뭐가 있어? 응?"
"보석과 바꾸기를 원하신다면 제가 가진 보석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청을 들어주십시요"

설마 금관을 하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 자가 스스로 하지 않은 것인가? 전하께서 하사한 물건을 몸에 달지 않은 그런 경거망동한 행동이 있을수가..

괘씸한 생각에 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하르에게 다가갔다.
맑은 푸른 빛이 도는 눈동자가 특이하긴 하지만 이런 벽안의 눈동자가 없는 건 아니다.
왕처럼 남자답게 생긴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쁘게 생긴 미형의 사내는 더더욱 아니고 깨끗한 피부외엔 크게 눈에 드러나는 점이 없는 평범하게 생긴 사내일 뿐이었다.
수수하게 생겼다고 할까, 현인(賢人)처럼 생겼다고나 할까. 가까이가면 책냄새가 날 것 같은 지루함이 배여있는 사내였다.
이렇게 평범하게 생긴 사내가 어찌 심미안이 까다로운 현 크루아흐 왕의 총애를 받는단 말인가.
역시 소문일 뿐이라 여기서 모리안은 손에 든 부채로 유하르의 턱을 치켜세웠다.

청을 하는 자의 전혀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푸른 눈동자가, 무관의 후궁인 주제에 금관의 후궁가운데 가장 왕비로 유력시 되는 자신 앞에서 빛을 잃지 않은 눈빛이 모리안은 싫었다.
권력의 중심에 서다보면 기분 좋은게 비굴한 상대의 눈빛이었다.
처음부터 금관의 후궁이었지만 후궁을 귀애할줄 모르는 왕의 성정을 아는 대신들이 처음엔 꼿꼿하였었는데 테오르가 태어나자 모두 굽실거리며 자신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다.
왕비란 자리는 바로 왕 다음의 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비록 아직 왕비로 책봉이 되진 않았지만 시간문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리안으로서는 자신에게 부탁씩이나 하면서 대신들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자신의 눈을 무례하게 맞받아치는 유하르의 오만함이 마음에 들리가 없었다.

"그래, 일단 네가 말하는 그 청이란게 무엇인지 물어나보자. 네가 원하는 청이 무엇이냐?"
"모리안님의 시종동 가운데 폴라라는 여섯살 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저에게 주십시요"
"뭐? 아... 호호호홋. 이 시녀의 딸 말이냐? 아까 나에게 건방지게 대들었던. 쯧..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냐."

유하르는 참고 또 참았다. 폴라를 자신의 궁으로 데리고 와야만 하니깐.
그래야 테오르에게 좋아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주지 않을테고 폴라의 춤을 다시 한 번 구경할수 있을테니깐.
어른이 되면서 겪을 수 있는 아픔을 미리 어린 나이에 배울 필요는 없다.
그래서 유하르는 테오르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그렇게 만들고 폴라의 등짝을 채찍으로 내친 모리안을 보면서도 그 일에 대해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청하기만 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말할 권리따위가 없을 것이다. 한마디 충고쯤은 해주고 싶은 걸 참으며 유하르는 반드시 폴라를 데리고 가리라 다시 다짐을 했다.

"죽어가는 그깟 시종동따위가 왜 필요하지? 응? 호.. 이제 알았군. 그래, 네 궁에는 계집은 하나도 없을 터. 설마하니 그 어린 계집을 품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
"모리안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감히 엇다대고 눈을 부라리는게야!! 난 금관의 후궁이다. 무관의 후궁따위가 어디 함부러 말대꾸를 하는게야!!!! 법도를 몰라도 유분수가 있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넌 대답도 못하는 처지다. 어디서 감히.."
"어찌하면 그 아이를 제게 주시겠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데려간들 모리안님께 폐가 될만큼 그 아이가 소용되지 않치 않사옵니까. 저에게 주십시요. "
"호홋. 정말 그 용도로 아이를 쓸 모양이군. 이왕이면 더 건강하고 이쁜 소녀로 줄까?"

폴라의 어미가 있는 자리에서 폴라를 모욕하고 시종이 있고 남자인 무관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내뱉는 모리안에게 유하르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네 말대로 금관의 후궁이라는 여자가 어찌 말을 그리 막해."
"무..뭐? 네...네 이놈이.."
"아무리 내가 보기 싫다고는 하나 윗사람이 된 자가 아랫사람이 보는 곳에서 해야할 말과 하지말아야 할 말조차 구분 못한단 말인가. 그러고도 넌 네가 금관의 후궁이라 떠벌리고 다니며 그리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이냐!!!"
"네... 이.. 썩을.. 남창노...놈..."

모리안이 분노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더니 한 대라도 내리칠 듯 손을 높이 치켜들자 샤치가 유하르의 앞으로 나서며 모리안의 손을 잡았다.

"당장 이 손을 놓치 못하겠느냐. 감히 무관주제에 전하의 후궁의 몸에 손을 대다니!!!!!!!!!!"
"진정하십시요 모리안님."

샤치의 무뚝뚝한 말에 모리안은 유하르를 무섭게 노려보며 이를 갈았지만 샤치의 손아귀를 떨칠 힘은 없었다.

"그래. 그 계집을 원한다고 했지? 대가로 무엇이던 치를수 있을터냐?"

여전히 샤치에게 손목을 잡힌 채 으르릉 거리는 모리안을 바라보며 유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 그래? 그럼 네 뺨을 대라. 단 한 대만 내리치지. 그리곤 그 아이를 데리고 가라. "

남자따위가 후궁에 들어선 곳도 마음에 들지 않은데 비록 궁은 작기는 하지만 궁터는 후궁처소 가운데 가장 크고 호수까지 달린 아름답기로 유명한 피나하 궁까지 소유한 유하르의 존재가 모리안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유하르에게 따끔히 후궁의 위계질서를 가르칠려고 갔었는데 그때 이 무관에게 저지를 당했었다.
장차 왕비가 될지도 모르는 금관의 후궁에게 전하의 명이라는 말로 가로막자 화가 더 치밀어 올랐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매끈한 얼굴로 무관의 후궁인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양 호통치는 꼴을 보니 모리안의 사지가 분노로 벌벌 떨렸다.

저 햐얀 얼굴을 한 대라도 내리칠수만 있다면 그나마 화가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어차피 죽어가는 시동 하나야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으니 오히려 싸게 치이는 셈이다.


"비켜라. 샤치"
"유하르님.."
"모리안, 당신을 위해 이 일은 차후 함구에 붙이겠다. 그대도 명심하길. 그리고 샤치. 넌 물러서라."
"하지만.. 유하르님."
"너의 주인은 내가 아니더냐? 네가 날 주인으로 섬긴다면 비켜라. 샤치."

주인의 단호한 음성에 샤치는 어쩔수 없이 자리를 비켰고 그가 비켜나가자마자 모리안의 얼굴엔 음흉한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후훗.. 무관의 남자 후궁인주제에, 아이를 낳지도 못하고 언제 쫓겨나 뭇 사내들에게 엉덩이를 들어댈지도 모르는 주제에 넌 뭐가 그리 잘나 나에게 존대도 하지 않고 감히 건방을 떠는 거지? 후회하게 될꺼다. 건방진 유하르."

짜 - 악!!!!

모리안이 힘껏 내리치자 하얀 유하르의 뺨엔 손자욱이 그대로 남아 붉게 물들었다.
샤치가 어쩔줄 몰라하는 것을 외면한 채 유하르는 모리안에게 등을 돌렸다.
한시도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폴라는 내가 데려간다. 이제 그 아이의 주인은 나이니 그 어떠한 경우가 될지라도 그 아이에게 해를 끼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모리안"
"네..네놈이 감히.. 나에게 그리 막되먹게 말을 하다니. 한 대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약속한 것은 한 대다. 그대야말로 정신을 차리라. 가자 샤치."

유하르가 모리안의 거처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샬비의 음성이 문 밖에서 들려왔다.

"크루아흐 전하이십니다."

샬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크로우가 먼저 들어서고 그 뒤를 이어 스루드와 샬비, 스렐 그리고 뛰어왔는지 가뿐 숨을 내쉬는 브란까지 모리안의 거처로 들어섰다.

실내에 있던 시종은 급히 엎드려 부복을 하였고 모리안과 샤치도 허리를 꺽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왕을 대하고도 예를 취하지 않은 사람은 유하르뿐으로 왕이 등장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다른 그 어떤 사람에게 시선하나 던지지 않고 크로우는 유하르에게 성큼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턱을 잡고 돌리니 붉어진 뺨이 눈에 확 들어왔다.

"뭐냐. 이것은"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왕의 살기어린 목소리에 실내의 모든 사람들은 공포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뭐냐고 물었다. 유하르. 대답해라."
"말씀드릴수 없는 개인적인 일입니다. 전하. 양해를.."
"뭐? 개인적인 일? 그래, 지금 넌 감히 나 크로우 크루아흐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유하르"

유하르는 크로우가 무엇때문에 속을 상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목소리는 낮게 깔리어 당장이라도 칼을 꺼내들 것처럼 살기를 띄우고 있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유하르의 오른쪽 뺨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마치 믿을수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은 뺨에 난 자국을 더듬고 또 더듬는 것이다.



아직은.. 아직은 금관의 후궁보다 내가 먼저인가..
하지만 언제까지.. 언제까지..
문득 든 생각에 유하르는 잠시 폴라를 잊고 크로우를 바라보았다.

그래, 한 때는 이 아름다운 모리안의 품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고 헤매었겠지.
그러니 당신의 아들이 태어났겠지. 크루아흐 전하.
어쩌면...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난 당신을 믿는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모리안을 못 본척 외면하지 마.
가까운 미래에 있을 나의 모습같아 보이니깐..


폴라의 충격에 이은 모리안의 폭언. 그리고 문득 스며든 우울한 생각에 유하르는 기운을 잃었다.

크로우의 고백이 진심임을 알면서도 농락하듯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유유히 바라보자고 다짐을 했었다.
분한 마음에 칼을 들기는 했지만 망국에 대한 원한은 애초에 없었다.
부정과 부패로 찌들린 상태에다가 호전적이고 전쟁을 좋아하던 벨레누스는 병력에 소비되는 물자를 지원하고자 백성들을 쥐어짜 백성들은 과다한 세금과 징병에 허덕이고 있었다.
코나흐타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에 오히려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던 유하르였다.
다른 나라였다면 백성들은 더 오래되는 전쟁에 힘이 들었을테였고 코나흐타였기에 무안이라는 대국이 단 두 달만에 코나흐타에 귀속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나라라할지라도 그래도 모국인지라 애절한 마음이 들었고 자신이 힘이 아닌 나름대로의 복수라면 다행히 자신에게 목을 매는 듯 사랑을 간구하는 코나흐타왕에게 정을 한 톨도 주지 않는것이라 여겼는데 어느새 뒤를 돌아다보니 자신의 마음은 이미 돌이킬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것을 유하르를 이제서야 깨달았다.
이 사람에게 오래도록 사랑받고 싶다..라는 느낌이라니..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언제나 그랬듯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기운이 서린 눈동자가 보였다.
상처입은 사람보다 더 아파해주는 크로우의 마음이 가슴에 진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크로우 크루아흐전하. 당신의 남자후궁에 지나지 않는 유하르는 생각도 없고 신의도 없는 자입니까?"
"무슨 말이야. 그게. 난 지금 이것에 대해 묻고 있잖아!!!"

당신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마. 전하. 당신만은 나에게 쓸모없는 존재라고 말하지 마.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런 말 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당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 얼마나 오래 갈수 있을까.
부디..그때가 빨리 오길 바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 당신의 아무렇지도 않는 말에 이번엔 정말 심각하게 상처를 받을 것 같거든
버릴려면 빨리 버려줘 나의 왕. 크로우


"이 일에 대해 함구하기로 약조했습니다. 저 따위가 한 약조는 언제 깨뜨려도 될 하잘것 없는 것입니까. 전하. 제가 한 맹세는 제가 한 신의는 전하의 말 한마디에 허물어져야할만큼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그런 것입니까. 전하."

크로우는 항상 이성적이던 유하르가 격한 음성으로 말을 뱉으며 곧 눈물이라도 떨굴것처럼 습기어린 푸른 눈을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당겨 안아주었다.


뭐가 그리 슬픈거야. 뭐가 그리 아픈거냐. 넌. 내가 있는데 나 크로우가 네 곁에 있는데 넌 왜..

크로우는 당장 유하르를 안고 피나하궁으로 가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스렐을 불렀다.

"당장 유하르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라. 샬비. 이 궁의 시종처소에 있는 유하르가 당부한 자의 건강을 살펴줄 의사를 불러라.."

스렐이 힘없는 유하르를 데리고 빠져나갈 때 샤치도 따르다가 왕의 눈짓을 받고 자리에 머물렀다.

왕이 타인에 의해 그 뜻의 굽힌 적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리안은 건방진 유하르가 당장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생각을 하며 속으로 쾌차를 불렀다.
감히 왕의 말에 대꾸를 한 것도 모잘라 큰 소리로 왕의 물음에 대답은 커녕 엉뚱한 소리마저 해대었다.
진작에 칼이 뽑아졌어도 졌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모리안의 예상과는 달리 왕은 처단할 유하르가 사라지자 검을 빼들었다.

"샤치. 넌 오른손잡이 검사였지."
"네. 전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툭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모리안은 비명소리조차 지르지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입을 손으로 막으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 앞에는 떨어진 것은 금방전까지만 해도 어깨에 붙어있던 샤치의 왼쪽 팔이었다.

샤치 역시 비명소리하나 지르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이마는 땀으로 젖어들었다.
투툭 떨어지는 핏방울이 아름다운 카펫을 적시는 동안 실내의 그 아무도 입도 열지 못했다.
팔을 자른 것으로 모자라 크로우는 샤치의 배를 발로 차버리자 힘없이 샤치는 바닥을 뒹굴렀다.
넘어진 샤치의 어깨를 무릎으로 누른채 크로우는 샤치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이 한껏 당겨진 샤치의 입에선 저절로 낮은 신음성이 터졌다.
왕의 오랜 친구인 브란조차 왕을 말리지 못한채 그저 황망히 왕의 행동을 바라볼뿐이었다.

"샤치. 넌 내 말을 어느 귀로 들었는가. 감히 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더냐?"
"저..전하.. 아닙니다.. 전..전하"
"지켜라 했다. 유하르를 네 목숨으로 지켜라 했다. 머리칼 하나 다치지 않게 하라고 했다. 넌 무엇을 하였더냐. 그 얼굴에 그 자국이 생길때 넌 구경만 했느냐?"
"요..용서를..저..전하.."
"기억해라. 샤치. 이 머리속에 새겨둬라. 네 주인은 유하르다. 유하르의 몸에 해를 끼치는 자가 설사 내가 될지라도 넌 네 몸으로 네 주인을 지켜야 한다. 이 코나흐타에서 나보다 더 위에 있는 자가 있느냐."
"아..니...으윽..."
"하물며 그런데도 넌 네 주인을 다치게 했다. 행여 네 주인이 낯을 가릴까봐 네 팔 하나로 끝냈다."

크로우는 샤치의 머리를 바닥에 쿵 내리 꽂으며 프라가라흐를 그의 눈 앞에 세웠다.

"명심해라. 샤치. 다음 번에 너의 부주의로 네 주인의 손톱 하나라도 부러지면 그땐 네 주인이 말려도 네 목을 칠 것이다. 알아들었나?"
"네...으....저..전하."
"치워!!!"

크로우의 명령에 밖에 대기해있던 병사들이 들어와 샤치를 데리고 가자 그를 끌고가는 방향으로 길다란 핏줄기가 그대로 자욱을 만들었다.
그 붉은 자욱을 바라보며 왕이 다가와도 모리안은 앉은 채 공포로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들어라. 모리안."
"네..네.네. 전하.."

시종처럼 부복을 한 모리안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래, 서로 함구하기로 했다니 길게 묻지는 않겠다."
"말씀..말씀을 드리게..드리겠습니다. 저..전하.."
"되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너도 유하르와 한 신의를 지켜야하지 않겠나? 다만. 모리안."
"네..네 전하.."

낮게 부복한 모리안의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고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모리안의 시선에 샤치가 끌려가며 흔적을 남겼던 피가 여실히 들어왔다.

"오늘은 그냥 돌아간다. 허나, 앞으론 내 눈에 띄이지 않는게 좋을거다. 오래 살고 싶다면."
"명심..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크로우는 차갑게 모리안을 내려다보며 모리안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샬비가 크로우를 뒤따르며 시종거처에 있는 폴라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설마 그 시종동을 자신의 궁으로 들이기 위해 뺨을 내주었던 말이냐?"

어처구니없다는 듯 샬비를 노려보는 크로우를 보며 브란은 어깨를 가볍게 들었다 놓았다.

"아마도. 유하르님이라면 그럴수 있을 것도 같은걸."
"그런 사소한 일로...."
"진정해. 크로우."
모리안을 그대로 살려둔 것이 분한지 가끔 뒤돌아보며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크로우를 바라보며 브란은 나중에  모리안에게 사람을 보내 다시는 크로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언질을 해두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지금이야 유하르가 한 말이 있으니 그냥 두었겠지만 다음에 그의 눈 앞에 나타나면 그녀가 입고 있는 옷자락에 붙어 있는 먼지를 핑게삼아서라도 그녀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테오르의 친모가 아닌가. 비록 테오르와 사이가 원만한 편은 아니라고는 하나 그래도 친모를 죽이는게 껄끄러운게 사실이다.
사랑받고 있는 이의 질투는 귀엽고 사랑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이의 질투란 추한 것이 되는 법이다.
질투로 인해 다시는 왕를 뵙지 못하게 되어버린 모리안에게 측은한 마음이 생긴 브란은 아직까지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크로우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설마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하고 피나하로 갈꺼야?"
유하르란 이름만 나오면 살벌했던 기운을 순식간에 사그라뜨리는 왕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브란은 유하르야 말로 왕의 질주를 잡아줄 유일한 사람임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젠장. 모리안이 유하르를 업신여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당연하지. 왕의 분노를 살 정도로 가치가 있는 후궁인지 몰랐을꺼야. 사실 유하르님은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으시고 왕과 관례도 치르지 않았고 네가 준 브로치도 하지 않으니 모르는 후궁이 보면 유하르님은 수 많은 후궁중에 한 명일 뿐일꺼야."
"어떻게 하면 좋치. 브란. 유하르는 보석을 좋아하지도 않고 연회에 참석하자고 해도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었단 말이야. 도데체 어떻게 해야 유하르의 가치를 알릴수 있는거야.대체. "
"글쎄. 어려운걸."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생긴다면..으흠.."
"이봐이봐. 크로우. 네가 그러면 나도 무섭다고.  그러니 이제 인상 좀 풀어. 응?"
"그렇치. 왕비자리를 주면 어떨까??"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듯 손바닥을 마주치며 눈을 반짝이는 왕을 브란, 샬비, 스루드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을 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로우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아아..역시 반기지는 않겠지."
"와..왕비?"
"왕비라면 관례도 치루어야 할테고 남자라고 할지라도 업수이 여기지 않을꺼 아니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왕비잖아. 왕비. 왕비는 단 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고 왕이 없으면 그 자리를 대신할수도 있는..왕비는 물릴수 없는 자리라고. 후궁과는 천지차이야. "
"당연한 말을 하는군. 후궁과 같으면 내가 생각이나 했겠어? 아아..그나저나 어떻게 달래서 왕비로 앉히나.."
"미쳤군."
"뭐?"
"아.. 그..그러니깐.. 아..그래. 유하르님이 네가 왕비이야기를 꺼내면 그렇게 대답하실꺼라고..하..하핫.."
"음..그렇겠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멍한 브란이 자리를 물러나고 걸음을 재촉한 크로우가 피나하궁으로 들어서자 브란과 상태가 비슷해보이는 샬비와 스루드는 그 자리에 멈추어서 크로우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직도 머리속을 헤집고 다니는 왕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 스루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샬비를 바라보았다.

"샬비님."
"응"
"저..아까 스렐의 보고를 회의가 끝난 후에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샬비님?"
"스루드. 상상하면 괴로워지는 질문은 하지 마라. 알겠나?"
"네. 샬비님"





아사 유하르 [9]




힘이 없는지 크로우가 들어서는 것을 스렐의 보고로 알았을텐데도 유하르는 돌려진 의자에 턱을 받히고는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다른 후궁이라면 경을 칠 일인데 크로우는 자신을 본체만체 하는 유하르에게 다가가며 오히려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왜 그렇게 힘이 빠진거야. 얼굴 좀 봐. 응? 유하르"
마주대하니 또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지만 크로우는 조심스럽게 유하르의 붉은 뺨을 쓰다듬었다.

"젠장"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나 유하르에게 상처를 내었지 그 후로는 자신의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도 유하르가 혹시 아파하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게 안았었다.
같이 말을 타고 나설때도, 가벼운 대련을 할때조차 생치기 하나 나지 않게 할려고 그렇게 아끼고 보듬어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장 목을 쳐도 하나도 섭섭하지 않을 한 여자가 그토록 아껴온 유하르의 뺨에 이런 자국을 만들게 하다니..
유하르가 약조가 어쩌고 신의가 어쩌고 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진작에 모리안의 목을 쳤을 크로우였다.

"아프지 않아?"
고개를 가로젓는 유하르를 번쩍 안아들고 침대에 곱게 눕혔다.
자신의 얼굴을 따라오는 유하르의 맑고 깊은 눈매가 이뻐 크로우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끝이 없는 듯 하였다.
처음엔 하나만큼 사랑스럽던 이가 이제는 열이 넘고 백이 넘게 사랑스러웠다.
급기야 이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눈짓 하나하나에 가슴이 저며온다.
꼭 보듬어 안고만 싶은 이를 아프게 한다면 그 상대가 누구던간에 크로우는 용서할수 없었다.
낮게 내려앉은 유하르의 눈빛에 생기가 사라진 것을 보며 크로우는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기분이 안 좋아보여. 유하르. 정말 아픈게 아니고?"
"응. 괜찮아. 전하."
"훗, 반토막 말과 전하라는 말, 너무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나보지? 크로우. 크로우라고 말해줘. 유하르."

자신의 말에 씨익 웃기만 하는 유하르를 보며 크로우는 옷을 몽땅 벗어 던졌다.
침대위로 울라가 유하르의 곁에 눕자 유하르가 인상을 찌부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크로우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내었다.

"아..전하.. 나 오늘은.."
"쉿. 건드리지 않을테니. 자. 재워줄께. 힘들어보여. 유하르. 푹 자. "
유하르의 몸을 뒤에서 껴안자 둘러진 자신의 팔을 쓰다듬는 유하르가 사랑스러워 크로우는 고개를 돌려 유하르의 입을 가볍게 맞추고는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재울려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크로우는 자신의 품에 고이 안겨있는 몸뚱아리가 이뻐 연신 그의 연한 갈색빛 머리칼에 새가 모이를 쪼듯 연신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가 반복을 하였다.

"전하도 그렇게 생각해?"
"응?"
마치 꿀이라도 발린 양 유하르의 머리칼을 할짝이던 크로우가 겨우 입을 떼며 유하르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시종따위는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거야?"
차마 그렇다라고 대답을 못해 머뭇거리는 크로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하르는 침실 너머로 보이는 푸른 나무를 바라보았다.

허긴 죽음의 신이라 불리우는 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 생각을 하며 유하르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아.. 실수. 당신에겐 갈등조차 될수 없는 일을 묻고 말았군."
"유하르.."
"하지만 크루아흐전하. 난 그렇게 생각안해. 죽어 마땅한 자, 하나 없어. 없어져도 될 사람 하나 없다고. 폴라는 시종이 아니라 작은 여섯살 난 여자아이일 뿐이야."
"응. 그래, 유하르. 앞으론 신경쓸께. 네가 한 말 꼭 기억할께."

뜻밖의 말에 유하르가 놀라 고개를 돌려 크로우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는 내 기분대로 내 멋대로 했지만 이제부터는 시종이라할지라도 한 번 생각해보마. 널 위해서라도.."
"고마워. 전하. 그렇게 내 생각을 고려해줄줄 몰랐어."
무심코 뱉은 자신의 말에 금방 호응을 하며 수긍을 하자 놀란 유하르는 벌린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누군가의 청을 듣고 자신의 뜻을 꺽는 일이 없음직한 사내가 흘려보내도 될 말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꼼꼼히 다 주어듣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알았다 하며 고치겠다고까지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벌려진 입술을 그리운 듯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크로우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넌 유하르니깐. 나의 유하르. 네가 하는 말은 다 옳다. 훗. 이제보니 내 고백을 못 믿는거였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유하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도...필요한 사람일까? 나는 없어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일까? 나도 살아 있어도 되는거지? 응? 나도 이렇게 살아도, 아버지와 함께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어도 되는거지? 응?"


크로우는 몸을 일으켜 유하르를 내려다보았다.
팔로 몸을 지탱하며 자신의 팔 안에 갇힌 유하르의 불안한 눈두덩이위에 입을 맞추었다.
붉어진 볼에 입을 맞추고 달콤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자신의 품안에 있는 사람이건만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먼 눈빛을 하는 것이 크로우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언제나 코나흐타에, 자신의 품 안에 머무를 것처럼 맑고 청명한 눈빛으로 생기있게 웃는게 좋았다.

"난 모든 것을 가졌지만 필요없다. 유하르. 너만이 필요해. 너만이 소용이 된다. 네 혈육을 죽여놓고도 이런 말 하는거 넌 용서 못하겠지만 유하르. 부디 내 마음을 알아줘. 내가 널 필요로 한다는 것을. 너 뿐이다. 유하르. 내가 필요한 사람은, 내가 이렇게 간구하는 사람은 오직 너 뿐이야. 그러니 살아있어야 해. 어떤한 경우라도 넌 살아 내 눈 앞에 있어야 한다. 나의 유하르."


아무도, 그 아무도 자신을 필요치 않았다.
필요한 것은 태자뿐. 스스로를 아무도 필요해주지 않았고,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신을 그대로 봐주고 불러준 사람은 어이없게도 자신의 나라를 친 적장 크로우인 것이다.
날 위해 살아달라고, 너 뿐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크로우뿐이었다.


"고마워.. 고마워.. 날 필요로 해주어서..날 유하르로 봐주어서..고마워.. 크로우"
연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은 달콤하고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로 화끈한 고백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보지 않아도 자신의 달아오른 뺨을 느낄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불리워진 이름이라는 것이 형체가 되어 자신의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이 사랑스러운 연인을 한 입에 톡 털어넣을수 없는 것이 원통할뿐이다.

"맙소사. 유하르.. 그래, 넌 나의 아스(신)다. 아사 유하르. 나 크로우 크루아흐는 나의 아스를 진심으로 경배한다. 사랑해. 유하르"


이 사람을 떠날 생각만 했었는데, 버려질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뜻밖의 말에 유하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크로우를 바라보았다.
한 톨의 거짓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의 눈동자는 붉게 타올랐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사랑이 배여있었다. 

처음부터 복수니 뭐니 하는 마음은 없었다. 따라 죽지 못하면 살아남아 아네를 만나야겠다는 것 뿐.
빨리 이 사내에게서 버림을 받아 떠날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주는 감정 받지 않고 내 마음 흘리지 않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는데.. 시간이 흘러도 사내가 주는 감정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넘치기만 하고 흘리지 말자고 단단히 봉한 마음은 갈수록 흐트러지기만 했다.
내가 받아도 될까? 당신의 마음을.. 내가 풀어놓아도 될까? 내 마음의 봉인을.
그래서, 그래서 나중에 나 필요없다고 한다면?
................
그래, 어차피 버려졌던 몸과 마음. 한 번 더 버려진들 그게 무어이 대수일까.


크로우가 종종 자신을 눈 앞에 두고도 연신 이름을 불렀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에 유하르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크로우..크로우..."
"아아.. 이름을 불러주는건 좋은데, 젠장. 그런 목소리로 부르면 참기 힘들다고"

유하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로우의 붉은 눈동자가 욕망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자신의 팔을 올려 크로우의 목에 감자 크로우의 눈은 더 흐려진다.
낮게 중얼거리며 욕망을 참는 듯한 모습을 보며 유하르는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이 사내가 태어나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욕망을 참은 적이 있었을까.
어디서든 거릴께 없는 사내가 자신을 위해 참아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은 낯설지만 다시 떨구고 싶지 않을만큼 달콤했다.
심하게 박동질치는 연인의 심장을 따라하듯 자신의 심장이 가뿐 호흡으로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유하르는 나른한 목소리로 연인을 유혹하였다.

"크로우, 당신이 원하신다면..."
급하게 내려오는 크로우의 입술을 받으며 유하르는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설사 이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 기한이 잠시뿐일지라도 자신을 아스로 섬기는 추억이 있다면 이토록 아껴주고 사랑해준 찰나의 시간이라도 있다면, 잠시 잊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는 기분을,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외로운 고독을 잠시 잊고 유하르는 현재에 살기로 했다.




**

콰당!!!!

주인을 닮아 조용하던 피나하궁의 주인인 유하르가 머무는 문이 덜렁덜렁 거릴정도로 방금 전의 과격한 왕의 등장을 보여주었다.

"도데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안그래도 목청이 큰 왕의 등장과 함께 들려오는 고함에 실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부복을 한 채 왕을 맞이하였다.

물론 예외는 단 한 사람. 

유하르는 미소만으로 왕을 환대하였다.

"이런 놀래키고 말았군. 전하."
이제 시종들 있는 곳에서도 말을 놓는 유하르였지만 그것에 대해 왕은 한 번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젠 누구가 있더라도 자신을 편하게 대해주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좋아할 뿐이다.

"뭐야. 이건. 이게 뭐냐고!!!"
크로우는 믿을수 없다는 듯 피로 물들여진 유하르의 옷을 바라보았다.
머리엔 깨끗한 붕대가 감겨져 있었지만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피가 어디서 나왔는지 짐작하고는 머리끝까지 치솟은 분노를 참을수가 없었다.

"아..별거 아니야. 그냥 사고야. 사고. 진정해. 응? 크로우."
보통의 경우 유하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면 모든 시름과 격정을 가라앉히던 크로우였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참을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건가. 스렐."
당사자인 유하르의 말보다는 시종의 말이 더 정확할 것 같아 스렐에게 물으니 부복한 채 스렐이 말할려고 하자 유하르가 스렐의 말을 막았다.

"아, 잠깐 스렐. 크로우. 내가 말할께. 잠시 침실로 가서..응?"
"스렐. 뭐하는건가."
"네..네 전하."

스렐의 보고를 들으며 크로우는 유하르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넘길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드러난 상처는 머리 뒤통수 부분에 길게 찢어진 상처였다. 
치료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손으로 만지자 금방 손에 피가 묻어나왔다.
혹 그 강도가 세어서 더한 상처를 입었다던가, 아니면 유하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크로우는 이를 갈았다.
의사에게 손짓을 해 다시 붕대를 감게 지시는 하는 동안 스렐의 보고를 끝이 났다.

"샤치. 유하르를 막아라."
외팔의 샤치가 붕대를 다 감은 유하르의 앞에 서자 크로우는 아직 바닥에 엎드려있는 테오르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멱살이 잡혀 공중에 떠있게 되어버린 테오르가 불안한듯 발을 버둥거렸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크로우의 눈빛은 싸늘히 식어있었다.
곁에서 브란이 놀라 크로우의 이름을 불렀지만 유하르의 목소리마저 새겨듣지 않던 크로우에게 영향력이 있을리 없었다.

"네 놈때문에.. 유하르가 죽을 뻔했다고."
"크로우!!!!!"

철썩!!!
검을 만지던 투박하고 큰 손이 아이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크로우가 테오르의 뺨을 세게 내리치니 입 안에 상처를 입은 것인지 연약한 아이의 입에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유하르가 샤치의 팔에 몸이 묶인 채 바둥거렸지만 샤치는 왕의 엄명을 기억하며 유하르를 놓치 않았다.

"너 때문에 유하르가 네 어미에게 모욕을 받은지 겨우 이십 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네 놈이 유하르를 죽일려고 들어?"
"크로우. 그게 아니란거 잘 알잖아. 크로우. 크로우. 제발 제발 테오르를 때리지 마. 테오르를 내려줘. 크로우!!!!"
"떨어지는 화병을 네 머리로 받아도 시원치않을 판국에 뭐? 네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유하르의 머리에 피를 흘리게 해?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지 않어서야 어찌 그렇게 대범할수 있나. 네가 어리다고 유하르의 피를 보고도 내가 봐줄줄 알았나."

테오르는 대답 한 번 하지 못한 채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아버지의 눈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고만 있었다.

"쓰잘데 없는 네 놈을 당장....."
크로우가 테오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아이는 떨어지면서 팔을 잘못 부딪혔는지 악 하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널 태어나게 한 모리안을 원망해라."

프라가라흐가 검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 순간 유하르는 샤치의 사타구니를 공격하고 샤치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팔의 결박을 풀고 자신의 죽음이 눈 앞에 있어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테오르의 앞에 서 그를 보호하겠다는 듯 양 팔을 벌렸다.

"크로우. 그만 해."
"비켜라. 유하르. 이번일은 네가 뭐라고 해도 절대 이 아이를 용서 못한다."
"실수였어. 아이가 할수 있는 실수였고 내가 스스로 아이를 감싼 거야. 테오르가 민 것도 아니고 내가 한 일로 테오르를 협박하지마."
"훗, 협박? 이 프라가라흐가 협박으로 보이나? 널 다치게 한 사람을 내가 살릴꺼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야!! 몰라? 몰라? 이 아인 당신의 아이 테오르란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지?"
"뭐?"
"난 단 한 번도 아이를 원한적이 없었다. 내가 기회를 주지 않자 모리안이 꾀를 부려 생긴 아이다. 내 씨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지만 처음부터 필요없는 존재였다. 태어났을 때 죽일려고 하다가 살려두었건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비..."



짜 -  악!!!

실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이 모두 쩍 하니 벌려졌다.
유하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크로우 크루아흐전하의 뺨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총애를 받는 후궁이라고는 하나 크루아흐전하의 몸에 손찌검을 하고 살아남기를 어려울 것이라 생각을 하며 모두 경악했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이 유하르의 목을 쳐도 이상할게 하나 없는 상황에서 더 놀라운 것은 왕이 단 한번도 자신의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는 검을 바닥에 떨군 것이다.
자신의 손에서 검이 떨어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은 자신의 뺨을 친 후궁을 애처롭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유..유하르..."
"그..그런 말 하지마. 크로우. 제발.. 필요없다는 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하지 말어..크로우.."

크로우가 유하르를 다시 만난지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유하르의 눈물을 보며 크로우는 자신이 맞은 뺨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처음에 굴욕적인 관계를 맺을때 조차 눈물을 보이지 않던 유하르였다.

"유하르..유하르..."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유하르의 푸르던 눈동자는 물기를 가득 머금고 그도 어쩌지 못하는 슬픔에 온 몸을 떨고 있었다.
다가가 꽉 안아주니 자신의 품에 안기고도 눈물을 이기지못해 떠는 작은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크로우는 자신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유하르의 눈물로 축축해진 가슴이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아파하는거야? 왜. 이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유하르.

"침실로 갈까? 유하르? 응? 그럴까? "
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하르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자 한 번도 왕의 손을 떠난 적이 없었던 왕의 검 프라가라흐가 바닥에 내동댕쳐 있는 모습을 보며 브란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브..브란님. 유하르님은 무사하실까요?"
"후훗. 걱정마 스렐. 네 주인은 왕께 손찌검을 하고도 털 끝하나 다치지 않는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될 사람이니깐. 그나저나 나도 놀랐는걸. 크로우. 저 정도일줄이야.. 그런데, 누가 저 기분 나쁜 검을 좀 치우지 그래? "

브란의 말을 모두 들었지만 아무렇게나 바닥에 뒹구는 화려한 검 프라가라흐를  만지는 사람은 없었다.
왕의 명이 없으니 자리를 떠날수도 없어 브란과 샬비를 제외한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유하르의 침실문을 바라보았다.




아사 유하르 [10]





"형 브리안이 왕이 되었다면 무안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을꺼야. 무술도 뛰어났고 체력도 강인했고 무엇보다도 다정한 사람이었어. 열 살이나 어린 나를 가까운 호수나 산으로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음악을 좋아했어. 모두들 태자의 뛰어남에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그는 겸손하기까지 해서 그런 칭찬에 머쓱해 머리를 긁적이기도 했었지."

너도 뛰어나,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그 말 대신 크로우는 유하르의 몸을 더 꼭 껴안아주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아는 듯 유하르는 크로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주었다.

"그 날은 마침 여동생이 아파서 같이 못가고 우리 둘이서만 유명한 거리파티를 구경하기 위해 몰래 성을 빠져나왔었어. 몰래라고 해도 몇몇 수행을 데리고 나갔었는데 산 중에서 그만 검객들을 만나고 말았지. 그 전에 낌새를 챈 브리안이 내 목을 쳐 기절시키고는 수행원이 매고 있던 커다란 배낭에 날 넣어두었나봐. 잠에서 깨어보니 난 배낭안에 있었고 주머니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어 배낭을 찢고 나가니 모두...모두 죽어있었어. 그렇게 착하고 상냥하던 우리의 태자 브리안도, 수행원들도 모두. 아마 노리고 있었나봐. 그러니 배낭은 조사하지 않았겠지. 그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쉿. 내가 들어서 기분 나쁜 말은 하지 말기."

"하지만 죽은 사람은 태자였는걸. 나 혼자서만 살아돌아간 무안의 성은 더 이상 아름답고 활기찬 성이 아니었어. 태자를 칭찬하던 사람들은 눈물로 며칠 밤을 지새웠고 큰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어머니 마저 한 달만에 돌아가시고 말았지.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럽던 태자와 왕비를 잃어버린 무안의 왕은 둘째아들에게 태자의 관을 씌워주고는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어. 태자, 아니면 브리안으로..."

"하지만 네 이름은..."

"응. 그때부터 아버지에겐 피누알라라는 둘째 아들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어. 브리안이 죽기전까지는 나의 노래와 나의 하프를 즐겨들으셨는데 내가 태자가 되고부터는 나의 노래와 나의 하프소리를 두 번 다시 허락하시지 않았어. 나에게 검을 가르치고 태자로서의 업무를 가르치셨지. 그렇게 가까이에서 가르치시면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셨어. 연한 갈색빛깔의 눈을 가셨던 브리안과 다른 색깔을 지닌 내 눈을 본다면 내가 아버지가 원하던 태자가 아님을 알게 되니깐 눈을 보기 싫으셨던게지."
"유하르..."
"아..그래 그때였을꺼야. 리안에서 크로우 당신을 만나던 그 해. 당신에게서 가인이란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아?"
"기뻐하면 뭘해. 아직까지 한 번도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으면서.."
"노래 부르는걸 잊어버렸는걸. 크로우. 하지만 이제는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정말 노래 불러줄꺼지 유하르. 응?"
"응"

이미 테오르와 폴라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는 말을 생략하고 유하르는 십 년도 넘은 일을 더듬어갔다.

"문득 반항을 하고 싶었었지. 당신에게 가인으로 불리워지고 난 후에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노래고 하프였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어. 난 당신이 가인 유하르로만 보아준 것처럼 난 분명 아버지에게 아들 피누알라인데 말이야. 날 나로 봐달라고..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똑똑히 말을 했지. 난 브리안이 아니라 피누알라라고."
"그랬더니?"

갑자기 다시 젖기 시작하는 유하르의 눈을 바라보며 크로우는 그의 눈두덩이위에 입을 맞추었다.

"제발, 잊지 좀 마. 유하르. 당신에겐 내가 있다고. 그랬더니, 당신의 아버지 벨레누스는 뭐라고 했어? 응?"
"피..필요없다고 했어. 피누알라는 필요없다고, 오직 태자만이 필요하다고.. 피누알라같은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태자도 못되는 쓸모가 없는 아이라고...네가 죽고 브리안이 살았어야 한다고.."
"이런.. 유하르.."
"난 믿었었어. 나를 브리안으로 부르시는 것도 브리안을 못 잊으시는 것도 이해하자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래도 믿었었어. 나도 자식인데 피누알라로 알고 계실꺼라고. 나에게 태자업무를 강요하시고는 계시지만 날 나로 봐주고 계시리라 믿었어. 단 한 번도 내가 필요없는 아이일꺼라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 죽어 마땅한 아이라고..생각해본적이 없었다고. 나도 같은 자식이었는데..나도..그때 알았버렸지. 나 피누알라는 전혀 쓸모가 없는 아이라는 것을..."
"무슨 소리야. 당신이 필요없는 사람이라니, 그런 말 좀 하지마. 지금 내게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다면 그런 말 못할꺼야. 유하르"
"당신이 나를 처음으로 유하르라고 불러주었지."
"응."

"유하르라는 이름은 나를 가르키는 것 같았어. 노래를 좋아하고 하프를 좋아하는 가인 유하르. 태자도 아닌 나 자신 그대로를 말해주는 이름. 유하르.. 새로 태어난 이름을 불러준 것은 당신이 처음이야. 크로우."
"유하르..유하르... 나의 아스 나의 사랑. 유하르. 기억해. 난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나에게 하늘이고 땅이고 아스임을 기억하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나를 당신도 믿어줘.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줘. 아사 유하르."

아버지에게 위로받지 못한 마음이 적국의 왕에게 위로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유하르를 기뻤다.
처음 듣는 고백도 아닌데 새삼 두근거려지는 마음에 얼굴까지 붉어지는 듯 했다.

"크로우...."
스스로 크로우의 입을 맞추자 크로우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보며 유하르는 그의 품에 안겨 가벼운 마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브리안을 잃고 마음 깊숙히 까지 즐거워져 웃음을 짓는 것은 처음인것 같았다.
자신의 입술을 깊숙히 빨아들이고 입 안의 예리한 감각을 두드리는 크로우의 혀를 자신의 혀로 감싸안으며 유하르는 크로우를 더 세게 안았다.

당신 점점 마음에 들어. 크로우 크루아흐.



힘겹게 입술을 뗀 크로우가 못내 아쉬운 듯 유하르의 양 뺨에 이마에 턱에 콧잔등에 입을 맞추고서야 유하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젠 날 믿어주는건가? 위대한 크로우의 아스여."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유하르는 또다시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눈가를 가늘게 주름을 잡으며 웃는 유하르를 보면서 크로우는 유하르의 환한 얼굴이 자신의 가슴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다 밝혀주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사람이 웃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입가가 저절로 미소 지어지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 사람의 눈물은 진짜 싫다.
큰 소리를 내어 울지도 못하는 가늘게 떨리는 슬픈 어깨도 싫다.
자신의 가슴이 찢기는게 차라리 더 시원하리라.
이 사람의 슬픔보다 이렇게 웃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크로우는 새삼 유하르에게 절대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을 하며 유하르의 손을 잡고 경건히 입을 맞추었다.


"크로우."
"응. 유하르."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말아."
"응??"

유하르가 무얼 말하는건지 잠시 알수 없는 크로우는 유하르의 이쁜 웃음을 만들던 눈매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유하르에게 되물었다.

"아이에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 필요없다는 말..하지 말라고."
"아아.. "

크로우의 끄덕거림으로 성이 안 차는지 유하르는 서서히 자신의 몸을 더듬는 크로우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니 사과해. 크로우. 테오르에게 사과해야한다고. 당신은 테오르의 아버지잖아. 응? 크로우."
"사과라..."
"당신의 아이니깐 이쁜거야. 당신의 아이니깐 사랑스러웠던거라고."
"뭐??"
"그러니 사과해줘. 테오르는 상처를 많이.."
"잠깐. 유하르. 너...너.. 내가 착각해도 되는건가? 유하르? 당신이.. 내 아이를 사랑스러워한다는 말은.. 그렇다는건 나에게 조금이나마.. 나를 조금이라도 눈썹만큼이라도 좋아한다고 생각해도 되는거야? 유하르? 응? 그런건가? 유하르?"

돌연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하는 크로우의 기대에 찬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하르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활활 타오르던 불길에 물을 끼얹었는 양 바로 재가 되어서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선연히 타오르던 크로우의 붉은 눈동자가 실망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크로우의 귀에 입술을 갖다대며 유하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고백했다.

"하지만.. 눈썹만큼 보다는 많이 좋아해. 크로우."
"맙소사. 이런.. 유하르..유하르..."

혹시 사라질까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유하르를 세게 껴안은 크로우는 유하르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격렬히 뛰는 심장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어떤 일도 이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25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순간만큼 크로우를 격정으로 몰고 갈 만큼 기쁜 일은 없었었다.
크로우는 유하르를 자신의 품에 가둔 채 앞으로 절대 자신의 아스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내 어린 시절을 보듯 당신의 아이를 그렇게 사랑해줘. 크로우. 난 나와 같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싫어. "
"물론. 유하르. 당신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던지. 나의 아사 유하르. 당신의 뜻대로.."





크로우 크루아흐가 뺨을 맞은 대 사건의 주인공인 유하르의 침실에서 나오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온 몸을 긴장으로 굳힌 채 왕의 말을 기다렸다.

왕의 허락이 없었기에 자리를 비우고 있지 않았던 의사 미아흐는 피로 물들여져있는 후궁 유하르의 침대를 떠올리며 왕진가방을 자신의 옆에 놓아두며 부복을 하였다.

"이런이런.. 테오르."

왕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테오르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선 번쩍 들어올리자 테오르 역시 다른 사람처럼 긴장으로 온 몸이 경직되었다.
테오르를 탁자위에 앉히고 왕이 테오르를 바라보자 테오르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을 불안하게 굴렸다.
그런 테오르의 뺨에 손을 갖대대고는 왕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음성으로 테오르를 불렀다.


"테오르. 내가 보고 있다. 나를 봐. "
명에 움찔 놀라 테오르가 크로우를 바라보자 크로우는 자신의 같은 빛깔을 지닌 테오르의 연한 붉은 기가 서린 눈동자를 그제서야 볼수 있었다.

이 아이를 보면서 내 어릴 때를 상상한다고 했지?
흠..좀 멋있게 보여야 할텐데.. 


"아깐 내가 심했다. 테오르. 사과하지."
왕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부복하고 있던 스렐과 샤치, 미아흐는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켜 믿을수 없는 말을 꺼낸 왕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샬비와 스루드, 브란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이 놀란 눈으로 왕과 왕이 금방 나온 유하르의 침실문을 번갈아 보았다.

"저..전하..."
"유하르에게 자주 놀러온다고 들었다. 너도 사내라면 네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을 보호해주고 책임을 져야한다. 내가 사과한 것은 너에 대해 내가 뱉은 경솔한 말이었지 네가 유하르에게 상처를 입힌 일로 너의 뺨을 내리친 것에 대한 사과는 아니다. 또다시 너 때문에 유하르가 상처를 입는다면 다신 용서치 않아. 알겠나?"
"네..전하."

고개숙인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로우는 혀를 찼다.

"쯧.. 너만은 나와 눈을 마주칠수 있도록 허락하지. 테오르. 누가 종종 말하지 않더냐, 눈을 마주보면 그 사람이 거짓말 하는지 안 하는지 알수 있다고."
그제서야 테오르의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가가 풀려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테오르를 보며 크로우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테오르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너, 멋있어져야 한다. 테오르"

왕의 말을 이해못해 어리둥절해하는 테오르를 거처로 데려다주라고 샤치에게 명령한 후 크로우는 바닥에 내동댕치쳐진채 그대로 있는 프라가라흐를 내려다보았다.

"하핫. 아무도 널 주워주지 않더냐. 프라가라흐. 쯧.. 화내지마라. 유하르의 일이었잖아. 어쩔수 없었다니깐."
그답지 않게 가볍고 소탈한 웃음을 짓는 왕이 다시 유하르의 침실로 향햐자 그제서야 자신의 주인의 안부가 걱정이 된 스렐이 아주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저..전하.."
"음? 말하라. 스렐."
"저..의사는..."
"의사??"

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사 미아흐를 바라보자 미아흐는 가방을 꼭 쥐었다.

"아까 치료가 끝나지 않았나?"
"끄...끝났습니다만.."

차마 유하르의 안부를 묻지 못하는 미아흐가 머뭇거리자 왕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머리의 상처가 곪지 않도록 신경쓰도록 해라."
"네. 전하."

왕이 유하르의 침실로 사라지자 실내의 긴장이 확 풀려 모두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져기..샬비님.."
"응"
"마치 아스같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냐."
"유하르님 말입니다."
"유하르님이 왜?"
"제가 보기엔 유하르님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을 지닌.. 아스같습니다."


브란은 샬비와 스루드의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며 자리를 떠났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큰 소리로 웃으며 시종들의 앞이라 대꾸하지 않은 말을 중얼거렸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스루드."
기분 좋게 터진 웃음을 마무리 할 생각이 전혀 없는 브란의 웃음소리가 피나하궁의 복도를 오래도록 메웠다.




아사 유하르 [11]



최고의 악단인 티르 나 노이가 왕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온다는 소식에 코나흐타의 대궁은 떠들석했다.
각 국마다 무희와 악단, 가인들이 있지만 떠돌아다니는 유령 악단 티르 나 노이에 비할게 못되었다.
그들을 부르는 것만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지만 특히 이번에는 티르 나 노이측에서 코나흐타의 왕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청하지도 않았는데 축하의 의미로 방문한다는 것은 에린에서 코나흐타의 강력한 힘을 대변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그들의 무희와 가인들을 보호해줄 강력한 군사를 같이 지니고 있긴 하지만 코나흐타의 왕 크루아흐전하의 신임을 얻는 것이 돈 몇 푼 버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피나하궁은 두 사람의 실랑이가 계속 이어졌다.

"다른 것으로 말해봐. 크로우."
"휴..이 고집쟁이 아스같으니."
"크로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가 들어주지. 그것말고 생일선물로 원하는거 다른 걸 말해봐."
"젠장. 도대체 왜 말이 안 된다는 것이야. 왜. 내가 하고 싶은데, 내가 하겠다는데 왜 싫다는 거야."
"크로우. 남자가 왕비가 된 적은 이 에린을 통틀어 한 번도 없었어."
"아 그러니깐, 그게 뭐가 중요하냐 말이다. 유하르. 내가 원한다고, 내가 바라고있다고. 왜 다른 후궁들은 못 되어서 안달인걸 유하르 너는 싫어서 그렇게 마다하는거야?"
"그럼 그 원하는 후궁을 앉히던가."
"뭣!!!!"

크로우가 화가 나 일어서자 콰당 하고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왕의 진노한 음성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스렐과 샤치만 바짝 얼어붙었을 뿐 샬비는 느긋한 미소마저 띄우며 싸우는 모습이 믿을수 없는 눈 앞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유하르가 미워 잔뜩 노려보던 크로우는 탁자에 놓여진 음료를 벌컥 벌컥 마셨다.
턱으로 흐르는 물을 손으로 쓱 닦아내고 유하르를 바라보며 휴..하고 길게 숨을 내쉬며 크로우는 자리를 떠날 것처럼 서성이다가 어느새 스렐이 다가와 세워놓은 의자에 다시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앉았다.

유하르에게 화를 내서 득을 보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유하르는 강한 자에게 더 강하고 약한 자에게 한없이 약해지는 스타일로 자신이 큰 소리로 밀어붙이면 열의 열 번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화가 나 며칠동안 근처엔 다가오지도 못하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픈 척하고 앓는 척하면서 우는 소리를 하면 곧잘 들어주었다.
그런 방법으로 노래도 들어보았고 하프를 연주하는 것도 볼수 있었던 크로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애원을 해도 화를 내보아도 전혀 먹히질 않아 답답해 미칠지경에 이르렀다.

"난 너를 원해. 유하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내 왕비로 너를 원한다고."
"알아. 크로우. 하지만 왕비는 안돼. 어떤 자리인줄 알면서 그걸 고집해?"

왕의 협박에도 애원에도 끄덕하지 않고 사양을 하는 유하르의 모습을 보며 샬비는 언젠가 브란이 유하르를 말하며 '그가 왕비가 된다면 최고의 왕비가 될꺼야.' 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왕의 간청이란 참으로 보기 드문일이지만 후궁이 왕비의 자리를 한사코 거부하는 것 또한 진풍경이었다.
아마도 결국 왕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그의 아스에게 굴복하고 말거라 예상을 하니 왕이 조금은 안스럽게 느껴지지까지하는 샬비였다.
죽음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왕이 안스럽게 보이는 날이 올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왕은 피나하궁의 주인과 관련된 일 외엔 전혀 안스럽게 보이진 않은 인물이다.


"그럼 이대로 후궁으로 있겠다는거야? 모리안과 같은 일이 없으리라 누구 보장해. 물론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다 죽여버릴테지만.."

왕은 자신의 후궁이 노려보자 움찔놀라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왕의 그런 모습이 비록 안스럽기는 하지만 결코 놓칠수 없는 재미거리라 생각을 하며 샬비는 이 광경을 보면 그 누구보다 즐거워할 브란이 자리에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나중에 찾아가 그대로 고하면 그는 분명 지금 이 자리에 없었던 것을 후회하며 땅을 치며 통곡할것이다.

"아..그게 .. 에....하지만 네가 다치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샤치의 일도 나 한 마디도 안 하고 넘겼어. 크로우."
"그러니깐 네가 왕비가 되면 그 누구도 널 헤치지 못할꺼란 말이야. 그래야 내가 안심이 된다고."
"매일 없는 시간 쪼개어서 날 훈련시키는 사람이 누군데 보호를 운운하는거야. 그리고 샤치와 병사들틈에서 무슨 큰 일이 일어날꺼라고 그래. 크로우. 이제 이 이야긴 그만 해. 피곤해.응?"

며칠째 계속된 이야기에 오늘만은 반드시, 라고 작정을 하고 온 크로우였건만 유하르의 애원하는 눈을 보는 순간 계획을 수정하였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깐..
보기 드물긴 하지만 유하르가 화가 나면 무섭다는 것을 실감한 뒤에는 유하르의 그만, 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자동으로 모든 계획이 전면적으로 수정이 된다.
거짓이 아닌 듯 눈이 피곤으로 충혈된 유하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로우는 스렐을 불러 잠자리를 살피게 하였다.


"알았어. 대신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간다. 다른 후궁이니 어쩌니 말하지마. 네가 내 부탁을 안 들어줘서 기분이 안 좋단 말이다. 오늘은 누구라도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프라가라흐부터 뽑을 것 같이 신경이 예민해졌다고."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하르를 안아 침대로 항하면서 뒤의 시종에게 손짓을 하자 소리를 죽여 시종들과 무관이 자리를 비웠다.

"이 고집쟁이 아스. 나만의 유하르.. 사랑해."

빨면 빨수록 점점 달콤해져 자신의 몸마저 녹아드는 것같은 느낌을 주는 유하르의 입술을 떠나지못하며 크로우는 유하르의 입 안에 혀를 넣은 채 말을 하였다.

"응.. 크로우.."

자신의 등을 감싸안는 유하르의 손을 느끼며 크로우는 손을 뻗어 유하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고집으로 인해 유하르의 화를 돋구어 이 사랑스러운 몸을 안지 못할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포기하는게 나았다.
유하르는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을 땐 조금 미안한지 밤에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들어주는 보상을 종종 해주곤 했다.

크로우는 그날 밤 유하르의 보상을 마음껏 즐겼다.






**



크로우는 자신이 유하르에게 요구한 생일선물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내려온 갈색 빛 머리칼은 뒤로 한 가닥 묶었고 연한 하늘색의 비단 망토를 어깨에 걸쳤는데 그 여밈은 크로우가 선물해준 짙은 파란 빛의 보석으로 하였다.

망토 안의 옷 가슴에는 금색의 실로 자수를 놓아져 있는데 그것은 크로우를 상징하는 뿔이 있는 용의 모습이 양 쪽 가슴으로 휘감겨있었고 허리에 복대는 하얀색으로 하였다.
유하르의 다리를 감싸는 밑부부분은 옷 소매와 같은 단순한 문양이 수놓여있었다.

처음보는 성장한 유하르의 어깨를 당겨 품에 안자 유하르가 가볍게 뿌리쳤다.


"무슨, 크로우. 대신들이 보고 있어."
"후훗. 보라지. 그나저나, 선물 고마워. 유하르"

뿌리쳤다고 뿌리쳐질리가 없는 크로우의 손이 유하르의 뺨을 감싸안으며 달콤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크로우의 뒤에 서 있던 대신들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원하는 것을 얻을수 없어 불만이긴 했지만 크로우로서는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을 하며 흐뭇하게 유하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요구한 선물이란 자신이 준 보석과 옷을 입고 성장을 한 채 연회에 참석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연회에 후궁들이 참석하는게 당연하지만 유하르가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의지가 단호했고 또 유하르의 단호한 의지를 꺽을 힘이 크로우에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회를 빌미삼아 대신들이나 각 국의 왕이나 사절단에게 유하르를 보여줌으로서 왕비의 관례만큼은 아니겠지만 유하르의 입지를 구축하고자하는게 크로우의 목적이었다.

"자, 가지"
수 많은 대신들과 후궁들을 오로지 유하르의 마중을 위해서 이끌고 온 크로우가 유하르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기고자 할때 유하르가 크로우의 손을 잡아당겼다.

"응? 왜 유하르?"
시종이나 무관외에 만나본 사람이야 기껏해야 브란정도뿐일 유하르가 낯을 가리지 않게 하기 위해 빨리 움직일려고 하는데 유하르는 오히려 자신을 살펴보고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크로우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연회에 들어가면 정신이 없을테니 간단한 소개는 해줘야지."
"뭐하러. 불편하게.. 몰라도 되."
"크로우."
"천천히 해."
"크로우. 지금 해. 복잡한 연회장에 들어가서 내가 이 사람이 우리 대신인지 다른 나라의 사절단인지 헷갈려 머리를 싸매야한다는 말이야?"
"다 무시하면 되지 뭐하러 머리 아프게 다 익힐려고 해."
"예의가 아니잖아. 예의가. 그러니깐 지금 소개시켜줘 크로우"

대신들은 코나흐타의 왕 크로우 크루아흐에게 존대를 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어느 후궁도 감히 하지 못했던 왕의 이름을 당당하게 부르는 유하르가 왕의 명령마저 거절하자 놀라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총애 받는 남자후궁의 이야기가 종종 나오긴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총애해봤자, 였다.
총애해본들 아이를 낳을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름이 아니라 그 상대는 죽음의 신 크루아흐였다.
후궁 하나 죽이는 것쯤이야 우습게 여기던 왕이 아니었던가.

태대신 브란이야 그의 오랜친구로 사석에서는 이름도 부르고 말도 놓는다고는 하나 그건 소문일뿐이었고 그들의 눈 앞에 유하르처럼 당당하게 왕의 이름을 부르고 존대를 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건 항명이다.
왕의 말에 거역을 하고도 살아남은 자 대신들은 보지 못했다. 그게 설사 후궁이 될지라도.
즐거운 왕의 탄신일에 피를 보게 되는가..했던 대신들은 이어지는 왕의 말에 더 놀라고 말았다.


"휴우, 정히 그렇다면, 대신 다는 소개 못 시켜주고 몇몇만 소개할께. 태대신 브란은 알고, 자, 이쪽은 북부 주(州) 의 슬라이고."

호명당한 슬라이고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자 유하르도 고개를 숙이는 예로 대했다.

"문관 코르플레. 그리고 고문관인 스인하브. 남부의 레스킨과 서부의 루아흐, 동부의 베일라, 수도 얼스터의 에이네. 그리고 재정담당 코호파르"

줄줄이 열 명정도 넘게 간단하게 소개를 한 크로우는 마지막으로 후궁들을 바라보았다.

"아.. 후궁들은 넘어가."
"크로우."
"필요없으니 되었어. 그리고 무장 스렝은 브르타뉴에 있기 때문에 못 왔지만 조만간 얼스터로 돌아올 예정이니 그때 소개시켜주마."

소개할 가치가 없다는 듯 후궁들을 외면한 채 크로우는 유하르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때 그 일이 있은 후 왕의 앞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였던 모리안이 없는 금관의 후궁들의 입에서는 처음보는 무관의 남자후궁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움의 탄식을 흘러나왔다.
모처럼 화려하게 입고 온 옷들과 반짝이는 장신구들이 자신들에 비해 거의 치장을 안하다시피한 유하르를 보니 오히려 더 초라하게 여겨지는 그들이었다.


**



연회는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후궁들의 자리가 아닌 왕의 곁에 앉은 유하르를 호기심있게 바라보는 각 국의 왕과 사절단들은 그 소문의 남자 후궁이 무안의 태자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왕의 총애를 받는지는 몰랐는지 음식과 화려한 무희들의 동작보다 왕의 후궁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총애, 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왕, 크루아흐가 그를 다른 후궁들과 같이 취급하지도 않았으며 각 국의 왕에게 소개시켜주기까지 하였다.
자신이 구경거리가 되고 있음을 모를리 없을텐데 후궁 유하르는 난색하나 표하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에게 단아한 미소를 지어보여주었다.

잠시 왕이 곁에 다가온 자와 이야기를 나누자 그 틈을 타 울라의 여왕 마하가 유하르의 곁에 앉았다.
음료로 목을 적시던 유하르가 마하를 보면서 인사를 건넸다.

"아. 아르드리(지고왕)"
가까이에서 인사나 나누며 어떤 사람인지 탐색할려고 하던 마하가 화들짝 놀라 유하르를 보았다.

"유..유하르님?"
가볍게 웃는 유하르의 미소는 따뜻하였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이번에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세우신 왕중의 왕(아르드리)이 아니십니까."
"과찬입니다. 유하르님. 아르드리라니요."

마하는 자신을 높여세워 불러주는 유하르의 깨끗하고 맑은 눈을 보며 자신의 친구들이 말했던게 옳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땐 코나흐타가 무안을 치기 전이었으니 유하르가 태자였을 때였는데 그때 유하르를 우연히 만났던 친구 셀키는 유하르를 일컬어 태자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었다.
호수처럼 맑고 고운 사람이어서 권력의 중심에 있는 건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도 유하르를 보게 되면 그의 깨끗함에 덩달아 정화가 되는 기분을 느낄꺼라고 말이다.
잠시 셀키의 이야기를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유하르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울라는 여지껏 한 번도 통일이 되어본적이 없는 나라이지 않습니까. 세 개의 소국들을 통일시킨 사람은 아르드리 그란아네헤님뿐이지요. 이렇게 여자의 몸으로 그런 훌륭햔 일을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해서라도 축하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다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르드리 마하 일다나 그란아네헤님."

자신의 풀네임마저 알고 있는 유하르의 축하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마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유하르가 딴 눈 파는 것을 잠시도 보지 못하는 크로우가 그들 사이에 끼었다.

"무슨 이야기중이야? 유하르?"
"아..응. 아르드리 그란아네헤님의 업적을 축하해드렸어."

유하르의 존대하지 않은 말에 마하가 놀라기도 전에 크로우의 아르드리? 라고 반문하는 말에 마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비록 사대 강국에 포함되긴 하지만 무안의 땅마저 귀속시켜버린 코나흐타의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 울라의 통일에 아르드리라는 칭호가 우습긴 할거였다.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고 한 손으로는 유하르의 손을 잡던 크로우가 턱을 만지던 왼손을 뻗어 마하에게 내밀었다.

"아..그러고보니 축하를 못해주었군. 아르드리 마하. 통일을 축하해."
결단코 현 코나흐타의 왕이 다른 사람의 일에 치하한 적이 없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치하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금방 알수 있었다.
따뜻한 시선으로, 마치 자신이 한 일이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대며 자신의 후궁을 바라보는 왕의 눈은 믿을수 없게도 사랑이 넘쳐흘러내렸다. 
마하가 한동안 코나흐타왕이 내민 손을 잡지 못하는 실례를 바라본 사람들은 그제서야 무관의 후궁 유하르의 존재가 일반적으로 총애하는 후궁의 수준이 아님을 깨달았다.




연회가 끝나고 각 국의 왕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는 크로우를 살피며 유하르는 자신의 시종 스렐을 손으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유하르님"
"응. 스렐. 시킬게 하나 있는데, 왕께는 비밀로 해야한다. 알았느냐?"
"네?"

느닺없는 주인의 말에 스렐이 주인을 바라보자 주인은 오히려 왕의 동정만 살피는 듯 했다.
그리고 혹시 들을까 목소리를 낮춘 유하르의 초조한 음성은 스렐이 주인을 모시고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티르 나 노이의 무희공연을 봤겠지? 그 중 제일 마지막에 나와서 춤을 추었던 그 여자를 오늘 밤 내 처소로 은밀해 데리고 와 줘. 명심해. 스렐. 왕께는 비밀이다."

스렐은 명을 내리고 왕께 다가가며 미소를 짓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릴수 없었지만 주인의 명에 따라 티르 나 노이일행이 묶는 거처로 종종 걸어갔다.





아사 유하르 [12]




"하핫. 이런 이런.. 유하르님께서 저 무희에게 상당히 반했나봅니다"

크로우의 사나운 눈빛에 움찔 놀라며 시선을 돌리는 로흘란의 왕 미주케나의 말에 크로우는 그제서야 유하르도 남자임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유하르를 여자다 남자다라는 성별로 인식한게 아니라 자신의 사람으로만 생각했기에 그도 여자를 안고 싶어할수도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그의 웃음이 보고 싶었고 그의 생기발랄한 눈이 보고 싶어서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렸고 그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그의 환한 미소를 보면 온갓 시름이 다 걷혔었다.

사랑할 시간도 모잘랐다.

허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는 무안의 태자였다.
자신과 같은 나이의 태자라면 분명 후궁은 부지기수였을테다. 자신도 그러했으니깐.
비록 자신처럼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의 여자를 안지는 않았겠지만 그도 분명 몇 몇 총애하는 후궁은 있었을터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남자에게 뒤를 맡기게 되고 여자를 한 번도 안지 않았으니 남자에게 안겨서 느낄수 있게 되었지만 여자에게 삽입을 하고 느끼는 쾌감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유하르.... 유하르?"
자신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 상대가 유하르라면 용서가 된다.
허긴 그와 관련이 된 일에 용서가 되지 않은건 없다. 뺨까지 맞고도 그에게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었다.
뺨정도야 얼마든지 내줄수 있다. 그걸로 그의 눈물이 그쳐질수 있다면, 그걸로 그의 눈에 생기를 돋을수 있다면..
유하르는 말 그대로 자신에게 있어선 아스니깐.

단 하나, 용서가 되지 않는게 있다면 그건 그가 다른 사람을 눈에 담는 일이다.
바로 지금처럼.


크로우는 유하르가 자신의 부름을 듣지 못한 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무희를 보았다.
동그랗고 작은 인형같은 무희의 외모는 그럭저럭 괜찮긴 하지만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모리안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오히려 평범한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매력적이긴 했다.
움직이는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았고 살짝 꺽이는 손목의 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서 메인의 무희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일테다.
연회 내내 지루한 듯 피곤한 기색을 보이던 유하르의 눈빛이 그 무희가 나오면서부터 달라지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것도 연 이틀씩이나.
애잔하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동작 하나하나까지 눈이 따라간다.
그것은 단순히 무희의 아름다운 동작에만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는 크로우는 허공에다 손짓을 했다.
다가온 샬비가 고개를 숙이자 그의 귀에 작게 명을 내렸다.


"저 무희와 유하르와의 관계를 알아봐. 지금 당장."
샬비가 물러나자 크로우는 자리에서 일어서 손을 들었다.
자신의 손짓하나에 음악이 끊어지고 중간에 춤을 추던 무희의 동작도 끊어지니 그제서야 자신을 돌아다보는 유하르의 눈빛을 곁눈으로 느낄수 있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당신의 뜻대로. 나의 사람. 나의 아스.
그러나 난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눈에 담는 건 절대 못 본다. 
뭐냐, 유하르. 이 무희에게 관심이 있는건가? 여자를 안고 싶은건가?
나로는, 내 마음으론 부족한게 있었나? 
그대,  부디 그대때문에 잠자고 있는 나의 뜨거운 피의 소용돌이를 자극하지마라.
살아 가질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가지고 싶은 너에 대한 나의 욕심을 더 이상 자극하지마라. 나의 아스여.



"오늘의 연회는 여기까지 한다. 그리고 오늘 이후의 모든 일정 역시 취소다."
브란을 비롯한 대신들과 여라나라의 왕과 사절단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았으나 아무도 코나흐타왕의 말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유하르. 나를 따르라"

자신이 홀을 빠져나오자 그제서야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를 신경쓰지도 않은 채 크로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를 따르는 유하르를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대전으로 향하는 복도의 가운데서서  음료를 마신 탓인지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세게 빨아당기며 그의 나긋한 허리에 자신의 몸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달콤한 체향과 함께 그의 입술이 주는 부드러움으로 인해 금방 자신의 것이 뿌듯해져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살짝 벌려진 입 안을 헤집고 들어가 그의 혀를 감싸안으며 마치 자신의 입 안으로 데리고 올려는 양 감아 당기자 조금 아픈 듯 유하르의 항의가 섞인 신음성이 터졌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크로우의 두 손은 유하르의 엉덩이를 덥썩 잡고 몸을 더 밀착시켰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도록 두 사람의 몸이 가까워졌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은 유하르의 입술을 빨아당기다못해 살짝 깨물기까지 하면서 그가 주는 달콤함에 젖어들기 시작했지만 크로우는 그를 안으며 처음으로 머리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였다.

"이틀동안이나 연회에 참석하느라 고생많았다. 이제 모든 연회를 취소할테니 푹 쉬어라."

겨우 입술을 뗀 채 말하니 유하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가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크로우..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난 괜찮아. 나흘동안의 일정으로 잡았던 거잖아.  당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고..."



그 무희때문인가. 유하르.
그 여자때문에 너의 눈이 그리 흔들리는가.
감히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을 입에 담는가. 나의 아스.
그렇다면 설사 그게 너라도 난 너를 용서치 않아.
절대, 네 눈에 담긴 것을 용서치 않아.


"쉿."
들끓는 마음과는 달리 머리속은 차갑게 내려앉는다.
다정한 목소리로 유하르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며 크로우는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쉬어. 유하르. 난 다른 왕들과 함께 술이나 한 잔 할테니 그대는 쉬어라. 좋은 꿈 꾸기를.. 나의 아스"

영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유하르가 어쩔수 없이 피나하궁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크로우는 프라가라흐의 검신을 바스러뜨릴려는 양 꽉 움켜쥐었다.


**


"이렇게 힘들게 만났는데 겨우 이틀밖에 못 보다니..이제 언제 다시 만나 피누알라.."

유하르는 십 오년만에 만난 동생 아네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어렸을 때 납치 되어 실종이 되었던 어린 동생이 이제 여인이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나리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아네는 그 당시 납치되었다가 꾀를 내어 가까스로 탈출을 하였지만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 했다. 그래서 무안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나이가 들어서야 그 기억을 찾은 것이었다.

"아네. 내가 왕께 말씀드려 티르 나 노이가 조금 더 얼스터에 머무르게 하면 안되겠어? 너희 단장도 코나흐타 왕의 부탁이라면 들어줄꺼 아니야. 응?"

아네는 슬프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 역시 여기에 더 머무르고 싶은 것은 피누알라의 마음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안되. 사실 단장인 몬안은 나의 신분을 모르는 걸.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날 살려준게 몬안이라고 어제 말했지? 그는 나의 구원자이자 나의 연인이야."

살짝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는 아네를 보며 유하르는 그녀의 사랑에 자신도 박수를 쳐주었다.

"와..정말? 아네. 너 그 사람 사랑하는거야? 어쩐지 어제 말할때 눈빛이 다르다 했지. 축하해 아네. 결혼 할꺼야? 응?"
"응. 코나흐타에만 갔다가 결혼하자고 말했었어. 그런데 그는 왕족과 귀족을 병적으로 싫어해. 좀 슬픈 과거가 있거든. 우리가 비록 그들때문에 살아가곤 있지만 말이야.  멸망한 나라이긴 하지만 이제와서 내가 무안의 공주였다는 걸 안다면 그는...."
"이런.. 더더군다나 코나흐타의 왕이 압력을 넣으면 네 입장이 더 곤란해질수도 있겠구나."
"으응. 피누알라가 코나흐타의 후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해서든 보고 싶어서 이리로 오자고 한건 나였거든. 물론 피누알라의 말은 하지 않았지. 내가 그를 속인걸 알게되면 그는 나에게 엄청 실망할꺼야. 싫어. 그런건."
"알았어. 아네. 걱정하지마. 왕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을테니.. 널 ..너만은 내가 지켜줄께. 아름답고 용기있는 아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는 유하르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며 아네는 유하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고는 하나 상대는 그 코나흐타 왕이 아닌가..
걱정이 안될수 없는 일이었다. 

"나와 함께 갈래? 피누알라. 몰래.. 빠져나갈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께. 응?"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형제의 눈빛에 스며든게 진심임을 알기에 아네는 두 번 권하진 않았다.
"코나흐타왕은..어때? 때리진 않아? 상처를 주진 않아? "

누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유하르는 그녀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 그는 나를 사랑하는걸. 너의 몬안이 너를 사랑하듯"
"하지만.. 그는... 그의 후궁들을 대하는...소문이 안 좋아서.."
"아네. 만약 누군가 너에게 나를 가르켜 왕좌를 노려 브리안을 죽인 파렴치한으로 말한다면 넌 어때? "
"그 따위의 망발을 하는 자가 있다면 당장 그 자의 목을 내가 쳐버릴꺼야. 말도 안되는소리를.."
"마찬가지야. 아네. 그가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가 사랑에 빠지기 쉬운 성격은 아니지만 이제는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아. "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듯한 아네를 보며 유하르는 그녀의 작은 몸을 당겨 안았다.
어릴 적 자신을 위로해주던 새가 이제 이렇게 커버려서 자신의 사랑을 찾아 떠난다고 한다.
이제서야 만났는데, 이렇게 어렵게 만났는데 다시 헤어질 걸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오는 유하르는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동생을 꼬옥 껴안았다.

"피누알라.. 너도 그를 사랑해? 응?"
유하르는 아네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짓었다. 
"응.. 많이..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어버렸어. 그는...사랑하지 않고는 베길수 없는 사람인걸."
"푸하하핫. 피누알라. 네 말에 동감하는 사람은 이 에린을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을꺼야."
"후훗..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는 자신을 믿지 않는 대륙의 모든 사람들보다 나의 믿음만을 따를꺼야."
"그를...믿는구나. 피누알라."
"응. 그를 믿어. 평생..그와 함께 할꺼야. 너도 몬안과 영원한 시간을 함께 하기를.. 너의 사랑에 축복만 깃들기를..나의 아름다운 아네."
"언제..다시 볼수 있을까.. 피누알라.."
"살아 있다면 또 볼수 있겠지. 그래도 이렇게 네가 건강할 걸 내 두 눈으로 확인하니 난 여한이 없는 걸. 난 코나흐타왕이 나에게 질려 나를 버리면 널 찾아 떠날려고 했어. 널 본 다음에 이 구차한 목숨 끊자고 생각했었거든."
"이런..그런 끔찍한 말을 하다니. "
"응. 이제는 하지 않아. 너를 만났으니깐. 그리고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깐."
"사랑해. 피누알라. 세상의 모든 빛이 그대에게 있기를.."
"나도 사랑해. 아네. 너만은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킬꺼야. 설사 다시는 널 만날수 없게 되더라도 아네. 널 잊지 못할꺼야. 평생.."
"나도. 나도 피누알라. 이렇게 만나게 된게 정말 꿈만 같아. 아아.. 이대로 헤어질수 밖에 없다니.."

격정적으로 끌어안은 두 사람 가운데 아네가 먼저 문가에 서 있는 왕의 모습을 보고 놀라 부복조차 하지 못한 채 입을 벌릴 뿐이었다.
아네의 경직에 그제서야 뒤를 돌아 본 유하르의 눈에는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는 눈동자로 다가오지도 않고 석상처럼 문 가에 기대어 서 있는 크로우의 모습이 보였다.
벌벌 떨고 있는 스렐과 샤치. 그리고 왕의 뒤에는 샬비와 스루드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서 있었다.
뒤늦게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 아네가 부복을 하는 동안에도 유하르는 자신을 노려보는 연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건 아주 놀라운걸. 유하르. 내 살아생전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을꺼다."
이명처럼 크로우의 귀에 계속 맴돌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도 단 한번도 뱉은 적은 없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유하르의 목소리였고  곧 헤어질 연인을 쓰다듬던 유하르의 손에 묻어나온 애틋함이 진심임을 아는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바라보는 시선엔 한치의 두려움도 섞이지 않았고 후회도 없는 듯 당당하였다. 아니 어쩌면 들켰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크로우는 자신의 가슴어귀에 매달려 있던 심장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깊숙히 뿌리박힌 나무처럼 문가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크로우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유하르의 앞에 다가와 어느새 검집을 빠져나온 프라가라흐를 당장이라도 올릴 듯 비스듬히 세웠다.
그런 프라가라흐를 보면서도 유하르의 시선은 크로우에게 꽂혀 흔들림조차 없었다.

"부정해라. 유하르. 내가 들은 말, 네가 이 여자에게 맽은 말 지금 내 눈 앞에서 부정해라. 유하르."
"........"
"내 말이 들리지 않는거야!! 뭘하고 있어. 당장 내 말에 대답을 해!!!!"
"........."

진정하자 진정하자 이 사람은 유하르다..라는 주문을 외우는 동안에도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리고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채 하얗게 탈색이 되었다.
이토록 아무런 생각조차 할수 없을 만큼 분노로 몸을 떤 적이 없었다.
여태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게 있으면 칼을 휘둘러서라도 해결을 보았기에 이렇게 화를 낼 일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유하르였다. 검으로 해결이 될리가 없는. 아니 그렇게 할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말해라. 잘못했다고, 다시는 네 눈에 다른 사람은 담지 않겠다고 말해."
"........."
"이 여자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라고!!!!"
".........."
"나에게 용서를 구할려면 맹세를 해라. 목숨은 살려두겠다. 이 여자와의 일 다시는 묻지 않겠어. 그러니 나에게 말해라. 유하르. 단지의 맹세라도 하란 말이다. 유하르!!"
"..........."
"유하르!!!!!!!!!"
"내가 잘못한게 없는데 무엇에 대해 잘못을 빌고 무엇에 대해 맹세를 하란 말이야. 크로우. "
"뭐? 잘못한게 없다고? 유하르..감히 네가 죽고 싶지 않고서야 ..."
"저..전하........"

놀란 아네가 크로우를 불렀다.

"부디..용서를..전하. 사실 전 무안의.."
"아네!! "
"피누알라. 행여나 나 때문에 네가 잘못된다면.."
"아네. 널 다치게 하진 않아. 설령 내 목숨이 위태로와도 널 다치게 하진 않아. 네 행복을, 네 사랑을 다치게 하지 않아. 아네."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이젠 아예 자신의 앞에서 서로의 애정확인을 하는 유하르와 무희를 보며 크로우는 유하르의 두 팔을 뒤로 돌려 자신의 한 손으로 결박을 한 후 프라가라흐를 그의 목에 겨누었다.

"네가 죽더라도.. 이 여자를 살리겠다고? 하핫. 누구 그렇게 하겠대. 널 죽이고 내가 설마 이 여자를 살려둘 성 싶었나? 유하르. 넌 그렇게 날 몰라? 알면서 내 앞에서 네 목숨을 들먹거리며 여자를 살리겠다고 말하는건가? 응? "

푸른 호수의 빛깔은 띤 깊은 눈동자가 슬픈 듯 가늘게 접혀졌다.
여전히 반성의 기미라고는 전혀 볼수 없는 안타까운듯한 시선이 누구때문인지 알수도 없었다.

"널 피누알라로 부르는 저 여자는 누구냐. 무안에서부터 알던 여자인거냐? 네 여자였었나? 응?"
"크로우..."
"날 미치게 하지 마라. 유하르. 여기서 더 이상 날 자극시키지 마. 마지막으로 말한다. 유하르. 저 여잔 누구야. 네 이름을 알고 있는 저 여잔 도데체 너에게 어떤 의미의 여자냐, 네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킬려는 저 여잔 누구냔말이다!!!"
"말이 그렇게 중요한가  크로우"
"핫, 그래 똑똑한 유하르는 말 하지 않아도 다 이해를 하시는 모양이군. 난 안 그렇다. 난 지금 당장 네 입에서 저 여자와 너의 관계를, 내가 들은 말에 대한 너의 부정을 여기서 들어야겠어!! 말하라. 유하르. 너에게 있어 저 여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 차라리 단순히 저 여자를 품고 싶었다고 말해라. 그러면 용서하지. 너도 남자이니 여자를 품고 싶기도 했겠지. 단 한 번일테지만 용서하마. 너니깐..넌 다른 사람도 아닌 넌 유하르니깐 용서하마. 저 여잔 네 하룻밤의 상대였나 유하르?"
"아니."
"그럼..그럼 그것보다 더 깊은 여자...란 말이냐. 내가 들은 바 그대로 네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여자...더냐.."
"크로우.."

미칠 것 같은 분노로 부정하지 않는 유하르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벌겋게 달아오르며 자신의 날카로움으로 상대의 피부를 찢기전에 먼저 화상부터 입히던 프라가라흐의 뜨거운 검신이 크로우가 유하르에게 들이대자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손의 뼈속까지 시릴정도로 차가운 감각에 크로우는 정신이 번쩍 들어 유하르를 거칠게 밀어내었다.
바닥에 넘어진 유하르를 내려다보며 크로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감금시킨다. 내가 허락할때까지 물 한 모금도 주지마!! 그리고 이 여자 역시 다른 방에 감금시켜!!"
"크로우..아네는 풀어줘. 아네는 가야해."
"뭣들하는 거야!! 내가 하는 말 못 들었나???"

그제서야 분주하게 움직이며 샤치가 여자를 끌고가자 유하르의 시선이 여자의 마지막까지 따라간다.
자신이 눈 앞에 있음에도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유하르의 모습을 보며 크로우는 유하르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를 가졌던 검이 내뿜기 시작한 차가운 냉기는 손이 시릴정도였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건가. 프라가라흐.
네 주인의 부정을 내가 용서하란 말인가.
어떻게..어떻게 해야하는지 가르쳐다오.
어떻게 해야 그의 마음을 얻을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의 눈이 나만을 바라볼수 있는지 말해다오.
나의 검. 프라가라흐.





아사 유하르 [13]


"이게 무슨 일이야 크로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친구에게 시선조차 들지 않으며 크로우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아.. 뭐가 말이냐. 잔소리꾼 브란."

취하고자 마시는 술은 마셔도 마셔도 취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머리속이 선명해지고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는 다른 사람을 향한 연인의 고백만이 머리속에서 다시 재생이 되고 또 재생이 되었다.
당장 자신의 손으로 유하르의 목을 조르고 싶다가도 멈칫 멈추고마는 심장이다.
자신이 화가 난 걸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말도,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 유하르의 단단한 고집을 꺽을수도 품을수도 없어 선택한 것이 눈에서 멀어지자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화도 좀 가라앉겠지 했었는데 유하르의 거처를 나오자마자 가슴속이 더 듫끓는 건 또 뭔가.
그를 향해 화를 참지 못하고 있는 이 순간순간에도 그가 보고 싶고 그를 안고 싶은건 또 뭐란 말인가.


"갑자기 연회를 취소하질 않나 유하르님께 갔더니 어제부터 물 한 방울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면서? 티르 나 노이측에선 무희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고.. 설마 유하르님과 연관이 있는거야? 내 말 듣고 있어?? 무슨 일이냐고!!!"
"하핫..똑똑한 브란. 뭐 잡히는거 없나? 응? 여자가 없어졌고 유하르는 감금이 되었어. 하핫.. 뻔하잖아."
"서..설마..유하르님이 그 무희를??"

브란은 부정의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마치 술이 시원한 음료수라도 되는 양 벌컥벌컥 마셔대는 크로우를 바라보았다.
저 성격에 유하르의 부정을 보면서도 유하르를 살려둔 것만 해도 용하다.

"이야기 좀 해. 어떻게 된건데?"
"훗. 뭐 이야기할꺼라도 있나? 아마 무안에서부터 안면을 튼 사이였겠지. 그러니 유하르가 자신의 목을 걸면서도 그 여자를 지킬려고 한거겠지. 하핫.. 이렇게 오만하고 방자한 후궁은 생전처음이야. 그러면서 그 깨끗한 눈이라니. 오히려 날 탓하는 그 눈이라니. 하하핫. 브란. 제일 우스운건 뭔지 알어? 자기 잘못을 전혀 뉘우칠 생각이 없는 부정한 후궁을 차마 내치지 못하는 내 자신이야. 다시 돌아오기를 구걸하고픈 가난한 내 마음이다. 브란.."

큰 소리로 웃다가 나중엔 거의 낮은 목소리여서 브란은 크로우의 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크로우.. 오다가 유하르님을 뵙고 왔어. 말을 전해달래."
자신을 바라보는 왕의 눈에 어린 슬픔은 오랜 친구인 브란조차 처음보는 종류였다.
유하르란 이름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크로우가 들고 있던 술잔이 멈칫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하르의 말이라면 한 톨이라도 빠짐없이 듣고싶어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브란의 왕의 손에서 술 잔을 빼내었다.

" 내가 건네다주는 물도 마시지 않았어. 알지? 유하르님은 스스로에겐 강한 사람이야. 그가 물 한 방울도 마시기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그 누구도 그에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할수 없어. 그를 찾아가봐. 그래서 이야기를 해. 이렇게 화만 내다가 유하르님의 마음마저 돌아서면..."

차마 마저 말을 맺지 못하는 브란의 말을 공감하며 크로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브란의 말대로 그는 칼과 같은 성질이 있는지라 한 번 마음을 잡으면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마음마저 돌아선다면.......... 아마 그는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다시는 자신을 그렇게 따뜻한 눈으로 봐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그래도 못 놓아준다. 유하르. 
여자를 품고 싶다면, 아아..그래 단 한 번 쯤은 내 봐주지. 그러나 내 곁을 떠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넌 영원히 내 곁에 있어야 해. 널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유하르.
아아..그래도 다른 여자를 품는 유하르라니... 젠장, 정말 힘들군.


크로우는 피나하궁으로 한 번 옮기기 시작한 발을 제어하지 못하고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스스로 어이가 없어 크로우는 유하르의 침실에 들어서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며 사랑을 운운하고 목숨걸어 지키겠다는 말은 한 연인을 단 칼에 내리치기보다는 일단 감금시킨 후 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자고 생각했었다.
비록 분노로 머리속이 달그락 달그락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지만 차분히 처리를 하자고 생각을 했을때만해도 유하르에 대해 냉정하게 대할수 있다 여겼다.

거친 성정을 표현하듯 문을 소리나게 열고 들어서고는 한동안 움직일수 없었다.
단 하루였다. 그것도 그의 부정을 벌하기 위한 단 하루였을 뿐이었다.
크로우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유하르의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이 사람을 보고파했는지 알수있었다.

정말 물 한 모금 안 마신건지 기운을 잃은 채 들어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서린 슬픔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용서하고픈 마음이 들어 크로우는 스스로 자신의 감정에 기가막혔다.
당장이라도 무릎이라도 꿇어 간구하고싶었다.
제발.. 날 좀 봐달라고, 날 좀 사랑해달라고 그렇게 애원하고 싶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연인을 보자마자 들었는 생각이었다.
다가가 뺨에 손을 갖다대니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거칠었다.
욱신, 거리는 심장은 짙은 통증을 호소했다. 이건 이 사람을 고통주기 위한 벌이 아니라 자신을 고통주기위한 벌이었음을 크로우는 그제서야 알수 있었다.


"미련한 유하르.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나. 응? 스렐더러 왕께 고하지 말라고 하고 간단한 요기정도는 할 수 있는거잖아. 정말 물도 한 모금 입에 안 댄거냐?"
"으응.."
자신이 내린 명령이건만 힘없는 유하르의 대답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스렐!!!!"
"네..전하"
"당장 유하르가 먹을 것을 준비해!!!"
"네 전하."

자신의 주인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다 호통을 칠려다가 한 호흡을 참은 크로우는 스렐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명령을 한 후 의자에 앉아 마주 앉은 유하르의 팔을 당겨 자신의 오른쪽 무릎위에 앉혔다.
라인에서 보았던 맑은 호수처럼 투명한 연 푸른 빛깔의 눈동자를 보니 자신을 갉아먹던 분노와 화가 서서히 가라앉는게 느껴졌다.
연인의 부정은 도무지 참을수 없지만 그 연인의 눈을 볼수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죽음과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브란의 말에 정신이 퍼득 들었었다.
유하르가 자신을 외면하기 시작하면, 그나마 자신에게 조금쯤은 마음을 열었던 유하르의 마음이 식어버리면 그는 거짓이라도 자신을 예전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고집스러운 면을 잘 아는 크로우는 그런 상상에 등골이 서늘해 행여 짧은 찰나의 시간에 혹시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피나하까지 달려온 것이다.

"내 마음도 좀 이해해보라고. 유하르"
말이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부드러워진 말투에 그제서야 자신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유하르를 보며 크로우는 아직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유하르가 행여 도망가지 못하게 꼭 안았다.

"잘못한거야. 크로우. 당신이 잘못했어"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브란이 들었다면 놀라 뒤로 넘어질만큼 유하르를 보자마자 머리끝까지 치솟던 분노도 화도 가라앉힌 크로우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당신은 말 뿐이었다고. "
"응??"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나, 아스라고 했던 말이나.."
"그게 무슨 말이야. 유하르. 난 절대.."
창 밖을 바라보던 물빛과도 같던 눈동자가 처연하게 내려앉은채로 자신을 바라보자 크로우는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마법진에 걸린 마법사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웃음은 안개처럼 흐릿하였다.

"날 아스처럼 믿는다 하고선 당신은 전혀 날 믿지 않았어. 난 그것에 화가 난거야."
행여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이 나올까 먼저 무희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듯 유하르가 먼저 그 일을 화두로 삼아 말을 건넸다.
아스앞에서 무엇을 숨기랴, 
크로우는 제발 날 떠난다는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내심 기도하며 경건히 자신의 하나뿐인 아스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난 익숙하지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하는...그런 일. 사람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사물도 좋아해본적 한 번도 없었다. 이런.. 말로 표현할수 없는 감정들. 이건 나에게 위험한 감정임과 동시에 절대 놓칠수 없는 내 목숨과도 같은, 내 심장과도 같은 감각이야. 유하르. 널 온전히 가지기 위해 그 무엇도 다 할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네가 나 아닌 다른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걸 보고 내가 제정신이었다고 생각해? 내가 당신의 환심을 사기위해 거짓으로 아스라 불렀던 것 같아? 내 마음은 진심이다. 유하르.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에게 속인 거 하나도 없어. 날 다 보여주고 싶었다고. 내가 잘못한건가? 당신이 안고 있는 여자를 질투한 것이 당신을 믿지 못한것이 되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건가? "
"왜 화부터 내.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안 했었잖아. 날 하나도 안 믿었었잖아."
"하아.. 유하르. 네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게 싫은 내 욕심은 왜 모르지? 당신을 믿는 감정보다 질투가 더 컸다고. 그러니, 날 사랑해줘 나의 유하르. 당신의 마음을 알수 없으니 내가 믿음보다 질투가 앞서는거야."

유하르가 마주보며 목을 끌어안자 크로우는 그의 등으로 손을 뻗어 품으로 당겼다.

"나도 처음이야. 누군가에게 내 모든 것을 던져주는 건.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무릎에 앉을리가 없잖아. "
"유..유하르..."
크로우는 믿을수 없는 말을 뱉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상체를 당기자 쑥스러운지 차마 시선을 못 맞추는 유하르의 붉어진 목덜미를 볼수 있었다.
"맙소사. 유하르.. 다시 다시 한 번 말해줘. 응? 유하르"
다시 덥석 자신의 품에 안기면서 얼굴을 가린 유하르의 작은 웅얼거리는 소리는 분명 '사랑해' 라는 말이었다.
이 에린을 다 통일시킨들 이보다 더 기쁘진 않을 것이다.
감당하지도 못할 벅찬 감동에 크로우는 그가 부끄러워하던 말던 그의 입술과 온 몸에 키스를 하였다.

피와 살속에 숨겨져있던 심장이 뚜렷이 주인을 알아보고 격렬히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다..다시. 응? 뭐라고?  다시 한 번만 말해봐 유하르. 응?"
"언제부터인가는 나도 몰라.. 십년전인지..아니면 나를 아스라고 불러준 그 때부터였는지.. "
"하..유하르... "

유하르를 꼭 껴안은 크로우의 머리속에는 이미 아네의 존재는 없었다.
아니, 그 어떠한 생각도 할수 없었다. 언젠가는 내 품에 온전히 가둘것이라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크로우 자신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었다.
난생처음 목메이게 바라던게 이루어졌는데 다른 잡생각을 할래야 할수가 없는 것이다.
당장 일어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감당하지도 못할 벅찬 감동에 크로우는 그가 부끄러워하던 말던 그의 입술과 온 몸에 키스를 하였다.
답삭 자신의 품안에 들어온 꼬물거리는 생명이 너무 사랑스러워 크로우는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고 그에게서 아네의 일을 들은 것은 해가 사라진 밤이 되어서였다.

그동안 스렐은 허겁지겁 준비한 음식이 식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차마 고하지 못하고 문 밖에서 서성이고만 있었다.




아사 유하르 [14]


아네는 자신의 이기로 하나뿐인 오빠를 곤란하게 한 것 같아 감금된 상태에서도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고 좁은 방안을 왔다 갔다 하였다.
코나흐타엔 없는 남자후궁자리까지 차지한 피누알라지만 그의 상대가 누구인가. 죽음의 신 크로우 크루아흐가 아닌가.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는 직업인만큼 귀동냥도 많이 한다.
에린에서 가장 뛰어나고 역대 어느 왕보다 정복욕이 강해 그의 손아래 귀속된 소국의 수는 이미 열이 넘었고 에린의 오대 강대국이자 자신의 모국인 무안마저 속국으로 취했다.
무안을 취함으로써 에린땅의 반에 가까운 영토를 차지하게 된 코나흐타의 왕은 친구로 삼기도 힘들지만 적으로 삼기엔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다.
에린 최고의 검에 그에 걸맞는 실력, 그리고 왕으로서의 모든 자질을 다 갖추었다는 남자의 말을 그 누가 거역할수 있을까.
브리안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자신만은 꼭 지켜주리라 다짐하는 피누알라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몬안을 설득시켜 코나흐타까지 온 것은 살아있는 그를 멀리서나마 보기를 원했기때문이다.


"피누알라...제발..."
아까 보았던 검의 날카로움이 차라리 자신의 목에 드리워졌다면 마음은 차라리 편안할 것이다.
피누알라의 고집스러운 면을 아는지라 더 불안한 아네였다.


"크루아흐전하 드십니다"
느닺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아네는 급히 부복을 하였다.

설마..피누알라를 죽이고... 나를... 아..피누알라..............몬안...


"앉아라"
왕의 명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왕의 시종이 다시 한 번 왕의 명을 말해주자 그제서야 아네는 일어서 왕이 권하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가인이나 무희는 시종과도 같은 신분이었다. 
귀족과 왕족 앞에서조차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신분이건만 왕이 가르킨 곳은 왕의 맞은 편에 있는 의자였다.

"내 말을 못 들었나 무희."

낮은 왕의 목소리에 움찔 놀라 왕이 권한 의자에 앉았다.
왕의 명을 잠시 머뭇거려도 항명이란 이유로 왕은 당장 칼을 뽑아 목을 칠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칼을 뽑아 횡포를 안 부리고 오히려 마주 앉기를 원하는 것만으로도 왕은 소문보다 훨씬 나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희미하게 하면서 아네는 당장 피누알라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무희의 신분으로 왕의 명령없이 먼저 말을 꺼낼수 없어 목이 바짝 타올랐다.

"이름이 아네라고?"
"네..전하"

이름만 확인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왕의 침묵을 견디다 못해 아네는 주먹을 꽉 쥐며 먼저 왕에게 말을 건넸다.
이래도 저래도 죽는 목숨이라면 피누알라의 신변부터 확인해야만 했다.

"전하..감히 여쭙건데 피누알라는 어찌 되었는지.."
"후훗,."

호통이 아닌 낮게 깔리는 웃음소리에 아네는 고개를 조금 들어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올라가있던 눈꼬리가 살짝 웃고 있었다. 
희미한 붉은 기운이 서린 눈동자는 위협을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으로 반짝 거리는 것이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듯 아득하니 평화롭기까지 하였다.

"전하..."
"똑같군 그래. 너도 네 목숨보다 다른 이의 목숨이 더 중하더냐. 무희의 생활을 했다면 방금 네 행동이 어떤건지 알텐데"

살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코나흐타왕의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나른하였고 왕이 지금 믿을수 없게도 자신과 대화를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오랜 무희생활로 몸에 배인 눈치로 아네는 알수 있었다.

이런 사람앞에 거짓이란 삶의 연장이 아니라 단명이 될게 뻔하다. 
아네는 친구와 대화를 하듯 편안하게 말하기로 작정을 했다.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쉽게는 되지 않겠지만.

"피누알라는..."
"유하르라 불러라. 피누알라는 죽었지 않나. 그는 유하르다. "
"네.전하. 어젠 말씀 못 드렸습니다만 그는 저의 하나뿐인 혈육입니다. 혈육이니 궁금한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어찌 되었는지요 전하."
"후훗..역시 유하르도 그러하더니 너 또한 그러하군. 난 혈육따윈 타인과 별다를게 없다 여겼는데 유하르는 그렇치 않더군."
"가족이니깐요."
"가..족이라.."
"떨어져있어도 매 보고 싶고 걱정이 되는게 가족입니다. 지칠때 돌아가 쉴수 있는, 그리고 오랜간만에 찾아온 가족을 아무런 말 없이 품안에 안을수 있는 것이 가족이 아니겠습니까. 가족은 떨어져 있어도 한 울타리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네 가족은 유하르뿐인건가?"
"아닙니다. 전하.  가족이란 범위에 제가 말씀드린 혈육도 있겠지만 꼭 혈육만이 가족은 아닐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될수도 있고 피가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면 그는 가족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래? 그럼 나도 유하르의 가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야 전하의 뜻이라면.."
"아니, 내 뜻이 아니라 유하르가 그렇게 생각할수 있냐는 말이지."

왕의 말을 봐서는 유하르의 목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싶은 아네는 내심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왕과 마주앉아 이토록 편안하게 잡담을 해도 되는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사이에도 아네는 불안했다.
여러나라 왕들의 공통된 성격이란 바로 변덕스러움이었으니깐.
하지만 최악의 경우 유하르와 자신 둘 다 주검이 된다고 생각했던 아네인지라 과감히 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수 있었다. 

"그건 전하의 재량이겠지요.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유하르는 고집은 세어 그가 원치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의 뜻만으로는 유하르의 가족이 될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치. 그만큼 고집스러운 이도 없지"
"그는...........살아있는거지요? 전하?"
"음..글쎄.."
"전하.. 제가 고집부려 그를 만났습니다. 벌을 하실려면 부디 저에게 내려주시고 유하르를 어여삐 여겨주시옵소서."
"내가 그와 너를 살려준다면 넌 무엇을 나에게 줄수 있나?"
"네?"
"아..정말 치졸하기 그지없군 그래. 하지만 뭐, 만약 성공한다면 이쯤이야.. 아네. 그와 너를 살려줄테니 내 부탁 하나 들어다오."

대답도 못한 채 아네는 왕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무례임도 알면서도 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속임수도 아닌 것 같은데 부탁이라니..그게 무슨 말인가.
목숨을 살려준다는 왕이 원한다면 팔이나 다리도 썩뚝 잘라 줄수 있다. 
그런데 명령이 아니라 부탁? 목숨을 살려주는 댓가로 부탁?
생전 그 누군가에게 부탁이란걸 해 본적이 없을 것 같은 왕이 댓가를 걸며 하는 부탁이란 도데체 무엇이란 말인가.

"부탁이긴 하지만 꼭 들어줘야만 한다. 물론 네가 들어주지 않아도 너나 유하르의 목숨엔 지장이 없다. 아네. 들어줄수 있나?"
"무..물론 입니다. 전하. 그 어떠한 명이라도.."
"쯧. 명이 아니라 부탁이라 하지 않나. 그대 오빠의 고집을 그대가 꺽어주길 바래. 그대도 아니되면 휴..포기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포기가 안 되는군. 다른 방법을 모색해보는 수 밖에.."

유하르가 왕에게 맞서 고집을 피우고도 상처하나 없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그건 기적이다.
아네는 아무리 상상을 해도 떠올려지지 않는 왕의 그 부탁이란게 무엇인지 알수 없어 궁금했다.
유하르가 절대 안된다고 고집을 피운, 그래서 왕이 무희에게 목숨을 댓가로 부탁씩이나 하는게 도데체 뭐란 말인가.

홀홀단신으로 포로가 된 유하르가 가진 것이 보석따위는 아닐 것이고 - 그런거야 유하르가 설사 지녔다고 해도 빼앗으면 그만이고 왕이 가진게 오히려 값어치가 더 있을 것이다 - 아네는 아무리 생각해도 왕의 부탁을 들어야할만큼 유하르가 가진 귀중한 것을 헤어리지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화를 내도, 애원을 해도 유하르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아네. 네가 그를 설득시켜다오."
"전하. 말씀하시옵소서. 제 목숨마저 구해주셨는데 무엇인들 못하리오까. 무엇을 그에게 설득하면 되올런지요."

긴장으로 꿀꺽 침을 삼킨 아네의 머리위에 떨어진 왕의 말을 믿을수 없어 아네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난 유하르를 왕비로 맞이하고 싶다."
"와..왕비요??"

말도 안 된다는 듯 놀란 눈으로 왕을 바라보자 왕은 난처한듯 손을 저었다.

"아아..설교는 듣지 않아. 유하르에게 왕비가 왜 안되는지 수백가지의 이유를 수백번 들었으니깐. 넌 그에게 그 타당성을, 그 필연성을 깨우쳐주어서 수락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내 부탁을 들어줄수 있겠나 아네."
"전..전하..하지만 왕비는.."
"설교 듣지 않는다 했다. 들어줄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그..그러면 한 가지만..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전하."

또 싫은 소리를 들을까 가볍게 인상을 구긴 왕은 곧 체념한 표정으로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왜 유하르를 왕비로 맞이하실 생각이십니까. 남자후궁이 왕비가 된 적은 에린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내 묻지. 넌 티르 나 노이의 단장과 곧 결혼할꺼라 들었다. 왜 결혼하지?"
"당연히.. 두 사람이 사랑을................전하??"

유하르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을 했어도 왕이 유하르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다고 해도 아네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왕에게 있어 후궁이란 존재는 잠자리를 위한 사람이지 사랑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으면 모를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자후궁이란 그야말로 쾌락만을 위한 것이고 설사 유하르가 왕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해도 그건 왕이 흘린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코나흐타의 왕이 남자후궁따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에린의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 착각에 빠진 형제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아네였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무희의 무례를 꾸짖을 생각이 전혀 없는 왕은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는 게 더 억울한듯 불만을 토로했다.

"역시 안 믿는군 그래. 좋아. 뭐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내 마음을 호소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믿건 안 믿건 상관없지만 왜 유하르마저 믿지 않는지 모르겠군. 내가 그만큼 그에게 사랑한다 말을 해도 믿지 않아. 아니, 지금 내 마음은 믿는 듯 하지만 그 기한을 믿지 않은 듯 하더군. 나에게 있어 후궁은 성노와 다를바가 없다. 금관을 하사하는 것도 시종장이 대충 알아서 하지 내가 누군가를 정하여 총애한 기억은 없어. 그런 후궁의 자리에 나의 유하르, 나의 아스를 두란 말인가."
"아...아스?"
"말도 안되는 소리. 다른 사람들의 시선따윈 신경쓴 적 단 한번도 없으나 유하르는 아니다. 그 누구라도 유하르를 나의 그 쓰잘데 없는 후궁으로 보고 취급하는 건 절대 용서못해. 본 국에선 왕비의 자리에 오를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지. 왕비는 왕이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이자 본 국에선 왕 다음의 권력을 지닌 자리라 대대로 대신들은 왕이 선택한 왕비에 대해 왈가왈부할수 없다. 왕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직접 왕비를 선택하는데 있으니깐. 내가, 나 크로우 크루아흐가 왕비로 삼고 평생을 같이 하고픈 사람은 유하르. 그 뿐이다. 내 말에 거역하거나 잔소리를 들여놓는 자 있다면 웃으며 그 자의 목을 치리라. 허나 한사코 거부하는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유하르다. 그리고 난 그를 이길수가 없어. 아네."

왕비라니... 이건 총애의 수준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사랑이라니, 아니, 그 무엇보다 놀란 단어는 '아스'.
분명 왕은 유하르를 가르켜 자신의 아스라 칭했다.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콧웃음을 치며 검을 겨눌 것 같은 무신국가 코나흐타의 왕 크로우 크루아흐가 후궁에게 아스란 접두어를 붙인다니..

아네는 믿을수 없는 단어의 열거에 놀란 심장의 두근거림을 진정시킬수가 없어 왕의 부름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너를 믿겠다. 그를 설득시켜다오. 그래서 그 누구도 유하르를 비웃을수 없게, 내가 평생 그의 곁에 있을수 있게 왕비를 수락하라고 그에게 말해다오. 네 말대로 그의 가족이 될수 있게...부탁한다 아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지한 왕의 음성에 아네는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진심으로 깊이 부복을 하였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냉담한 성격의 부모님이 아닌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 항상 궁전의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던 유하르였다.
어린 나이에 그를 제대로 위로도 해주지 못해 그저 어설픈 말대신 노래를 불러주었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의지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가르킨 태자의 길을 힘겹게 가면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의 모습과 브리안의 모습을 비교하곤 했었다.
유일한 동무였던 자신마저 없다면.. 그가 얼마나 외로워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지끈 아파오곤 했던 아네였다.
그런 그가 코나흐타 왕의 후궁이 되었다는 소식에 이번엔 또 얼마나 힘겨울까.. 생각을 하면서 코나흐타로 오기전까지 밤 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었다.

그렇게 외로웠던 그를.. 그렇게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를 이토록 사랑해주는 이가 있다니..

아네는 눈물을 감출수가 없었다.

"전하..고맙습니다..  유하르를 그토록 사랑해주셔서.. 그처럼 아껴주셔서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전하.."
"아아..뭘. 그는 사랑하지 않고서는 베길수가 없는 사람인걸."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왕의 말에 아네는 왕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펑펑 울고 말았다.



**



막무가내로 연회를 중지시킨 왕이 이틀이나 지난 후에 마지막 연회를 연다는 말에 차마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각국의 손님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모두 참석했다.

이틀전과는 다르게, 아니 생전 볼수 없을 것 같은 크루아흐왕의 환한 미소를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못했다.
왕비나 앉을수 있는 왕의 옆 자리에 소문의 후궁, 무안 태자를 앉히고는 연신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터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공연으로 티르 나 노이의 무희의 춤이 끝나자 크루아흐왕은 방금 전 춤을 추었던 무희를 불렀다.
방탕한 왕으로 소문이 났기에 공개적으로 무희에게 침수발을 들게 하려나, 라는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것외엔 왕이 무희를 부를 일이 없으니깐.
하지만 뜻밖의 웃음을 보여준 왕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또다시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이름이 뭐냐. 무희"
"아네입니다. 전하."
"아네라.. 춤이 훌륭하구나."
"감사하옵니다. 전하."
"티르 나 노이의 단장은 누군가"

티르 나 노이의 단장인 몬안이 왕의 부름에 달려나와 아네의 곁에 부복을 하였다.

"티르 나 노이의 단장 몬안입니다."
"그대가 단장이었군 그대의 선물 고맙다."
"화..황송합니다. 전하."

이유없이 사람의 목을 쳐도 미안하단 말을 몰랐고 생일선물로 보석을 다섯수레로 갖다 받혀도 고개만 끄덕이지 고맙다는 말을 모르던 왕이 겨우 가인집단인 티르 나 노이의 단장에게 한 인사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크로우는 고맙다는 듯 자신에게 잡힌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을 가볍게 쓰다듬는 유하르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서야 이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게 무엇인지 알것 같았다.
보석이나 색다른 선물을 받았을때보다 더 환하고 밝은 미소를 보여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가는 행복해보였다.
그 행복자락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또한 뿌듯하게 만족해지는 것을 느끼며 크로우는 자신이 유하르에게 준비한 선물을 몬안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대 내 청을 들어줄수 있겠나"
"무..물론입니다. 크루아흐 왕이시여."
"아네라는 무희의 춤이 내 마음에 아주 흡족하게 들었다. 매년 내 생일때 저 무희를 데리고 코나흐타에 와 줄수 있나. 물론 경비는 후하게 쳐주지"
"화..황공하옵니다 전하."
사람들의 놀란 시선과 마찬가지로 동그란 눈을 뜨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유하르의 시선에 뻐근하게 충만되어지는 가슴속을 쓸며 크로우가 뒤로 손을 뻗자 샬비가 준비해놓은 물건을 몬안에게 건넸다.
시종이 건넨 물건을 바라본 몬안이 놀라 고개를 들어 크로우를 바라보자 크로우는 자신의 왕비에게 주는 첫 선물을 다른 이에게 주면서도 기뻐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건 나 크로우 크루아흐를 상징하는 용의 문양이 새겨진 금패이다. 다니다가 궁해 그것을 팔면 제법 금값이 나올테지만 그것을 근처 성으로 가져가는게 더 득일것이야.  코나흐타의 어디에서든 그 금패를 지니고 있다면 그댄 나의 보호를 받을 것이며 어느 성엘 가더라도 그대를 나처럼 반길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코나흐타에서만큼 위력을 발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대들을 업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곧 나와 같다는 말이 되니깐"
"저..전하.."
믿을수 없는 선물에 몬안이 제대로 대답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크로우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다짐을 하였다.
"대신, 그댄 나와의 약조를 지켜야한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저 무희와 함께 코나흐트를 방문하여 나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알겠나"
"네..네..전하."

거의 모든 나라의 수장이 모인 자리에서 말한 코나흐타왕의 발언과 그의 금패로 인해 명실상부 코나흐타를 배경으로 두게 된 티르 나 노이를 그 어느나라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헤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누가 코나흐타의 왕에 대적하고 싶겠는가.
웅성거리는 틈을 타 청량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려퍼졌다.

"그대, 티르 나 노이의 단장이 가진 그 금패의 효력은 코나흐타에서와 마찬가지로 울라에서도 똑같이 통용될 것이다. "
울라의 여왕 마하의 말에 크로우가 마하를 바라보았고 마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크로우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고맙다는 듯 유하르를 잡지 않은 손을 가볍게 들어보여주었다.

"크..크로우.."
곧 눈물이라도 떨굴 듯 그렁그렁 습기찬 유하르의 푸른 물기가 기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크로우는 짓궂게 그를 놀렸다.
"이런..울보가 다 되어버렸군."
"고마워..크로우..고마워.."
"후후. 그대가 아네와 지금 헤어지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제 잠을 설친것을 내가 모를줄 알았나. 내 선물이다. 유하르. 나의 왕비가 되어주는 첫번째 선물이다. 기대해라. 나의 유하르. 앞으로 어떤 선물이 그대를 기쁘게 할런지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촉촉한 눈을 하면 곤란하다고. 응?"
사람들의 앞에서 대담하게 자신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는 유하르의 용기를 결코 외면할리가 없는 크로우는 그를 자신에게 당겨 입술을 여니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혀를 향해 감겨오는 유하르를 붉은 살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크루아흐왕을 사로잡은 무안의 태자를 더 이상 뒤에서 험담을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연인의 행각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인은 브란이 다가와 두 사람을 떨어지게 할 때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사랑한다. 유하르. 나의 아사 유하르. 당신을 사랑해."
"으응. 나의 왕. 크로우 나도 당신을 사랑해."

피나하궁의 닫혀진 문은 다음 날 한 낮이 되어도 열릴줄 모르고 연인을 가두어두었다.
그리고 전 에린의 땅을 놀라게 하였던 남자후궁을 왕비로 삼는다는 경악스러운  코나흐타왕의 전언이 퍼진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사 유하르 [ 에필로그 ] 



"브르타뉴의 구석진 곳에서 머리까지 썩었나? 스렝. 감히 네가 지금 내 말을 거역하는 것이냐!!!"
"전하..그것이 아니옵고.."
스렝은 왜 안 도와주냐는 듯 원망어린 시선으로 브란을 바라보았지만 다른 때 같았으면 왕의 부당함을 충직하게 고했을 브란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을 보고 스렝은 왕의 호통이 브란때문인듯 그를 원망하였다.

"하지만 소국이 아닌 에린의 사대강국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까. 미를 공격하면 미와 우호적인 국가인 라인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소한 이유로 미를 치는 것은.."
"뭐? 사소한 이유??"
느닺없이 살기를 띄는 왕의 음성에 전장에서 구른 스렝조차 긴장으로 말을 멈추었다.
"뭐라고 했나. 사소한 이유?? 그게 사소한 이유인거냐. 브란."
다행이 화살이 브란에게 돌아가자 안도의 숨을 쉬던 스렝은 브란의 말에 다시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무슨 말씀을. 그것이 어떻게 사소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까. 공격을 해 이 기회에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도 그런 망발을 안 뱉지 않겠습니까?"
아니..저것이 얼스터에만 있더니 미쳤나? 라는게 솔직한 스렝의 심정이었다.

"스렝!!"
"네..네 전하."
"브란의 말을 들었을테지. 그럼 한 달 아내로 출전을 준비하라!! 이번엔 나도 직접 갈 것이다!!"
"저..전하.."
"명령이다. 스렝. 당장 준비하라!!!!!"

왕이 명령을 내리고는 자리를 비우자 스렝은 기다렸다는 듯 브란에게 따져들었다.
"브란!!! 미쳤어? "
"뭐가?"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 태연히 서류따위를 챙기는 브란의 팔을 휙 잡아채며 스렝은 으르릉 거리듯 말을 뱉았다
"전장에 안 나가봐서 모른가 본데 전쟁이란게 아이들 놀음처럼 보이나? 응?? 말려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왜 부추겨? 전쟁이 없어 이제서야 백성들도 한숨을 돌리며 평화롭게 사는게 그렇게 꼴사나웠나? 응??"
"아아..진정하라고 스렝. 누가 전쟁을 한대?"
"뭐??"
기가막힌듯 어이없는 눈빛을 하고 있는 스렝을 진정시키듯 브란은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이제 가야지."
"어딜 간다는 거야!!!"
"나도 전쟁은 싫다고. 누군 피만 보면 환장하는 줄 알아? 네 말대로 요즘 같이 평화로울 때가 언제있었다고 나도 평화를 즐기는 평화주의자라고 왜 이래"
"그런데 왕껜 왜 그렇게 말한거야!! 말이 안 맞잖아. 앞 뒤가 안 맞다고!!"
"거참 말 많네. 그러니깐 가자는거 아니야. 따라와 스렝!!"
"아, 그러니깐 이야기하다 말고 어딜 가냐고!!"
"훗. 우리의 아스께"

에린땅의 가운데에 위치한 미의 현 왕 도바르가 코나흐타의 왕비가 남자라고 콧웃음을 치며 왕비의 천함을 비웃었던 일이 바람을 타고 코나흐타까지 넘어오자 코나흐타왕은 당장 미를 쳐들어간다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물론 기분 좋은 일은 아니나 정식으로 공문을 띄워 사과를 받아내면 그만인 일을 가지고 왕이 전쟁까지 준비를 하라고 하니 브르타뉴에서 수도 얼스터로 돌아온지 얼마 안되는 무장 스렝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연회에서 잠깐 왕비를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소문과는 달리 영악한 느낌도 들지 않고 오히려 단아한 것이 브란처럼 글이나 읽는 문장처럼 보여 호감이 갔었다.
왕비가 모욕을 받았다고하나 그것이 대놓고 한 것도 아니오 소문에 지나지 않는 말로 왕이 전쟁까지 불사하는 것이 부당함이 마땅한데 브란은 부추기고는 이젠 전쟁은 싫다 하니 스렝은 브란의 속을 알수 없어 그의 뒤를 따르면서도 연신 중얼거렸다.

"아스라니? 언제부터 코나흐타가 신민국가가 되었지?"
"아아..있어. 비전하를 개인적으로 뵌 적 없었지? 알현하러 가자. "
"아니, 비전하를 뵙는건 좋은데 내가 알아들을수 있는 말을 좀 해봐!! 브란!!!"
"후훗. 스렝. 우리 왕의 고집을 꺾을수 있어? 왕께서 내린 명을 거둘수 있어?"
"안되니 명을 내리시기전에 말린거잖아.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네가 얼스터에 없는새에 궁에 아스가 한 분 생겼는데 말이야.. 왕의 뜻을 꺾을 사람은 그 분 밖에 없거든. 그래서 가는 길이야."
"피..나하로 가는 것 같은데?"
"호...덩치에 안 어울리게 여전히 눈썰미는 좋군. 맞아 피나하궁으로 가는 길이야"
"뭐??"
"우리의 유일한 아스. 아사 유하르님을 뵈러 가는 길이야. 겸사겸사 너도 인사를 드리고 말이야"
"서..설마.. 왕께서 비전하의 말이라면 다 들어준다는 말인가???"
"아마..거의. 여태 비전하의 말이 안 먹힌 적은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어떻게 그런 일이.."
"그러니깐 아스라고 하잖아. 궁 내에선 모두 비전하를 일컬어 아사 유하르라고 부른다니깐. 하핫. 어서가자!!"




"비전하. 그간 소원했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브란 어서와요."
하프를 다듬고 있던 유하르가 들고 있던 하프를 스렐에게 건네주며 브란을 맞이하였다.
"아..이 분은.. 스렝?"
"네. 무장 스렝입니다. 전하."
"아.. 마침 잘 왔습니다. 스렝. 안그래도 한 번 뵈었으면 했는데.."
"네?"
유하르의 말에 무슨 일인가 싶어 스렝이 유하르를 바라보니 유하르는 맑고 푸른 빛의 눈을 곱게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양해를 구하고 유하르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는 잠시 침실로 들어가더니 무언가 비단천에 쌓인 상자같은 걸 들어와 스렝의 앞에 내밀었다.
"얼스터에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준비해두었는데 연회때엔 정신이 사나워 못 드렸습니다."
"이게..."
"아.. 별건 아니고 오랫동안 변경에 계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치하는 왕께서 하셨을테고 제가 따로 준비한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요."
"저..전하.."
"모친께서 지병으로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지병에 좋다는 약이니 모친께 드리십시요"
왕의 혼례때도 못 와보고 몇 년이나 지난 후에야 돌아오니 왕이 그의 공을 크게 치하하며 땅과 보석과 비단을 하사하셨었다.
왕이 그렇게 환대하리라 짐작을 못하던 스렝은 낯선 왕의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분이 좋았었는데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넋이 나갔다.
거기다가 보석이 아닌 병중인 모친을 위한거라고 하니 열 개의 보석단지를 받는 것보다 더 귀하고 새삼 모친의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니 건네진 상자보다 더 스렝을 감동시킨 것은 그것을 건네는 사심하나 없이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듯한 유하르의 따뜻한 눈때문이었다.


"모친의 병세가 심해졌다 들었습니다. 왕께서 변방에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스렝을 보내지 않겠다고 저에게 약조를 하셨으니 마음 놓으시고 구완을 하십시요."
"저..전하.."
"이런..별거 아닌 일로 이렇게 황송해사면 제가 오히려 불편합니다. 어서 거두어주십시요"
"황..황송합니다. 전하.."
"브란, 그대가 날 보기 위해 걸음하진 않았을테고 무슨 일입니까?"
아직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스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며 브란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유하르를 바라보았다.
왕의 윤허를 받아내는 것보다 유하르의 허락이 더 어렵다.
하지만 유하르의 허락이 떨어지면 십중팔구 자신의 원하는 대로 된다는 것을 아는 브란은 진지하게 유하르를 바라보았다.

"도바르왕의 소문을 들으셨는지."
"아... 설마.. 왕께서 전쟁이라도??"
단번에 추리해내는 그를 보면서 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명이 떨어져버렸습니다. "
"휴.. 라인도 있고.. 이 평화로운 시기에 전쟁이라니.."
"더더군다나 왕께서 직접 출병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대번에 눈이 치켜올라가는 것을 보며 브란은 자신이 이미 유하르의 허락을 받아낸 것을 알수 있었다.
"알았습니다. 브란."
"매번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전하."
"다시는 정무에 관여하지 않겠다 했는데 이번엔 정말 어쩔수가 없군요. 알았으니 이제 물러가십시요. 왕께서 오실 시각이 다 되었습니다."
"네. 그럼.."



보석보다 귀한 이였다. 세상 그 어떠한 생명보다 소중해 자신의 품안에 보듬고 다듬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늙은 영감이 유하르를 보고 태자였던 신분이었으면서 엉덩이를 흔들어 왕을 꼬여낸 요부라고 하니 눈이 안 뒤집어지겠는가.
앞에선 제대로 시선조차 못 마주치는 졸장부가 등 뒤라 해도 후한이 두려워 차마 자신을 입에 담지는 못하고 유하르를 그 더러운 입에 담은 것이다.
차라리 자신을 험담 했다면 이렇게 격분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하르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유하르를 그렇게 매도하여 입에 담다니..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들어가고 싶은데 전쟁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란 것이 오히려 억울한 크로우의 걸음은 저절로 급해졌다
그 소문을 듣고 기운이 빠져있을 유하르를 생각하니 회의고 뭐고 눈에 차지 않았다.
당장 가서 안아주고 싶은 크로우였다.



스렐의 인사에 눈길도 주지 않고  들어서니 맞이하는 것은 빈 공간뿐. 급한 마음을 아는지 다가온 스렐이 부복을 한 채 침실에 계시다고 말을 하였고 크로우는 바로 침실로 들어갔다.


"크...크로우......"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발견하고는 뛰어와 가슴에 안기는 유하르를 보고 크로우는 덜컥 놀라버렸다.
요즘들어 애정어린 표현을 많이 한다고는 하나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덥석 안기는 유하르의 행동이 일상적인 것은 아니기때문이다.
놀란 크로우가 그의 어깨를 당겨 얼굴을 볼려고 해도 자신의 등을 감싼 유하르의 제법 센 악력에 포기를 하고 유하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놀림이지만 놀란 심장은 가라앉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유하르..응?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다면 분명 스렐의 보고가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런 보고도 못 받았다. 그렇다는 것은.. 역시 그 불쾌한 소문이 유하르의 귀까지 들어가 이렇듯 가슴아파하는 것이라 짐작을 할수 밖에 없는 크로우였다.
젠장, 당장에 어떻게 해서든 준비를 빨리 하라고 해야겠군. 

자신을 세게 껴안아 주는 유하르의 강한 조임이 마치 그의 속상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여 크로우는 연신 부드럽게 그를 위로하였다.
"신경 쓸 필요없어. 유하르. 내가..."
".....어...어떻게........으...흐흐흑..."

떨리는 어깨의 슬픔을 참지 못하고 터져나온 유하르의 흐느낌을 듣는 순간 크로우는 솟구치는 살기를 주체할수가 없었다.
내일 당장 미로 잠행을 갈 것이라 다짐을 했다.
이 사람을, 이렇게 귀하고 아까운 이가 눈물을 흘리게 하다니, 유하르의 눈물이란게 결코 보기 쉬운게 아니란걸 아는 크로우의 뇌에는 이미 냉철한 이성이란게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쉿..괜찮아. 유하르..응? 진정하라고. 그런 쓰잘데 없는 말 따위는.."
"꾸..꿈을 꾸었는데..."
"응?"
느닷없는 말을 하는 유하르의 얼굴이 보고싶어 가슴에서 떼어낼려고 하자 자신의 가슴을 더 답싹 끌어안는 유하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크로우가 할수 있는거라고는 그의 머리를 소중히 쓰다듬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꿈..이라니? 유하르"
"으...흐흑.. 꾸..꿈에서 당신이..크로우가..."
유하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크로우는 유하르가 낮잠이라고는 전혀 자지 않는 사람이란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왜? 당신 꿈에서 내가 어떻게 했는데? 설마 괴롭혔어?"
"아니..주..죽어버렸어!!!!"
"뭐??"
"갈..기갈기..찢어져서...엄청난.....피가..."
"아...."
아직 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보듬어주며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쉿. 괜찮아. 꿈인걸. 응? 기운내 유하르.."
"크로우!!!!"
다행이 그 소문은 듣지 못했나 싶어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때 유하르의 부름에 그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유하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크로우는 금방 흐느꼈던 유하르의 눈동자가 물기하나 서려있지 않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전쟁 할 계획 없는거지? 응? 그런거지?"
"아....저기...."
자신의 옷을 움켜쥐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댄채 대답을 요구하는 유하르의 말에 크로우는 난처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걸로 유하르는 성이 안 차는지 듣고 싶은 답을 재촉했다.
"없는거지? 그렇치?"
"유..유하르.."
"꿈에서 어땠는지 알아? 당신이 그렇게..주...죽고.. 난 다른 남자에게...몸을..."
"뭣!!!!"
물론 꿈이란거 아는 크로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꿈이라고 해도 화가 나는걸

"아얏. 아파. 크로우"
크로우가 자신도 모르게 잡은 유하르의 팔을 풀어주자 유하르가 크로우의 목에 팔을 걸며 몸을 밀착시켰다.
마찰되어진 유하르의 부드러운 몸이 여실히 느껴졌고 언제나 맡아도 머리속을 어지럽히는 유하르만의 독특한 체향이 코를 자극하였다. 
크로우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유하르와의 미세한 공간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 양 손을 뒤로 돌려 유하르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자신의 몸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푸른 빛깔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그의 매끈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난..이제 왕의 비가 되어버렸잖아. 만약..정말 만약이지만..행여 그렇게 된다면 난 그들의 놀림감이 될수 밖에 없는 자리인걸."
"난 지지 않아. 유하르. 널 위해서라도."
"물론 알아. 하지만 만약이란게.."
"만약도 없어. 유하르. 널 두고 내가 죽을리, 없다. 결코."
"아.. 그렇겠지? 전쟁은 이젠 없을테니깐.."

유하르가 다시 이렇게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기는 싫고 도바르왕의 괘씸한 발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넘어갈려니 괘씸한 크로우는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음...."
"뭐야? 그 표정은?"
"음.. 미의 왕이 말한게...영 기분이 나빠서 말이야.."
"훗, 뭐 그깐일로 그래. 대신 다음에 그 왕을 만나면 사과로 실로나이트(보석의일종)나 좀 달라고 해. 미는 실로나이트가 나는 나라지?"

싱긋 웃는 유하르의 환한 미소에 덩달이 가볍게 근육을 풀며 크로우는 유하르의 손등위에 입을 맞추었다.
역시 이 사람의 웃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크로우는 느긋하게 마음을 풀어버렸다.

실로나이트라.. 꽤나 비싼 물건이다. 물론 코나흐타에도 있긴 하지만 도바르가 가진 것에 비하면 작은 양일터이다.
푸른 색의 실로나이트로 만든 목걸이만을 걸친 유하르를 생각하며 크로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당신이 원하신다면. 유하르. 그대 뜻대로.."


크로우의 손을 잡고 앞장을 서 침대로 항햐는 유하르가 내심 길게 숨을 내쉬는 것을 크로우는 끝끝내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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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흐타의 대궁의 어느 구석진 복도에서 자신만만한 한 사내의 말을 도무지 믿을수 없는 양 덩치 큰 사내는 머리를 계속 젓고있다.


"뭐??? 저..정말이야??"
"그렇다니깐. 왕이 방금 전 미에 관한 모든 일들은 없던 걸로 하자고 하셨어."
"세..세상에 믿을수가 없군. 바로 어제 내린 명령인데...."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
"........."
"아사 유하르라고"


- 끝 -